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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에 대한 명상 ㅣ 민음 오늘의 시인 총서 22
장정일 지음 / 민음사 / 2002년 4월
평점 :
한때 장정일을 좋아했었다. 지금도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전만큼 그의 책을 즐겨 읽지는 않는다. 애정이 있었기에 실망도 있었던 셈. 이문재의 경우도 그렇고 장정일 또한 초기시집에서 이미 가장 신선하고도 완벽한 경지를 보여주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조심스런 발언을 해본다. 그러나 생존해 있는 작가들이기 때문에 조만간 근사한 책을 들고나올 수도 있겠지. 장정일은 근래에 희곡집을 한 권 낸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이 장르에 관심이 있던 터라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든다.
99년도. 군에서 휴가를 나왔던 한 선배는 나에게,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은 시집이라서 너에게 주려고." 라고 말하며 이 시집을 건네주었다. 나는 곧 젊은 시인의 거침없는 언어와 발랄한 상상력에 도취되었다. 이 사람, 어쩌면 천재일지도 몰라. 시종일관 감탄하면서. 사실 나란 사람은 안과 겉, 사고와 행동의 어긋남을 스스로도 인지할 만큼 모순되는 인간인데 당시의 선배는 나를 꽤나 전위적인 후배로 보아주었나 보다. 오해였지만 내가 아직도 그 말을 기억하는 것을 보면, 아마 나는 그 오해 속에서 숨은 이상을 발견하곤 잠시 행복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로부터 멀리 떠나온 지금, 사심없이 치열해질 수 있는 것도 한철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판단을 할 때 그것이 타협이기 보다는 겸손이었으면 하는데, 대관절 그 경계란 것이 모호하기도 한데다 스스로의 기만은 아닐까 싶어 갸웃거릴 때도 많다. 이젠 더 이상 치열해지지는 못하고 치열한 성찰에만 열을 올리는 것 같아 장정일을 다시 읽으며 내내 부끄러웠다.
지하인간
- 장정일
내 이름은 스물 두 살
한 이십 년 쯤 부질없이 보냈네.
무덤이 둥근 것은
성실한 자들의 자랑스런 면류관 때문인데
이대로 땅 밑에 발목 꽂히면
나는 그곳에서 얼마나 부끄러우랴?
후회의 뼈들이 바위틈 열고 나와
가로등 아래 불안스런 그림자를 서성이고
알만한 새들이 자꾸 날아와 소문과 멸시로 얼룩진
잡풀 속 내 비석을 뜯어먹으리
쓸쓸하여도 오늘은 죽지 말자
앞으로 살아야 할 많은 날들은
지금껏 살았던 날에 대한
말없는 찬사이므로.
※ 안습 패로디
서재폐인
- 깐따삐야
내 별명은 깐따삐야
한 이 년 쯤 어리버리 보냈네.
알라딘이 즐거운 것은
재주꾼 알라디너들의 톡톡튀는 빼빠질 때문인데
이대로 코 박고 잠들어 버리면
나는 알라딘에서 얼마나 부끄러우랴?
자책의 콧방귀가 콧구멍을 비집고 나와
눈꺼풀 아래 꾀죄죄한 다크서클을 우롱하고
알만한 알라디너들이 자꾸 도망가 즐찾삭제와 악성댓글로 얼룩진
알라딘 속 내 서재에 발을 끊으리
피곤하여도 지금은 쉬지 말자
앞으로 써야 할 많은 빼빠는
지금껏 써왔던 빼빠에 대한
말없는 협박이므로.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