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히 개봉한 오락물에 끼어 야간 타임 딱 한번. 지역의 모든 영화관을 훑어보았지만 내가 원하는 시간에 이 영화를 볼 수는 없었다. 점점 짜증이 밀려왔다. 더 기다렸다가 나중에 dvd로 출시되면 볼까, 잠시 망설였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재미는 있지만, 극장을 채 나서기도 전에 스멀스멀 날아가 버리는 영화들에 물린 참이었고 이 영화를 꼭 보아야 했다. 오후에 미스터 빈의 <쟈니 잉글리쉬>를 보고난 참이라 <체인질링>에 나오는 존 말코비치와 마주치면 쿡, 하고 웃음부터 터지지 않을까 우려했었다. 하지만 두 시간 남짓의 러닝타임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웃지 못했다.

  처음에 예고편만 보았을 때 주목했던 것은 세 가지였다. 모성, 실화, 안젤리나 졸리.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엔 새로운 두 가지가 보였다. 거대 공권력 앞의 왜소한 개인, 그리고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위대한 거장. <체인질링>은 단지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절규나 모성에 관해 말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하나의 발단이자 예화일 뿐. 영화는 그 이상의 것을 고발하고, 비판하고, 분노한다. 거짓 권위를 위해 진실이 조작된다, 조작된 진실을 위해 희생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반기를 든 자는 희생되어야 마땅하다. <체인질링>은 한 마디로 ‘두 번 죽이는’ 영화다. 첫 번째는, 진실을, 두 번째는, 진실을 믿는 개인을. 나는 꼭 쥔 주먹을 펴지 못한 채 문득문득 쌍시옷을 날려가며 이 영화를 보아야만 했다.

  2, 30년대의 LA. 교환원을 통해 전화를 걸고, 거리에는 느릿느릿 전차가 다니고, 긴 치마에 모자를 쓴 여인들이 오가는,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 먼 도시의 이야기. 그 고릿적 얘기가 요즘을 사는 내 눈 앞에서도 벌어지고 있기에 더욱 공감하고 화를 내며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꼭 현 정부를 지목하지 않더라도 공권력에 의한 억압과 횡포는 공공연히, 또는 암암리에 벌어지고 있다. 어느 면에서는 과거에 비해 더 불행한지도 모른다.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구현하는 당연한 일에도 자본과 연줄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기에 말이다. 정부에 대들다가 기둥뿌리 뽑힐까,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 불이익으로 돌아올까, 사사로운 불만부터 숨 막히는 분노까지, 그저 침묵으로 삼킬 수밖에 없는 이들이 영화나 소설 같은 픽션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힘은, 견고한 개인주의의 틈을 유유히 비집고 들어와 남의 일에 분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내 일에는 쉽게 열을 내도 남의 일에는 무심한 편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피켓을 들고 시위하는 인파 속에 내 머리 하나 더 보태고 싶은, 분노와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왜 아이가 사라졌는지, 그 아이의 생사는 어떠한지, 영화의 발단과 결말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라는 솜씨 좋은 감독은 showing truth에 충실하되 영화적 재미와 긴장을 결코 떨어뜨리지 않을뿐더러, 불의만 보면 인내심이 용솟음쳤던 나 같은 이들을 이토록 자극시키니 단연 거장이랄 수밖에. <밀리언 달러 베이비>도 참 훌륭한 영화였지만 여기저기 권하고 다니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부디 많은 사람들이 보았으면 좋겠다. 아니, 모든 사람들이 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연기변신을 시도한 안젤리나 졸리에 대한 첨언. 나름 극심한 다이어트를 한 것 같은데 상대를 똑바로 노려볼 때만 역시 졸리구나, 싶었다. 그녀의 명성 덕분에 개봉 전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인기몰이는 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를 잃고 절규하며 분노하는 싱글맘의 역할은 안젤리나 졸리 외에 다른 배우가 연기했어도 그 정도는 했겠지, 싶다. 모자를 씌우고 붉은 립스틱을 발라 놓는다고 해도 내 눈의 졸리는 졸리였을 뿐. 오히려 외유내강형의 분위기를 지닌, 보다 아담한 사이즈의 여배우에게 이 역할을 맡겼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어르신이 어련히 잘 알아서 캐스팅 하셨을라고, 쓸데없이 이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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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01-30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린트 이스트우드 어르신 덕분에 졸리가 그 정도의 연기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도 듭니다. 사실 최상의 톱스타를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는 감독은 몇 안될꺼라고 보고 싶어요..^^
'그랜 토리노' 도 꼭 보도록 하세요 전 아직 체인질링을 안봤는데 그랜 토리노...좋은 영화 였습니다. 역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주연"인 영화입니다. 연세로 봐서는 아마도 마지막 출연 영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깐따삐야 2009-01-30 11:49   좋아요 0 | URL
메피님 말씀이 정답이네요. 훌륭한 감독과 좋은 시나리오는 배우에게 든든한 뒷백이 되겠지요.^^
'그랜 토리노'는 말씀 듣자마자 바로 찾아봤어요. 감독에 주연까지 했다니 기대를 갖고 보겠습니다!

Alicia 2009-01-30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찜해놨는데, 예고편만 봤어요 :)저도 약간 미스캐스팅이란 생각은 들어요.
졸리는 워낙 생김생김이 굵직하고 화려해서 외유내강 스타일하곤 거리가 좀 있지요,
클린트이스트우드 할아버지 좋아요-
어휴 예전에 밀리언달러베이비 보고 한시간은 운거 같아요.

깐따삐야 2009-01-30 11:54   좋아요 0 | URL
알리샤님, 조만간 꼭 보셨으면 좋겠어요. 영화 보는 내내 팝콘 부스럭거리는 소리 한 점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어요. 아마 대부분의 관객이 영화 속으로 완전 몰입했기 때문일 거에요. 심장을 쿵쿵 두드리는 몇 안 되는 영화일 거에요.
졸리의 연기는 특별하지 않았고 어쩌면 그녀에게 주목할 겨를이 없었어요. 영화 그 자체로 충분했으니까요. <밀리언 달러 베이비>가 좋으셨다면 이 영화 또한 분명히 마음에 드실 거에요.^^

마늘빵 2009-01-30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현 시국에 딱 어울리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 어떤 블로거에 의하면, 이 영화와 앞으로 개봉될 - 내용은 잘 모르겠는데 - <블루>가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다락방 2009-01-30 10:54   좋아요 0 | URL
블루는 재개봉이구요, 아프락사스님. 스폰지하우스 광화문에서 01.29인 어제, 개봉했답니다. 제가 아는 그 블루가 맞다면 말이지요.

Mephistopheles 2009-01-30 11:11   좋아요 0 | URL
그게 키에스로프스키 감독의 영화라면....
아프님은 블루만 보지 마시고 레드와 화이트도 보셔야 할지 몰라요..^^

찾아보니 맞군요...아프님 같은 감독의 3연작인 레드와 화이트도 보셔야 하겠군요..으흐흐.

마늘빵 2009-01-30 11:25   좋아요 0 | URL
아 이런 제가 착각했어요. 그거 말고 <밀크>와 <체인질링>이 현 시국에서 정부가 싫어할 만한 영화라고 하더라고요. 그 블로거는. 다락방님이 알려준 사이트의 그 블로거인데. ^^ <블루>와 <밀크>를 헷갈렸군요.

깐따삐야 2009-01-30 12:11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현 정부가 저지르는 갖가지 만행들이 오버랩되기도 하고 군포 여대생 살인사건의 범인이 떠오르기도 하고. 공포와 분노가 뒤섞인 긴장 상태로 영화를 보아서 그런가. 영화관을 나설 땐 머리도 아프고 피곤하고 그렇더라구요.
앞으로 이런 영화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언젠가 이 모든 불행들이 영화 속 과거로만 그칠 날이 왔으면 좋겠어요! 그나저나 <밀크>도 꼭 보고 싶은데 개봉관이 있을지 걱정되네요.-_-

레와 2009-01-30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토당토 않은 정말 말도 안되는 터무니 없는 일이 비단 영화속에서 뿐만아니라 (설사 실화라도 영화속)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간에도 일어나고 벌어진다는 사실이, 질리더군요.

윽..!!! 숨막혀..

깐따삐야 2009-01-30 12:09   좋아요 0 | URL
그쵸? 영화 보는 내내 화도 나고 부끄럽기도 하고 그랬어요. 정부를 상대로 싸우는 일을 골리앗에게 덤비는 하찮은 몸부림 정도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는 자각. 주변의 계속적인 응원과 지원이 없었다면 크리스틴도 실성한 여자로 영원히 묻혀버렸을 가능성이 크니까요.
저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분노할 수 있는 감각을 잃지 않았음 좋겠어요.


비로그인 2009-01-30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영화를 니콜 키드먼이 했다면 어땠을까, 싶었어요. 권위에의 도전, 모성의 재현이라기 보다는 이 영화는 어쩌면 자기 자신의 용기와 맞서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더랬습니다. 권위와 모성으로만 보기에는 이야기가 계속 뭔가 어긋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깐따삐야 2009-02-01 12:31   좋아요 0 | URL
저도 여배우 여럿을 떠올렸어요. 수잔 서랜든, 줄리안 무어 등등을 생각했다가 나이가 넘 많아 탈락시키곤 혼자 안타까워하고.^^
Jude님은 저보다 영화를 한층 깊게 보신 것 같네요. 저는 주로 화만 내다가 나온 것 같아요. 졸리가 의사에게 정면으로 욕을 퍼부을 땐 끌려가겠군, 뒷일을 염려하면서도 어찌나 통쾌하던지요.

라로 2009-01-31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영화를 아직 보지못했어요, 남편왈,"잔인한 부분이 나올텐데 너 볼 자신이 있어?"라고 하기에,,,
모성과 연관된 어떤 끔찍한 장면이 나올까봐 두려워서요~.
그런데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보고싶잖아요!!!!!

비로그인 2009-01-31 07:03   좋아요 0 | URL
지다가다가]for nabi님
저도 봤는데요, 아마 그 잔인한 장면 아주 많이 힘드실 거여요. 꼭 보고싶으시다면 저처럼 그 잔인한 장면에서만 눈을 감는 것이 어떨까 싶군요. 그런데 음향효과가 너무 뛰어난지라 그 소리 하며 제가 상상한 장면, 조금이라도 본 잔인한 장면 암시효과가 겹쳐서 아직도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깐따삐야 2009-02-01 12:31   좋아요 0 | URL
nabi님- 저는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두눈 똑바로 뜨고 봤는데... 담이 커서가 아니라 뭐랄까. 고개 돌리기 아까워서랄까. 완전 몰입해서 보느라 나중에 일어날 때 온몸이 뻐근하고 그랬어요. Jude님 말씀처럼 어느 장면에서 눈을 꼭 감을지언정 이 영화, 꼭 보셨음 좋겠네요.^^

개츠비 2009-01-31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싶은 영화입니다. 올해는 영화와 친해지고 싶네요. 친해지고 싶어도 언제나 마음뿐이라서...깐따삐야님, 영화평으로 살짝 맛보고 갑니다.

깐따삐야 2009-02-01 12:38   좋아요 0 | URL
책은 시공간의 제약을 덜 받는데 영화는 직접 가서 표 끊고, 기다리고, 꼬박 두 시간 동안 정면주시하며 봐야 하고. 아무래도 소요되는 것들이 많죠. 저도 개학하고 바빠지면 영화 보러 나서느니 그냥 쉬는 쪽을 택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체인질링>은 나중에라도 꼭 보세요. 요즘 살짝 유감스러운 영화들이 많은데 그 중에 단연 일품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