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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라는 소설 1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김희용 옮김 / 민음사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브라운 대학 동급생 세 명의 삼각관계 이야기라고, 아주 거칠게 이야기할 수 있다. 원래 애정을 깔고 하는 삼각관계라는 것이 워낙 재미있는 것이라 TV 드라마, 소설, 희곡 등을 망라해 비슷비슷한 내용을 복제해왔음에도, 21세기 A.I 인공지능의 시대에 접어들어서도 여전히, 삼각관계라는 착착 달라붙는 감칠맛은 계속되고 있다. 이 책에선 한 명의 부르주아 여주인공 매들린 해나와 두 명의 브라운대 동급생 레너드 뱅크헤드, 미첼 그라마티쿠스가 등장한다. 매들린 해나는 코네티컷 대학 학장을 하다가 60대 중반에 벡스터 대학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뉴저지의 프리티브룩으로 이사를 한 올턴 해나의 둘째 딸이다. 생전 돈에 관한 한 부족해본 적이 없다. 레너드 뱅크헤드는 거의 틀림없이 골동품 중개상을 하던 아버지와 가정주부 어머니 두 명 다 알코올 중독자인 것 같으며, 그들로부터 형질을 물려받아 심각한 조울증 상태에 빠져버린 생물학 전공자로 반half 천재 정도로 평가할 수 있는 두뇌의 소유자다. 부모는 벌써 이혼했다. 아버지는 벨기에에 사는 젊은 여자한테 날아가 정착해버렸고, 생활력은 강하지만 아버지와 같은 성gender이라는 이유로 레너드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어머니와 오리건 주 바닷가에서 불량하게 살다가, 딱 일 년 독하게 공부해 가장 건전한 가출 형식, 전 학기 장학금의 수혜를 받고 동부의 명문 브라운대학에 입학했다.
이 브라운 대학이 바로 작가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모교다. 삼각관계의 세 번째 주인공 미첼 그라마티쿠스는, 부계가 그리스, 모계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이며, 대학을 졸업한 후에 유럽 각지와 인도 콜카타에 가서 마더 테레사와 합류해 자원봉사 경험을 하는데, 딱 유제니디스가 그랬다. 유제니디스와 다른 건 미첼이 종교학을 전공해 눈부신 성과를 냈다는 점 딱 하나. 심지어 자기가 태어났고 아직 부모가 사는 곳도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중산층)인 것도 같다. 그렇다고 미첼 그라마티쿠스를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도플 갱어라고 볼 필요는 없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허구다.
우리말 제목을 “결혼이라는 소설”이라고 했다. 원래 제목은 “결혼 플롯: Marriage Plot." 영문과를 졸업한 여자 주인공 매들린 해나가 대학시절 내내 관심을 쏟는 것이 빅토리아 시대에 쓰인 소설 가운데 결혼을 플롯으로 한 작품을 분석하는 작업이었다. 제인 오스틴은 사실상 섭정시대 작가라 예외로 하고,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가 떠오른다. 또 헨리 제임스가 쓴 <한 여인의 초상>. 이 두 작품의 공통점은 전 시대, 오스틴의 <에마>에서 볼 수 있듯이 결혼과 더불어 이야기를 종료하는 플롯을 채택하지 않고, 결혼을 하고나서 비로소 본격적인 갈등을 시작한다는 거. <미들마치>에선 도로시아 브룩이 16세 많은 국교회 목사 에드워드 커소번과 결혼해서 완전히 권위적인 가부장제에 질식해가며, <한 여인의 초상>의 이사벨 아처는 잘 생기고 매너 좋을 것 같은 길벗 오스먼드와 결혼해 이모부로부터 증여받은 7만 달러, 현재가치로 대충 250억 원 가량 되는 재산의 권리를 구사해보지도 못할 처지로 떨어져버리는 이야기다.
18세기나 19세기 초반의 작가, 예컨대 새뮤얼 리차드슨의 <파멜라>나 제인 오스틴의 <에마> 등의 주인공이었다면, 이들은 이렇게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결혼에 골인해서 행복하고 모자람 없이 오래오래 살다가 둘이 손을 꼭 잡고 한날한시에 같은 침상에서 늙어 죽었답니다, 로 끝났을 것이란다. 즉 주인공 매들린 헤나가 전공하는 소설분야인 동시에, 메들린이 졸업을 하고 곧바로 동거를 거쳐 결혼에 이를 것이란 점은 처음부터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결혼이 결론이냐, 갈등의 시작이냐 하는 것만 남았을 뿐.
주인공들이 각기 영문학, 생물학, 종교학을 전공한다. 그것도 매우 공부를 잘한다. 제프리 유제니디스는 여기에 제일 중요한 주인공 매들린의 주 관심사를 빅토리아 시대의 소설로 묶어버려, 헨리 제임스를 이어가려 하는 것처럼 보이는 영국의 앨런 홀링허스트와 비슷하게, 세밀하고 유장해서 자칫하면 장황하다고 느끼게 하는 문장과 단락을 사용한다. 매들린과 미첼의 전공을 설명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소설가와 그들의 작품, 신학적 용어와 예배의 형태 등을 묘사하기도 한다. 바로 이점 때문에 이 책이 기대한 것만큼 재미없다, 라고 느낄 수도 있겠다. 독자의 그런 심정을 이해한다. 하지만 스토리에 등장하는 작품들을 진짜로 읽어본 독자는 <파멜라>, <에마>, <다니엘 데론다> 등의 작품은 물론이고, 위에 인용한 작가들 외에도 로렌스 스턴, 헨리 필딩, 개스켈 부인 같이 여간해 거명하지 않는 작가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도 반갑고 흥미롭다. 그럼에도 민음사가 넉넉하게 편집을 했지만 해설 없이 1천 페이지가 넘는 두 권 분량의 장편소설을 쉽게 시작하기는 좀 부담스러울 수 있을 듯하다.
매들린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겨우 한 번의 성경험이 있을 뿐이다. 그게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그냥 한 번 해봤을 뿐, 상대를 사랑한다거나 뭐 그런 감정적인 영향은 거의 없었다. 대학에 진학하고 공부 이외에서 가장 큰 관심사는 당연히 사랑을 나누는 일이었는데, 이제 그걸 하려면 진짜 사랑이 필요했으며 그것도 급했다. 왜냐하면 여자의 몸 특정한 부분도 마치 귓불과 같아서 한 번 뚫어놓았으면 계속 사용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막혀버릴 것 같은 강박이 있었다고 한다. 입학하고 처음 친해진 미첼을 크리스마스 휴가 때 자기 집 프리티브룩에 초청해 함께 기차를 타고 가서 며칠을 묶으며 매들린의 부모와 더불어 재미있는 연말을 보낸다. 이 휴가 동안의 하루, 매들린은 2층 침실에서 잠잘 준비를 하던 미첼의 방에 들어가 페로몬을 분사하지만 미첼은 마치 당연하게, 아주 깍듯한 예의로 그냥 돌려보낸다. 이런 내용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 매들린이 프랑스에 머물고 있는 미첼에게 편지를 써 알게 된다.
매들린은 3학년이 된 후에야 영화 제작자를 희망하는 첫 번째 진지한 남자친구 빌리 베인브리지가 생기고, 아늑하고 안락하고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성경험을 하지만 포경수술을 한 자신의 생식기에 크게 불만이 있고, 창문을 통해 매력적인 금발 여자와 이란 국왕의 조카딸 파티마 시라지, 이렇게 적어도 두 명 이상의 벌거벗은 여자애들과 나신으로 누워 있는 것을 목격하고 헤어진다. 다니브 칼라일이란 이름의 두 번째 남자는 연극 전공자로 연기 워크숍에서 만난다. 완벽한 육체를 지녔지만 모델 일을 잘 하기 위해 연극을 전공하며, 외모 말고는 높이 평가할 게 없고, 외모도 (브라운 대학이 있는)로드아일랜드의 프로비던스에서나 근사하지 뉴욕에 가면 쌔고 쌘 수준이라 끝을 냈다.
세 번째 등장한 애인이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레너드 뱅크헤드. 문제적 인물이다. 극단적 조울증 환자이며 반 천재. 또는 준 천재. 윌리엄 스타이런의 소설에서 말고 앨런 J. 파큘라 감독의 영화 <소피의 선택>에 나오는 네이선 같은 스타일이라고 하면 얼추 맞겠다. 조증이 돋으면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세상의 둘도 없는 캐릭터이지만 그것이 끝내 파멸로 갈 수밖에 없는 처지. 그러나 천재성이 자신의 질병을 치유할 정도는 되지만, 이 병력 때문에 앞으로 직업을 얻기도, 그것을 유지하기도 어려울뿐더러, 주위 사람의 이력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임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불운한 남자이기도 하다. 아, 레너드 이야기는 그만. 너무 깊이 들어간다.
그리고 멀리서, 가까이서 이들을 관찰하며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는 또 한 명의 주인공, 분량은 좀 되지만 그러나 조연에 가까운, 우리의 불쌍한 미첼 그라마티쿠스.
잊히지 않는 대사. 조울증으로 늘 문제를 일으키는 레너드를 향해, 지친 매들린은 이렇게 묻는다.
“내 말은, 가끔은 네가 우울을 즐기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라는 거야. 뭐랄까 우울하지 않으면 모든 관심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듯 말이지.”
왜 잊히지 않을까. 읽어보시면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