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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출근, 산책 : 어두움과 비 ㅣ 오늘의 젊은 작가 8
김엄지 지음 / 민음사 / 2015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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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엄지의 소설집 《미래를 도모하는…》을 흥미롭게 읽어 주저 않고 이이의 장편소설(이라고 주장하지만 장편? 후후훗 웃기네…)을 읽었다. 쇼핑하듯 개가실 훑어보다 눈에 뜨인 것이 아니라 아예 김엄지를 향해 직진해서 딱 두 권 있는 책 가운데 하나를 고른 것. 다른 하나는 전에 읽은 소설집. 2015년에 찍어 벌써 책 나오고 10년이 됐건만 손때가 묻지 않았다. 도시의 다른 도서관 목록을 검색해도 레퍼토리가 그리 많지 않다. 이 도시에서는 김엄지가 별로 인기가 없는 모양이지? 흠.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E의 일상을 그렸다. E는 생일기념으로 치과에 가서 스케일링을 받았다. 앞 장면 읽을 때는 젊은 의사 같았는데 뒤에 다시 나오면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같은 느낌이 드는 의사의 말에 의하면, 간호사가 아니라 의사가 직접 스케일링을 해주었다는 것도 신기하기는 한데, 4번과 12번에 충치가 생겼고, 앞니는 금이 갔으며, 사랑니가 가까운 미래에 말썽을 부릴 것 같단다. 의사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치료하면 괜찮다면서. 당연하지. 근데 돈이 없다. 의사의 의견을 좇아 이를 고치려면 반년치 연봉이 필요하다. E의 통장엔 잔고가 별로, 거의 없다.
저축한 돈이 있었다면 결혼할 수 있었을까?
결혼에 특별한 동경이 없는 E는 치과를 나오면서 생각했다. 치과 옆에 나란히 내과, 피부과, 정형외과 그리고 이비인후과가 붙어 있는 건물. 결혼을 동경하지 않으니 그동안 저축하지 않은 것에 대해 크게 후회하지도 않는다. 곧 크리스마스. 여자를 만날 거다. 작가가 여성이라 E도 여성인 줄 알았다. 이때 까지는. 근데 남자다. 일주일에 두세 번 만나는 여자가 있었다.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없거나 있기는 있어도 애매하다는 뜻이라고 독자는 방점 박았다.
백화점에 가서 여자에게 줄 선물로 장갑을 샀다. 이때까지는 눈이 오지 않았다. 집에 우산이 없지만 눈이 오지 않았으니까 우산도 사지 않았다. 여자를 만날 희망이 있으니 선물을 산 거고, 희망이 있으니까 눈 또는 비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우산도 살 필요가 없었다. 이거 주목해야겠는걸? 쫌 웃기잖아?
아니나 다를까, 여자한테 여덟 번 전화하고 다섯 통의 메시지를 남겼지만 전화도 받지 않고 문자도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다음날 여자의 휴대폰은 아예 꺼져 있었다. 이후 책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여자의 휴대폰은 결코 열리지 않는다. 희망이 꺼지니까 눈이 오기 시작하고, 곧이어 비로 바뀌고, 눈 또는 비가 오니까 우산을 사야 한다. 경호원들이 쓰는 검정색의 튼튼한 우산. 이후 작품이 끝날 때까지 계속 하늘은 흐리고,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약하게 그러나 끊임없이 눈 또는 비가 내린다. 어디선가 본 장면이다. 작품 끝날 때까지 우중충하게 비 오는 거. 근데 그게 어떤 작품이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까 참 책임 없이 쓴 거 같다. 내가 독자면 다야? 어떤 작품인지 특정하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지껄이게? 맞다. 반성하겠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씨.
E도 지인들 한테 연말연시 선물을 받았다. 책, 목도리 그리고 와인. 왜 포도주라면 될 걸 꼭 와인이라고 하지? 맞아, 나도 와인이라고 하는군. 하여간 와인은 마트에서 산 고등어를 구워 한 방에 다 마셔버렸다. E가 조금 술이 과하다. 센 편도 아닌데 자주 마신다. 술이 잦으면 사고를 면할 수 없다. 자동차 운전하면서 완전 무사고가 불가능한 것처럼. 후반부에 가면 E도 바닷가에 가 혼자 술 마시고 비 겁나게 오는 해변에 앉아 있다가 자살 여행 온 사람으로 오인받는 일도 겪는다. 그건 나중 일이고 E도 지인들 한테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이것저것 고르기 귀찮아 전부 양말로 통일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죽어도 소원은 통일.
E 한테 선물 받은 사람들 가운데 낚시 좋아하고 낚은 생선을 가져와 직접 회를 떠 직원에게 먹으라 나눠주는 상사 백도 있고, 동료 a, b, c도 있다. 백은 자기가 뜬 회는 자신이 먹지 않지만 회 뜨는 실력 하나는 죽여준다. a는 회를 먹지 않아 백의 눈 밖에 났다. E와 a, b, c는 12월 31일 출근해서 오늘 계획에 대해 말한다. a는 여자하고 바닷가에 가겠다 하고, b는 친구들과 술자리 약속이 있단다. c는 고향에 간다는데 E는 뭘 할까 생각하다가 산에 올라 일출을 보겠다고 마음먹는다. 계획이 있으니 눈도 그쳤다. 아닌가? 아직 눈이 오지 않았나 보다. E는 퇴근하기 전에 렌터카 업체에 전화해 경차를 빌렸다. 그걸 타고 산 밑에까지 가려고. 퇴근하다가 마트에 들러 헤드 랜턴, 아이젠, 목장갑, 초콜릿과 커피믹스를 샀다. 집에 가서 다음날, 그러니까 새해 첫날 새벽 세시 반에 알람을 맞추어 놓고 잤다.
세시 반에 알람이 울리자 단호하게 침대에서 일어난 E. 상의로 반팔, 셔츠, 카디건과 파카를 입었다. 하의엔 타이즈와 코르텐 바지. 코르텐 바지는 면으로 만들어 눈 쌓인 겨울엔 쥐약이다. 밤색 양말 위에 검정색 양말을 겹쳐 입고 운동화를 신었다. 운동화도 가지가지로 겨울산엔 쥐약이다. 김엄지는 그런 건 몰랐나보다. 산에 갔다. 산을 오르는 한 여자의 뒷모습에 눈이 갔다. 단화를 신고 있어서 발목이 드러나 보였다. 흠. 그리 춥지는 않았나 보다. (여기서 웃어줘야 하는데…)
우리의 찌질한 주인공 E는 산을 오르다 수백명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정상까지 가지 못하고 중턱에서 헉헉, 바위에 기대 앉아 있다가 조금 아래 천막 치고 장사하는 남자한테 만원 주고 컵라면 하나를 사먹고 내려왔다. 컵라면이 오천원이다. 만원짜리를 내니까 잔돈 줄 생각을 하지 않아 그냥 내려왔다. 천막 가게 안에 열댓 명이 있었는데 정상까지 오르지 못한 인간은 E 한 명인 거 같다. 산을 내려오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맞다. 이제부터 비가 내린다. 끝날 때까지. 그리고 집에 가는 차 안에서 E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왜 눈물이 흐르는지 이유는? 모호하다. 상황이 모호한 게 아니라 정말로 김엄지가 그렇게 썼다. 모호하다고.
모호하긴 뭐. 여자한테 전화해도 불통이지, 동료 직원들은 전부 연말 계획이 있는데 자기는 없었지, 산에 올라 새해 첫날 일출 보는 것도 날 샜지, 비는 오지. 우중충 itself 아냐? 그러니 비는 오고, 눈엔 눈물이 흐르지.
독자는 시작부터 알아봤다. E는 앞으로 계속 충치가 있는 4번과 12번 이가 아니라 금간 앞니 때문에 전전긍긍할 것이며, 언젠가 한 번은 자빠져 금이 갔고 전전긍긍한 앞니에 충격을 받을 것임을. 마치 소설 속에 권총이 등장하면 반드시 한 번은 쏘아야 하는 것처럼. 직장 동료 a, b, c와 상사 백에 대한 험담이 끝이 없을 것도. 현재 연락두절이며 전엔 일주일에 한두 번은 만나던 여자에 관한 갈증도 계속될 것. 당연히 하염없이 비가 주룩주룩 내릴 것이고, 높은 습기로 인한 부작용까지.
여기에 하나 더. E는 직장 동료 세 명과 함께 퇴근 후 일상처럼 술자리를 갖는데, 특별하게 2차로 포장마차에 간 날, 옆 테이블의 여성 네 명과 합석을 한다. 여기서 한 명을 낚아챈 E는 그날로 여관에 가서 함께 자긴 했지만 말 그대로 그냥 잤다. 틀림없이 키스는 했건만 여자의 혀가 두꺼웠는지 아닌지 기억나지 않고, 섹스를 하려 했다가 E가 하도 주절거리는 바람에 김이 샌 여자는 E한테 등을 돌려 그냥 자버리고 말았다. E의 머리 속에는 돌아누운 여자의 등뼈가 확 박혀 버렸다. 이 등뼈도 책이 끝날 때까지 E의 머리에 삼삼할 것임을 단번에 알아차린다.
이렇게만 얘기해도 김엄지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감이 잡히시지? 뭐 그런 거지. 그렇게 젊음과 시간은 황량하게 가버리는 거지. 중뿔난 거 하나도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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