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판시선 71
서정춘 지음 / 비(도서출판b)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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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도 무심하지. 서정춘. 벌써 여든다섯. 등단하고 스무 여덟 해 만에 낸 첫 시집 《죽편》으로 그때까지 붕어빵 찍어내듯이 시를 쓴 시 생산업자한테 면목없게 만들던 기억. 여전히 언어의 구두쇠. 이번 시집 《랑》은 표지까지 39쪽의 짧은 분량에 서른세 편의 시를 실었다. 서정춘의 시는 그냥 읽으면 된다. 척, 읽으면 탁, 와 부딪는다. 예컨대:



  홍매설紅梅說



  첫, 보시기에

  꽃도

  불이시니

  불티 먹은

  꽃가지에

  불이시라

  남의 님

  넘보듯

  불콰하시니

  지난 날

  물불 없이

  사르다 간

  불이시라  (전문. p.10)



  아후, 세상에나. 아직도 이렇게 시를 쓰는 것이 유효할 줄 누가 알았을까? 붉은 매화 한 송이 또는 한 그루를 보고 “지난 날을 물불 없이 사르다 간 불”이라 노래하면, 노랠 듣는 사람은 어찌하라고. 제일 첫 마디 좀 봐. “첫, 보시기에” 저 쉼표의 절묘함이라니. 일찍이 쉼표의 단애斷崖는 송기원의 단편 <월행>에서 유감없이 표현된 바, “구름 사이로 달이 빠져나오자 반짝, 개천이 드러났다.” 이후 무단 없이 쉼표를 사용한 글쟁이들은 누구나 송기원에게 빚진 바 있다 하겠으나, 같은 40년대생 송기원이나 서정춘이나, 보성이나 순천이나 거기서 거기니까 두 양반이 알아서들 하시압고, 하여간 잡소리 없는 절창이라 아니 할 수가 없네 그려.

  꽃도 불이니, 불티를 먹은 꽃가지에 매달린 불이러라. 크. 낮에 마신 소주가 지금 다시 취한다. 이런 시 한 수는 외워두어야 마땅하건만 이젠 외우는 것보다 잊는 게 더 많아져 도무지 그럴 엄두가 나지 않는 게 한이라면 한이랄까. 이런 시 쓰는 서정춘 시인이 미울 지경이다.

  아무리 서 시인이라 하더라도 39페이지 얇은 책 속에 좋은 시도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시도 있다. 하지만 내 마음에 차지 않는 건 굳이 소개할 필요 없으니, 딱 들어온 시만 하나 더 골라보자.



  아픈 꽃



  어린이는 꽃으로도 때리지 말랬는데, 맞고도 틀렸다

  그 꽃도 아플 터라  (전문. p.14)



  맞아, 맞아. 어린 아이라도 골밀도 촘촘한 두골이 있을 터. 거기에 부딪는 꽃이라도 어찌 아프지 않을소냐. 아이를 보면서도 한 눈으로 꽃도 보는 이, 그게 시인일 터.

  이 시집에는 예전에 자기가 쓴 시를 새로 쓴 시도 있다. 2010년에 <흘림>이었다가 2013년에 <飛白비백>으로 제목을 바꾸고 다시 내용을 고쳐 쓴 <비백>.



  비백

  ― 은어잡이 황갑철



  저것이냐

  자네 흘림체 먹물에서 보았던 흰점박이 飛白

  내리내리 섬진강 내린 물을 은장도 빛깔의 은어 떼가 차오를 때 보이는 飛白

  저 역류의 힘!  (전문. p.17)



  원래 시는 이렇다.



  흘림



  저것이냐 飛白 어느 흘림체 먹물에서 보았던 飛白 오늘 섬진강 여울에서 시린 니쏘리로 여러 번씩 보인다 飛白 돌자갈에 몸을 갈며 여울물 차오를 때 보이는 飛白 은장도 빛깔의 은어 떼가 보인다 飛白 저 역류(逆流)의 힘!  (《귀》 시와시학사 2005. 전문 p.27)



  내 읽기로는 둘 다 좋은데, 시인은 암만해도 <흘림>이 뭔가 아쉬웠던 모양이다. <홍매설> 첫행에서 본 절묘한 쉼표를 이 <흘림>에선 “시린 니쏘리”가 역할을 하건만, 독자는 그게 빠진 모양이 암만해도 섭섭하다. 뭐 그렇다고 구시렁거릴 입장은 아니긴 한데….

  또 재미있는 시가 있으니:



  乭과 새 1



  돌에 눌린 새라니요

  한글박이 시인의 눈에

  저러한 뽄새가 서름해설랑

  돌은 들내놓고

  새를 건드려

  한글 나라 소리로 훨

  날려 버릴까를 궁리중입니다요  (전문. p.19)



  乭의 우리말 음가는 “돌”이니 갑돌이 할 때 甲乭이 이 돌이다. 생김새가 돌石 아래 새乙이 눌려 있어 새가 날지 못할 것이 시인 보기에 서름해설랑, 돌을 들어내고 새 옆구리를 찔러 하늘 멀리 날려보내려 궁리중이란다. 어디로 날려보낼까? “꽃 그려 새 울려놓고 / 지리산 골짜기로 떠났다는 / 소식” <봄, 파르티잔>처럼 지리산 빨치산 한테? 참 “봄봄하다.”

  하나만 더 소개하자.



 



  전라도 순천 어머니가 서울 사는 아들에게 전화를 하면서 아가 온 나라가 난리통이다잉 밥은 집에서만 묵고 다녀라잉 마스크는 꼭꼭 눌러쓰고 다녀라잉 사람들 모닥거린 데는 쳐다보지도 마라잉 이래잉 저래잉 잉잉대는 꽃벌의 날짓 소리 같은,  (전문. p.27)


  남도 사투리 끝에 “잉” 붙이는 건 다 아시지? 비슷하게 시집의 제목을 《랑》이라 한 건, 이음새가 좋아서이다. “너랑 나랑 또랑물 소리로 만나서 / 사랑하기 좋은 말”이라서인 것처럼 <잉>도 마찬가지. 근데 감염병이 2019년인데 이때 서정춘의 연치가 78세. 순천 사는 어머니는 적어도 오메, 90대 후반 아녀? 장수하셨네. 이이의 아버지가 마차를 모는 마부였다. 당연히 가난하고 어려운 세월을 살았겠지. 그런 살림을 꾸린 아버지는 속으로 애간장이 녹아났을 터. 이제 시인은 아버지 제사를 지낸다.



  향불 앞에서



  오늘따라 아버지 제상의 향불 타는 연기가 나에게는 마른 말똥 타는 냄새로 싫을 것이 없는 것은 차마 아버지의 한 평생인 마부의 몸 냄새라 우겨보는 데 있다  (전문. p. 36)



  한 수만 더 인용한다 해놓고 또 한 수를 보태면 반칙 아니냐고? 꽃별의 날짓 같은 어머니의 잉 소리를 한 바에 아버지 제상 향불 하나 보탠다고 어찌 흉이랴. 그냥 곱게 봐주시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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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출근, 산책 : 어두움과 비 오늘의 젊은 작가 8
김엄지 지음 / 민음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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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엄지의 소설집 《미래를 도모하는…》을 흥미롭게 읽어 주저 않고 이이의 장편소설(이라고 주장하지만 장편? 후후훗 웃기네…)을 읽었다. 쇼핑하듯 개가실 훑어보다 눈에 뜨인 것이 아니라 아예 김엄지를 향해 직진해서 딱 두 권 있는 책 가운데 하나를 고른 것. 다른 하나는 전에 읽은 소설집. 2015년에 찍어 벌써 책 나오고 10년이 됐건만 손때가 묻지 않았다. 도시의 다른 도서관 목록을 검색해도 레퍼토리가 그리 많지 않다. 이 도시에서는 김엄지가 별로 인기가 없는 모양이지? 흠.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E의 일상을 그렸다. E는 생일기념으로 치과에 가서 스케일링을 받았다. 앞 장면 읽을 때는 젊은 의사 같았는데 뒤에 다시 나오면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같은 느낌이 드는 의사의 말에 의하면, 간호사가 아니라 의사가 직접 스케일링을 해주었다는 것도 신기하기는 한데, 4번과 12번에 충치가 생겼고, 앞니는 금이 갔으며, 사랑니가 가까운 미래에 말썽을 부릴 것 같단다. 의사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치료하면 괜찮다면서. 당연하지. 근데 돈이 없다. 의사의 의견을 좇아 이를 고치려면 반년치 연봉이 필요하다.  E의 통장엔 잔고가 별로, 거의 없다.

  저축한 돈이 있었다면 결혼할 수 있었을까?

  결혼에 특별한 동경이 없는 E는 치과를 나오면서 생각했다. 치과 옆에 나란히 내과, 피부과, 정형외과 그리고 이비인후과가 붙어 있는 건물. 결혼을 동경하지 않으니 그동안 저축하지 않은 것에 대해 크게 후회하지도 않는다. 곧 크리스마스. 여자를 만날 거다. 작가가 여성이라 E도 여성인 줄 알았다. 이때 까지는. 근데 남자다. 일주일에 두세 번 만나는 여자가 있었다.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없거나 있기는 있어도 애매하다는 뜻이라고 독자는 방점 박았다.

  백화점에 가서 여자에게 줄 선물로 장갑을 샀다. 이때까지는 눈이 오지 않았다. 집에 우산이 없지만 눈이 오지 않았으니까 우산도 사지 않았다. 여자를 만날 희망이 있으니 선물을 산 거고, 희망이 있으니까 눈 또는 비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우산도 살 필요가 없었다. 이거 주목해야겠는걸? 쫌 웃기잖아?

  아니나 다를까, 여자한테 여덟 번 전화하고 다섯 통의 메시지를 남겼지만 전화도 받지 않고 문자도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다음날 여자의 휴대폰은 아예 꺼져 있었다. 이후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여자의 휴대폰은 결코 열리지 않는다. 희망이 꺼지니까 눈이 오기 시작하고, 곧이어 비로 바뀌고, 눈 또는 비가 오니까 우산을 사야 한다. 경호원들이 쓰는 검정색의 튼튼한 우산. 이후 작품이 끝날 때까지 계속 하늘은 흐리고,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약하게 그러나 끊임없이 눈 또는 비가 내린다. 어디선가 본 장면이다. 작품 끝날 때까지 우중충하게 비 오는 거. 근데 그게 어떤 작품이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까 참 책임 없이 쓴 거 같다. 내가 독자면 다야? 어떤 작품인지 특정하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지껄이게? 맞다. 반성하겠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씨.


  E도 지인들 한테 연말연시 선물을 받았다. 책, 목도리 그리고 와인. 왜 포도주라면 될 걸 꼭 와인이라고 하지? 맞아, 나도 와인이라고 하는군. 하여간 와인은 마트에서 산 고등어를 구워 한 방에 다 마셔버렸다. E가 조금 술이 과하다. 센 편도 아닌데 자주 마신다. 술이 잦으면 사고를 면할 수 없다. 자동차 운전하면서 완전 무사고가 불가능한 것처럼. 후반부에 가면 E도 바닷가에 가 혼자 술 마시고 비 겁나게 오는 해변에 앉아 있다가 자살 여행 온 사람으로 오인받는 일도 겪는다. 그건 나중 일이고 E도 지인들 한테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이것저것 고르기 귀찮아 전부 양말로 통일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죽어도 소원은 통일.

  E 한테 선물 받은 사람들 가운데 낚시 좋아하고 낚은 생선을 가져와 직접 회를 떠 직원에게 먹으라 나눠주는 상사 백도 있고, 동료 a, b, c도 있다. 백은 자기가 뜬 회는 자신이 먹지 않지만 회 뜨는 실력 하나는 죽여준다. a는 회를 먹지 않아 백의 눈 밖에 났다. E와 a, b, c는 12월 31일 출근해서 오늘 계획에 대해 말한다. a는 여자하고 바닷가에 가겠다 하고, b는 친구들과 술자리 약속이 있단다. c는 고향에 간다는데 E는 뭘 할까 생각하다가 산에 올라 일출을 보겠다고 마음먹는다. 계획이 있으니 눈도 그쳤다. 아닌가? 아직 눈이 오지 않았나 보다. E는 퇴근하기 전에 렌터카 업체에 전화해 경차를 빌렸다. 그걸 타고 산 밑에까지 가려고. 퇴근하다가 마트에 들러 헤드 랜턴, 아이젠, 목장갑, 초콜릿과 커피믹스를 샀다. 집에 가서 다음날, 그러니까 새해 첫날 새벽 세시 반에 알람을 맞추어 놓고 잤다.

  세시 반에 알람이 울리자 단호하게 침대에서 일어난 E. 상의로 반팔, 셔츠, 카디건과 파카를 입었다. 하의엔 타이즈와 코르텐 바지. 코르텐 바지는 면으로 만들어 눈 쌓인 겨울엔 쥐약이다. 밤색 양말 위에 검정색 양말을 겹쳐 입고 운동화를 신었다. 운동화도 가지가지로 겨울산엔 쥐약이다. 김엄지는 그런 건 몰랐나보다. 산에 갔다. 산을 오르는 한 여자의 뒷모습에 눈이 갔다. 단화를 신고 있어서 발목이 드러나 보였다. 흠. 그리 춥지는 않았나 보다. (여기서 웃어줘야 하는데…)

  우리의 찌질한 주인공 E는 산을 오르다 수백명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정상까지 가지 못하고 중턱에서 헉헉, 바위에 기대 앉아 있다가 조금 아래 천막 치고 장사하는 남자한테 만원 주고 컵라면 하나를 사먹고 내려왔다. 컵라면이 오천원이다. 만원짜리를 내니까 잔돈 줄 생각을 하지 않아 그냥 내려왔다. 천막 가게 안에 열댓 명이 있었는데 정상까지 오르지 못한 인간은 E 한 명인 거 같다. 산을 내려오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맞다. 이제부터 비가 내린다. 끝날 때까지. 그리고 집에 가는 차 안에서 E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왜 눈물이 흐르는지 이유는? 모호하다. 상황이 모호한 게 아니라 정말로 김엄지가 그렇게 썼다. 모호하다고.

  모호하긴 뭐. 여자한테 전화해도 불통이지, 동료 직원들은 전부 연말 계획이 있는데 자기는 없었지, 산에 올라 새해 첫날 일출 보는 것도 날 샜지, 비는 오지. 우중충 itself 아냐? 그러니 비는 오고, 눈엔 눈물이 흐르지.


  독자는 시작부터 알아봤다. E는 앞으로 계속 충치가 있는 4번과 12번 이가 아니라 금간 앞니 때문에 전전긍긍할 것이며, 언젠가 한 번은 자빠져 금이 갔고 전전긍긍한 앞니에 충격을 받을 것임을. 마치 소설 속에 권총이 등장하면 반드시 한 번은 쏘아야 하는 것처럼. 직장 동료 a, b, c와 상사 백에 대한 험담이 끝이 없을 것도. 현재 연락두절이며 전엔 일주일에 한두 번은 만나던 여자에 관한 갈증도 계속될 것. 당연히 하염없이 비가 주룩주룩 내릴 것이고, 높은 습기로 인한 부작용까지.

  여기에 하나 더. E는 직장 동료 세 명과 함께 퇴근 후 일상처럼 술자리를 갖는데, 특별하게 2차로 포장마차에 간 날, 옆 테이블의 여성 네 명과 합석을 한다. 여기서 한 명을 낚아챈 E는 그날로 여관에 가서 함께 자긴 했지만 말 그대로 그냥 잤다. 틀림없이 키스는 했건만 여자의 혀가 두꺼웠는지 아닌지 기억나지 않고, 섹스를 하려 했다가 E가 하도 주절거리는 바람에 김이 샌 여자는 E한테 등을 돌려 그냥 자버리고 말았다. E의 머리 속에는 돌아누운 여자의 등뼈가 확 박혀 버렸다. 이 등뼈도 책이 끝날 때까지 E의 머리에 삼삼할 것임을 단번에 알아차린다.

  이렇게만 얘기해도 김엄지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감이 잡히시지? 뭐 그런 거지. 그렇게 젊음과 시간은 황량하게 가버리는 거지. 중뿔난 거 하나도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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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미쳤어, 250권, 8만쪽을 넘겨 읽다니 인간도 아니네.

  빨간 글씨는 재미나게 읽은 책. 빨갛고 굵은 글씨는 재미있는 책들 가운데서 더 재미있게 읽은 책 열네 권.

  짓궂은 분이 이 가운데서 한 번 더 재미있는 책을 고르라면? 읽은 시간 순서대로:


​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뱅크하임 남작의 귀환>

  장바티스트 앙드레아, <그녀를 지키다>

  제럴드 머네인, <소중한 저주>

  딩옌, <설산의 사랑>

  아서 밀러,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



​  딩옌. 중국 티베트족 자치지구 출신의 젊은 회족 작가. 이이를 알게 된 것이 `25년의 수확 가운데 하나일 정도로 즐겁게 읽었다. 다음 주 목요일, 1월 8일에 독후감 업로드할 예정이다.

  크러스너호르커이와 앙드레아의 <뱅크하임...>, <그녀를 지키다>가 작년 최고작 자리를 놓고 쌍벽을 겨루고, 밀러의 희곡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은 역시 명성에 어울렸다. 머네인의 <소중한 저주>는 독자에 따라 호오가 심할 듯한데, 완전 내 체질. 난 뻑! 갔다.

  우리나라 소설로 말하자면 나도 연식이 좀 있어서 그런지 전상국의 마지막 소설집 <굿>을 따라올 요즘 작가를 찾을 수 없었으며, 시집은 딱 떠오르는 게 없는데 이 가운데 강기원의 엽기발랄한 <바다로 가득한 책>을 고르겠다. 물론 좋은 시집도 몇 권 있다. 이 가운데 그렇다는 거지 뭐.

  순전히 "읽는 재미"만 따지자면 역시 존 업다이크의 토끼 시리즈가 제일 윗길이었다. 좋잖아? 적당하게 야하고.  차분하게 마음에 들었던 책은 장웨이의 <흥분이란 무엇인가>였다. 내돈내산 한 딱 한 권의 책이기도 하다.

  말이 길어 좋을 거 없다. 250여 권, 전부 작가들이 심혈을 기울여 쓰고, 대다수의 역자, 대다수의 편집자가 눈을 뒤집어 쓰고 번역하고 편집한 결과물이다. 물론 안 그런 인간도 몇 있지만 누구라고 굳이 밝힐 필요는 없다.


​  푸르죽죽한 글자로 쓴 책은 나하고 영 맞지 않았던 불운한 책. 후지다는 뜻 아니니까 괜히 내가 칠한 글자 색깔 때문에 읽기를 주저하실 필요 없다. 그저 나하고 맞지 않다는 것일 뿐. 예를 들어 슈미트가 쓴 <브로츠와프의 쥐들>은 열광하는 독자도 많다. <멜랑콜리아>를 쓴 커르터레스쿠는 매해 노벨문학상 후보자이기도 하다. 그러니 틀림없이 독자로의 내 소양은 그리 믿을 만하지 못하다.

  뒤라스가 쓴 <동네 공원>은 번역체가 마땅하지 못해 걍 푸르죽죽하게 색칠했다. 사로트의 <항성>도 마찬가지이기는 한데 <동네 공원>이 더 심했다. 지시대명사 "그"의 남발에 콱 질려 버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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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6-01-03 17: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인간 아니고 책신령님이십니다.
올려주신 목록 사진 일단 (냉큼) 저장했고요,
신령님 새해에 10만쪽 도전 해 보세요?!!

Falstaff 2026-01-03 17:13   좋아요 1 | URL
에휴 신령은요 뭘. ㅎㅎㅎ 10만쪽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글쎄 제가 숫자는 좀 안다니까요. ㅋㅋㅋ
올해 건강하세요, 그게 최곱니다!!!

페넬로페 2026-01-03 18: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우,
이런걸 두고 넘사벽이라고 하나요.
책신령, 책먹는 여우, 독서도사,
그리고 인간 아닌 AI?
어떻게 이렇게 집중력을 가질 수 있나요?
비결 공유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올해도 즐거운 독서하시고
책에 대한 감상 기대하겠습니다.

Falstaff 2026-01-03 18:18   좋아요 2 | URL
에휴, 아니라니까요. 걍 남는 시간이 하도 많아서리... ㅋㅋㅋ

햇살과함께 2026-01-03 18: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기세면 1일 1권 가능하시겠습니다! 대단하십니다!

Falstaff 2026-01-03 18:53   좋아요 0 | URL
그건, 단언컨대 불가능합니다. ㅎㅎㅎ

그레이스 2026-01-03 2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십니다.!

Falstaff 2026-01-04 03:20   좋아요 1 | URL
에이, 뭘요. 그저 책만 읽은 겁니다. ㅎㅎ

잠자냥 2026-01-03 2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녀를 지키다> 저는 앍다 말았는데 다시 집아들어보겠습니다!

포스트잇 2026-01-03 23:21   좋아요 0 | URL
저두요... 중도 하차했어요.... 저는 다시 잡을 것 같지 않네요!

Falstaff 2026-01-04 03:21   좋아요 0 | URL
크러스너호르커이의 노벨상이냐, 앙드레아의 공쿠르상이냐 비교하는 것도 괜찮았답니다.

포스트잇 2026-01-03 2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폴스타프님이 몇분이나 계신건가? 한분이 어찌...
책만 읽는것도 아니고 긴 페이퍼도 쓰시고... 신기합니다!

Falstaff 2026-01-04 03:22   좋아요 0 | URL
걍 읽고 쓰고, 먹고 마시고, 자고.... 딱 이것들만 하고 살면 됩니다. ㅋㅋㅋ

2026-01-03 2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1-04 0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26-01-04 0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250권이요!!! 미친 기록입니다! 목록 공유 감사합니다. 폴스타프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Falstaff 2026-01-04 03:23   좋아요 1 | URL
독서괭님도 좋은 일만 생기기 바랍니다. 건강하세요!

자목련 2026-01-04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와, 와, 정말 대단한 기록장입니다. 이 많은 책 가운데 김지연의 <새해 연습>이 붉은 색이라 기분이 매우 좋습니다. 단 한 권인데, ㅋㅋㅋ

Falstaff 2026-01-05 03:58   좋아요 0 | URL
<새해연습> 참 깔끔하니 좋았습니다. ^^

딸기홀릭 2026-01-04 1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이게 가능한가요?
대단하세요 그리고 부럽네요

Falstaff 2026-01-05 03:59   좋아요 0 | URL
아이구, 제가 있는 거라고는 시간밖에 없답니다. ㅎㅎㅎ

잠자냥 2026-01-05 1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악녀서> 초록색이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그거 안 읽을 거 같더라고요...ㅋㅋㅋㅋㅋㅋㅋ

<오래된 빛>하고 <여인과 군상>,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이 저랑 겹쳐서 더 기쁩니다요.
(<겨울 여행>도 제 상반기 좋았던 책 10에 있었고요... ㅎㅎ)

Falstaff 2026-01-05 15:18   좋아요 0 | URL
아이구.... 악녀서는 내 입장에서 노답이었습죠.
ㅎㅎㅎ 넵. 특히 <다리에서...>를 결국 읽은 건 자냥 님 덕분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얄리얄리 2026-01-05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술은 도대체 언제 드시는 겁니꽈아..?
새해에도 건강+즐독하시고, 책소개 잘 부탁드립니다!!

Falstaff 2026-01-05 15:20   좋아요 0 | URL
옙. 지금처럼 막 술 마시기를 끝냈을 때, 아직 본격적인 취기가 돌지 않을 때 주로 이 시간에 댓글을 답니다. ㅋㅋㅋ
얄리 님도 늘 건강하세요. 그게 최곱니다!
 
귀가 서럽다 창비시선 311
이대흠 지음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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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년에 전라도 장흥에서 나서 서울예대와 조선대 문창과를 졸업한 시인. 이 시집이 나온 2010년에는 “시힘” 동인으로 활동했다는데, 시만 써서 먹고 사는 전업시인인지, 시만 써서 살림 살기가 팍팍해 다른 직장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긴 독자가 시인의 먹고사니즘까지 굳이 알 필요는 없지. 그래도 간혹 시집을 읽다 보면 궁금할 때가 있긴 있다.

  (독후감 여기서 잠깐 스톱. 삼겹살에 쐬주 한 병.)

  소설이나 희곡을 읽고 난 다음 독후감을 쓸 때는 가끔 취중 감상을 끼적일 때가 있다. 근데 시의 경우는 아니다. 시를 인용할 경우에 시인이 의도적으로 띄어쓰기나 철자법을 맞지 않게 쓴 것까지 그대로 옮겨야 시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를 갖추는 것이라 여겨서 혈중 알코올 농도에 민감한 편이다. 지금? 술 깼다. 아니면 깼다고 생각한다.

  며칠 전에 읽은 시집이 마땅하지 않아 다른 시집을 읽고 싶어서 골랐다. 근데 세상 일이란. 이 시집을 읽고 또 며칠 안 되어 희망도서 신청한 다른 시집이 도착했다고 얼른 와서 찾아가라는 연락이 왔다. 내리 세 권의 시집을 읽게 됐다. 뭐 살다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거다. 재미있군.


  이대흠. 천생 전라도 사람. 전라도 사투리는 참 듣기 좋다. 특히 남도의 사투리는 된소리가 별로 없고 말의 높낮이와 장단이 세상에 그렇게 부드러울 수 없다. 그래 관심이 많았는데, 하이고, 이대흠의 남도 사투리는 극에 달해 중부지방 사람치고 그나마 제법 알아듣는다고 자부하는 나도 헤맬 수밖에 없었다. 우짜? 한 번 구경해보시려나?


  니가 작년 가슬에 싱게놓고 간 국화도 이상 커부렀다 깽벤 밭에는 감재랑 콩을 싱겠는디 아까 낮에는 아그들 데꼬 가서 밭을 맸다 날이 정상나게 더와서 아그들은 풀 조깐 매고 나서 뫼욕을 하드라 아그들 뫼욕한 거 보고 이씀서 오매 우리 큰악으는 더운디서 엄마나 고상할끄나 생각허닝께 눈물이 나드라 모쪼록 어그는 암상토 안항께 니 몸 한나 건사 잘하기 바란다  (<오래된 편지> 부분. p.48~49)


  엄마가 보일러공으로 싱가폴에 일하러 간 큰형한테 쓴 편지, 엄마는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해 어깨 너머로 글을 깨쳤지만 혼자 편지를 쓸 정도는 아니라서 어린 시인한테 대필을 시켰다. 큰형이 덥디 더운 싱가폴에서 번 돈으로 겨우 중학교에 다니던 내가 엄마의 구술을 받아 형한테 쓴 편지가 위와 같다. 겨우 중학교 올라간 천둥벌거숭이가 그저 편지만 써줄 수 있겠어? 기어이 말미에 자기 이야기도 했을 수밖에. 이렇게.


  큰성 나 대흠인디, 엄니 시방 울고 있소. 큰성 이약만 나오먼 눈물부텀 흘린당께. 모쪼록 몸 성히 잘 지내시고, 나올 때게 샤프펜슬 꼭 잊지 마씨요이잉.  (같은 시. p.49)


  앞뒤 가리지 않고 말하자면 재미있다. 앞뒤 가리고 이야기하자면 사투리로 무장한 것처럼 보여 좀 거시기하다. 하긴 그것도 시인 자신의 자산이라고 할 수 있으니 독자가 뭐라고 할 시비거리는 아닐 터. 시인 마음대로 쓰면 되리라.

  이대흠이 1967년생.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엉터리 자료에 보면 68년생이라고 하는 것도 있는데, 한참 경제발전 도상에 있던 60년대에 1년 차이가 만만하지 않았을까? 우리나라가 한참 발전하고 있던 60년대라고 하지만 아직 부의 혜택을 받지 못한 세대. 그래서 전편에 걸쳐 조금은 궁상스런 장면이 출몰한다. 궁상스럽지만 돌봄과 배려와 추억이 있다. 그게 과해서 좀 질리기는 하지만. 이 시집에서도 2부는 어머니, 3부는 아버지와 주변 인물들. 나 한테 문제가 좀 있는 모양이다. 시인, 작가들이 자기 주변, 특히 부모와 부근 사람들을 소재로 택하는 걸 유별나게 좋아하지 않는다. 왜 그렇지?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그런가? 뭐 그럴 수도 있다.



  애월(涯月)에서



  당신의 발길이 끊어지고부터 달의 빛나지 않는 부분을 오래 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무른 마음은 초름한 꽃만 보아도 시려옵니다 마음 그림자 같은 달의 표면에는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발자국이 있을까요


  파도는 제 몸의 마려움을 밀어내며 먼 곳에서 옵니다 항구에는 지친 배들이 서로의 몸을 빌려 울어댑니다 살 그리운 몸은 불 닿은 노래기처럼 안으로만 파고듭니다


  아무리 날카로운 불빛도 물에 발을 들여놓으면 초가집 모서리처럼 순해집니다 먼 곳에서 온 달빛이 물을 만나 문자가 됩니다 가장 깊이 기록되는 달의 문장을 어둠에 눅은 나는 읽을 수 없습니다


  달의 난간에 마음을 두고 오늘도 마음 밖을 다니는 발걸음만 분주합니다  (전문.  p.14)



  애월涯月의 涯는 물가, 물의 가장자리 또는 무엇의 끝자락. 그러니까 애월이라면 달의 끝자락, 달의 가장자리이면서 제주도 북서쪽 읍의 지명이다. 파도 운운하는 걸로 보아 틀림없이 시인은 제주도 갔다. 거기서 쓴 시다. 그러면서 저 까마득한 단애, 절벽 또는 한 경계, 달이라는 시의 난간을 생각했겠지. 근데 시를 존대로 쓰니까 좀 간질간질한 거 같지 않나? 그리움의 발자국, 그리운 몸, 날카로운 불빛. 어딘지 좀 촌스럽고 이미 다 써먹어 좀이 쓴 옷을 입은 거 같기도 하다. 뭐 그래서 좋다면 그걸로 다행이지만 나 읽기엔 조금 거슬린다. 그래도 좀 더 읽어 보기로 한다.



  시간의 뿌리



  마루 끝을 햇살이 콕콕콕 쪼아댑니다 백년이 넘어서인지 햇살의 부리가 닿는 곳은 둥글어져 있습니다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나서 흘린 것들을 걸레로 닦아냅니다 벌어진 나무 사이로 들어간 밥알 몇 개가 빠져나오지 않습니다 꼬챙이로 틈을 후비다보니 묵은 때들이 길게 빠져나옵니다 검게 뻗은 시간의 뿌리입니다


  오래된 것들은 지나온 세월만큼 얼굴이 검습니다 하찮은 것도 쉬이 흘리지 못하고 받아들인 덕분입니다 고목나무 뿌리가 저렇게 검은 것도 돌이 되어 가라앉는 누군가의 속울음에 귀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전문. p.20)



  아이가 흘린 밥알이 마루 널판 사이로 쏙 들어갔다. 그걸 빼내려 꼬챙이, 이쑤시개였을까, 하여간 뾰족한 걸로 후볐는데 나오지는 않고 오히려 널 사이에 콱 박혀버리고 말았다. 그게 세월이 흐르면 새까만 흔적으로 남으리라. 밥알은 시인의 시각에서 고목나무 뿌리로 나이를 먹었다. 세월이 흐를 동안 나이를 먹으며 누군가의 설움도 다 들어주었겠지. 하, 써놓고 보니까 꿈보다 해몽이다. 오래된 것은 검다. 여기서 ‘검다’는 형용사는 보기에 ‘추하다’와 비슷한 말로 읽힌다. 몰라, 몰라. 내가 그렇게 읽힌다는 말이다. 그리 보기에 흉한 검은 것이 타인의 속울음을 들어주었단다. 정말? 이 시집을 냈을 때 시인은 마흔 셋. 벌써 고목나무 뿌리를, 흠.

  근데 나는 역시 먹는 이야기가 제일 좋다. 좀 길지만 한 번 같이 읽어보실 텨?



  비빔밥



  비빔밥엔 잡다한 것이 들어가야 한다 싱건지나 묵은 김치도 좋고 숙주노물이나 콩노물도 좋다 나몰이나 남새 노무새도 좋고 실가리나 씨래기 시락국 건덕지도 좋다 먹다 남은 찌개 찌끄래기나 달걀을 넣어도 좋지만 빼먹지 않아야 할 것은 고추장이다 더러 막걸리를 넣거나 된장국을 홍창하게 넣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취향일 뿐 그렇다고 국밥이 되는 것은 아니다

  비빔밥엔 가지가지 반찬에 참기름과 고추장이 들어가야 하지만 정작 비빈 밥이 비빔밥이 되기 위해서는 풋것이 필요하다 손으로 버성버성 자른 배추잎이나 무잎 혹은 상추잎이 들어가야 비빔밥답게 된다 다 된 반찬이 아니라 밥과 어우러지며 익어갈 것들이 있어야 한다 묵은 것 새것 눅은 것 언 것 삭은 것 그렇게 오랜 세월이 함께 해야 한다

  하지만 재료만 늘어놓는다고 비빔밥이 되는 것은 아니다

  비빔밥을 만들기 위해서는 요령이 필요하다 비빈다는 말은 으깬다는 것이 아니다 비빌 때에는 누르거나 짓이겨서는 안 된다 밥알의 형태가 으스러지지 않도록 살살 들어주듯이 달래야 한다 어느 하나 다치지 않게 슬슬 들어올려 떠받들어야 한다


  손과 손을 맞대고 비비듯 입술과 입술을 대고 속삭이듯 그렇게

  몸을 맞대고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있게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우리 이미 분리할 수 없게 그렇게

  그렇게 나는 너를 배고

  너는 나를 밴 상태라야 비빔밥이라고 할 수 있다


  우는 사람아 비빔밥을 먹을래?

  내가 너에게 들고 싶다   (전문. p.24~25)



  잘 나가다가 말았다. 1연 4행까지 가면, 거 비빔밥 한 번 비비기 위해 도를 닦아야 할 지경에 이른다. 비빔밥 한 술 뜨려면 목욕재개하고 2박3일 면벽참선 한 다음, 대접에 담긴 비빔밥에 재배한 연후에야 한 술 뜰 수 있을 정도이다. 이이가 남도 장흥 사람이라고 했지? 북도 남원에서는 깨스럽게 젓가락으로 비빔밥 후비지 말고 숟가락으로 썩썩 비벼 팍팍 떠 먹는 게 장땡이라고 하던 걸? 내가 제일 우습게 아는 것 가운데 하나가 다도茶道라고 하는 노동. 차 한 잔 마시자고 뭐 어쩌고 저쩌고. 그냥 덖은 차 물에 불려 후루룩 마시면 입술에 헤르페스라도 돋나? 혓바늘은 안 돋고? 같은 의미에서 비빔밥 한 그릇 먹자고 말이 많다. 그게 첫번째 불만이고 두번째 불만은, 먹는 이야기면 먹는 이야기로 끝내지 뭘 손을 맞대고 입술을 맞대는 것도 모자라 네가 나를 배고, 내가 너를 배? ‘배다’는 ‘임신하다’는 말이지? 하다가 막장엔 내가 너 한테 들고 싶단다. 무슨 뜻인고 하니, 한 번 하고 싶다는 말 아냐? 거참 고얀 지고.

  흠. 그러니까 이런 시도 나오는 것이었군.



  황영감의 말뚝론



  생땅은 말이여 말하자면 처녀진디

  그라고 쾅쾅 친다고 박히는 것이 아니여

  힘대로 망치질하다간 되레 땅이 썽질 내부러

  박혀도 금방 흐물흐물해져불제

  박은 듯 안 박은 듯 망치를 살살 다뤄사제

  실실 문지르대끼 땅을 달래감서 박어사

  땅이 몸을 내주제

  그라다 인자 조깐 들어갔다 싶으면

  그때부텀 기운대로 치는 거야 아먼

  그라고 박힌 말뚝이라사 썩을 때까장 안 뽑히제

  그래사 말뚝이제  (전문. p.90)



  차라리 이렇게 내놓고 노래하니 오히려 편하다.

  아이쿠. 할 얘기가 아직 잔뜩인데 독후감이 너무 길어진다. 아쉽지만 여기서 그만하자. 써놓고 보니 안 좋은 얘기만 좍 쓴 거 같아 나도 유감이다. 이대흠. 이 양반 괜찮다. 괜히 아마추어 독자가 쓴 몇 마디 가지고 이 시인을 단정하지 마시기 바란다. 사투리가 많고, 부모 이야기가 너무 많아 읽기 좋지 않았지만 그랬다는 것이지, 그래서 불편하고 심사 삐딱해질 정도는 아니었다. 괜히 시인한테 미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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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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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년 첫날 업로드할 독후감. 신중하게 고른 책은 아니고 모디아니와 테드 창 중에서 연말과 연초에 어울릴 작품을 고른 것이다. 읽고 난 다음에 순서를 정하지 않았다. 그저 모디아니의 작품이 새해 아침에 읽을 만하지 않을 것이라 짐작해서 모디아니를 먼저 읽었을 뿐. 좋은 선택이었다.

  소위 “양력 설”이라도 떡국 한 그릇씩 배불리 하셨기 바란다. 한 살 더 자시건 말건 그건 본인들이 알아서 선택하시고. 나는 꾸역꾸역 한 살 더 먹기로 했다.


  테드 창. 나는 ‘테드 창’히면 영화 <극한직업>에서 오정세가 분장한 주둥이만 쉴 새 없이 조잘거리는 불쌍한 2번 악당이 먼저 떠오른다. 그 다음에야 중국 혈통의 미국 SF 작가. 이름이야 많이 들어봤는데 SF를 그리 좋아하지 않아 읽기를 머뭇거리고 있었다. 거의 비밀댓글로 말씀을 주시는 서재 친구께서 테드 창을 권하시기에 마음에 두고 있었다가 개가실에서 보니 문제가 있었다. 분량이 녹록하지 않은 건 나 한테 별로 문제가 되지 않건만, 얼마나 많은 독자들의 손때가 묻었는지 하나같이 책이 너덜너덜해서 도무지 지문을 보태기 싫더라는 점.

  흠. 손때가 이리 많이 묻은 걸 보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열혈독자를 지닌 작가군.

  그렇게 날만 갔다.

  하루는 다른 책 검색하다가, 이웃 도서관 목록을 뒤적거리다 발견한 책이 《당신 인생의 이야기》. 장편소설인 줄 알았다. 그리고 한 가지 반짝 떠오른 생각. 이웃 도서관은 주변에 거주단지가 별로 없어서 책 상태가 좋지 않을까? 한 번 빌려보지 뭐, 싶어서 즉각 상호대차 서비스 신청해 받아 읽었다. 빌린 김에 함께 빌린 책이 모디아노와 내일 업로드 할 이대흠의 시집.


  테드 창, 강봉남姜峯楠 씨는 1967년 뉴욕에서 스토니 브룩 대학의 기계공학 교수인 아버지와 사서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화인민공화국 개국 당시 대륙에서 타이완 섬으로 간 중국인, 소위 ‘본토인’ 출신인 강씨 집안의 일원이다.

  공학 교수 아버지한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강봉남, 테드 창은 물리학을 공부하려 했다가 아이비리그 가운데 한 곳인 브라운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이랄까 과학을 선택해 졸업했다. 동아시아 출신 학생답게 공부도 제법 했을 거 같다. 대학 다닐 때부터 SF 소설에 관심을 두고 습작을 했지만 관심을 받지 못하다가 《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첫번째 작품이기도 한 <바빌론의 탑>으로 네뷸라 상Nebula Award를 받으면서 SF 소설의 기린아로 떠올랐다고 위키피디아에 적혀있다. 네뷸라 상은 미국에서 출판한 최고의 SF 및 판타지 작품에게 수여하는 높은 권위의 문학상이라고.

  이후 써서 출판하는 책 마다 뉴욕과 서울의 종이값이 천정을 뚫게 했던 모양이다. 그의 작품 목록을 보면 생각과 달리 전부 중∙단편이다. 그것도 몰랐다. 도서관에 있는 이이의 책들마다 만만치 않은 두께를 가졌던데 그게 모두 독자들 손때가 묻어 불은 건가? 그것 참.


  중단편 여덟 편이 실려 있는 작품집. 이 가운데 <인류 과학의 진화>는 본문이 겨우 네 페이지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휙 읽어버리면 될 손바닥 소설 같지? 천만의 말씀. 나도 그렇거니 하고 읽었다가 혼났다. 이 작품이라고 하기에 민망한 분량의 단편소설은 2000년 과학 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해 로커스 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초인간적인 지성을 갖고 있는 ‘메타인류’의 탄생.  이후에도 인류 문화가 미래에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 지 여부가 관심이다. 컴퓨터와 연결해 탄생한 초지성은 디지털 신경 전이로 현상을 분석해 전달, 보관 기타 등등의 작업을 할 터인데, 문학 특히 시의 정서와 음악, 미술, 공연 등 감성의 호소는 그런 상황에서도 존재할 수 있을까? 세계적인 학술지 <네이처>의 지면을 차지했던 작품인지라 결코 쉽지 않다. 비록 네 페이지 분량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이렇게 적은 분량에 세계 곳곳에서 읽을 과학적 재능들을 만족시킬 내용을 담아야 하기 때문에 당연히 있으나 마나 한 일체의 서술은 구경조차 할 수 없다.

  위에서 말한 <바빌론의 탑>을 읽으며, 이게 나의 첫 테드 창이었는데, 눈이 팽, 돌아갔다. 이랬어? 이런 작가였나? 바빌론의 탑이면 당연히 우리가 알고 있는 바벨탑이다. 인간이 하느님과 더욱 가까이 있고자 하는 욕심으로 만든 거대한 탑. 하느님 생각하시기를, 저 하찮은 것들이 감히 나하고 맞먹으러 드네? 그리하여 한 날을 잡아 당시까지 모든 인류들이, 사실은 모든 유대/무슬림들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언어를 전부 바꾸어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러자 곧바로 바벨탑 건설이 중단된 건 당연하고 얼마 있지 않아 와장창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벨탑 신화. 원래 신들이 하는 일이 다 그렇다. 일단 진흙으로 자신의 모습을 따 인간이라는 종種species를 만들어 놓고 그 다음부터 죽어라 고생시키고, 구박하고, 핍박하고, 질투하고, 서로 싸움 붙이는 등 하여간 못살게 구는 존재.

  그런데 테드 창의 바벨탑을 그렇지 않았다.

  만일 그 탑을 수메르의 평야에 눕혀 놓는다면, 한 끝에서 다른 끄트머리까지 걸어 가려면 족히 이틀이 걸린단다. 현대인들의 경우 하루에 한 30km 걸어갈 수 있으려나? 40km? 옛날에 걸어서 문경새재 넘어 한양에 과거 보러 갈 당시에 하루 거리를 백리 쳤으니까 40km라고 하자. 그러면 이틀이라 했으니 꼬박 80km. 그 거리를 똑바로 세우면 바벨탑의 높이가 나온다. 8만 미터. 에베레스트 산을 아홉 개 쌓은 높이다. 애초 사람이 살 수 없는 고도. 물론 픽션이니까 그러려니 해야지 뭐. 평지로 생각하고 걸으면 이틀, 그걸 수직으로 세워서 걸어 올라가려면? 한달 반. 근데 그냥 올라가나? 탑을 더 높이 올리기 위하여 목재와 벽돌을 구울 흙을 수레에 싣고 올라야 하니 넉 달이 걸린단다.

  탑이 하도 높아서 저 8만 미터 상공에서 일하던 벽돌공이 떨어져 죽은 이만 해도 한두 명이 아니겠다. 사람들은 이골이 나 그저 어떤 놈이 떨어져 죽어도 그런가보다, 산재보험 나올 터이니 처자식 먹고 사는 데는 문제없겠지, 이렇게 지나가는데, 벽돌 한 장이 떨어지면 눈물 콧물 바람을 했단다. 떨어진 벽돌을 만드는 흙이 여기까지 올라오려면 또다시 넉 달을 사람이 끌고 와야 하니까. 이게 히브리 전설에 나오는 모양이다. 책 뒤편에 “창작 노트”라고 태드 창, 강봉남 씨가 직접 써서 말했다.

  여기까지는 탑을 꼭대기까지 짓는 일. 하여간 그렇게 해서 탑이 하늘과 맞닿았다고 치자.


  인간이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가보니, 있으라고 하는 하느님은 보이지 않고 마치 화강암인 듯한 돌 천장이 꽉 막고 있는 거다. 인간은 긴장한다. 일찍이 저 노아의 시절을 겪지 않았느냐는 말이지. 당시 폭포 같은 비가 무려 40일간 “하늘에서 쏟아져” 인류의 거의 전부를, 인류 좋아하네, 유대인의 거의 전부를 멸망케 하지 않았느냐는 기억 또는 이야기. 이제 흙으로 빚은 인간이 하늘에 도달했건만, 하늘의 입구를 돌로 막은 건 하느님이 만나지 않겠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그러면 대족장의 꿈에라도 나와 허연 수염을 휘날리며 “나는 너희들을 만날 의향이 없도다.”라고 알려주든지 말이야. 아무런 언질도 하지 않고 이번에도 노아 시절처럼 꽈광 멸망의 길을 걷게 하고 나중에 “그때 너희가 오만했느니라.” 한 마디 하면 인간은 너무 억울한 거다. 혹시 이 돌 천장을 깨고 하늘에 닿으면 뚫린 구멍을 통해 또다시 거대한 물더미가 쏟아져 제2의 홍수를 만나는 것 아닐까? 인간의 고뇌는 깊어간다.

  그러나 여기서 말 수는 없는 법. 바빌론 사람들은 지금의 이란 땅에 있던 도시왕국 엘람에서 태어난 석공 힐라룸을 초빙한다. 동시에 석공 기술에 관한 한 피라미드 건조를 통해 세상 어디보다 탁월한 노하우를 지닌 이집트 기술자도 부른다. 그들 모두 바빌론의 탑 꼭대기에 올라 불을 피우고, 별의 별 짓을 해서 드디어 하늘에 이르는 돌의 터널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하니, 에그머니, 아니나 다를까, 물, 불이 없는 석굴의 암흑 속에서 온통 물이 쏟아지기 시작해, 주인공 힐라룸은 물 속에서 급류에 휘말려 부상도 당하고 꿀꺽꿀꺽 배고플 수 없을 정도로 물도 마시고 어디엔가 도착한다. 이곳이 어디일까? 그 고생을 다 해서 드디어 하느님 전에 끓을 수 있었을까?

  안 가르져드린다.

  인생은 쉼없이 뫼비우스의 띠에서 맴을 돌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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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6-01-01 1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봉남 씨라고 해서 한궄 사람인 줄 알았더니 중국계였군요. 요시절에도 촌시런 이름 많았죠. 요즘엔 이름도 세련되게 잘 쓰더만 그래도 아주 드물게 고전스런 이름을 쓰기도 하더군요. 이 책 저도 SF 자신없어 멀리 보기만했는데 저도 언젠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Falstaff 2026-01-01 13:03   좋아요 1 | URL
중국인들 이름이라서 촌시러운지 아닌지 잘 모르겠구먼요. ㅋㅋㅋ
작년 마지막으로 읽은 책의 작가 왕웨이롄....의 웨이롄은 ˝윌리엄˝이라더군요. 타이완 사람들이 영어 이름을 쓰는 건 뭐 그렇다 쳐도 중국인 이름이 윌리엄이라... 인구가 많으니 별의 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얄리얄리 2026-01-01 2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바빌론의 탑>이 첫번째 테드 창이었습니다. 그땐 뒷머리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는데, 다시 보게 되면 어떤 느낌이 들지 궁금하네요.

Falstaff 2026-01-02 05:51   좋아요 0 | URL
아오, 저도 <바빌론의 탑>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여태 테드 창 읽기를 괜히 주저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