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할 때 보면 성격이 보인다고 나와 남편은 참 다르다. 남편이 옆에 탄 사람을 어느 순간 곤히 잠들 수 있게 하는 마일드한 드라이버라면, 나는 일주일 꼬박 불면으로 보낸 사람조차 절대 잠들 수 없게끔 만드는, 터프하기 짝이 없는 드라이버다. 아빠는 예전에 내게 운전을 가르치시다 포기할 지경에 이르러서는 얘는 면허를 야매로 딴 것 같다고까지 하셨다. 물론 나는 그 어렵다는(!) 국가고시를 필기, 실기 모두 한 번에 패스했다. 그러나 암기력으로 승부한 테스트란 실전에 직면해서는 힘을 잃기 일쑤다. 돌발 상황에서 잽싸게 비상 버튼을 누르는 일은 운전 학원에서나 가능한 일.

  예전에 한 번은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 순간에 엑셀을 밟았다가 스쿠터와 충돌할 뻔 한 적도 있었고 얼마 전에는 공사 현장에 쌓아놓은 모래더미 위로 차가 막 등산도 했다. 그뿐인가. 아파트 단지 내의 턱을 넘어보겠다고 부르릉거리다가 웬만해선 터질 일 없는 타이어까지 해먹었다. 덕분에 빨간 견인차가 와서 나와 내 차를 질질 끌고 가는 이색 체험을 했다. 급기야 면허 딴 지 몇 년씩이나 지난 마당에 남편은 굵고 진하게 프린트를 해서는 ‘초보운전’ 이라고 붙여주었다. 운전 초기에 그렇게 써 붙이고 다녔다가 빵빵거리며 놀려먹는 불량 운전자들 때문에 짜증이 났었다고 했더니 남편 왈. 요즘은 그런 사람들 별로 없어요. 그리고 저렇게라도 해놓아야 알아서들 피해가지. 남편은 이렇듯 나를 특별관리대상 드라이버로 낙인찍어 버렸다.

  사실 술을 마시고 운전한 적도 물론 없고 운전을 하면서 되도록 딴 생각을 안 하려고 하는 편인데 성격이 좀 급하다는 게 문제다. 처음 도로에 나왔을 땐 어차피 신호에 걸릴 텐데 속도를 내거나 추월하는 차들을 이해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그러고 있다. 연애 시절, 드라이브를 하던 중에 남편한테 왜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으면서 못 들은 척 하는 거냐고 따진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운전 중에는 봐야 할 것도 많고 조심해야 할 것도 많아서 그렇다고 변명 했었다. 나는 괜히 둘러다대지 말고 솔직하게 다른 생각 하고 있었다고 이실직고하라고 했는데 사실은 부러 억지를 써 본 것일 뿐. 운전할 때는 항상 긴장을 하고 주변을 잘 살펴야 한다. 특히 낯선 길을 갈 때는 더욱 그렇다. 또한 아무리 익숙한 길도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어쨌든 내 차를 타고 이동하는 날이면 남편 얼굴이 금세 핼쑥해진다. 내가 운전하니까 편하지! 편하지! 아무 걱정 말고 자요! 남편 왈. 잠이 와야 잠을 자죠... 만만한 길이 나왔을 때 언제 또 속도를 낼지도 모르는데다 무슨 말이라도 시키면 대답할 것을 생각하느라 좌회전해야 할 타이밍에 직진을 하는 등 마구잡이로 운전을 해대니 불안할 수밖에. 남편은 안전벨트를 꼭 쥐고 옆에 손잡이까지 붙든 채로 조심스럽게 말하곤 한다. 이러다 부산까지 가겠어요. 운전할 때는 제발 운전만 생각해요. 에이그~ 다 알아서 집에 모시고 갈 테니까 걱정 마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내가 고집을 부리지 않는 한 남편은 가급적 자기 차로 이동을 하는데 나는 하루빨리 능숙한 드라이버가 되어서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갈 수 있는 기동력을 갖추고 싶다. 조심 운전은 필수지만 너무 겁을 내다보면 아무 것도 배울 수가 없다. 범퍼를 긁히고 타이어를 교체하면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경험도 해봤지만 세상에 공짜 수업이 어디 있겠는가. 특히 운전은 많이 해봐야 는다. 그런 고로, 영화 상영 시간을 기다리다가 잠깐 오락실에 들러 하는 게임도 무조건 운전이다. 남편은 이러한 나의 질긴 의지에 공포 가득한 눈빛으로 응원을 보낸다. 나는 신나게 엑셀을 밟고 점점 커지는 남편의 목소리. 좀더! 좀더 밟아! 이러한 외침은 안타깝게도 오락실에서만 가능하다.

  나는 오늘도 베스트 드라이버를 꿈꾼다. 주변의 이야길 들어보니 운전에 익숙해지고 잘한다 싶을 때 사고가 생긴단다. 정말 그런 것 같다. 처음 핸들을 잡았을 때는 60 이상 속도를 내는 것도 겁이 났었는데 이제는 옆의 자동차들과 레이싱이라도 할 것처럼 밟아댄다. 이러시면 아니 된다. 아니 돼. 베스트 드라이버는 빨리 달리는 운전자가 아니라 안전에 주의하는 운전자라는 것을 늘 염두해야겠다. 험한 드라이버를 만난 탓에 거의 연습용 차량처럼 되어버린 가엾은 나의 꼬마자동차. 붕붕. 너와 함께 한 시간들이 헛되지 않도록 내 머잖아 너를 능숙하게 다뤄 줄지어다. 남편이 조수석에서 곤히 잠드는 그날까지. 고고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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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02-02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F1 레이서의 전설이라고 불리우는 마이클 슈마허도 공공도로에선 절대 과속 안하며 신호를 꼬박꼬박 지킨답니다..^^ 사고는 자신이 운전에 자신감이 붙었을 시기인 3~4년에 제일 많이 일어난데요 아무쪼록 운전할때만큼은 남편분 말 잘듣는 순한 깐따삐야님이 되시길..^^
(그나저나 운전하는 남편에게 따지는 모습을 보니..모뙤꾸나 깐따님!!=3=3=3)

깐따삐야 2009-02-02 12:04   좋아요 0 | URL
역시 달인은 달려서 달인이 아니라 달라서 달인이구나. 이제 운전할 땐 고분고분하겠사와요. 과연? ㅋㅋ
(아녜요. 진짜 딴 생각하는 줄 알고 승질이 났던 거에요. 가끔 그럴 때 있다니깐요. 중얼중얼.)

레와 2009-02-02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처음 운전을 시작했을때 이런 질문을 했더랬습니다.
'언제쯤이면 운전에 익숙해질까요?'
'운전은 절대 익숙해지지 않아요. 조심 또 조심해야 합니다.'
우문현답, 부끄러웠습니다.으..;;

안전운전하세요! ^^

깐따삐야 2009-02-02 18:43   좋아요 0 | URL
'운전은 절대 익숙해지지 않아요' '당황하면 가끔 후진합니다' 이래로 가장 와닿는 명언이네요.

레와님도 안전운전이요! ^^

웽스북스 2009-02-02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 벼랑위의 포뇨에서 소스케 엄마같아요 ㅋㅋㅋ

깐따삐야 2009-02-02 18:44   좋아요 0 | URL
앗! 꼭 보고 싶었던 애니인데. 그나저나 소스케 엄마도 좀 막무가내인 모양이네염.ㅋㅋ

Mephistopheles 2009-02-03 00:47   좋아요 0 | URL
푸하하하하하..이렇게 적절한 비유라니..!!!

웽스북스 2009-02-03 01:23   좋아요 0 | URL
제가 쫌 한비유 ㅋㅋㅋ
 
모데라토 칸타빌레 (구) 문지 스펙트럼 19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정희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마르그리트 뒤라스 하면 우선 장 자끄 아노 감독의 <연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뒤라스는 젊은 날, 은밀하고 다채로운 은유로 <연인> 속의 자신을 감췄다. 그리고는 이른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세상에 고백했다. 제인 마치가 열연했던 프랑스 소녀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어른이 채 되기도 전에 사랑의 모든 것을 알아버린다는 것. 끔찍한 일이다.

 『모데라토 칸타빌레』는 백 페이지 남짓한 분량의, 모데라토보다는 안단테로 읽히는, 우아하고 섹시한 소설이었다. 읽는 동안 영화를 염두하고 쓴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는데 (실제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영화화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활자보다는 정황과 분위기에 매료되는 독특한 작품이었다.

  상류층의 정숙한 여인, 안은 아들의 피아노 레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치정살인 현장을 목격한다. 사랑 때문에 죽은 여자가 있고, 피범벅이 된 여자를 애무하며 슬퍼하는 남자가 있다. 안은 그처럼 죽음으로 완성되는 사랑을 목도한 이후 공장 노동자인 쇼뱅과 함께 그들의 사랑을 재현한다. 그들은 카페에서 만나 죽은 여자와, 그녀를 사랑한 남자를 자신들과 동일시하며 언어유희와도 같은, 기묘한 대화를 나눈다.

  그 여자는 다시 손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는 여자의 행동을 눈으로 쫓다가, 결국 고통스럽게 알아차리고, 납덩이처럼 무거운 손을 들어 그 여자 손 위에 포개놓았다. 그들의 손은 너무도 차가워서 오직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소망 속에서만 환각으로 서로 스쳐갔다. 지금과 같이 소망 속에서 말고는 달리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들의 손은 죽음의 포즈로 굳어진 채 그렇게 머물러 있었다(116). 오직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소망 속에서만 환각으로 스쳐가는 인연. 단 한 번의 성마름도 없이 모데라토 칸타빌레, 보통 빠르기의 절제된 템포로 연주되는 사랑.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쇼뱅이 말했다. “그대로 되었어요.” 안 데바레드가 말했다(120). 안은 쇼뱅과 더 나아가지 않는 대신, 과거의 안으로 돌아갈 수도 없을 것이다. 

  사랑은 갑작스런 일상의 균열, 그 틈을 비집고 쳐들어오는 자유에의 갈망과도 같다. 낯선 세계로의 진입과 동시에,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일깨우고 원래의 나보다 더욱 나처럼 느껴지게끔 만드는, 전인적인 자유, 그리고 변화. 안은 아들에게 말한다. “어떤 때는 내가 널 상상으로 만들어낸 것 같아. 네가 진짜 있는 게 아닌 것 같다니까(41).” 그렇듯 생경해지곤 한다. 무언가에 심신이 매혹되어 일상 저 너머로 이동하는 찰나, 익숙했던 일상의 요소들이 거짓말처럼 낯설게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역으로, 열렬히 매혹되었던 그 무언가를 향해 똑같은 말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어떤 때는 내가 널 상상으로 만들어낸 것 같아. 네가 진짜로 있는 게 아닌 것 같다니까. 그리고는 뒤따르는 의문들. 사랑하는 내가 나일까. 살아가는 내가 나일까.    

  이런 사랑, 도 있노라고 한번쯤 권하고픈 작품이었다. 그리고 뒤라스의 다른 소설들을 더 찾아 보고 싶어졌다. 한편으론, 뒤라스의 모든 사랑은 <연인>, 그 첫사랑의 도돌이표에 지나지 않겠구나, 하는 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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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ia 2009-02-01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 비슷한 시기에 뒤라스를 읽으셨네요^^
'히로시마 내 사랑'도 느낌이 비슷해요. :)
아마도 뜨겁게 사랑했던 건 그 중국남자가 아니라 뒤라스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도 들구요-
'연인'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여준 뒤라스기에 다른 작품은 오히려 소품같다는 느낌도 들어요. 민음사에서 나온 <연인>의 해설은 심리학적 개념을 들이대면서 그 어린 소녀를 무슨 변태성욕자쯤으로 몰아세우고 있던데, (전 그래서 전문가가 싫어요) 절망과 수치, 죄의식, 중독, 애욕...에 대해 이만큼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가도 드물다고 봐요. 사소설이란 점에서 아니 에르노와 닮았다고 볼수도 있지만 아니 에르노의 몽상과는 정말 달랐어요.

깐따삐야 2009-02-02 11:54   좋아요 0 | URL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이미 사랑의 절대치를 경험했기 때문일까요. 노년에 이르러 발표한 <연인> 이외의 작품들은 알리샤님 지적처럼 다소 소품 같기도 하고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만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해요. 다른 작품들을 먼저 읽고 <연인>을 가장 마지막에 읽었다면 느낌이 과연 어땠을까 싶기도 하네요.

흐업. 변태성욕자라니. 제 눈에 비친 <연인>은 오히려 사회학적인 소설이었어요. 백인 집단에서는 가난한 최하류층에 속하고 그렇다고 베트남 사회에도 속할 수 없는 이방인으로서의 프랑스 소녀. 그렇듯 이중소외를 겪고 있던 사춘기 소녀가 지푸라기 붙잡는 심정으로 빠져들었던 사랑. 그 안쓰러운 일탈을 변태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군요.

알리샤님 말씀처럼 뒤라스는 아니 에르노와 비슷하지만 아니 에르노의 집착이나 격정과는 많이 다르죠. 저에겐 뒤라스가 더 잘 맞아요.^^

Mephistopheles 2009-02-01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일상적이거나 보편적이지 않은 사랑의 행위와 방식을 "연인"이라는 그 시작점과 함께 계속 연장되는 분위기 인건가요??

깐따삐야 2009-02-02 12:00   좋아요 0 | URL
네. 그런 느낌이 계속 들어요. 감수성 풍부하고 명민한 소녀가 이미 사춘기에 <연인> 속의 사랑을 경험했다면 나머지 사랑은 모두 소품에 불과하지 않을까. 무언가 새로운 것이 다가와도 결국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까 싶어요. 뭐든 빨리 경험하거나 안다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니라는, 노인 같은 마음이 들었어요.

다락방 2009-02-04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거 읽을래요!! 안그래도 연인 읽고 뒤라스 또 읽어 보고 싶었어요!

깐따삐야 2009-02-05 19:38   좋아요 0 | URL
이 책 분위기가 묘했어요. 행간의 무드를 천천히 느껴야 할 책. 읽어보세요.^^

다락방 2009-02-06 08:53   좋아요 0 | URL
땡스투 저예요 ㅋ

깐따삐야 2009-02-06 17:08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감사해요. 그나저나 이 책이 다락방님께도 재밌어야 할 텐데 말이죠.
 




  일제히 개봉한 오락물에 끼어 야간 타임 딱 한번. 지역의 모든 영화관을 훑어보았지만 내가 원하는 시간에 이 영화를 볼 수는 없었다. 점점 짜증이 밀려왔다. 더 기다렸다가 나중에 dvd로 출시되면 볼까, 잠시 망설였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재미는 있지만, 극장을 채 나서기도 전에 스멀스멀 날아가 버리는 영화들에 물린 참이었고 이 영화를 꼭 보아야 했다. 오후에 미스터 빈의 <쟈니 잉글리쉬>를 보고난 참이라 <체인질링>에 나오는 존 말코비치와 마주치면 쿡, 하고 웃음부터 터지지 않을까 우려했었다. 하지만 두 시간 남짓의 러닝타임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웃지 못했다.

  처음에 예고편만 보았을 때 주목했던 것은 세 가지였다. 모성, 실화, 안젤리나 졸리.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엔 새로운 두 가지가 보였다. 거대 공권력 앞의 왜소한 개인, 그리고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위대한 거장. <체인질링>은 단지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절규나 모성에 관해 말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하나의 발단이자 예화일 뿐. 영화는 그 이상의 것을 고발하고, 비판하고, 분노한다. 거짓 권위를 위해 진실이 조작된다, 조작된 진실을 위해 희생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반기를 든 자는 희생되어야 마땅하다. <체인질링>은 한 마디로 ‘두 번 죽이는’ 영화다. 첫 번째는, 진실을, 두 번째는, 진실을 믿는 개인을. 나는 꼭 쥔 주먹을 펴지 못한 채 문득문득 쌍시옷을 날려가며 이 영화를 보아야만 했다.

  2, 30년대의 LA. 교환원을 통해 전화를 걸고, 거리에는 느릿느릿 전차가 다니고, 긴 치마에 모자를 쓴 여인들이 오가는,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 먼 도시의 이야기. 그 고릿적 얘기가 요즘을 사는 내 눈 앞에서도 벌어지고 있기에 더욱 공감하고 화를 내며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꼭 현 정부를 지목하지 않더라도 공권력에 의한 억압과 횡포는 공공연히, 또는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다. 어느 면에서는 과거에 비해 더 불행한지도 모른다.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구현하는 당연한 일에도 자본과 연줄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기에 말이다. 정부에 대들다가 기둥뿌리 뽑힐까,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 불이익으로 돌아올까, 사사로운 불만부터 숨 막히는 분노까지, 그저 침묵으로 삼킬 수밖에 없는 이들이 영화나 소설 같은 픽션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힘은, 견고한 개인주의의 틈을 유유히 비집고 들어와 남의 일에 분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내 일에는 쉽게 열을 내도 남의 일에는 무심한 편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인파 속에 내 머리 하나 더 보태고 싶은, 분노와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왜 아이가 사라졌는지, 그 아이의 생사는 어떠한지, 영화의 발단과 결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솜씨 좋은 감독은 showing truth에 충실하되 영화적 재미와 긴장을 결코 떨어뜨리지 않을뿐더러, 불의만 보면 인내심이 용솟음쳤던 나 같은 이들을 이토록 자극시키니 단연 거장이랄 수밖에. <밀리언 달러 베이비>도 참 훌륭한 영화였지만 여기저기 권하고 다니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부디 많은 사람들이 보았으면 좋겠다. 아니, 모든 사람들이 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연기변신을 시도한 안젤리나 졸리에 대한 첨언. 나름 극심한 다이어트를 한 것 같은데 상대를 똑바로 노려볼 때만 역시 졸리구나, 싶었다. 그녀의 명성 덕분에 개봉 전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인기몰이는 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를 잃고 절규하며 분노하는 싱글맘의 역할은 안젤리나 졸리 외에 다른 배우가 연기했어도 그 정도는 했겠지, 싶다. 모자를 씌우고 붉은 립스틱을 발라 놓는다고 해도 내 눈의 졸리는 졸리였을 뿐. 오히려 외유내강형의 분위기를 지닌, 보다 아담한 사이즈의 여배우에게 이 역할을 맡겼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어르신이 어련히 잘 알아서 캐스팅 하셨을라고, 쓸데없이 이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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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01-30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린트 이스트우드 어르신 덕분에 졸리가 그 정도의 연기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도 듭니다. 사실 최상의 톱스타를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는 감독은 몇 안될꺼라고 보고 싶어요..^^
'그랜 토리노' 도 꼭 보도록 하세요 전 아직 체인질링을 안봤는데 그랜 토리노...좋은 영화 였습니다. 역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주연"인 영화입니다. 연세로 봐서는 아마도 마지막 출연 영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깐따삐야 2009-01-30 11:49   좋아요 0 | URL
메피님 말씀이 정답이네요. 훌륭한 감독과 좋은 시나리오는 배우에게 든든한 뒷백이 되겠지요.^^
'그랜 토리노'는 말씀 듣자마자 바로 찾아봤어요. 감독에 주연까지 했다니 기대를 갖고 보겠습니다!

Alicia 2009-01-30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찜해놨는데, 예고편만 봤어요 :)저도 약간 미스캐스팅이란 생각은 들어요.
졸리는 워낙 생김생김이 굵직하고 화려해서 외유내강 스타일하곤 거리가 좀 있지요,
클린트이스트우드 할아버지 좋아요-
어휴 예전에 밀리언달러베이비 보고 한시간은 운거 같아요.

깐따삐야 2009-01-30 11:54   좋아요 0 | URL
알리샤님, 조만간 꼭 보셨으면 좋겠어요. 영화 보는 내내 팝콘 부스럭거리는 소리 한 점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어요. 아마 대부분의 관객이 영화 속으로 완전 몰입했기 때문일 거에요. 심장을 쿵쿵 두드리는 몇 안 되는 영화일 거에요.
졸리의 연기는 특별하지 않았고 어쩌면 그녀에게 주목할 겨를이 없었어요. 영화 그 자체로 충분했으니까요.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좋으셨다면 이 영화 또한 분명히 마음에 드실 거에요.^^

마늘빵 2009-01-30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현 시국에 딱 어울리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어떤 블로거에 의하면, 이 영화와 앞으로 개봉될 - 내용은 잘 모르겠는데 - <블루>가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다락방 2009-01-30 10:54   좋아요 0 | URL
블루는 재개봉이구요, 아프락사스님. 스폰지하우스 광화문에서 01.29인 어제, 개봉했답니다. 제가 아는 그 블루가 맞다면 말이지요.

Mephistopheles 2009-01-30 11:11   좋아요 0 | URL
그게 키에스로프스키 감독의 영화라면....
아프님은 블루만 보지 마시고 레드와 화이트도 보셔야 할지 몰라요..^^

찾아보니 맞군요...아프님 같은 감독의 3연작인 레드와 화이트도 보셔야 하겠군요..으흐흐.

마늘빵 2009-01-30 11:25   좋아요 0 | URL
아 이런 제가 착각했어요. 그거 말고 <밀크>와 <체인질링>이 현 시국에서 정부가 싫어할 만한 영화라고 하더라고요. 그 블로거는. 다락방님이 알려준 사이트의 그 블로거인데. ^^ <블루>와 <밀크>를 헷갈렸군요.

깐따삐야 2009-01-30 12:11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현 정부가 저지르는 갖가지 만행들이 오버랩되기도 하고 군포 여대생 살인사건의 범인이 떠오르기도 하고.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긴장 상태로 영화를 보아서 그런가. 영화관을 나설 땐 머리도 아프고 피곤하고 그렇더라구요.
앞으로 이런 영화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언젠가 이 모든 불행들이 영화 속 과거로만 그칠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그나저나 <밀크>도 꼭 보고 싶은데 개봉관이 있을지 걱정되네요.-_-

레와 2009-01-30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토당토 않은 정말 말도 안되는 터무니 없는 일이 비단 영화속에서 뿐만아니라 (설사 실화라도 영화속)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간에도 일어나고 벌어진다는 사실이, 질리더군요.

윽..!!! 숨막혀..

깐따삐야 2009-01-30 12:09   좋아요 0 | URL
그쵸? 영화 보는 내내 화도 나고 부끄럽기도 하고 그랬어요. 정부를 상대로 싸우는 일을 골리앗에게 덤비는 하찮은 몸부림 정도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는 자각. 주변의 계속적인 응원과 지원이 없었다면 크리스틴도 실성한 여자로 영원히 묻혀버렸을 가능성이 크니까요.
저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분노할 수 있는 감각을 잃지 않았음 좋겠어요.


비로그인 2009-01-30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영화를 니콜 키드먼이 했다면 어땠을까, 싶었어요. 권위에의 도전, 모성의 재현이라기 보다는 이 영화는 어쩌면 자기 자신의 용기와 맞서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더랬습니다. 권위와 모성으로만 보기에는 이야기가 계속 뭔가 어긋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깐따삐야 2009-02-01 12:31   좋아요 0 | URL
저도 여배우 여럿을 떠올렸어요. 수잔 서랜든, 줄리안 무어 등등을 생각했다가 나이가 넘 많아 탈락시키곤 혼자 안타까워하고.^^
Jude님은 저보다 영화를 한층 깊게 보신 것 같네요. 저는 주로 화만 내다가 나온 것 같아요. 졸리가 의사에게 정면으로 욕을 퍼부을 땐 끌려가겠군, 뒷일을 염려하면서도 어찌나 통쾌하던지요.

라로 2009-01-31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영화를 아직 보지못했어요, 남편왈,"잔인한 부분이 나올텐데 너 볼 자신이 있어?"라고 하기에,,,
모성과 연관된 어떤 끔찍한 장면이 나올까봐 두려워서요~.
그런데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보고싶잖아요!!!!!

비로그인 2009-01-31 07:03   좋아요 0 | URL
지다가다가]for nabi님
저도 봤는데요, 아마 그 잔인한 장면 아주 많이 힘드실 거여요. 꼭 보고싶으시다면 저처럼 그 잔인한 장면에서만 눈을 감는 것이 어떨까 싶군요. 그런데 음향효과가 너무 뛰어난지라 그 소리 하며 제가 상상한 장면, 조금이라도 본 잔인한 장면 암시효과가 겹쳐서 아직도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깐따삐야 2009-02-01 12:31   좋아요 0 | URL
nabi님- 저는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두눈 똑바로 뜨고 봤는데... 담이 커서가 아니라 뭐랄까. 고개 돌리기 아까워서랄까. 완전 몰입해서 보느라 나중에 일어날 때 온몸이 뻐근하고 그랬어요. Jude님 말씀처럼 어느 장면에서 눈을 꼭 감을지언정 이 영화, 꼭 보셨음 좋겠네요.^^

개츠비 2009-01-31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싶은 영화입니다. 올해는 영화와 친해지고 싶네요. 친해지고 싶어도 언제나 마음뿐이라서...깐따삐야님, 영화평으로 살짝 맛보고 갑니다.

깐따삐야 2009-02-01 12:38   좋아요 0 | URL
책은 시공간의 제약을 덜 받는데 영화는 직접 가서 표 끊고, 기다리고, 꼬박 두 시간 동안 정면주시하며 봐야 하고. 아무래도 소요되는 것들이 많죠. 저도 개학하고 바빠지면 영화 보러 나서느니 그냥 쉬는 쪽을 택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체인질링>은 나중에라도 꼭 보세요. 요즘 살짝 유감스러운 영화들이 많은데 그 중에 단연 일품이었어요.^^
 

  결혼하고 처음 맞는 명절이라고 친구들로부터 응원 메시지. 잘하고 오라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는데 왜 시댁에 도착하기도 전에 혓바늘이 돋고 난리인지. 눈은 폴폴 날리고, 혀를 달싹일 때마다 통증은 느껴지고, 공연히 긴장되는 것이 내가 결혼했구나, 하는 절절한 현실. 지금쯤이면 엄마가 부쳐놓은 부침개나 주워 먹고 한과나 아삭거리며 휴일을 만끽하고 있으련만.

  시어머니는 편한 때 오라고 하셨지만 결혼하고 처음 맞는 명절인데 집에 있기도 뭐해서 설 하루 전날 저녁에 집을 나섰다. 친정에 들어온 선물세트 중에 정종, 한우 등을 차에 싣고 한 시간 반을 달려 시댁에 도착. 어머님은 그새 시금치와 당근으로 만두피에 물을 들여 알록달록 만두도 빚어놓으시고, 인삼 넣은 식혜도 해놓으시고. 가족들 먹을거리를 미리 준비해 놓으신 덕분에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그 날은 같은 층에 사시는 큰댁에 인사를 드리고 와서는 어머님, 남편이랑 고스톱을 쳤다. 나는 무려 만오천원을 땄는데 일단 패도 잘 들어왔지만 아무래도 주변에서 은근 밀어주는 것 같았다. 계속 치고 싶었지만 내일을 위해 취침. 시댁에서 처음 자는 거라서 잠이 잘 안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피곤했던 까닭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까무룩 잠에 빠졌다.

  다음날. 자명종을 맞춰놓고 자서 일찍 일어나긴 했는데 밖이 조용했다. 씻으러 나가보니 어머님이 일어나 계셨는지 안방에서 조그맣게 텔레비전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깰까봐 밖에 안 나오시고 그냥 방에 계시는 것 같았다. 친정엄마가 시킨 대로 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 옷을 갈아입고 큰댁에 갈 준비를 했다. 남편은 아직 아무도 안 일어났을 거라며 더 자라고 하는데 긴장 탓인가. 이상하게 머리가 맑았다. 내가 커피를 타려고 하자, 어머님은 아버님이 밭에서 따오신 딸기에 꿀과 우유를 넣어 주스를 갈아주셨다. 이어서 남편과 아버님이 기상, 어머님이 마련하신 몇 가지 음식을 싸가지고 큰댁으로 갔다.

  종가집이 아니다보니 모인 인원은 단출했다. 차례를 지내고 아침을 먹고 났는데 큰댁 농장에서 일을 한다는 베트남 아가씨가 새해 인사를 왔다. 그녀는 결혼식 때 나와 남편을 봤다고 했다. 결혼식에 와주셔서 고맙단 말을 하고 싶어 고맙습니다, 가 베트남어로 뭐냐고 물었더니 깜언, 이란다. 그녀는 언뜻 촌스러웠지만 눈빛이 맑고 목소리가 고왔다. 배부러요, 하면서 음식을 극구 사양하는데 외국인 노동자들은 명절 때 참 외롭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내 위치가 세뱃돈을 줘야 되는 입장이려니 생각하고 아예 기대를 안 했는데 큰아버님과 시아버님이 세뱃돈을 챙겨주셨다. (실은 신정 때 서른이 되었다고 남편한테 삼십만원을 세뱃돈으로 받았었다. 호호.) 작은 댁 도련님들과 여섯 살배기 시누이가 세배를 해서 남편과 나도 미리 준비해 간 빳빳한 새 지폐로 세뱃돈을 주었다. 작은 어머니가 무지 좋아하셨다. 우리 엄마도 옛날에 그랬는데. 엄마한테 맡겨라, 그리고는 영영 종적을 감춰버리는, 세뱃돈의 묘연한 행방.

  어머님이 들려주신 들기름, 참깨, 딸기 등등을 싣고 와서 오후엔 친정에서 연휴를 즐겼다. 차가 밀려 생각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역시 친정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사뿐사뿐. 아무리 시어른들이 잘해주셔도 친정만큼 편할 수는 없다. 오랜만에 오빠와 올케 얼굴을 보니 반가웠다. 남편도 결혼하면서 든든한 형님이 생겼다고 늘 좋아하곤 했다. 오빠는 잔정이 없고 냉정한 편이지만 자기 가족들한테는 참 잘한다. 저녁을 먹고 나서 여기서도 고스톱을 쳤다. 가장 신난 건 우리 아빠. 오리지널 타짜인 아빠와, 계산과 잔머리의 달인인 오빠, 이상하게 운 좋은 올케, 그리고 어떤 패가 들어와도 절대 죽지 않는 무대뽀인 나. 결국 보다 못한 오빠가 너는 웬만하면 광을 팔던가, 죽지 그러냐, 는 결정적인 말을 해왔고 처음엔 아빠가 몽땅 따는 분위기였는데 내가 빠지자 오빠와 남편이 번갈아 따곤 했다. 오빠 왈, 깐따삐야가 빠지니깐 판이 재미있네. 서로 견제하면서 치니까 치는 맛도 나고. 엄마랑 이것저것 집에 가져갈 걸 챙기며 수다를 떨고 있는데 조금 있다가 또 오빠의 목소리. 역시 깐따삐야가 없으니깐 판이 잘 돌아가. 글치 뭐. 우리 집은 내가 항상 화근이지 뭐. 오기로 다시 끼려고 했는데 남편이 따는 중이라서 참았다.

  밤늦게 돌아와 곯아떨어져서는 오늘 아침도 친정에 가서 먹었다. 남편한테는 점심 건너뛰게 여기서 어여어여 많이 먹으라고 부추기면서. 오빠 내외가 서울로 올라간 뒤, 엄마가 챙겨주는 것들을 바리바리 싸서 귀가. 이제야 오롯한 내 시간을 맞았다. 예전 같으면 엄마랑 수다를 떨든가, 친구를 만나 영화라도 보려고 궁리하든가, 아마 그랬을 것이지만 오늘은 그저 무한정 쉬고 싶다. 혓바늘에 오라**를 바르고 입 꼭 다문 채 뒹굴뒹굴 해야겠다. 냉장고에 먹을 게 잔뜩이고, 빨래도 해널었고, 집도 뭐 비교적 깨끗하고. 내일 아침까지는 무조건, 무조건 쉬고 말거야! 어머니 세대와는 달리 요즘은 명절에도 그다지 할 일이 없지만, 어머니 세대와는 달리 요즘 며느리들은 그다지 깡도 없어서 평소보다 조금만 더 움직여도 이렇게 엄살을 부린다. 어쨌든! 결혼하고 처음 맞은 명절. 무사히, 즐겁게 보낸 것으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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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7 1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1-27 1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Mephistopheles 2009-01-27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0에 남편이 새뱃돈을 40만원 준다면....
그땐 한 떡 쏘세요...^^

깐따삐야 2009-01-27 13:37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물어보더라구요. 마흔되면 40만원 달라고 할거냐고. 그래서 넘 멀리 내다보지 말고 내년에 31만원부터 생각하고 있으라구 했어요. 저 잘했져?^^

조선인 2009-01-28 08:27   좋아요 0 | URL
깐따삐야님, 존경합니다. 아이참, 난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요.

깐따삐야 2009-01-28 11:31   좋아요 0 | URL
조선인님,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용돈 받을 구실은 갖다붙이기 나름이어요.^^

Mephistopheles 2009-01-28 23:24   좋아요 0 | URL
이 페이퍼는 절대적으로 마님에게 보여줘선 안되겠군요!!

마늘빵 2009-01-27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결혼 후 첫 명절, 잘하고 오신거 같은데요? 큭큭, 저는 고스톱을 못치고, 다른 친척들도 못쳤던거 같아요. 아무도 고스톱판을 벌이지 않는. -_- 그냥 형들하고 원카드놀이만 했던거 같아요. 우리 가족뿐 아니라 친척은 놀이문화가 없어요. 걍 과일먹고 티비보고 밥먹고 드러눕고, 다시 과일먹고 티비보고 밥먹고 드러눕고.

깐따삐야 2009-01-28 11:45   좋아요 0 | URL
어른들이 더 잘 아시더라구요. 저희 세대가 암껏도 못한다는 것을요. 흐흐.^^
저도 고스톱 잘 못쳐요. 시댁에서는 땄는데 친정에 오니 판도 커지고 다들 머리 팽팽 굴리며 치는 바람에 나가 떨어졌다는. -_- 가족들끼리 해야 즐거운 놀이문화로 그치지 다른 사람이 내 돈을 그렇게 많이 따가면 이거야 원!

순오기 2009-01-27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명절~ 무사히 마치셨군요.^^
친정에서 바리바리 싸온거로 한참은 버티겠군요~ㅎㅎㅎ
우린 다도를 즐기는 시숙님 덕분에 우아하게 차마시며 강의를 들었어요. 차와 다구도 얻어왔고요~

깐따삐야 2009-01-28 11:50   좋아요 0 | URL
네. 어떻게 잘 흘러갔네요.^^
아직도 친정에서 덜 가져온 게 있어서 오늘 한번 더 다녀오려구요. 우와... 저도 적벽대전2 보고서 다도를 배우면 좋겠구나, 생각했었는데. 저는 시댁에서 종이컵에 커피 타서 마셨는데. 비교되네요.ㅋㅋ

이리스 2009-01-27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신한 새댁의 냄새가 폴폴~ 귀여우십니다.. ^^;;

깐따삐야 2009-01-28 11:54   좋아요 0 | URL
집안의 첫 며느리라 그런지 그냥 다 이쁘게 봐주시더라구요. 암만 그래도 시댁은 어려운 것 같아요.^^;;

Alicia 2009-01-28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뱃돈으로 거실카페트가 뭐에요- 깐따님~
저 같으면 옷을 사버릴텐데. ^^
좋아보여요- 달콤따뜻한 홈 스윗 홈. :)

깐따삐야 2009-01-28 11:59   좋아요 0 | URL
앗! 벌써 샀는데. 어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가서 결국 사고 말았어요.^^
가족이 그런 것 같더라구요. 서로서로 잘하려고 들면 화목하고, 서로서로 챙기려고만 들면 각박해지고. :)

전호인 2009-01-28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그야말로 새댁의 첫 시댁 명절 참여로군요.
글에 시부모님의 넉넉한 인정이 베어 있네요.

깐따삐야 2009-01-28 12:03   좋아요 0 | URL
저는 그냥 그런갑다, 했는데 오히려 친구들하고 저희 친정부모님이 걱정을 하시더라구요. 얌전하게 잘 있다 오라구요. 얌전은 아니고 잘 있다 오기는 했어욤.
시부모님은 더 못 줘서 늘 아쉬워 하시죠. 들기름 주실 땐 진짜 좋았어요. 친정엄마가 나물 볶을 때 많이 쓰시길래 갖다 드렸어요.^^

웽스북스 2009-01-28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깐따삐야님을 어느 시부모님이 안이뻐할 수 있겠어요.
메피님 말처럼 저와는 정말 대조적인 설.. 흐..
복작복작 따뜻해보여서 좋아요

깐따삐야 2009-01-30 01:58   좋아요 0 | URL
저는 웬디양님의 여행기가 넘 부러웠어요. 왜 결혼 전에 친구들과 그런 추억을 더더더 많이 만들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도 들었구요. 웬디양님이라도 싱글라이프를 만끽하셔야 합니당.^^
 

  “공무원은 아닌 것 같고.” 영화관 앞에서 색깔사주를 봐주는 사주도사가 Y를 보자마자 한 이야기란다. 이어지는 얘기 또한 하나도 맞는 게 없어서 Y는 왜 이렇게 못 맞히는 거냐며 화를 냈단다. E와 나는 거기 순 엉터리라며 깔깔거렸지만 도사의 추측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가긴 했다. 도사는 무슨 도사. 그저 첫 인상을 보고 대략 판단했던 것이다. Y는 척 보기에도 공무원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그녀는 마치 연예인 같고, 그녀의 삶도 어떤 면에서는 연예인스럽다.

  새내기 시절, 처음 만났을 때부터 Y는 우리 과의 다른 아이들과는 좀 달랐다. 아담하고 예쁘장한 외모에 경상도 말씨는 어찌나 애교스러운지 여자인 내가 보기에도 참 감질나도록 귀여웠다. Y가 마침 기숙사 부근에서 자취를 했기 때문에 기숙사에서 지내던 K와 나는 그녀와 종종 어울렸다. Y는 겉으로 비춰지는 모습과는 다르게 순진하고 씩씩한 아이였다. 그녀의 교태와 끼는 타고난 것도 있었지만 어떤 면에서 생존본능 같은 것이었다. K는 그런 그녀를 기특해하며 아껴주었다. Y는 예쁜데다가 귀엽기까지 해서 스캔들이 끊일 새가 없었는데 믿음직한 남자친구가 생기고 부터는 성실한 연애모드로 전환, 모두의 부러움을 샀다.

  당시 동아리 활동에 몰두하고 실존에 눈 뜨느라 고통스러웠다... 면 썩 오버고 원래 제 앞가림 하나도 버거웠던 나는 이런저런 딴짓에 관심을 쏟느라 과 친구들과 좀 멀어지게 되었는데 어느 날 K가 Y와 절교하는 사단이 벌어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후로 K는 무서우리만치 놀라운 집중력으로 학업에 전념했고 Y는 알바를 뛰어 모은 돈으로 어학연수를 떠나버렸다. 이후에 나는 어쩌다보니 회색분자마냥 두 사람 모두와 잘 지내게 되었다. 둘 다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고, 둘 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어서, 그냥 갈팡질팡하는 사이 그리 되어버렸다. K가 워낙 완고하고 순수했던 반면, Y는 사과할 타이밍을 영영 놓쳐버렸다. K의 고집도 대단했지만 Y도 사과는 진심으로 해야 했다.

  사실 잘 지냈다고는 하지만 Y는 여러모로 나와 달라서 마음을 깊이 나누거나 하지는 못했다. 그녀가 힘든 속내를 털어놓아도 나는 그녀의 여성스러운 외모 이면에 탄탄히 단련된, 똑똑하다 못해 영악스러울 정도로 강한 생활력을 보았기에 그녀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사는 법을 일찌감치 깨우쳤고 같은 조건이라면 나보다 더 잘 살 것이었다. 만약 조건이 다르다면 그 조건을 뛰어넘어서라도 반드시 잘 살고야 말 것이었다. 근처 학교로 실습을 나갔을 때, 지도 선생님이나 아이들을 향한 Y의 상냥하고 다정한 태도에 감탄을 넘어 질투까지 느꼈던 적이 있다. 때로, 아니 종종, 열 마디의 간절한 말 보다 한 번의 눈웃음이 훨씬 효과적이란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나 또한 그다지 차갑거나 무뚝뚝한 편이 아닌데도 연하고 달콤한 배 같은 Y 앞의 나는 설삶은 말대가리 같았다. 그때 Y의 능란한 사교술은 부러운 한편, 두렵기도 했다.

  그 동안 띄엄띄엄 연락을 하고 가끔 얼굴을 보고 그랬는데 이번에 만난 Y는 나에게 여러모로 고맙다고 했다. 시험 정보를 알려준 것, 결혼식에 초대한 덕분에 여러 동기들과 만나고 인사할 수 있었던 것. E 말로는 식사할 때 테이블에 의자가 부족했는데 K가 얼른 의자를 하나 당겨서 Y에게 앉으라고 했던 모양이다. 오래도록 정을 주었던 친구와 멀어졌을 때 실망과 아픔도 컸겠지만 연애하고, 사랑하고, 아기도 낳고 하다 보니 K도 이젠 이해 못할 것이 무엇이랴, 싶었을 것이다. 더구나 Y가 어마어마한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세월도 많이 흘렀으니 어디 연수라도 가서 마주치면 그땐 더 반갑게 인사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같은 지역에 있는 학교에 근무하다보면 동기만큼 편한 동료도 없다. 학부 때 안 친했던 사람도 같이 근무하다 친해지는 경우도 봤다.

  그나저나 꽤 오랜만의 만남이었는데 Y는 “결혼, 꼭 잘하고야 말거야!”라는 대사를 남겨 E와 나는 또 한번 감탄했다. 너무 솔직해서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는데 급기야는 애인이 있는 남자한테 대쉬했던 경험까지 털어놓는다. 내가 그래도 별별 책도 다 읽고 결혼까지 한 사람인데 촌스럽게 놀라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럼에도, 거 참 용감하고 멋지다고 말하기엔 그새 유부녀 모드에 길든 탓인지 차마 호응불가. 애인이 있는데도 너와 연락을 주고받은 상대 남자가 나쁜 쉐X 같다고 소심한 반발만 했을 뿐.

  조만간 지인들과 함께 엮은 책도 나오고 지역의 좋은 학교로 발령을 앞둔 Y는 혼자 객지에 나와서도 참으로 꿋꿋하게, 부지런히 인생의 지형도를 그려나가고 있었다. 그녀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 E와 나는 우리는 온실 속의 화초마냥 자라서, 어쩌고 해가면서 그녀의 야무진 생활력을 존경하고 시기했다. 항상 자신의 욕구에 솔직하고 다가온 기회는 반드시 잡고야 마는 Y. 나는 그녀가 아니고, 그녀처럼 되려다가는 곧장 시스템 에러를 일으키고야 말겠지만 어느 순간에도 현실을 불평하는 대신,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무엇인가를 재빨리 생각하고 처신하는 그녀의 현명한 낙천성만큼은 두고두고 본받아야 할 미덕이란 생각이 든다. 다만, 아름답고 능력 있는 여성들에게 인생이 걸어오는 트릭이란 게 있다. Y가 그 트릭에 휘둘리지 않을 정도의 보다 높은 경지의 내공을 쌓았으면 좋겠다. 그녀는 특별하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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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9-01-24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그래도 별별 책도 다 읽고 결혼까지 한 사람인데 촌스럽게 놀라지 않으려고 애썼다.-> ㅋㅋㅋ 귀여우신 깐따삐야님.

깐따삐야 2009-01-25 13:11   좋아요 0 | URL
헤에...^^ 암튼 얘기 듣고 좀 황당했는데 열 여자 마다 안 하는 게 남자더라구요.

Mephistopheles 2009-01-24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극단으로 절대 치닫지 않는 회색이 최고라니까요...으흐흐(나름 알라딘 회색분자 메피스토가)

깐따삐야 2009-01-25 13:13   좋아요 0 | URL
메피님 경지에 이르기엔 저는 아직도 고집이 넘 세요. 메피님과 열심히 어울리다 보면 언젠간 저도! -_-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