밖에 눈이 온다는 전화를 받고도 옴짝달싹 못했는데 드디어 페이퍼를 하나 마쳤다. 함박눈이 쏟아졌다면 우울했겠지만 다행히 이건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이 청승맞게 내리고 있군. 07년은 아직 보름도 넘게 남았지만 첫눈도 온데다 다음주면 종강이어서 그런가, 사뭇 파장 분위기가 난다. 연말이라고 들뜨지 않는 건 나를 들뜨게 해 줄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나이가 들어간다는 서글픈 반증이겠지.
올해는 덜렁대다가 복사실 철문에 손가락이 끼어 피멍이 든 것을 빼곤 별다른 물리적 아픔 없이 무탈하게 보낸 듯 싶다. 기분 좋은 일도 있었고 마음 아픈 일도 있었지만 모두 다 스치고 나면 이렇게 담담한걸. 그 순간엔 그것만이 전부요, 그것만이 특별해 보였을지라도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보면 그저 여느 해와 다를 것이 없는 소소한 사건들이었다. 이제는 초등학생처럼 일기를 쓰지 않으니 어딘가 기록해 놓지 않으면 기억은 추억이 되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나에겐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문득 내가 나 자신에게 궁금해져 몇 가지의 키워드로 정리해 보았다.
# Book : 올해는 많은 책들을 읽었음에도 알라딘에 올린 리뷰의 갯수는 참 초라하다. 내가 읽은 책들이 대개 전공 관련 서적이라는 변명을 차치하고라도 리뷰를 올릴 마음의 여유가 부족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에 남는 책을 꼽으라면 에드워드 올비의 'The Zoo Story.' 학부 때 희곡작품을 몇 개 읽긴 했지만 올비의 작품은 대학원에 와서 처음 읽었다. 집단의 아웃사이더인 제리가 중산층을 대표하는 피터를 향해 시도하는 소통의 제스처는 마치 필사적인 구애의 양상처럼 격정적이고도 극단적이다. 1958년 작품인데도 이러한 진풍경이 낯설지가 않은 것을 보고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이성복의 싯구가 떠올랐다. 단순히 읽는 즐거움을 넘어서 내게 문제의식을 던져주었던 작품이다.
# Movie : 역시 올해의 영화는 '밀양'이다. 밀양 외에도 사랑, 마이파더, 라파예트, 궁녀 등등의 영화를 본 것 같은데 혼자서 한번 더 보고싶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은 역시 밀양 뿐이다. 언젠가 알라딘에 밀양의 리뷰를 올리기도 했지만, 그 리뷰를 지금 다시 읽어봐도 그것만으로는 이 영화를 말하는데 한없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전도연과 송강호의 연기는 훌륭했고 영화 속, 그 누구도 인생에 대해 단언하지 않는데도 나는 이 영화 속에서 쨍하니, 반짝이는 삶의 긍정을 읽었다. 이창동 감독은 진짜 예술가구나, 라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던. 영화는 예술의 한 장르이지만 영화감독이라고 해서 모두 예술가는 아닌 것처럼.
# Song :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올해 하반기에 이 노래를 참 많이도 들었다. 임재범, 이승철 등도 불렀지만 내 구미에 가장 잘 맞는 버전은 이문세다. 박기영의 '마지막 사랑'을 들었을 때의 느낌과 흡사했는데 그냥 그대로 슬픔 자체랄까. 내 귀는 땡벌부터 시칠리아노까지,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자랑하며 거의 모든 음악을 차별대우하지 않지만 간혹 타이밍에 의해 선호도가 좌우되는 경향은 있다. 누군가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불렀고 그 때 나는 마음으로 울고 있었지만 그 노래가 끝난 후, 곧장 템버린을 흔들어대며 엄정화의 배반의 장미를 불러제끼는 용단을 보여주었다. 아, 이율배반으로 점철된 유흥이여.-_-
# Place : 세월의 공백을 건너뛰어 불쑥 찾아진 친구와 불쑥 가게 되었던 남이섬. 섬에서의 하룻밤이 주었던 고립감과 평화는 여유 없이 돌아가던 내 일상에 때마침 끼어든 긍정적 체험이었다. 남이섬은 오랜 시간 나를 보아온 속 깊은 이성친구처럼 한 마디의 말 없이도 위안을 주었다. 사랑이 영원할 것으로 믿고 있을 어린 연인들은 카메라로 추억을 만드느라 분주했고, 나와 친구는 줄담배 피워대는 할망구처럼 시큰둥한 표정으로 한 마디씩 했다. 저저저... 치마 봐라. 감기 들겠다. 콜록~
# Time : 특별한 것 보다도 밤에 강의실에 모여 사람들과 영화를 보았던 시간이 기억에 남는다. 모든 불을 끄고 다 같이 스크린을 응시한 채, '세일즈맨의 죽음'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보았던 그 날. 짬뽕과 우동을 시켜놓곤 후루룩거리며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에 대한 안쓰러움을 토로했으며, 블랑슈 뒤부아의 비극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했다면 거짓말이고, 그저 오로지 비비안 리와 말론 브란도의 미모에 대해 끊임없는 찬사를 보냈다. 그 날, 오래된 화면의 흑백 영화와, 강의실 안의 어둠과 정적은 내게 묘한 매력을 주었다.
# Human : 어처구니 없게도 뿡사모 회장으로 등극했다. 어느 할아버지가 바다에 빠진 어린아이를 구하자 사람들이 그 용기에 대해 칭송했고, 물에서 나온 할아버지 왈, 언놈이 내 등 밀었어? 나도 주변 사람들이 와와 하면서 밀어주니 결국 교수님과 매우 친한 사이인 척 하게 되었다. 물론 교수님은 좋은 분이시다. 평온한 외면에 감추어진 따숩은 열정이랄까. 첫눈에 그런 느낌이 왔고, 고집스러우면서도 따듯한 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다지 논리적이지 못한 나는 매사를 직관으로 때려맞추는 습성을 버리지 못했고 결국 제 발등 찍는 경우도 허다하긴 했지만, 서투른 내 직관에도 일말의 일리는 있으리. 주위를 보면 사람과 곁을 트는데 시일이 오래 걸리는 사람들이 있고 교수님도 그런 분이란 생각이 든다. 처음에 비하면 많은 진보가 있었지만 항상, 워서 오셨쎄여? 라고 물을 것만 같은 서먹한 분위기는 그대로다. 그나마 우리방 분위기가 이 정도인 것은 실어증인 교수님과 수다증인 내가 빤타스틱한 조화를 이루기 때문은 아닐까. -_-;; 아무튼 교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고, 오가는 대화와 토론 속에서 배운 것이 많은 한해였다.
# Shock : 쥐도 새도 모르게 5년 간의 비밀연애를 해왔던 동아리 선배 한쌍이 결혼을 했다. 뜬금없는 소식을 접한 나와 동기는,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신랑신부를 향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사태냐고 행패를 부렸다. 졸업을 하고 먼저 사회에 나온 J선배는 새로운 공부를 시작한 Y선배를 한결같이 기다려주었고, Y선배가 원하던 직업을 갖게 되자 준비를 해서 결혼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쾌청한 가을날, 조용한 성당에서 소박한 결혼식을 올렸고 십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정과 신의를 함께 했으니 오래도록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요란떨지 않는 그들의 행보에 축복 있으라. - 뿡사모
# Love : 수적으로만 따지면 대박이었다. 싱글이었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고, 소위 말하는 결혼적령기 츠자인 셈이니 기회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내가 여전히 혼자라는 사실이 실속이라고는 없었음을 확실히 증명한다. 소개팅과 같은 인위적인 만남이든, 우연히 엮이게 되는 자연스러운 만남이든, 사람은 많이 만나보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럴수록 평소 생각해오던 이상형에 자꾸 수정이 가해지면서 점점 더 조심스러워지는 나를 발견한다. 안목이 높아지면 오히려 다행인데 나의 연애호르몬은 발산에는 젬병이요, 수렴에는 능통해서 이래저래 다 시큰둥해지는 경지에 다다르고 마는 것이다. 더욱이 눈치도 없지, 눈치도 안 보지, 눈치를 줘도 모르기에 모든 게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리고는 폭닥폭닥 앵겨대는 애완견이나 한 마리 길러볼까 하는 생각이나 하구. -_- 누군가의 말에 의하면, 사랑은 좋아하는 것 플러스 알파라던데 대체 그 알파의 실체가 애매무쌍해주시니 원. 어쨌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를 좋아한다고, 내게 잘해준다고 다가 아니며, 예나 지금이나 헤어질 때 아프고 힘들더라도 그만큼 서로 많이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넘 당연한 건가.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마음이 예뻐야 남자고 가슴이 따뜻해야 남자라는 명제에는 변함이 없다. 아, 잘생기면 플러스 알파~♡
# Present : 올해 받았던 가장 인상적인 선물은 바로 요 인형이다. 서울에 놀러갔을 때, 인사동에서 친구가 내게 선물한 것이다. 그 녀석은 자나깨나 동기사랑을 외치더니 찬바람을 헤치고 달려가 이 깜찍한 인형을 내게 안겨줬다, 와락, 하진 않았고 짜식, 했다. 가지고 있는 인형이라곤 못생긴 긴팔원숭이 뿐이었는데 속으로 무척 감동했다. 우리는 물론 예전부터 서로 몸무게 걱정이나 해주는,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는 절망적인 관계이긴 하지만 오랜만에 얼굴 본 기념이라고 선물도 다 해주고, 짜슥, 못 보던 사이 사람 됐군아. 아무튼 갓 제대한 예비역 방 같던 내 방이 요 녀석 덕분에 환해졌다. 곰인형은 있으니 다음엔 개인형을 사달라고 해야겠다. 왈왈.
# Style : 우리 동네의 잘나가는 헤어드자이너이신 미스터 수지 아저씨의 권유로 머리를 좀 길러볼까 했는데, 다시 미스터 수지 아저씨의 권유로 단발머리로 싹둑, 잘라버렸다. 여름에 갔을 땐 길러보지, 하시더니 요번에 갔을 땐 겨울엔 잘라야 돼, 하시더라는. 결국 드자이너 맘대루라는. 신기에 가까운 가위질로 나를 현혹시킨 후, 마치 초등학생 딸내미를 꾸짖듯 반말 쩍쩍 해대시는 칼있쑤마도 여전하시다. 나보다 훨씬(?) 연세도 많으신데 내게 꼬박꼬박 존대하시는 알라디너 분들이 새삼 고맙게 느껴진다. 오프라인의 나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이상하게 반말을 들을 때가 많은데 아무래도 어딘가 좀 만만하게 생긴 모양이다. 새해엔 머리도 기르고, 허리 잘록한 정장도 입고 다니고, 메이크업에도 신경써야지, 라고 하기엔 별로 자신이 없고 그냥 반말 들어도 기분 나빠하지 말기로 한다. 난 마음이 넓으니깐.-_-
# Society : 올해도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역시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대선이겠지. 평소 괜찮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정치판에 발을 담그는 순간, 눈꼬랑지 부근부터 이상하게 변모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그리 좋지만은 않다. 원하는 것을 넘칠만큼 가진 후, 한 차원 이상의 것에 욕심을 내는 그 마음을 이해는 한다. 그렇듯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는 정치꾼 말고 비전 있는 정치가의 모습을 기대하기엔 우리나라의 의식 수준이 여전히 미흡한 걸까. 누군가의 굽신거림에 한번 중독된 사람은 거기서 헤어나오기가 죽기보다 힘든 모양이다. 정치는 안 하고, 정치꾼만 하려고 부단히들 애쓰는 걸 보면. 시끄러운 홍보트럭 때문에 붕어빵 아저씨 고막 터지는 건 아닐까, 오늘도 걱정된다. 지들이 대신 붕어빵 구워줄 것도 아니면서 하필 고 옆에서 난리법석들이람.
# Question : 사람 사는 게 참 부조리하다. 굉장하게 들리지만 그냥 간단히 말해서 마음 먹었던 대로, 뜻했던 대로, 잘 풀리는 것도 있지만 안 되는 게 더 많다는 의미다. 공부를 시작했고 비교적 성실했다고 생각하지만, 공부 이외의 것들에 대해선 성실하려고 했음에도 잘 되지 않았던 것들도 많았다. 미술시간, 직접 물감을 섞어가며 만들었던 색상환처럼, 삶이 둥근 원을 중심으로 해서 똑고른 색조로 옮겨가는 건 아닌 것 같다. 필연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수가 되기도 하고, 우연처럼 생각했는데 운명이 되기도 한다. 고로, 다음에 무슨 색이 튀어나올지 아무도 모르는 거다. 빨강 다음이 곧 다홍인 것은 색상환에서나 가능한 것일 뿐. 결국 사람은 노랑연두가 나오거나 남보라가 끼어들 것에 대비해 성실에 성실을 거듭하는 수 밖에. 어쩌면 삶은 이렇듯 다채롭다는 그 사실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 Hope : 08년도 계획은 미정이다. 아무리 한치 앞을 모른다 해도 계획 없이는 그나마 더 깜깜하니깐 리스트를 만들긴 만들어야 하는데. 우선을 일년 더 남은 대학원 생활을 열심히 해야겠지. 하면 할수록 느끼는 거지만 공부도 다 때가 있다는 어른들 말씀이 맞는 것 같다. 물론 모든 걸 불사하는 강한 의지만 있다면 사소한 제약들이야 문제될 것이 없지만 점점 나이를 먹고 세월의 때가 묻을수록 스스로 공부하고 배운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수확량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그저 묵묵히 괭이질을 해대는 농부의 마음이어야 하는데, 점점 심신의 소박함은 사라지고 각박함만 늘어나니 문제다. 나는 공부의 달인도, 생활의 달인도 되지 못할텐데, 페이퍼의 달인에라도 도전해 볼까.-_-
# Aladdin : 서재 2.0으로 바뀐 후부터 어딘가 아직도 낯설다. 원래 적응력이 떨어지긴 하지만 이건 좀 심한 것 같군. 내 서재 이외의 공간에서 어떤 웃기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지 넘흐넘흐 궁금한데 대체 어디서부터 기웃거려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그냥 브리핑 정도만 해오고 있다. 올라오는 글들을 보며 느끼는 것이지만, 알라딘엔 유쾌한 미남들도 많지만 재주꾼 미녀들도 참 많은 것 같다. 마치 매일 업데이트 되는 따끈따끈한 잡지를 읽듯, 그들의 일상과 리뷰와 재능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악한은 드물지 싶다. 책과 글이라는 공통분모 덕분에 소통에 있어서도 자유로우면서도 참 건전하다. 올해도 이 곳에 와서 책을 고르고, 다양한 리뷰를 읽고, 일상의 희로애락에 공감하며 많은 도움을 입은 것 같다.
일일이 모두의 안부를 챙길 수는 없겠지만 이 글 읽으시는 분들, 한 해 마무리 잘 하시고 다가오는 무자년에 무쟈게 좋은 일들만 많이 생기셨음 좋겠어요. 연말이라고 과음하지들 마시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