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리처드 포드 지음, 곽영미 옮김 / 학고재 / 201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리처드 포드를 읽으려면, <스포츠라이터>, <독립기념일>, <캐나다> 순서로 읽는 것이 좋을 듯싶다. 지금은 절판된 프레스21에서 찍은 <잃어버린 나날들>은 원 제목이 “Independence Day”로 <독립기념일>과 같은 책을 번역한 것이다. 《여자에게 약한 남자》는 단편집이다. <캐나다>는 1944년생인 포드가 67세에 거의 대부분을 쓰고, 68세인 2012년에 미국이 아니라 제목과 같은 나라, 캐나다에서 처음 출간했다. 단편집은 별개로 하고, 위에 거론한 세 편의 장편소설은 하나같이 결혼과 가정이 붕괴한 이후 구성원들의 소외, 고독, 그리고 상실감을 다루고 있다. 앞의 두 작품(특히 <독립기념일>)은 이혼한 두 남자, 소설가 출신의 스포츠잡지 기자와 부동산거래업자의 상태를 철저하게 파헤치는 훌륭한 심리소설이지만, <캐나다>는 부모와 강제로 떨어져 살 수밖에 없는 쌍둥이 남매, 이 가운데서 남자동생 델의 경험을 통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인생론에 가까울 수 있다.
  소설은 아주 이색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나는 우선 우리 부모가 저지른 강도 사건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살인사건에 대해서도 말할 것인데 이 “강도 사건이 더 중요한 이유는, 그 사건이 결국에는 나와 누나의 운명을 결정짓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며 이 이야기를 빼면 “아무것도 이해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란다. 통상적인 소설에서 보면 아버지가 악당이고, 어머니는 피해자인 경우가 보통인데, 부부가 공동으로 강도 사건을 저질렀다는 것도 의외고, 더구나 소설 주인공이 처음부터 자신의 부모가 벌인 강도행각을 깔아놓고 시작하는 건 여태 한 번도 읽어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베브 파슨스. 1923년 앨라배마의 산골 머랭고 카운티에서 목재 견적인의 수다스러운 외아들로 출생한 출중한 외모와 180센티미터의 늘씬한 체격의 소유자. 1920년대생 미국인에게도 180cm는 매우 큰 키였단다(베브보다 10년 젊은 내 아버지도 180이었으니 당시 식민지 조선에선 전봇대라 할 만했겠지?). 1939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데모폴리스에서 공군의 전신인 육군 항공대에 입대해 전투기 조종사를 꿈꾸었지만 신체검사, 적성검사 결과 전투기 대신 ‘미첼’이란 이름의 중형 폭격기 B-25를 타고 필리핀, 오사카 상공에서 무차별 폭격을 감행해 수천 명의 인명을 살상한 공으로 훈장까지 받은 예비역 대위였을 뻔했다가 모종의 부정 사건에 연루되어 일계급 강등당한 예비역 중위였다. 천성이 수다쟁이고 편견이 없으며, 친절하고 자상한 성격에 늘 웃는 얼굴이었다. 태평양전쟁에 참전해 목숨을 걸고 조국을 위해 수많은 생명을 앗았으니 이젠 국가가 자신에게 이에 합당한 보상을 마땅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는 의식의 저변에 깔려있었다. 여기다가 매사가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좋은 방향으로만 흘러갈 것 같은 낙천주의가 결과적으로 파멸의 깊은 우물 속으로 헛발을 딛게 만들었다.
  원래 이름이 니바 캄피친스키였지만 미국으로 이민 온 부모에 의하여 니바 캠퍼로 이름을 고쳤다가 1945년 3월에 디트로이트 근처에서 열린 귀환공군 환영파티에서 키 크고 잘 생긴 남부 출신의 대위를 만나 분위기에 휩쓸려 한 번 자빠졌더니 덜컥 쌍둥이를 임신해서 결혼하는 바람에 본격적으로 신세 망쳤다. 폴란드 출신 유대인 부모 레나타와 보이테크 캄피친스키는 대학졸업장이 있는 딸이 변호사나 회계사, 적어도 교수 사모님의 지위에 오를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얼마나 배신감이 컸고, 이에따라 얼마나 니바의 반발심이 컸던지 결혼 15년이 되도록 부모자식 간에 전화 한 통이 없었다. 하필이면 군인하고 결혼하는 바람에 자주 이사를 다녀 주로 군 주둔지 근방의 중고등학교에 기간제 교사로 일하는 날개 꺾인 작가지망생. 얼굴은 예쁘장하지만 왜소한 덩치와 근시, 독립적인 성격으로 밀드레드 렘링거 여사를 제외하고는 친구는커녕 말 섞는 이도 드물다. 즉 외모와 성격, 지적 능력 같은 것이 남편과 완벽하게 반대편이다. 결혼을 하고서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 전에는 자신과 매사에 너무도 다르다는 것이 그렇게도 매력적이었는데, 이젠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이질감을 초래하는지를 알게 됐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악착같이 성사시킨 결혼을 깨기가 쉽지 않아 오늘날까지 이럭저럭 살아온 것. 게다가 하나도 아니고 한꺼번에 딸 아들 쌍둥이까지 생겼으니.

 

  전쟁이 끝나 아버지 베브 파슨스 대위는 이제 더 이상 폭격할 일이 없을 것이라 예단하고 주특기를 병참으로 바꾸어 교육을 받는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터졌다. 다시 참전하기 싫어 국내 주둔을 결정했다는 건 결국 진급을 포기하고 대위로 제대하여 얼마 되지 않는 연금으로 남은 생을 살겠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병참부대. 이게 전 세계 모든 부대를 막론하고 또 쏠쏠한 거거든. 병참부대의 유구한 전통으로, 몬태나 그레이트폴스 인근 목장에서 암소를 훔쳐 밀도살한 인디언에게 통갈비를 야매로 구입해 부대 장교식당에 넘기는 거였다. 그토록 오래 잠잠했다가 갑자기 무슨 정보가 들어갔는지 부대 감찰반에서 조사를 나와 장물 취득 범죄가 들통나는 바람에 병참대위 파슨스는 일 계급 강등당해 중위로 떨어졌고, 이것이 결정적 이유가 되어 20년 가까이 복무한 공군 경력을 마감하게 된다. 그러나 천성이 낙천적인 베브는 긍정적인 성격과 특유의 친화력을 자신하여 작은 읍 규모의 공군주둔지 그레이트폴스에서 GM 자동차 딜러를 시작해, 시작하자마자 중고차 매매로 직업을 바꾼다. 중고차 매매를 했지만 별로 소득이 없어 다시 목장, 농장 중개업으로 전직한다. 이 세 가지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베브는 눈부신 옷차림과 외모 꾸미기에 여념이 없어, 겉으로 보면 세상에 이런 온유한 사람이 없었으니, 대강 짐작하시겠지, 어떤 부류인지.
  애초부터 목장, 농장 중개업은 말이 그러했다는 것이고, 올즈모빌, 닷지, 중고차, 오토바이 판매가 생각처럼 되지 않았을 때부터 생각해놓은 사업이 병참장교 시절 재미가 쏠쏠했던 야매 소고기 중개업. 국가로부터 훈장까지 받은 전쟁영웅으로 이 정도의 웬만한 비리는 나중에 발각이 나더라도 국가가 당연히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환상도 있었다. 그래 사업을 시작했는데, 인디언의 고기를 풀 곳이 다시 군대일 수는 없어서, 그레이트 노던 철도회사 소속 열차의 식당칸을 담당하는 흑인 스펜서 딕시와 접촉을 했다. 문제는 딕시는 인디언을 무서워했고, 인디언은 흑인 딕시를 믿지 못했는데도, 인디언들이 고기를 중간상인 베브에게 넘긴 것이 아니라 직접 딕시에게 전달해야 했다는 점. 하여튼 어느 날, 딕시는 소 몇 마리 분의 고기를 받고, 고기가 상해 미주리 강에다 버렸으며 돈을 지불하지 못하겠다고 버텼다. 그러더니 다음 날, 시카고로 날라버렸다. 이제 인디언은 베브와 베브 가족의 목숨을 위협하며 한 시간에 차를 몰고 두 번씩 파슨스 댁 주변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고, 하루에도 수십 번 씩 전화벨이 울렸다.
  이걸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베브는 은행 돈은 정부 돈이며, 정부를 위해 베브는 그동안 수없이 희생하고 수천 명을 죽인 애국자라서 정부 돈을 일부 사취한다 해도 그리 큰 도덕적 잘못이 아니라는 외골수로 빠져버린다. 그리하여 1960년 8월, 나 델과 쌍둥이 누나 버너 파슨스가 열다섯 살일 때, 아버지는 사우스다코타 주로 건너가 아침에 은행 문을 열자마자 농업은행에 진입해 권총으로 위협해 꼴랑 2천5백 달러를 강도했으며, 어머니는 강도가 끝난 후 남편을 집에까지 태워 와, 졸지에 강력범죄자가 되었는데, 주인공 델과 델의 쌍둥이 버너는 이걸로 끝난 게 아니라 이제 시작이었다.
  은행 강도의 딸과 아들. 이 꼬리표를 달고 새털처럼 많은 날들, 어머니 니바의 말처럼 남아 있는 수천 날을 살아가야 했으니, 앞길이 구만 리 같은 이 아이들은 도대체 어이할꼬.
  결론은.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것. 어쨌든 살아야 한다는 거.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나도 좀 살았는데, 아직도 그걸 모르겠다. 예순 일곱 살 작가가 쓴 <캐나다>를 읽고도, 그래도 모르겠다. 하긴 알게 되면, 그걸 아는 순간 숨이 넘어갈 거 같긴 하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21-11-23 0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교정교열 때문에 별점 하나 뺐음!

coolcat329 2021-11-23 09: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잊지못할 첫문장이네요!
인간은 평생 방황하다 끝내 삶의 의미 모르고 죽거나 운이 좋으면 이반 일리치처럼 죽기 직전 알고 가는거 같아요. ㅎ

Falstaff 2021-11-23 09:37   좋아요 1 | URL
모르고 죽는 게 속은 편할 거 같아요. ㅋㅋㅋ
재미있는 작품이긴 합니다만, <독립기념일>을 워낙 재미나게 읽어서 말입죠, ^^;;;

독서괭 2021-11-23 1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첨 들어보는 작가인데 재밌어 보입니다. 교정교열만 아니면 별 다섯이란 말씀이죠? <독립기념일>이 더 재밌고요? 메모메모..

Falstaff 2021-11-23 12:22   좋아요 0 | URL
ㅎㅎ 맘 편하게 걍 <독립기념일>로 가셔요!

다락방 2021-11-23 13:55   좋아요 0 | URL
오오 독립기념일 문동세계문학으로 있네요? 1,2권으로.. 재미있을 것 같아요!

Falstaff 2021-11-23 13:59   좋아요 0 | URL
옙. 문둥이네 집에서 찍었습니다. 왜 그런 거 있잖아요. 톰 울프 <허영의 불꽃>과 더불어 잘 쓴 미국식 대중소설! 전 무지 괜찮게 읽었습니다!!!
 
주눈
잘릴라 바카르 지음, 유효숙 옮김 / 연극과인간 / 200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요즘 유행하는 난해한 시집을 읽다가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으면 자주 책 뒤에 실린 해설을 먼저 읽었다. 그러면 시를 읽는데 훨씬 도움이 된다. 나는 지금 무릎을 치고 있다. 역자 유효숙의 작품 해설을 먼저 읽을 것을.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무척 도움이 되었을 텐데.
  <주눈>은 원작이 있다고 한다. 튀니지의 여성 신경정신과 의사 네쟈 잠니가 쓴 <정신분열증 환자의 이야기>. 이것을 각색해 극작품으로 만든 이가 잘릴라 바카리. 내가 지금 ‘희곡’이란 말 대신 ‘극작품’이라고 표현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드라마투르기, 또는 드라마터지, 라는 직업이 있다. 희곡을 연극으로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개입을 하는 사람은 당연히 연출자. 그럼 연출자는 희곡을 그대로 연극으로 전환시킬까? 요즘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드라마터지가 있어서 희곡을 연극으로 올리기에 적절한 대본으로 만드는 것을 필두로, 극 전반에 걸쳐 해석하고, 희곡이 아닌 대본을 다시 편집하는 등 예전엔 연출이 담당했던 것들의 일부를 수행함으로써 연출자를 보좌하는 일을 한다.
  잘릴라 바카르는 1952년에 튀니지에서 태어나 불문학을 전공한 극작가, 드라마터지 그리고 배우로 활약했다. 남편 파델 쟈이비가 유명한 연출자라서 자신도 연출을 하기보다는 연출을 보좌하는 드라마터지에 만족했을 수도 있고, 그러다보니 <정신분열증 환자의 이야기>를 <주눈>이라는, 희곡 말고, 연극의 대본으로 고쳐 썼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유효숙은 작품해설에서 “잘릴라 바카르는 문학적으로 뛰어난 희곡을 완성시키려는 목적이 아닌 정확하고 진실된 말, 등장인물들이 꼭 하고 싶은 말에 대해 고민”했기 때문에 “아름다운 글에 집착하지” 않았다고 하며, “남편 파델 쟈이비의 연출로 극단 단원들과 함께 즉흥을 통한 집단창작으로 작품을 완성”하는 형식을 취했다고 썼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즉흥을 통한 집단창작’이 대충의 스토리를 갖고 무대에 오른 연기자들이 즉흥적으로 소위 애드립을 쳐가며 연극을 만들었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 대본을 만들기 위해 연출자, 배우, 그리고 드라마터지가 각 부분을 연기해보고 토의를 거쳐 최종 대본을 확정지었다는 의미다.
  아직 재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이 나온 2007년에 우석대학의 연극영화학과 (지금은 미디어영상학과가 있고 연극영화학과는 없어졌다. 문창과를 포함한 교수진 명단에 이름이 없는 걸로 봐서 이직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교수였던 역자는 책이 담고 있는 소기의 목적, “제대로 된 연극 문법과 언어”로 만들기 위해 연극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리딩reading을 시켜 문학적 언어가 연극적 언어로 잘 바뀌었는지 의견을 물었다고 밝히며,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설마 마음만 표했을까. 자장면, 짬뽕 말고 탕수육, 양장피에다가 고량주도 시켜줬겠지? 아니면 인간도 아니다. 그지?
  <주눈>은 2005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 <주눈의 눈>이란 제목으로 아랍어 공연을 했고, 이때 유효숙이 자막 번역을 위해 작가 잘릴라 바카르가 직접 옮긴 프랑스어 판본을 사용했다고 한다. 아시다시피 튀니지에서 불문학을 전공했으니 거의 불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할 정도였을 것. 번역 때문에 의미가 어긋나지는 않았으리라 본다. 제목 “주눈Junun”은 우리말로 정신착란 상태, 광기, 광란이란 의미란다. 게다가 주인공의 이름이 “눈”이다. 그래서 첫 장을 넘기자마자 눈이 등장해 여성을 혐오하는 내용의 독백을 하면, 분명히 미친놈인 건 알겠는데 조금 헷갈린다. 역자는 “원래 제목의 강렬한 의미가 제목의 번역으로 살려지지 않는다고 판단해서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제목은 번역하지 않고 원작의 아랍어 <주눈>으로 표기”했다고 하지만 <주눈>이라고 해서 오히려 독자를 헤매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생각을 해보기 바란다. 우리들 가운데 불어 단어 다섯 개 알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나는 심통나면 회사 서류 서명 란에 “Merde”라고 쓰기도 했는데, 아직까지 해고 안 당하고 있다. 며칠 남지 않았지만.

 

  눈이란 이름의 정신분열증 환자와 이이를 치료하는 전문의 ‘그녀’가 주인공이다. 지독하게 가부장적인 아랍과 이슬람 문화 속에서 살아야 하는 남자의 스트레스. 남자라면 이래야 하고, 남자라면 저래야 한다는 사회적, 가정의 요구. 폭력적인 아버지와 장남만 사랑하고 나머지는 내가 미쳤지, 저런 딸들과 아들을 또 낳았다니, 하는 눈치를 끊임없이 던지는 어머니. 아버지가 죽자 또 다른 폭력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맏형.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독일로 가버린 수치를 집안의 동생들에게 배설해버리는 형, 11명의 형제자매 속에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실어증에 걸리고 급기야 분열증까지 생겨 열두 살에 가출, 열네 살에 소년원, 열일곱에 감옥, 열여덟에 군대, 스물네 살에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했던 눈. 모두 11명의 형제자매 가운데 둘은 어려서 죽고, 맏형 ‘카’는 감옥에 수감 중인데 극 중에 출감한다. 맏딸은 외국인하고 결혼해 집에 없다. 형제 하나는 소년원에 있고 두 명은 이탈리아로 도망갔으면 지금 집구석에는 네 명의 자녀, 세 딸 ‘사’, ‘와우’, ‘카프’와 눈만 어머니와 살고 있다.
  콩가루 집안도 이런 콩가루가 없어서 맏아들 카는 술과 약을 사기 위해 돈을 받고 셋 남은 여동생을 시간제로 나누어주는 이른바 포주도 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짬짬이 여동생들을 두드려 패고, 남동생 눈은 좀 더 심각한 수준으로 두드려 패는 걸 취미생활로 여긴다. 눈의 착란증세에 가세했던 건, 그가 최악의 것으로 여기는 여자의 몸에 한 번 가까이 했다가 냉큼 걸려버린 매독도 한 몫을 했을 것. 눈의 분열증은 병원에서도 수시로 탈출하기에 이르러 마치 자식처럼 회복을 바라던 그녀 말고는 눈의 증세를 치료하기 위해 어떤 의사도 협력하지 않는다. 그녀는 병원 안에서 말고 눈의 집, 눈이 지정하는 장소에서 계속해 치료를 멈추지 않는데, 무시무시한 여성 혐오가 그녀의 헌신적인 치료의지를 조금씩 사랑하며 완쾌…… 되면 연극이 아니겠지? 그렇다. 20세기도 아니고 21세기 현대극에서 조건 없이 해피엔드를 줄 수는 없다.
  아랍과 이슬람 사회에서도 갈등을 겪는다. 결국 사람 사는 일은 그것이 천국이나 지옥이 아니라면 다 거기서 거기구나. 무슬림도 그들의 계율이 정하는 바에 따라 행위하고 사고하지만 맹목적인 계율의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해 머리가 헤까닥 돌기도 하는구나. 결국 종교는 이거나 저거나 어차피 다 아편이라는, 망치를 든 철학자의 이야기가 맞는 말이었구나. 뭐 이런 걸 배울 수 있다고? 아니다. 한 불쌍한 영혼이 겪는 격렬한 갈등의 이야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 2020년에 가장 인상 깊었던 책 열 권을 추렸었다. 해당 글에 2021년에는 장강명의 <표백> 독후감을 읽고 싶다고 하신 분이 계셔서 내내 기억하고 있다가 이제야 독후감을 쓴다. 사람 마음이 참. 워낙 잘 나가는 작가라서 오히려 선뜻 집어 들게 되지 않았던 거 같다. 2011년에 <표백>으로 한겨레문학상을 받아 데뷔를 하고, 이후 굵직한 문학상을 수집하는 데 게으르지 않았으며, 을지로 인쇄골목의 종이 값을 올리는데 기여한 작가다. 내는 책마다 대박이라, 억대 연봉으로 유명한 동아일보사를 때려치우고 지금은 전업 작가로 활약 중이다.

 

  <표백>. 발표했던 십년 전은 물론이고 지금 읽어도 젊은이들에게 크게 어필할 수 있는 센세이셔널한 주제를 다루었다. 표백이라. 백 년 전까진 힘이 좋아 무쇠 칼을 휘두르며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저편에 있는 적들을 쳐부수기만 하면 영웅의 관을 쓸 수 있었고, 일제강점기엔 독립투쟁을 하느라 목숨을 버리기도 했고, 전쟁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후에 독재에 저항하기 위해, 민주화를 이룩하기 위해 기꺼이 보도블록을 깨 같은 젊은 세대인 전투경찰을 향해 던지기도 했다. 이런 덜 성숙했던 시절을 지내며 이미 몇몇 선배들은 거대 담론을 독차지 할 수 있었으며, 큰 영광을 차지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다른 꾀바른 몇몇은 어수룩한 시운을 타서 하다못해 아파트 투기 몇 번을 통해 탄탄한 중산 계급장을 깔고 앉을 수 있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사회 전반은 틀이 꽉 잡혀 어디 한 군데 허술한 곳을 발견하기 힘들 지경이 되고,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경제의 확립은 오히려 젊은 세대들에게 옴짝달싹 못 할 규격화 “만”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치열한 경쟁을 이겨내고 쌓아올린 스펙, 좋은 대학 졸업해 판검사 또는 5급 공무원이 되거나 의사가 되거나 반도체, 이동통신, 금융 같은 일류 대기업에 입사해야 하거나, 아니면 중견기업, 그것도 아니면 중소기업,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7급이나 9급 공무원, 하다못해 이것도 아니면 그저 루저가 되어 월 88만 원짜리 아르바이트생으로 빌빌거려야 하는 규격.
  위대한, 또는 영웅적인, 역사에 기록될 만한 이슈는 모두 완결이 된 이후의 사회 속에서 사는 젊은이들의 허무. 이들 가운데 상위 천 분의 일에 해당하는 두뇌와 천부의 미모를 갖춘 정세연이란 젊은이가 현대의 사도로 등장해 소크라테스, 재프루더, 루비, 하비, 제리, 메리, 여섯 명의 제자를 두기에 이른다. 이들은 기성세대를 향하여 거대한 복수의 장을 마련하고자 하니, 어떻게 읽으면 이제 이들에게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영웅적, 또는 위대한 반항, 항의의 뜻으로, 자살을 선언하고 실제로 죽어버리는 일이다.
  어차피 세상살이는 선택으로 이러진다. 젊은이들이 현실에 고뇌하고, 탐색하다가 절망하고, 출구를 모색하고, 타협하고, 분노도 하는 건 언제나 같다. 이들이 기성에 항의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자살선언과 실행. 백 년 전에도 있었다. 다만 살해의 대상이 내가 아니라 부모였을 뿐. 그래서 생긴 것이 살부계殺父契, 아버지 죽이는 집단. 이들의 아버지들도 살부계 자식들을 용인했다. 왜냐하면 자신들 역시 젊은 시절 살부계를 만들어보았기 때문. 물론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말 생명의 결단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도 제일 싫어하는 말이 “부모님을 제일 존경한다.”는 거다. 부모는 극복과 타도의 대상이지 존경의 대상이 아니다. 내가 키운 두 아이는 어려서부터 절대로 이런 얘기는 입도 벙긋하지 말라고 교육받아서, 어디 가서 “저는 부모님을 존경하지 않아요.”라고 말한다는데, 미친다, 어감이 꼭 “우리 집구석이, 콩가루 집안이에요.” 라는 뜻 같기도 해서. 그것도 참.

 

  하여튼 자살선언서 작성, 자살 종교의 사도 재키 정세연과 여섯 제자, 그리고 주인공이자 2년 공부 끝에 7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과천 종합청사의 농림부에서 근무하는 ‘나’ 적그리스도. ‘나’가 적그리스도? 그렇다. 그럼 그리스도는, 당연히 사도, 재키, 정세연이다. 정세연. “정의 세우기 연대”가 아니고, 작가 장강명이 졸업한 학교 연세대학의 ‘연세’를 뒤집어 놓은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 자살교의 교주이자 사도. 그럼 적그리스도는 비록 처음엔 그리스도와 한 편이었을지 모르지만 지혜와 판단을 장착해 나중엔 악착같이 그리스도, 라기보다 자살교 교주에 바락바락 기어올라 방해만 일삼을 거 아냐? 맞다.
  ‘나’ 적그리스도와 비슷한 성격의 등장인물이 하나 더 있는데, 나중에 주간지 기자가 되는 소크라테스 휘영. 아, 스포일러일 수 있는데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재키 정세연이 겨우 50 센티미터 깊이의 연못에서 고개를 들지 않아 자살에 성공하고 (말도 안 된다. 편의점에서 산 복분자술 한 병 마시고 숨이 끊어질 때까지 물속에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고? 왜, 숟가락 놓을 때까지 숨을 안 쉬어보지 그랬어. 하여튼 그랬다고 치자. 이 정도는 돼야 현대의 ‘사도’라 이거지?) 5년 후에 재키와 약속한 대로 죽지 않은 이유가 그때까지 화려한 성공을 한 번도 못해봤기 때문일 수도 있다.
  세연이 제자들에게 성공적인 자살을 위하여 인생의 절정을 맞았을 때 죽으라 했다. 그리하여 루비는 미국 동부의 모 대학에서 거의 모든 과목에 A학점을 받아 유수의 대학원 입학이 확정된 순간 호숫가에 자기 차 캠리를 세워두고 견인줄을 허리에 묶은 다음 호수로 걸어 들어가, 폐에 가득 물이 찰 때까지(가히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죽을 때까지) 견인줄을 잡아당기지 않아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는데 성공한다. 하비는 아이비리그의 MBA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이제 재계서열 6위의 대기업 진호그룹 회장의 장남 자격으로 기획실 과장 자리에 앉기 바로 전, 필라델피아 자신의 집에서 변사체로 발견되는데 결국 자살로 판명이 난다. 재프루더는 마포대교에서 죽겠다고 선언을 하고, 예정된 시간에 목에 끈을 묶은 상태로 약 10미터 아래로 자유낙하, 목뼈가 똑, 부러져 죽어버린다. 이때 재프루더는 바로 회계사 시험에 합격한 상태였다. 소크라테스도 조중동 같은 유명 일간지나 KBS, MBC, SBS 같은 방송국 기자로 취직했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었겠지. 하여튼 이래서 루저들만 살아남는다는 책.

  근데 이게 다냐고? 아니지. 장강명이 만일 재키 정세연의 편을 들어 이 땅의 젊은이들한테, 죽어, 죽어, 죽으라고, 이제 자살하는 게 바람직한 시대정신이야, 라고 말했다 하면, 그의 인기가 이토록 하늘을 찌를 리도 없고, 한겨레문학상을 받지도 못해 아직 데뷔도 못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장강명도 이 책을 내고 쫄았을 거다. 나 같아도 쫄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만일 한 명의 젊은이가 책을 읽고 재키 정세연의 말에 감동을 받아 열심히, 열심히, 열씨미 공부해 행정고시 패스한 다음 날 자살선언서 한 장 쓰고 죽어버리면 조금 곤란했을 터이니까. 두 명이 죽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사회문제가 되고, 세 명, 네 명, 다섯 명, 한 다스가 그러했다면 장강명은 이민을 갈 수밖에 없었을 거라서, 서문을 이렇게 써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디에서도 자살선언문을 보게 되지 않길 바라며.”

 

  이제 이 책이 나오고 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아직은 그렇지 않더라도 당시 20대 중후반이었던 등장인물은 30대 중후반이 되어 인생의 황금기를 우울하게 보내고 있을 터이고, 새로이 등장한 젊은 세대들은 또다시 십 년 전의 이들처럼 반란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흘러간다. 웃긴다면 웃기고, 드럽다면 드럽게.

 


댓글(17)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2021-11-19 08:5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은 바로 접니다 ㅋㅋㅋㅋ 태반은 금융치료 주식하고 비트코인 하며 살껍니다…ㅋㅋㅋ 그러니 코인에 세금때리겠다는 이 정부를 어찌 아니미워하겠습니까? 많이잡아 15퍼센트는 페미니스트가 되었습니다. 다시 읽는다면 아마 이 소설의 ‘나’를 한남충이라고 비웃을 겁니다 ㅋㅋㅋ

Falstaff 2021-11-19 09:04   좋아요 3 | URL
아 다 사는 방법이 있다니까요. 그냥 건들지 말고 냅두면 알아서 잘 살 텐데 코인 세금처럼 없는 거 만들어 귀찮게 하니까 더 복잡해지는 거 아닙니까.
장쟝님 이거 읽으셨군요. ㅎㅎㅎㅎ

- 2021-11-19 09:14   좋아요 3 | URL
네 흥미진진하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뭐가 옳은지 저는 모르겠지만 세대로만 놓고보면 코인한탕 심리나 쿠데타 한번 거하게 일으켜서 힘좀 써보자 하는 심리나 그렇게 다르지는 않을 거 같습니다?

바람돌이 2021-11-19 09: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늘 Falstaff 님 리뷰는 책을 안읽어도 왠지 읽은 듯한 느낌이 들게 하네요. ㅎㅎ 장강명작가 책은 에세이 한권 읽었는데 딱히 흥미롭진 않아서 살짝 미뤄뒀는데 소설은 또 다른 분위기네요. 기억해두겠습니다.

Falstaff 2021-11-19 09:58   좋아요 2 | URL
ㅎㅎㅎ 흥미로운 작가더군요. 발상도 발칙하지만 자살이 재미있지는 않습니다. 기자 출신답게 문장도 깔끔하고요.

그레이스 2021-11-19 09: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스토리만 보면 별로 읽고 싶지 않은책! 작가의 의도를 읽는다면 다르겠죠^^
작가가 걱정이 되긴 했겠네요 ㅎ

Falstaff 2021-11-19 10:02   좋아요 3 | URL
완전히 두뇌에 의존해서 쓴 글 아닌가 싶었습니다. 여기에 신문사 재직하면서 주워 들은 사건 사고 몇 개를 응용했을 거 같아요. 저도 자살선언 뭐 이런 건 줄 알았으면 안 읽었을 겁니다. ^^;;
이 책 읽고 죽어버린 사람 없는 것이 다행이고요, 있다면 드러나게 자살 선언문 같은 거 써놓고 죽은 사람이 알려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불행한 일이겠습니다. 읽는 내내 흥미롭긴 해도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씨. 애써서 사는 얘길 써도 부족한 시간에 스스로 죽는 얘길 쓰다니 말입니다.

coolcat329 2021-11-19 10:1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장강명 작가 소설은 국정원 불법 선거개입을 소재로 한 <댓글부대>만 읽어봤는데 이때 느낀게 ‘와 이 작가 거침없네!‘였어요.
10년이나 지난 소설인데 내용보니 지금도 어필할 주제네요. 찜! 합니다.

Falstaff 2021-11-19 11:26   좋아요 4 | URL
댓글부대... ㅎㅎㅎ
거침없이 쓸 수 있는 세월이 얼마나 좋습니까.

잠자냥 2021-11-19 12:1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기자 출신 작가로 한국에서는 인기 독보적인 두 사람, 김훈, 장강명. 그런데 저는 이 둘 작품에 손이 안가요. 거참... 이상하죠? ㅎㅎㅎ 심지어 폴스타프 님의 이 매력적인 리뷰를 봐도 읽고 싶은 기분이 안 드네요. ㅋㅋㅋ

Falstaff 2021-11-19 12:36   좋아요 4 | URL
전 김훈은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았어요. 읽다가 지쳐 스르르르....
장강명도 이거 읽어보라는 권유가 없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듯하고요.
근데 이게 완전 취향이라 김훈, 장강명 좋아하는 분들은 그냥 흠뻑 취하더라고요.
그건 그렇고, ㅋㅋㅋㅋ 이 독후감이 매력적이라고요? ㅋㅋㅋㅋ 농담 잘하셔!!!

다락방 2021-11-19 13:09   좋아요 4 | URL
잠자냥 님의 댓글을 다락방이 좋아합니다. 공감도 드립니다.

페넬로페 2021-11-19 13:15   좋아요 3 | URL
저는 김훈 작가를 좋아하는데 장강명 작가의 책은 아직 한권도 읽어보지 않았어요. 한 권쯤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폴스타님 리뷰로 했습니다.
처음 시작을 뭘로 하면 좋을까요?

stella.K 2021-11-19 18: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책을 읽어 본 적은 없는데
TV에 나온 거 보면 인상이 좋더라구요.
조근조근하고 착한 인상이죠. 교회 오빠 같은.ㅋ
저는 기자 출신 작가가 쓴 책 좋아합니다.
각이 딱 잡혔잖아요.
장강명 작가도 읽어 볼만할 텐데 왜 안 읽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ㅠ

Falstaff 2021-11-19 19:34   좋아요 2 | URL
기자 출신 작가가 쓴 거 좋아하시면 얼른 읽으셔요! 누구보다도 에피소드로 사용할 거리가 많을 거 같아요.
전 우연히도 노먼 메일러도 헤밍웨이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말입죠. 이게 다 팔잡니다, 그죠? ㅋㅋㅋㅋ 읽고 멋있는 리뷰 올려주세요!

Conan 2021-11-20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년전 아주 흥미있게 읽었던 책 입니다. 당시에 리뷰도 남겼었구요~
위에 언급된 김훈과 장강명의 책은 거의 다 읽었습니다. 특유의 매력이 있는 작가들이라 생각합니다.~

Falstaff 2021-11-21 19:27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다 독자들의 취향 차이지요. 다 같은 감상이면 세상 재미없어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
 
결혼이라는 소설 1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김희용 옮김 / 민음사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브라운 대학 동급생 세 명의 삼각관계 이야기라고, 아주 거칠게 이야기할 수 있다. 원래 애정을 깔고 하는 삼각관계라는 것이 워낙 재미있는 것이라 TV 드라마, 소설, 희곡 등을 망라해 비슷비슷한 내용을 복제해왔음에도, 21세기 A.I 인공지능의 시대에 접어들어서도 여전히, 삼각관계라는 착착 달라붙는 감칠맛은 계속되고 있다. 이 책에선 한 명의 부르주아 여주인공 매들린 해나와 두 명의 브라운대 동급생 레너드 뱅크헤드, 미첼 그라마티쿠스가 등장한다. 매들린 해나는 코네티컷 대학 학장을 하다가 60대 중반에 벡스터 대학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뉴저지의 프리티브룩으로 이사를 한 올턴 해나의 둘째 딸이다. 생전 돈에 관한 한 부족해본 적이 없다. 레너드 뱅크헤드는 거의 틀림없이 골동품 중개상을 하던 아버지와 가정주부 어머니 두 명 다 알코올 중독자인 것 같으며, 그들로부터 형질을 물려받아 심각한 조울증 상태에 빠져버린 생물학 전공자로 반half 천재 정도로 평가할 수 있는 두뇌의 소유자다. 부모는 벌써 이혼했다. 아버지는 벨기에에 사는 젊은 여자한테 날아가 정착해버렸고, 생활력은 강하지만 아버지와 같은 성gender이라는 이유로 레너드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어머니와 오리건 주 바닷가에서 불량하게 살다가, 딱 일 년 독하게 공부해 가장 건전한 가출 형식, 전 학기 장학금의 수혜를 받고 동부의 명문 브라운대학에 입학했다.
  이 브라운 대학이 바로 작가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모교다. 삼각관계의 세 번째 주인공 미첼 그라마티쿠스는, 부계가 그리스, 모계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이며, 대학을 졸업한 후에 유럽 각지와 인도 콜카타에 가서 마더 테레사와 합류해 자원봉사 경험을 하는데, 딱 유제니디스가 그랬다. 유제니디스와 다른 건 미첼이 종교학을 전공해 눈부신 성과를 냈다는 점 딱 하나. 심지어 자기가 태어났고 아직 부모가 사는 곳도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중산층)인 것도 같다. 그렇다고 미첼 그라마티쿠스를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도플 갱어라고 볼 필요는 없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허구다.

 

  우리말 제목을 “결혼이라는 소설”이라고 했다. 원래 제목은 “결혼 플롯: Marriage Plot." 영문과를 졸업한 여자 주인공 매들린 해나가 대학시절 내내 관심을 쏟는 것이 빅토리아 시대에 쓰인 소설 가운데 결혼을 플롯으로 한 작품을 분석하는 작업이었다. 제인 오스틴은 사실상 섭정시대 작가라 예외로 하고,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가 떠오른다. 또 헨리 제임스가 쓴 <한 여인의 초상>. 이 두 작품의 공통점은 전 시대, 오스틴의 <에마>에서 볼 수 있듯이 결혼과 더불어 이야기를 종료하는 플롯을 채택하지 않고, 결혼을 하고나서 비로소 본격적인 갈등을 시작한다는 거. <미들마치>에선 도로시아 브룩이 16세 많은 국교회 목사 에드워드 커소번과 결혼해서 완전히 권위적인 가부장제에 질식해가며, <한 여인의 초상>의 이사벨 아처는 잘 생기고 매너 좋을 것 같은 길벗 오스먼드와 결혼해 이모부로부터 증여받은 7만 달러, 현재가치로 대충 250억 원 가량 되는 재산의 권리를 구사해보지도 못할 처지로 떨어져버리는 이야기다.
  18세기나 19세기 초반의 작가, 예컨대 새뮤얼 리차드슨의 <파멜라>나 제인 오스틴의 <에마> 등의 주인공이었다면, 이들은 이렇게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결혼에 골인해서 행복하고 모자람 없이 오래오래 살다가 둘이 손을 꼭 잡고 한날한시에 같은 침상에서 늙어 죽었답니다, 로 끝났을 것이란다. 즉 주인공 매들린 헤나가 전공하는 소설분야인 동시에, 메들린이 졸업을 하고 곧바로 동거를 거쳐 결혼에 이를 것이란 점은 처음부터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결혼이 결론이냐, 갈등의 시작이냐 하는 것만 남았을 뿐.
  주인공들이 각기 영문학, 생물학, 종교학을 전공한다. 그것도 매우 공부를 잘한다. 제프리 유제니디스는 여기에 제일 중요한 주인공 매들린의 주 관심사를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로 묶어버려, 헨리 제임스를 이어가려 하는 것처럼 보이는 영국의 앨런 홀링허스트와 비슷하게, 세밀하고 유장해서 자칫하면 장황하다고 느끼게 하는 문장과 단락을 사용한다. 매들린과 미첼의 전공을 설명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소설가와 그들의 작품, 신학적 용어와 예배의 형태 등을 묘사하기도 한다. 바로 이점 때문에 이 책이 기대한 것만큼 재미없다, 라고 느낄 수도 있겠다. 독자의 그런 심정을 이해한다. 하지만 스토리에 등장하는 작품들을 진짜로 읽어본 독자는 <파멜라>, <에마>, <다니엘 데론다> 등의 작품은 물론이고, 위에 인용한 작가들 외에도 로렌스 스턴, 헨리 필딩, 개스켈 부인 같이 여간해 거명하지 않는 작가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도 반갑고 흥미롭다. 그럼에도 민음사가 넉넉하게 편집을 했지만 해설 없이 1천 페이지가 넘는 두 권 분량의 장편소설을 쉽게 시작하기는 좀 부담스러울 수 있을 듯하다.

 

  매들린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겨우 한 번의 성경험이 있을 뿐이다. 그게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그냥 한 번 해봤을 뿐, 상대를 사랑한다거나 뭐 그런 감정적인 영향은 거의 없었다. 대학에 진학하고 공부 이외에서 가장 큰 관심사는 당연히 사랑을 나누는 일이었는데, 이제 그걸 하려면 진짜 사랑이 필요했으며 그것도 급했다. 왜냐하면 여자의 몸 특정한 부분도 마치 귓불과 같아서 한 번 뚫어놓았으면 계속 사용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막혀버릴 것 같은 강박이 있었다고 한다. 입학하고 처음 친해진 미첼을 크리스마스 휴가 때 자기 집 프리티브룩에 초청해 함께 기차를 타고 가서 며칠을 묶으며 매들린의 부모와 더불어 재미있는 연말을 보낸다. 이 휴가 동안의 하루, 매들린은 2층 침실에서 잠잘 준비를 하던 미첼의 방에 들어가 페로몬을 분사하지만 미첼은 마치 당연하게, 아주 깍듯한 예의로 그냥 돌려보낸다. 이런 내용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 매들린이 프랑스에 머물고 있는 미첼에게 편지를 써 알게 된다.
  매들린은 3학년이 된 후에야 영화 제작자를 희망하는 첫 번째 진지한 남자친구 빌리 베인브리지가 생기고, 아늑하고 안락하고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성경험을 하지만 포경수술을 한 자신의 생식기에 크게 불만이 있고, 창문을 통해 매력적인 금발 여자와 이란 국왕의 조카딸 파티마 시라지, 이렇게 적어도 두 명 이상의 벌거벗은 여자애들과 나신으로 누워 있는 것을 목격하고 헤어진다. 다니브 칼라일이란 이름의 두 번째 남자는 연극 전공자로 연기 워크숍에서 만난다. 완벽한 육체를 지녔지만 모델 일을 잘 하기 위해 연극을 전공하며, 외모 말고는 높이 평가할 게 없고, 외모도 (브라운 대학이 있는)로드아일랜드의 프로비던스에서나 근사하지 뉴욕에 가면 쌔고 쌘 수준이라 끝을 냈다.
  세 번째 등장한 애인이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레너드 뱅크헤드. 문제적 인물이다. 극단적 조울증 환자이며 반 천재. 또는 준 천재. 윌리엄 스타이런의 소설에서 말고 앨런 J. 파큘라 감독의 영화 <소피의 선택>에 나오는 네이선 같은 스타일이라고 하면 얼추 맞겠다. 조증이 돋으면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세상의 둘도 없는 캐릭터이지만 그것이 끝내 파멸로 갈 수밖에 없는 처지. 그러나 천재성이 자신의 질병을 치유할 정도는 되지만, 이 병력 때문에 앞으로 직업을 얻기도, 그것을 유지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주위 사람의 이력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임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불운한 남자이기도 하다. 아, 레너드 이야기는 그만. 너무 깊이 들어간다.
  그리고 멀리서, 가까이서 이들을 관찰하며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는 또 한 명의 주인공, 분량은 좀 되지만 그러나 조연에 가까운, 우리의 불쌍한 미첼 그라마티쿠스.

 

  잊히지 않는 대사. 조울증으로 늘 문제를 일으키는 레너드를 향해, 지친 매들린은 이렇게 묻는다.

  “내 말은, 가끔은 네가 우울을 즐기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라는 거야. 뭐랄까 우울하지 않으면 모든 관심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듯 말이지.”

  왜 잊히지 않을까. 읽어보시면 안다.

 

 


댓글(26)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21-11-18 09:53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아, 못 말리는 민음사의 교정교열. 오늘은 기가 막혀 한 가지 예를 든다.
작품은 이윽고 결말을 향해 긴박한 론도 알레그레토로 치달아, 불쌍한 미첼이 급기야 매들린을 침대에 쓰러뜨린 상태. 드디어 소원 성취하는 미첼. 이어지는 베드 씬. 2권 p.426

“뒤이어 밀려든 세부적인 사항들에 압도당해 미첼은 그 일을 즉각적으로 즐길 수가 없었다. 매들린의 옷을 한 겹 한 겹 벗겨 내면서 그는 오랫동안 상상해 온 것들의 물리적 실체에 직면했다. 둘 중 누구도 완전히 현실처럼 느끼지 못한 탓에 잠시 뒤 둘 사이에는 거북한 김장감이 감돌았다.”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웠는데 김장감이 감돌았단다, 김장감이. 김장감? 무, 배추, 고춧가루, 천일염, 파, 마늘, 생강, 새우젓, 까나리액젓, 기타 등등. 김은 샜지만 냄새 하나는 죽였겠지?

프레이야 2021-11-18 08:46   좋아요 2 | URL
ㅎㅎㅎ 김장감. 미치겠네요 치명적입니다. 게다가 옮겨 주신 문장의 번역도 별로네요. 번역이 아니라 해석만 한 느낌이랄지.
김장감 ㅎㅎ 멸치액젓,이면 더 강렬하겠습니다.

다락방 2021-11-18 08:47   좋아요 2 | URL
아니... 김장감 이라니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 진지한 순간에!!

Falstaff 2021-11-18 08:57   좋아요 1 | URL
아, 글쎄 제 말이 그겁니다. 교정교열 잘 못 할 수도 있습니다. 이해하고요. 근데 하필이면 딱 그때 나 참. 허탈. ㅋㅋㅋㅋㅋ
원래 까나리액젓 앞에 멸치액젓을 넣었다가 너무 센 거 같아서 지웠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1-11-18 09:26   좋아요 5 | URL
찹쌀풀은 식혀야하는데요, 성급하게 섞었을까요? … 아 어쩔 … 김장..
소보루 아저씨 곰보빵도 아니고 ㅠ ㅠ

Falstaff 2021-11-18 09:26   좋아요 2 | URL
찹쌀풀..... ㅋㅋㅋㅋㅋ 유부만두 님 때문에 밋치네요. 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 진짜 그건 생각을 못했습니다. ㅋㅋㅋ

잠자냥 2021-11-18 09:49   좋아요 2 | URL
김장감이 감돌면 언능 일어나 김장을 담가야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11-18 09:50   좋아요 3 | URL
아 어떡해요. 이제 앞으로 저 이런 순간에 김장감하고 찹쌀풀 생각나서 빵 터질 듯...ㅋㅋㅋㅋㅋ ㅠㅠ

Falstaff 2021-11-18 09:56   좋아요 3 | URL
그죠, 그죠? 오늘 최고의 댓글은 유부만두 님이셨습니다! ㅋㅋㅋㅋㅋㅋ

프레이야 2021-11-18 10:52   좋아요 2 | URL
ㅋㅋ 찹쌀풀도 썼다가 너무 김장감 돌 거 같아 멸치액젓만 던졌는데 고건 유부만두님이 첨가를 ㅋㅋㅋ 김장감 넘 웃겨요

페넬로페 2021-11-18 11:08   좋아요 2 | URL
아, 이 나이 되도록 스스로 김치를 담구지 못해 김장감을 이해하지 못해 어떡하지요 ㅎㅎ

coolcat329 2021-11-18 11:18   좋아요 1 | URL
아 ㅋㅋㅋㅋㅋ 지금 김장철이라 더 강력합니다.

- 2021-11-18 17:35   좋아요 2 | URL
오호라 댓글들이 댓글댓글 하구나 ㅋㅋㅋ 김장철처럼 바글바글 하구나 ㅋㅋㅋㅋ (크게 웃다 갑니다 🤣)

페넬로페 2021-11-18 11: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은근 ‘결혼‘ 들어가는 소설 좋아하시는것 같아요^^

Falstaff 2021-11-18 11:23   좋아요 3 | URL
아, 그렇습니까? ㅎㅎㅎ 오늘 청첩장 한 장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얘기해주었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어. 다시 생각해봐.
ㅋ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1-11-18 11: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네이선! 아주 지긋지긋한 인물인데 여기도 나오는군요. 그래도 레너드가 네이선보단 나을 거 같은데요.

Falstaff 2021-11-18 11:25   좋아요 1 | URL
소설 말고요, 영화에서의 네이선, 영화 자막에 ‘네이단‘으로 나오는 인간하고 정말 비슷하답니다. 소설 속 네이선 보다 낫다는 건 확실하고요. ㅋㅋㅋ

coolcat329 2021-11-18 11:59   좋아요 1 | URL
아 영화는 소설 속 네이선보다는 낫게 나오는군요. 휴 다행입니다. ㅋ

Falstaff 2021-11-18 12:05   좋아요 3 | URL
영화에서는 을매나 멋있는 남잔데요!
같은 남자라도 닮고 싶다니까요. 그러다 발작이 나면 정나미가 떨어집니다만.

소설 속에서는 아무리 만딩고, 가 아니고 스팅고가 나이도 열 몇 살이나 많고, 이도 몽땅 빠질 정도로 고생해 훨 쪼글쪼글했을 소피를 연모하는 게 별로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영화에 나오는 매릴 스트립은 흰 이를 모두 가지고 있는데다가 젊고 아름답답니다!
메릴 스트립이 눈부시지만, 네이단도 정말 끝내주거든요. 영화 꼭 보셔요!!!!

coolcat329 2021-11-18 12:10   좋아요 1 | URL
아 그렇군요! 캐빈 클라인이니 충분히 알것같습니다. ㅎ 넵~알겠습니다~^^

망고 2021-11-18 12: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정말 재밌게 읽었는데 리뷰가 너무 반가워요😄매들린이 제발 레너드랑 헤어져야 할텐데 하며 애태우며 읽던 기억이...ㅎㅎㅎㅎ

Falstaff 2021-11-18 12:09   좋아요 2 | URL
레너드가 그래도 최후의 양심도 있고 매들린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증거도 있어서 좀 측은하더라고요.
아, 아직 안 읽으시는 분들, 레너드가 마지막에 죽지 않습니다. 저는 주인공의 죽음으로 결말 내면 기본이 별 셋에서 시작해 더 아래로 내려보냅니다. ㅋㅋㅋ

바람돌이 2021-11-18 1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관심 1도 없던 소설을 항상 보고야 말겠다고 결심하게 만드는 Falstaff님
오늘도 Falstaff님 뽐뿌를 읽다가 첫 댓글 김장감에서 푸하 터졌습니다. ㅎㅎ

Falstaff 2021-11-18 13:58   좋아요 0 | URL
이런 애교스런 오타면 이걸 칭찬을 해야 하는지, 야단을 쳐야 하는지 말입니다. 근데 심했어요. 후끈 하는 순간에 그만 ㅋㅋㅋㅋ

그레이스 2021-11-18 13: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심리학에서도 우울증 안에 자신을 가두는 경우를 얘기하기도 하죠
하지만 그것도 자신이 어쩔수 없는 무의식의 작용이므로 어쩔 수 없겠죠?!
읽어보면 알거라는 말씀에 더이상 얘기 안할께요^^

Falstaff 2021-11-18 14:00   좋아요 2 | URL
저 친구 레너드는 좋은 머리를 이용해 처음엔 매들린 집안의 부를 이용하려 하거든요. 그 기미를 채고 매들린이 이렇게 물어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ㅎㅎㅎ 이 양반도 빅토리아 시대 소설 풍을 따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읽는 일에 속도가 나지는 않습니다. 간혹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고요.
 
해무 김민정 희곡집 1
김민정 지음 / 연극과인간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1974년 당진 출생인데, 이 당시에 당진 가려면 천안, 온양 지나 신창고개부터 비포장도로로 하루 왼 종일 가야 했던 오리지널 아부지, 돌 내려가유, 였다. 단국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예종에서 박조열, 윤조병을 사사하며 본격적으로 희곡 쓰기를 시작했는데, 여러 장르 가운데 희곡을 선택한 것이 기가 막혀서 데뷔작인 <가족 왈츠>가 국립극단 신작희곡 페스티벌에 덜컥 당선, 2004년 극단 움툼*이 연우소극장에서 초연을 한다. 이 책 《해무》가 김민정의 첫 번째 작품집으로 표제작을 포함해 모두 다섯 작품이 실려 있는데, 모두 연극제 당선이나 연극상 수상, 문화재단의 창작지원사업 선정 등의 영광을 누린 것들이다. 이 정도면 가까운 앞날에 김민정이란 이름이 우리나라 연극사에서 반짝, 빛을 발하리라고 짐작할 수 있겠다. 실제로 연극관련 전문 출판사 ‘연극과 인간’은 《해무》를 찍고 9년 후인 2020년에 이이의 두 번째, 세 번째 희곡집 《너의 왼손》과 《하나코》를 출간한다.
  소설이라고 그렇지 않겠느냐만, 보다 다중에게 접근하는 극문학으로의 희곡이라서 그런지 작품마다 다 사연이 있다. 소설은 작가 한 명이 작품과 관련한 인터뷰나 자료조사 같은 작업을 위해 소수의 인물, 사건, 이야기에 접근을 하겠지만, 연극은 희곡의 집필부터 극에 올라갈 때까지 스태프와 연기자들과 많은 관계자와 복잡하고 다양한 얽힘이 있어서, 작가는 책의 뒷부분에 “극작과 공연에 관한 후일담”을 재미있게 적어놓았다. 이것도 김민정의 재치고 배려라고 생각할 수 있다. 후일담은 대개 재미있거나, 감동적인 스토리가 많으니.

 

  첫 번째 작품 <가족 왈츠>는 전직 경찰관이자 단란한 가족의 가장인 아버지가 18년간의 교도소 복역을 마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한두 해도 아니고 18년 복역이면 당연히 중죄인이었다. TV <인간극장>에 소개된 실화를 모티브로 했다는데 말 그대로 모티브, 힌트를 받았을 뿐이지 정말 이런 가족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일 듯. 아버지, 엄마, 이모, 그리고 인수, 이렇게 네 식구가 단란하게 생활하다가 새 집을 사서 이사한 날, 이모가 가르쳐주어 아버지와 엄마가 서투르게 왈츠를 춘다. 서로 발을 밟아가며. 그래서 제목이 <가족 왈츠>. 김민정에게 가족이란, 가족의 구성원으로 제일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식구들이 빠짐없이 모여 단란하게 저녁 식사를 하는 것 같다. 18년 만에 출옥해 돌아온 아버지가 집에 오니 엄마, 집엔 아내밖에 없다. 이게 작품의 시작이다. 인수는 벌써 남미, 자신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완벽한 자유지대로 떠나버렸다. 식탁에 앉은 부부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날을 맞춰 터벅거리는 특유의 발자국 소리를 내며 아들 인수가 집에 돌아온다. 스포일러가 아니라는 믿음으로 한 마디만 보태면, 엄마는 3년 전에 이미 자살을 해버렸다는 점.

 

  두 번째 <십 년 후>를 제일 재미나게 읽었다. 극단 작은신화의 우리연극만들기 공모 당선작으로 아주 평범하지만 조금은 특별한 30대 중반의 여자들이 10년 만에, 10년 전에 약속한 대로, 만남을 갖는 이야기. 하필이면 폭우가 내리는 날이다. 수진, 주리, 희남이란 이름을 가진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었으니 한 남자를 사랑했다는 것. 수진과 주리는 몸과 마음으로 서로 사랑을 했고, 희남은 남자가 군대에 있던 시절 그이 앞에서 꼭지가 돌게 술을 마셨지만 남자는 앞에다 희남을 두고 두 여자 얘기만 했던 씁쓸한 기억이 있다. 이들 셋은 함께 그 남자를 보러 면회를 간 적도 있고, 주리는 부대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제대하는 남자를 납치해 섬으로 떠났던 적도 있다. 이들 표현대로 한다면 적어도 수진과 주리는 ‘소시지 동서’ 사이다. 수진과 주리는 행복하지 못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고, 중절수술 후유증으로 불임 판정을 받은 희남은 여전히 혼자 산다. 수진은 유럽에서 유학 중인 남편이 연애중이고, 주리는 자기가 다른 남자와 연애중이다. 이미 30대 중반에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를 챈 여자들의 수다. 10년 전의 복잡한 갈등도 이미 삶 속에 다 녹아버린.

 

  세 번째 작품이 조금 각색해서 영화로도 만든 표제작 <해무>. 앞의 두 작품과는 완연하게 구분이 되는 리얼리즘 극이다. 주로 학꽁치라고 부르는 공미리를 잡는 배 전진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가난이 죄다. 선장 강성진은 빚을 갚지 못해 이번에 공미리 만선을 하지 못하면 배를 빼앗길 처지이지만 이상기후 탓인지 공미리는 여간해 잡히지 않는다. 작품에는 선명하게 나오지 않지만 강선장은 ① 출항하기 전부터 이럴 때를 대비해서 공해상에 나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밀입국하려는 조선족 서른 명을 태워주기로 약속을 했거나, ② 어획량이 턱없이 부족해지자 무선 암호로 밀항에 가담하기로 했을 것이다. 그래 원래는 잡은 생선을 보관해야 하는 밀폐 창고에 서른 명이나 되는 밀항자들을 싣고 상륙을 해야 했지만, 때마침 근해에서 해경들이 정기 훈련을 하고 있어 예상보다 오래 바다에 머물게 된다. 그러다 열대성 저기압이 태풍으로 변해 북상하기 시작했고, 안전을 위해 밀항자들을 창고로 내려보내고 비바람을 견뎌내는데, 그동안 그만 창고 안의 밀항자들이 전부 질식사해버린다. 강선장이 내린 결정은 수장. 모두 바다에 빠뜨려 상어 밥을 만들려는데 어쩔 수 없이 밀려드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죄의식. 여기에 선원간의 갈등과 선장-선원 사이의 갈등, 그리고 빠질 수 없는 로맨스도 섞인다.

 

  네 번째 작품 <나, 여기있어!>는 여섯 그룹의 독립적인 이야기를 섞은 복잡한 구도를 한 작품으로 역시 삶의 고단함, 가난으로 인한 가족간의 살인과 합동 자살 시도 같은 우울한 이야기를 담았다. 아무리 예술이라지만 과장된 패륜과 폭력이 독자로 하여금 눈을 찌푸리게 만들어 개운하지 않았다. 도시 빈민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아무리 그래도 한 편의 희곡 안에서, 리얼한 폭력과 살인과 유사 섹스를 보는 독자를 이렇게 한 방에 훅 가게 만들면 되겠어? 마지막 작품 <길삼봉 뎐>은 선조 22년에 실제 있었던 기축사화를 소재로 한 허구다. 서인 송강 정철이 정여립의 난을 치죄한다는 핑계로 동인들을 잡아 죽이는 과정에, 신하들의 권력다툼을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는 임금 선조, 그리고 이에 반대하는 동인 측 사람들의 총체적 권력의지, 즉 더러운 정치판을 그린 사극. 결론은 정치엔 절대선도 절대악도 없고 오직 권력의지, 불나방같은 정치지향 뿐이란 건데, 새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섯 작품을 실었고, 이 가운데 세 편의 작품이 좋았으면 독자 입장에서 상당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작품이라 여태 몇 번에 걸쳐 공연을 한 바 있는 <해무>를 보면, 나는 영화로도 봤는데, 이런 작품을 쉽게 영화로 만들면 오히려 지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희곡을 읽은 후에야 확신했다. 소극장 공연을 조건으로 하고 쓴 희곡을 대형 스크린 상영이 목적인 영화로 만들기엔 무엇보다 장소가 너무 단조롭다. 영화를 보면 거의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그리 크지 않은 선박의, 벌써 여러 컷이나 찍은 같은 장소가 무수하게 나올 수밖에 없다. 기관실에서 동식과 홍매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조차, 조만간 비슷한 일이 비슷한 장소에서 벌어지겠다는 짐작을 할 수 있었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다보니 배우들은 이를 만회하기 위하여 오버액션을 해야 하거나, 영화감독이 그렇게 주문을 했을 수도 있다. 하여튼 희곡을 읽으면서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것도 즐거움이라고 여겨야 할 듯.

 

 


* 극단 움툼. ‘움툼’은 ‘움이 트다’와 전혀 관계가 없다. 영어로 자궁womb, 즉 수태에서 시작해 무덤tomb 죽음까지 한살이를 아우른다는 의미로 작명했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21-11-17 10: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움툼의 작명 의미도 신박합니다.
읽어보고 싶은 희곡집이네요. 찜!
김민정 작가를
또 이렇게 소개받아 알게 되네요 ^^

Falstaff 2021-11-17 08:28   좋아요 5 | URL
저도 ‘움툼‘인지 ‘움틈‘인지 여간해 모르겠더라고요. 눈에 가물가물하게 보여서요. ㅋㅋㅋ 그래 검색을 해봐서 알아냈답니다. 좋은 작명입니다!
별을 하나 뺀 건, 다섯 작품 전부 다 좋다는 얘기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

프레이야 2021-11-17 10:46   좋아요 2 | URL
팔스타프 님 리뷰는 언제나 재미와 의미 모두 갖춘 완벽리뷰라 제가 좋아합니다.
눈이 ㅠ 고 심정 제가 넘 잘 알지요 ㅎㅎ
그래서 교정 보다가 요샌 놓치는 게 있어 파일로 받아 확대해서 본답니다 ㅋㅋ

Falstaff 2021-11-17 12:02   좋아요 0 | URL
아이고, 이런 황감한 말씀을 하시면.... 몸둘 바를 모르잖습니까. ㅎㅎㅎㅎ
눈이 참 기특하게도, 근시 난시에 노안까지 다 있는데요, 글쎄 책 읽는 거리만 딱 잘 보이는 겁니다. PC까지는 조금 촛점이 맞지 않아 요새 오타가 좀 많고요. ㅋㅋ

다락방 2021-11-17 14: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해무>는 영화의 존재도 몰랐는데 희곡이 원작이었군요. 써주신 줄거리를 보니 뭔가 장편소설 됐어도 되게 좋았을 것 같아요. 무섭지만 뭔가 진한 소설이 됐을듯요.

Falstaff 2021-11-17 15:03   좋아요 2 | URL
예. <해무>를 장편소설로 썼다면 미스테리나 스릴러로도 좋았을 거 같습니다. 위에 얘기하지 않았는데 잔혹한 장면도 있어서 정유정이 썼더라면 말 그대로 피바다가 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ㅋㅋㅋㅋ
서른 명이나 되는 밀항자가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coolcat329 2021-11-18 08: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2,3번이 저도 맘에 드네요. 전체적으로 어두운 분위기에 미스터리,스릴이 있는거 같아요.

Falstaff 2021-11-18 08:21   좋아요 1 | URL
연극이라는 장르가 사실을 좀 과장하는 측면이.... 있는 거 같아요.
저 잉글랜드의 셰익스피어도 예외는 아니었잖습니까.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