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서럽다 창비시선 311
이대흠 지음 / 창비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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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년에 전라도 장흥에서 나서 서울예대와 조선대 문창과를 졸업한 시인. 이 시집이 나온 2010년에는 “시힘” 동인으로 활동했다는데, 시만 써서 먹고 사는 전업시인인지, 시만 써서 살림 살기가 팍팍해 다른 직장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긴 독자가 시인의 먹고사니즘까지 굳이 알 필요는 없지. 그래도 간혹 시집을 읽다 보면 궁금할 때가 있긴 있다.

  (독후감 여기서 잠깐 스톱. 삼겹살에 쐬주 한 병.)

  소설이나 희곡을 읽고 난 다음 독후감을 쓸 때는 가끔 취중 감상을 끼적일 때가 있다. 근데 시의 경우는 아니다. 시를 인용할 경우에 시인이 의도적으로 띄어쓰기나 철자법을 맞지 않게 쓴 것까지 그대로 옮겨야 시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를 갖추는 것이라 여겨서 혈중 알코올 농도에 민감한 편이다. 지금? 술 깼다. 아니면 깼다고 생각한다.

  며칠 전에 읽은 시집이 마땅하지 않아 다른 시집을 읽고 싶어서 골랐다. 근데 세상 일이란. 이 시집을 읽고 또 며칠 안 되어 희망도서 신청한 다른 시집이 도착했다고 얼른 와서 찾아가라는 연락이 왔다. 내리 세 권의 시집을 읽게 됐다. 뭐 살다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거다. 재미있군.


  이대흠. 천생 전라도 사람. 전라도 사투리는 참 듣기 좋다. 특히 남도의 사투리는 된소리가 별로 없고 말의 높낮이와 장단이 세상에 그렇게 부드러울 수 없다. 그래 관심이 많았는데, 하이고, 이대흠의 남도 사투리는 극에 달해 중부지방 사람치고 그나마 제법 알아듣는다고 자부하는 나도 헤맬 수밖에 없었다. 우짜? 한 번 구경해보시려나?


  니가 작년 가슬에 싱게놓고 간 국화도 이상 커부렀다 깽벤 밭에는 감재랑 콩을 싱겠는디 아까 낮에는 아그들 데꼬 가서 밭을 맸다 날이 정상나게 더와서 아그들은 풀 조깐 매고 나서 뫼욕을 하드라 아그들 뫼욕한 거 보고 이씀서 오매 우리 큰악으는 더운디서 엄마나 고상할끄나 생각허닝께 눈물이 나드라 모쪼록 어그는 암상토 안항께 니 몸 한나 건사 잘하기 바란다  (<오래된 편지> 부분. p.48~49)


  엄마가 보일러공으로 싱가폴에 일하러 간 큰형한테 쓴 편지, 엄마는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해 어깨 너머로 글을 깨쳤지만 혼자 편지를 쓸 정도는 아니라서 어린 시인한테 대필을 시켰다. 큰형이 덥디 더운 싱가폴에서 번 돈으로 겨우 중학교에 다니던 내가 엄마의 구술을 받아 형한테 쓴 편지가 위와 같다. 겨우 중학교 올라간 천둥벌거숭이가 그저 편지만 써줄 수 있겠어? 기어이 말미에 자기 이야기도 했을 수밖에. 이렇게.


  큰성 나 대흠인디, 엄니 시방 울고 있소. 큰성 이약만 나오먼 눈물부텀 흘린당께. 모쪼록 몸 성히 잘 지내시고, 나올 때게 샤프펜슬 꼭 잊지 마씨요이잉.  (같은 시. p.49)


  앞뒤 가리지 않고 말하자면 재미있다. 앞뒤 가리고 이야기하자면 사투리로 무장한 것처럼 보여 좀 거시기하다. 하긴 그것도 시인 자신의 자산이라고 할 수 있으니 독자가 뭐라고 할 시비거리는 아닐 터. 시인 마음대로 쓰면 되리라.

  이대흠이 1967년생.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엉터리 자료에 보면 68년생이라고 하는 것도 있는데, 한참 경제발전 도상에 있던 60년대에 1년 차이가 만만하지 않았을까? 우리나라가 한참 발전하고 있던 60년대라고 하지만 아직 부의 혜택을 받지 못한 세대. 그래서 전편에 걸쳐 조금은 궁상스런 장면이 출몰한다. 궁상스럽지만 돌봄과 배려와 추억이 있다. 그게 과해서 좀 질리기는 하지만. 이 시집에서도 2부는 어머니, 3부는 아버지와 주변 인물들. 나 한테 문제가 좀 있는 모양이다. 시인, 작가들이 자기 주변, 특히 부모와 부근 사람들을 소재로 택하는 걸 유별나게 좋아하지 않는다. 왜 그렇지?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그런가? 뭐 그럴 수도 있다.



  애월(涯月)에서



  당신의 발길이 끊어지고부터 달의 빛나지 않는 부분을 오래 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무른 마음은 초름한 꽃만 보아도 시려옵니다 마음 그림자 같은 달의 표면에는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발자국이 있을까요


  파도는 제 몸의 마려움을 밀어내며 먼 곳에서 옵니다 항구에는 지친 배들이 서로의 몸을 빌려 울어댑니다 살 그리운 몸은 불 닿은 노래기처럼 안으로만 파고듭니다


  아무리 날카로운 불빛도 물에 발을 들여놓으면 초가집 모서리처럼 순해집니다 먼 곳에서 온 달빛이 물을 만나 문자가 됩니다 가장 깊이 기록되는 달의 문장을 어둠에 눅은 나는 읽을 수 없습니다


  달의 난간에 마음을 두고 오늘도 마음 밖을 다니는 발걸음만 분주합니다  (전문.  p.14)



  애월涯月의 涯는 물가, 물의 가장자리 또는 무엇의 끝자락. 그러니까 애월이라면 달의 끝자락, 달의 가장자리이면서 제주도 북서쪽 읍의 지명이다. 파도 운운하는 걸로 보아 틀림없이 시인은 제주도 갔다. 거기서 쓴 시다. 그러면서 저 까마득한 단애, 절벽 또는 한 경계, 달이라는 시의 난간을 생각했겠지. 근데 시를 존대로 쓰니까 좀 간질간질한 거 같지 않나? 그리움의 발자국, 그리운 몸, 날카로운 불빛. 어딘지 좀 촌스럽고 이미 다 써먹어 좀이 쓴 옷을 입은 거 같기도 하다. 뭐 그래서 좋다면 그걸로 다행이지만 나 읽기엔 조금 거슬린다. 그래도 좀 더 읽어 보기로 한다.



  시간의 뿌리



  마루 끝을 햇살이 콕콕콕 쪼아댑니다 백년이 넘어서인지 햇살의 부리가 닿는 곳은 둥글어져 있습니다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나서 흘린 것들을 걸레로 닦아냅니다 벌어진 나무 사이로 들어간 밥알 몇 개가 빠져나오지 않습니다 꼬챙이로 틈을 후비다보니 묵은 때들이 길게 빠져나옵니다 검게 뻗은 시간의 뿌리입니다


  오래된 것들은 지나온 세월만큼 얼굴이 검습니다 하찮은 것도 쉬이 흘리지 못하고 받아들인 덕분입니다 고목나무 뿌리가 저렇게 검은 것도 돌이 되어 가라앉는 누군가의 속울음에 귀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전문. p.20)



  아이가 흘린 밥알이 마루 널판 사이로 쏙 들어갔다. 그걸 빼내려 꼬챙이, 이쑤시개였을까, 하여간 뾰족한 걸로 후볐는데 나오지는 않고 오히려 널 사이에 콱 박혀버리고 말았다. 그게 세월이 흐르면 새까만 흔적으로 남으리라. 밥알은 시인의 시각에서 고목나무 뿌리로 나이를 먹었다. 세월이 흐를 동안 나이를 먹으며 누군가의 설움도 다 들어주었겠지. 하, 써놓고 보니까 꿈보다 해몽이다. 오래된 것은 검다. 여기서 ‘검다’는 형용사는 보기에 ‘추하다’와 비슷한 말로 읽힌다. 몰라, 몰라. 내가 그렇게 읽힌다는 말이다. 그리 보기에 흉한 검은 것이 타인의 속울음을 들어주었단다. 정말? 이 시집을 냈을 때 시인은 마흔 셋. 벌써 고목나무 뿌리를, 흠.

  근데 나는 역시 먹는 이야기가 제일 좋다. 좀 길지만 한 번 같이 읽어보실 텨?



  비빔밥



  비빔밥엔 잡다한 것이 들어가야 한다 싱건지나 묵은 김치도 좋고 숙주노물이나 콩노물도 좋다 나몰이나 남새 노무새도 좋고 실가리나 씨래기 시락국 건덕지도 좋다 먹다 남은 찌개 찌끄래기나 달걀을 넣어도 좋지만 빼먹지 않아야 할 것은 고추장이다 더러 막걸리를 넣거나 된장국을 홍창하게 넣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은 취향일 뿐 그렇다고 국밥이 되는 것은 아니다

  비빔밥엔 가지가지 반찬에 참기름과 고추장이 들어가야 하지만 정작 비빈 밥이 비빔밥이 되기 위해서는 풋것이 필요하다 손으로 버성버성 자른 배추잎이나 무잎 혹은 상추잎이 들어가야 비빔밥답게 된다 다 된 반찬이 아니라 밥과 어우러지며 익어갈 것들이 있어야 한다 묵은 것 새것 눅은 것 언 것 삭은 것 그렇게 오랜 세월이 함께 해야 한다

  하지만 재료만 늘어놓는다고 비빔밥이 되는 것은 아니다

  비빔밥을 만들기 위해서는 요령이 필요하다 비빈다는 말은 으깬다는 것이 아니다 비빌 때에는 누르거나 짓이겨서는 안 된다 밥알의 형태가 으스러지지 않도록 살살 들어주듯이 달래야 한다 어느 하나 다치지 않게 슬슬 들어올려 떠받들어야 한다


  손과 손을 맞대고 비비듯 입술과 입술을 대고 속삭이듯 그렇게

  몸을 맞대고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있게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우리 이미 분리할 수 없게 그렇게

  그렇게 나는 너를 배고

  너는 나를 밴 상태라야 비빔밥이라고 할 수 있다


  우는 사람아 비빔밥을 먹을래?

  내가 너에게 들고 싶다   (전문. p.24~25)



  잘 나가다가 말았다. 1연 4행까지 가면, 거 비빔밥 한 번 비비기 위해 도를 닦아야 할 지경에 이른다. 비빔밥 한 술 뜨려면 목욕재개하고 2박3일 면벽참선 한 다음, 대접에 담긴 비빔밥에 재배한 연후에야 한 술 뜰 수 있을 정도이다. 이이가 남도 장흥 사람이라고 했지? 북도 남원에서는 깨스럽게 젓가락으로 비빔밥 후비지 말고 숟가락으로 썩썩 비벼 팍팍 떠 먹는 게 장땡이라고 하던 걸? 내가 제일 우습게 아는 것 가운데 하나가 다도茶道라고 하는 노동. 차 한 잔 마시자고 뭐 어쩌고 저쩌고. 그냥 덖은 차 물에 불려 후루룩 마시면 입술에 헤르페스라도 돋나? 혓바늘은 안 돋고? 같은 의미에서 비빔밥 한 그릇 먹자고 말이 많다. 그게 첫번째 불만이고 두번째 불만은, 먹는 이야기면 먹는 이야기로 끝내지 뭘 손을 맞대고 입술을 맞대는 것도 모자라 네가 나를 배고, 내가 너를 배? ‘배다’는 ‘임신하다’는 말이지? 하다가 막장엔 내가 너 한테 들고 싶단다. 무슨 뜻인고 하니, 한 번 하고 싶다는 말 아냐? 거참 고얀 지고.

  흠. 그러니까 이런 시도 나오는 것이었군.



  황영감의 말뚝론



  생땅은 말이여 말하자면 처녀진디

  그라고 쾅쾅 친다고 박히는 것이 아니여

  힘대로 망치질하다간 되레 땅이 썽질 내부러

  박혀도 금방 흐물흐물해져불제

  박은 듯 안 박은 듯 망치를 살살 다뤄사제

  실실 문지르대끼 땅을 달래감서 박어사

  땅이 몸을 내주제

  그라다 인자 조깐 들어갔다 싶으면

  그때부텀 기운대로 치는 거야 아먼

  그라고 박힌 말뚝이라사 썩을 때까장 안 뽑히제

  그래사 말뚝이제  (전문. p.90)



  차라리 이렇게 내놓고 노래하니 오히려 편하다.

  아이쿠. 할 얘기가 아직 잔뜩인데 독후감이 너무 길어진다. 아쉽지만 여기서 그만하자. 써놓고 보니 안 좋은 얘기만 좍 쓴 거 같아 나도 유감이다. 이대흠. 이 양반 괜찮다. 괜히 아마추어 독자가 쓴 몇 마디 가지고 이 시인을 단정하지 마시기 바란다. 사투리가 많고, 부모 이야기가 너무 많아 읽기 좋지 않았지만 그랬다는 것이지, 그래서 불편하고 심사 삐딱해질 정도는 아니었다. 괜히 시인한테 미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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