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데라토 칸타빌레 (구) 문지 스펙트럼 19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정희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마르그리트 뒤라스 하면 우선 장 자끄 아노 감독의 <연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뒤라스는 젊은 날, 은밀하고 다채로운 은유로 <연인> 속의 자신을 감췄다. 그리고는 이른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세상에 고백했다. 제인 마치가 열연했던 프랑스 소녀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어른이 채 되기도 전에 사랑의 모든 것을 알아버린다는 것. 끔찍한 일이다.

 『모데라토 칸타빌레』는 백 페이지 남짓한 분량의, 모데라토보다는 안단테로 읽히는, 우아하고 섹시한 소설이었다. 읽는 동안 영화를 염두하고 쓴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는데 (실제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영화화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만큼 활자보다는 정황과 분위기에 매료되는 독특한 작품이었다.

  상류층의 정숙한 여인, 안은 아들의 피아노 레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치정살인 현장을 목격한다. 사랑 때문에 죽은 여자가 있고, 피범벅이 된 여자를 애무하며 슬퍼하는 남자가 있다. 안은 그처럼 죽음으로 완성되는 사랑을 목도한 이후 공장 노동자인 쇼뱅과 함께 그들의 사랑을 재현한다. 그들은 카페에서 만나 죽은 여자와, 그녀를 사랑한 남자를 자신들과 동일시하며 언어유희와도 같은, 기묘한 대화를 나눈다.

  그 여자는 다시 손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는 여자의 행동을 눈으로 쫓다가, 결국 고통스럽게 알아차리고, 납덩이처럼 무거운 손을 들어 그 여자 손 위에 포개놓았다. 그들의 손은 너무도 차가워서 오직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소망 속에서만 환각으로 서로 스쳐갔다. 지금과 같이 소망 속에서 말고는 달리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들의 손은 죽음의 포즈로 굳어진 채 그렇게 머물러 있었다(116). 오직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소망 속에서만 환각으로 스쳐가는 인연. 단 한 번의 성마름도 없이 모데라토 칸타빌레, 보통 빠르기의 절제된 템포로 연주되는 사랑. “당신이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쇼뱅이 말했다. “그대로 되었어요.” 안 데바레드가 말했다(120). 안은 쇼뱅과 더 나아가지 않는 대신, 과거의 안으로 돌아갈 수도 없을 것이다. 

  사랑은 갑작스런 일상의 균열, 그 틈을 비집고 쳐들어오는 자유에의 갈망과도 같다. 낯선 세계로의 진입과 동시에,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일깨우고 원래의 나보다 더욱 나처럼 느껴지게끔 만드는, 전인적인 자유, 그리고 변화. 안은 아들에게 말한다. “어떤 때는 내가 널 상상으로 만들어낸 것 같아. 네가 진짜 있는 게 아닌 것 같다니까(41).” 그렇듯 생경해지곤 한다. 무언가에 심신이 매혹되어 일상 저 너머로 이동하는 찰나, 익숙했던 일상의 요소들이 거짓말처럼 낯설게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역으로, 열렬히 매혹되었던 그 무언가를 향해 똑같은 말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어떤 때는 내가 널 상상으로 만들어낸 것 같아. 네가 진짜로 있는 게 아닌 것 같다니까. 그리고는 뒤따르는 의문들. 사랑하는 내가 나일까. 살아가는 내가 나일까.    

  이런 사랑, 도 있노라고 한번쯤 권하고픈 작품이었다. 그리고 뒤라스의 다른 소설들을 더 찾아 보고 싶어졌다. 한편으론, 뒤라스의 모든 사랑은 <연인>, 그 첫사랑의 도돌이표에 지나지 않겠구나, 하는 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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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ia 2009-02-01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 비슷한 시기에 뒤라스를 읽으셨네요^^
'히로시마 내 사랑'도 느낌이 비슷해요. :)
아마도 뜨겁게 사랑했던 건 그 중국남자가 아니라 뒤라스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도 들구요-
'연인'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여준 뒤라스기에 다른 작품은 오히려 소품같다는 느낌도 들어요. 민음사에서 나온 <연인>의 해설은 심리학적 개념을 들이대면서 그 어린 소녀를 무슨 변태성욕자쯤으로 몰아세우고 있던데, (전 그래서 전문가가 싫어요) 절망과 수치, 죄의식, 중독, 애욕...에 대해 이만큼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가도 드물다고 봐요. 사소설이란 점에서 아니 에르노와 닮았다고 볼수도 있지만 아니 에르노의 몽상과는 정말 달랐어요.

깐따삐야 2009-02-02 11:54   좋아요 0 | URL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이미 사랑의 절대치를 경험했기 때문일까요. 노년에 이르러 발표한 <연인> 이외의 작품들은 알리샤님 지적처럼 다소 소품 같기도 하고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만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해요. 다른 작품들을 먼저 읽고 <연인>을 가장 마지막에 읽었다면 느낌이 과연 어땠을까 싶기도 하네요.

흐업. 변태성욕자라니. 제 눈에 비친 <연인>은 오히려 사회학적인 소설이었어요. 백인 집단에서는 가난한 최하류층에 속하고 그렇다고 베트남 사회에도 속할 수 없는 이방인으로서의 프랑스 소녀. 그렇듯 이중소외를 겪고 있던 사춘기 소녀가 지푸라기 붙잡는 심정으로 빠져들었던 사랑. 그 안쓰러운 일탈을 변태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군요.

알리샤님 말씀처럼 뒤라스는 아니 에르노와 비슷하지만 아니 에르노의 집착이나 격정과는 많이 다르죠. 저에겐 뒤라스가 더 잘 맞아요.^^

Mephistopheles 2009-02-01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일상적이거나 보편적이지 않은 사랑의 행위와 방식을 "연인"이라는 그 시작점과 함께 계속 연장되는 분위기 인건가요??

깐따삐야 2009-02-02 12:00   좋아요 0 | URL
네. 그런 느낌이 계속 들어요. 감수성 풍부하고 명민한 소녀가 이미 사춘기에 <연인> 속의 사랑을 경험했다면 나머지 사랑은 모두 소품에 불과하지 않을까. 무언가 새로운 것이 다가와도 결국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까 싶어요. 뭐든 빨리 경험하거나 안다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니라는, 노인 같은 마음이 들었어요.

다락방 2009-02-04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거 읽을래요!! 안그래도 연인 읽고 뒤라스 또 읽어 보고 싶었어요!

깐따삐야 2009-02-05 19:38   좋아요 0 | URL
이 책 분위기가 묘했어요. 행간의 무드를 천천히 느껴야 할 책. 읽어보세요.^^

다락방 2009-02-06 08:53   좋아요 0 | URL
땡스투 저예요 ㅋ

깐따삐야 2009-02-06 17:08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감사해요. 그나저나 이 책이 다락방님께도 재밌어야 할 텐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