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와 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4
귄터 그라스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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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귄터 그라스가 1961년에 완성/발표해서 1963년에 출간한 책으로 <양철북>에 이은 단치히 3부작 가운데 두 번째 노벨라 작품이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개들의 세월>이 있다는데 아직 번역을 하지 않은 모양이다. 작품의 무대는 1939년부터 1945년 초까지. 형식은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나 화자 필렌츠가 주인공 말케에게 내레이션을 하는 2인칭 시각이다. 물론 전형적인 2인칭 소설은 아니지만. 큰 그림으로 본다면, 필렌츠를 비롯한 친구들 사이에서 수영도 못하는 별 볼 일 없는 말케가 ‘위대한 말케’로 올라갔다가 전쟁 말기에 실종되기까지.
  말케는 목에 다른 사람보다 훨씬 큰 울대를 지니고 있다. 이 울대뼈를 라이트모티프로 해서, 울대뼈가 아래위로, 좌우로 움직이는 모습을 쥐로 착각한 고양이로부터 공격을 받는 첫 장면부터, 말케를 쥐를 달고 다니는 사람, 더 나가서 피공격자인 쥐를 연상하게 된다. 즉 울대가 나타나는 장면이 오면 말케에겐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그런데 책 속의 실제상황에서는 한 번도 진짜로 살아있는 쥐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 첫 장면인 슐락발(이라는 독일 스포츠) 경기장에서 관리인의 검은 고양이가 나와 잔디밭에 잠들어 있는 요하임 말케의 움직이는 울대를 와락 덮치는 장면을 연출하고, 이후에도 몇 번 등장한다. 이 작품의 핵심 은유는 제목 그대로 고양이와 쥐. 쥐는 말케, 보기 좋지 않지만 눈에 잘 띄는 울대를 가지고 있고, 본인 스스로도 이를 가리기 위해 여러 장치를 하는 주인공.
  그러면 고양이는 누굴까. 말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일 수도 있고, 전쟁 상황일 수도 있으며, 이것들을 다 합쳐 사회라고 해도 좋겠다. 역시 첫 장면을 보면, 고양이가 말케의 울대를 쥐로 착각하고 덮치는 장면을 기억하는 필렌츠는, 그 장면이 고양이 스스로 공격을 감행한 것일 수도 있고, 친구들, 우리 중 누군가가 고양이를 들어 올려 말케의 목에 올려놓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이 고양이를 들어 말케의 쥐를 보여주었을 수도 있다고, 확실하지 않다고, 그래서 어떤 경우든 가능하다고 말한다.
  비평가들은 이 책을 평하면서, 당시의 소시민들이 전쟁영웅을 동경하고 기사 십자훈장을 최고의 자랑거리로 여기는 무비판적 사고방식을 가졌던 것을 비판하고 있다며, 결론적으로 독일인이라면 나치 수뇌부뿐만 아니라 소시민들 역시 전쟁의 공범이었음을 그로테스크하게 폭로한 작품이라고 했다(출판사 제공 책 소개 요약). 물론 그렇게 읽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더구나 세계대전을 개전했으며 6백여 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나라의 국민이라면 그리 읽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좀 다르게 읽었다. 아마 주요 등장인물들이 하이틴 세대여서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스토리 자체를 즐겼다. 제목과 이들의 행위가 어떤 것을 비판하거나 은유하는지 궁리하는데 신경 안 쓰고 말케라는 인물의 행동 자체가 너무도 흥미로웠으니.

 

  말케라는 매력적인 주인공을 소개하자. 뛰어난 운동신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수영을 못하는데, 이게 안 배운 건지, 못 배운 건지 처음부터 아리송하다. 차이카 급 소해정으로 짐작되는 배가 1939년에 발트해 연안에 침몰했을 때 말케는 분명히 수영을 하지 못했었다. 수영 강습에 꾸준히 다녔음에도. 하다못해 강습에서도 거의 유아반 수준의 어린아이들하고 배웠다고 할 정도인데, 소해정이 침몰해 친구들이 잠수해서 배의 부품이나 표지판들을 뜯어내온다는 걸 듣고는 단박에 수영을 배워버린다. 그것도 모자라 불과 며칠도 되지 않아 침몰한 배(선박의 일부는 물 위에 드러나 있음)까지 친구들이 수영을 해서 갈 시간이면 동시에 출발했음에도 벌써 도착해 이미 잠수 한 두 번을 하고 나왔을 정도다. 이게 또 일취월장이라, 늘 (울대를 가리려는 의도를 별로 드러내지도 않지만 화자가 훤하게 알고 있음을 눈치 채지 못하고)목에 걸고 다니는 드라이버를 사용해 배의 뚜껑, 널빤지 조각, 발전기 부속품에 이어 독일제 소화기까지 건져낸다.
  그러다 굴뚝이 두 개 달린 병원선이 입항을 한다. 말케는 수영을 해 멀리 떨어진 배에 잠입해 이음매가 없는 영국제 셰필드 금속 드라이버, 아직 기름칠이 벗겨지지 않은 신품을 하나 훔쳐 가져온다. 해가 바뀌어 1940년 여름. 말케는 다시 소해정에 들어가 더 오래 잠수를 하고 새 드라이버를 이용해 수병의 선원용 가방을 꺼내오는데, 이 속에 손바닥만 한, 폴란드 독수리 밑에 메달 수여 날짜와 소유자의 이름이 새겨있고 뒷면엔 파우수트스키 원수가 부조되어 있는 동메달도 있고, 쳉스토호바의 검은 성모 같은 것도 들어 있었다. 나중엔 배 안의 눅눅하지만 공기가 통하는 작은 공간을 발견하고, 레코드는 없으나 고급 축음기까지 들어 내온다. 그러나 문제는 절도.
  거의 모든 체육에 탁월하고, 공부벌레 타입이 아니라 적당히 노력해도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면서도 누구나 자기 것을 베껴 쓰게 허용하고, 결코 고자질을 하지 않으며, 불결한 장난에 동참하지 않아 어느새 ‘위대한 말케’의 자리에 우뚝 선 주인공을 한 방에 추락시키는 일이 벌어진다. 이게 이 책에선 가장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된다. 말케와 친구들이 다니는 학교의 선배이자, 유보트 함장인 선배가 기사 십자 훈장을 단 채로 학교에 방문에 연설과 체육활동을 하는데 쥐도 새도 모르게 훈장을 훔쳐 버린 것. 교장을 위시로 해서 난리가 나고 평소에 싱글싱글 잘 웃는 부슈만이 또 한 번 히쭉 웃었다가 대표로 끌려나와 귀싸대기를 수없이 얻어터지는 일이 벌어진다. 며칠 후 말케가 훈장을 선배에게 돌려주고 얻은 건 퇴학처분.
  이 와중에 날짜는 가고, 주가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가서, 말케와 친구들 역시 전쟁에 나가야 하는 시절이 온다. 말케는 탱크 부대에 들어가 숱하게 많은 소련 탱크를 파괴하고 직접 철십자 기사 훈장을 받기에 이르는데, 이 과정, 말케가 훈장을 동경해 그걸 훔쳤고, 돌려주고, 기어이 입대해 다시 훈장을 받고, 그것도 모자라 훈장을 훔친 이유로 자기를 퇴학시킨 학교에서 연설을 하겠다고 제의했다가 좌절하는 장면을 두고 독일 평론가들은 저 위에서 이야기한 ‘모든 독일 국민이 전쟁의 공범’이라 주장했다 하는 거 같다. 말케가 훈장을 받아 그걸 가슴에 달고 휴가를 나올 당시의 나이가 한 열아홉 정도. 말 그대로 하이틴. 물론 성인이지만 아직 청소년의 때가 완전히 빠지지 않은 젊은이의 잘못된 동경을 반드시 정치적으로 볼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표지 그림을 귄터 그라스가 직접 그렸다. 고양이 목에 걸린 것이 기사 십자훈장 Knight Cross. 그러니 정치적으로 책을 읽는 것이 작가의 의도대로 읽는 독법일 것이다. 맞는 독법을 가지고 이러니저러니 우기고 싶은 마음은 하나도 없지만, 스토리만 가지고도 무척 재미있는 소설을 나처럼 읽는 독자가 한 명쯤 있어도 설마 세상이 뒤집어지겠는가. 그만큼 파란만장한 인물이 요하임 말케다. 어린 나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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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5-17 09: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말케 같은 애가 한반이거나 같은 동네 살면 친구하고 싶을 거 같은데, 이 책에서는 왕따(? 은따?) 당해서 참 신기했어요. ㅋㅋ

Falstaff 2021-05-17 10:00   좋아요 2 | URL
착하다 할 수도 없고, 말이 별로 없어 재미나지도 않지만 하여튼 꽤 오래 잊지 않고 연락할 수 있는 친구가 되지 않았을까요. ㅋㅋㅋ 술도 잘 마실 거 같고요.
염병할 같은 반 친구, 데미안 비슷....하다는 생각을 은근히 했었습니다만.

바람돌이 2021-05-17 10: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단치히 3부작이라고요? 지금 양철북 읽으려고 쌓아놧는데 빨리 읽고 읽어야겟네요. 저는 아주 옛적에 양철북 영화가 너무 충격적이어서 - 아마 그 때 어려서 충격적이었던걸거예요. 지금은 뭐.... -귄터 그라스 책 읽어볼 생각도 못했는데, 이 책 소개보니 진짜 빨리 양철북부터.... ^^

Falstaff 2021-05-17 10:53   좋아요 2 | URL
이 책에서도 오스카(양철북 치는 만년 세 살 소년)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얼른 읽으셔요. ㅋㅋㅋ

ye8640 2021-05-25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공감되는 글이어서 댓글까지 쓰라 왔네요.ㅎ 양철북의 작가여서 궁금해서 읽었는데 그 시대의 그런 상황에서 한 소년이 살았었던 이야기.. 담담하게 말케라는 한 소년을 알아가는 과정으로 읽었고 역사소설의 느낌도 났고 했는데..... 읽은 후 비평가들이 글이나 출판사 글이나 모두 거창한 말들이 많아서 당황했다.

Falstaff 2021-05-25 10:18   좋아요 0 | URL
아, 저처럼 읽으신 분이 계시는군요. 반갑습니다.
그냥 즐기는 게 제일이지요 뭐. 전문가들이 뭐라든 간에 독자가 제일입니다. ^^
 
전차를 모는 기수들 1 대산세계문학총서 165
패트릭 화이트 지음, 송기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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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쟁이 해골 영감이 쓴 책이 이리 오묘할 수가! 반나절 동안 160쪽밖에 못 읽은 건 지루해서가 아니라 휘리릭 읽을 만하지 않아서였다. 앞뒤 재가며 읽을수록 재미있는 소설책이 있잖은가. 이 책이 딱 그렇다. 저녁 시간에 술 마시지 못하게 만든 몇 달만의 책! 아직까지 그렇다는 말씀. 기대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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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05-16 08: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왕~폴스티프님 주말 저녁 술을 안 마시게 한 책!

Falstaff 2021-05-16 12:06   좋아요 2 | URL
ㅋㅋㅋ 오늘은 모르겠네요. 어떻게 될지.

붕붕툐툐 2021-05-16 11: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반나절 동안 160쪽밖에?? 하~ 역시 이 속도여야 일 년에 200권 이상이 가능하군요!ㅎㅎ

Falstaff 2021-05-16 12:07   좋아요 3 | URL
말이 반나절이지 어제 오후 세 시부터 밤 열한 시까지 밥 먹는 시간 빼고 몽땅입니다. ㅋㅋㅋㅋ 제 평균 속도가 시간당 30쪽. 근데 이건 어림도 없었어요!

붕붕툐툐 2021-05-16 12:28   좋아요 2 | URL
평균 속도 아시는 거 너무 신기해용! 전 재볼 생각도 못했는데!!ㅎㅎ 저도 책마다 편차가 너무 클 거 같긴 하네요!ㅎㅎ

새파랑 2021-05-16 12: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이렇게 또 한번 물어야 하는건가요 ㅎㅎ 술과 바꾼 책이라니~~!

Falstaff 2021-05-16 17:59   좋아요 2 | URL
ㅋㅋㅋ 기다리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아직 끝난 거 아니니까요. ^^

han22598 2021-05-16 1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주독서는 안하시나보네요 ㅎㅎ 대단하시다!

Falstaff 2021-05-16 18:02   좋아요 1 | URL
옙. 술 마시고 책 안 읽습니다. 물론 전에 코피나본 적 있어서 그렇습니다. ㅋㅋㅋ
댓글도 어지간해서는 달지 않습니다. 지금 시간이 정각 오후 여섯 시, 벌써 쐬주 한 병에다 와인 까서 여기가 바로 천국입니다. ㅋㅋㅋㅋㅋ
 
타타르인의 사막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3
디노 부차티 지음, 한리나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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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노 부차티라고 하는 작가가 있었는지도 몰랐다.
  부차티를 실존주의니 마술적 사실주의니 한다고 하는데, 그런 거 모르겠고, 적어도 내가 읽기로는 정말 아름다운 작품이다. 누구나 살면서 끊임없이 달고 살아야 했던 존재의 상실감에 대하여 이보다 더 애절한 공감을 쓸쓸하게 그린 작가가 있었을까.

 

  디노 부차티.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북쪽으로 백 킬로미터 떨어진 벨루노의 주도 산 펠레그리노에서 수의사 어머니와 국제법 교수를 역임한 아버지 사이에서 1906년에 네 남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명문가의 자제답게 이이도 밀라노 대학에서 국제법을 공부하고 밀라노의 매체에 취직해 저널리즘에 종사한다. 일을 하면서 1933년부터 다수의 단편소설과 장편을 발표했으며 <타타르인의 사막>이 그의 대표작이라고 한다.
  그가 태어난 산 펠레그리노. 흔히들 이탈리아라면 따뜻한 지중해성 기후만 생각하는데, 이곳은 북쪽으로 알프스 산맥이 둘러싸고 있다. 북위 46도 지역. 9월에 벌써 눈이 오고 3월까지 녹지 않는 지역. 그리하여 <타타르인의 사막>에서 북쪽에 광활한 스텝이 펼쳐지는 산악지역을 그렇게 아름답게 그릴 수 있었겠지.

 

  이제 막 고생스러운 생도시절과 함께 풋풋한 청년기까지 끝내버린 초급장교 중위 조반니 드로고. 9월의 어느 아침, 홀어머니와 작별을 하고 최초 부임지인 바스티아니 요새로 출발하는 것으로 작품은 시작한다.
  요새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친구 프란체스코 베스코비와 함께 요새로 통하는 골짜기 입구에 도착해 이별을 고한 다음 홀로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이 부분에서 부차티의 소설을 마술적 사실주의 운운할 수 있게 만드는 장면이 등장한다.
  산그늘이 지고 자줏빛 어둠이 골짜기에 들어찼을 때 거대한 규모의 군사시설과 맞닥뜨린다. 오래되고 황량한 건물, 성벽과 주변 풍경 등 모든 게 음산하고 냉랭한 분위기. 입구를 찾을 수도 없고 불이 켜진 창문도 하나 없는 거대하지만 황량한 곳. 이때 부랑자나 거지로 보이는 남자가 자루를 하나 들고 지나가서 드로고는 요새에 관해 물어본다.
  “이제 이곳에는 요새가 없습니다. 전부 폐쇄되었지요. 인적 끊긴지 족히 십 년은 될 겁니다.”
  드로고가 고개를 들고 산등성이를 올려다보니 저 멀리 까마득하게 보이는 기하학적 구조물이 선을 긋듯 한 윤곽이 보인다. 사람이 닿을 수 없으리만치 세상과 동떨어진 고독한 성.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 같은 곳. 그곳이 바스티아니 요새다.
  산길에서 노숙을 하고 아침이 되어 다시 말에 오르니 골짜기 저편 길에 말을 탄 대위가 가고 있다. 모자를 벗어 아는 척을 해봤으나 본 것 같지 않아, 무례한 짓인 줄은 알지만 크게 고함을 질러본다. 대위는 말을 멈추고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일단 마음이 놓이는 드로고. 30분 쯤 지나 두 길이 서로 합쳐져 만난 대위는 마흔 살 정도로 이름을 오르티츠라고 한다. 대위는 18년 동안 바스티아니 요새에 근무했으며, 드로고와 같은 왕립 사관학교 출신. 가파른 산길을 오르느라 길은 지그재그로 나 있고, 여전히 눈앞에 나타나는 점점 더 높은 길을 걸어 정오 무렵에 드디어 바스티아니 요새에 도착하는 조반니 드로고.
  그곳은 오래되고 낡은 2급 요새. 죽은 국경선. 산맥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펼쳐지는 광막한 스텝지역은 백 년 전과 똑같은 상태로 놓여 있고 저 북쪽 가는 푸른 선처럼 보이는 숲 너머에는 타타르인이라 칭하는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고 전해지는 곳. 그러나 최근 백여 년 동안 그들을 본 사람이 없는 비어버린 국경, 그리고 요새. 30 킬로미터 떨어진 가장 가까운 산로코 마을 말고는 아무런 즐길 것이 없는 극도로 외진 장소. 큰 꿈을 갖고 바스티아니 요새에 도착한 드로고는 곧바로 도시 근방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밖에.
  그러나 노란 성벽을 바라보고 있는 오르티츠 대위의 시선을 따라 가보니 성벽 너머로 보이는 우뚝 솟은 봉우리, 근거 없는 환상과 비슷하게 다가오는 석양 또는 황혼의 빛을 받아 위엄을 더하는 암벽이 다가온다. 그것을 바라보는 오르티츠 대위의 얼굴에 기쁨과 슬픔이 섞인 엷은 미소가 서서히 번져가는 모습. 드로고 중위는 북쪽에 있다는 타타르인의 사막이 어떤 모습일지 보고 싶어진다.

 

  나는 이 소설에 나오는 장소, 황량한 스텝이나 사막을 향한 로망이 있다. 그리하여 내 소원은 몽골의 초원이나 모래 속에 석굴이 잠긴 비단길을 따라가야 하는 서역지방,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에 가보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 속이 텅 비어버리는 듯 감정이 뭉클하다. 연이은 거대 암벽에 석양이나 아침놀이 비쳐 붉은 색깔이 칠해지는 반대편으로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지평선 너머 또 다른 지평선.
  이 소설 <타타르인의 사막>은 이런 광경만 묘사되어 있지는 않다. 명예로운 죽음과 성취를 소망하는 군인들이 외딴 요새에서 벌어질 전투와 용맹의 시범을 가망 없이 수백 년 동안 기다리다 사라지는 상실. 무엇인가를 기다리기만 하다 평생을 보내버리는 요새의 파수병들. 그것이 무엇인지는 직접 읽어보시기 바란다. 절절한 절창.
  책을 읽고 이번만큼 독후감 쓰기 어려운 적도 별로 없었다. 아름답지만 황량한 산악지역과 한도 끝도 없이 펼쳐진 돌과 먼지와 바람의 사막지역을 배경으로 얼마나 독자의 가슴을 아련하게 하는지. 무대가 군대라서 그렇지,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실패자 의식. 당신도 이 감정의 조금을 가지고 있다면 이 작품을 더 아리고 아리게 읽을 수 있을 터이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 작품과의 합이 조금쯤 필요할 듯.

 

  소설 속 초원을 넘어 이쪽 요새를 향해 진군하는 북국의 군사들이 나올 때, 나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오페라 <보이지 않는 도시 키테츠>를 떠올렸다. 저 끝도 없는 벌판에 오밀조밀한 까만 점들이 점점 다가오면서 거대한 먼지구름을 일으키나 했다가 드디어 높은 음정의 군호와 함께 둥근 칼을 흔들면서 질주해 쳐들어오는 타타르 병사들. 거대한 스텝의 한 가운데에 있는 요새 도시 키테츠는 갑자기 타타르 군대의 눈에서 사라져버리는 반면, 바스티아니 요새엔 한 대의 안락하고 화려한 사륜마차가 도착한다. 저 먼 먼 날 조반니 드로고가 왔던 길을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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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5-14 09: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사놓고 아직 안 읽었는데 별 다섯! 레삭매냐님도 별 다섯 주셨던 것으로 기억... 기대합니닷.
폴스타프 님 사막 좋아해서 <둔황>도 좋아하셨군요! ㅋㅋ

Falstaff 2021-05-14 09:47   좋아요 1 | URL
넵넵넵! ㅋㅋㅋㅋㅋㅋ
<둔황> 칭하기를, ˝나만의 명작˝ ㅋㅋㅋㅋ 아무도 동의하지 않는 줄 알면서도요!!!

유부만두 2021-05-14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려워 보이는데요, 오늘 전 만화만 볼겁니다. 일단. 보관..(주섬주섬)

잠자냥 2021-05-14 10:45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유부만두 님 서재 ‘보관함의 달인‘ 아니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05-14 10:47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 보관함의 달인...

유부만두님, 이거 어렵지 않아요. 읽으면 직빵으로 접수됩니다!!!
마음 여린 사람은 울지도 몰라요. ㅎㅎㅎ

새파랑 2021-05-14 11: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별 다섯개라니. 왠지 제 취향에 딱 맞을거 같아요 ㅋ 아리게 읽을 수 있다니~!!

Falstaff 2021-05-14 12:09   좋아요 4 | URL
아, 진짜 좋습니다.
저처럼 사막이나 스텝에 대한 로망이 없어도 이 책은 충분히 즐기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레이스 2021-06-14 18:50   좋아요 0 | URL
저는 그 로망 있어요.^^
봐야겠네요

Falstaff 2021-06-14 20:13   좋아요 1 | URL
아이고.... 그러면 만족하실 거예요!!!!

초란공 2021-05-14 13: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알흠답다 하셔서 저도 슬그머니 장바구니로~^^

Falstaff 2021-05-14 13:58   좋아요 2 | URL
옙. 좋은 선택입니다! ^^

바람돌이 2021-05-14 15: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5월이 가기전에 읽을 책으로 줄 세워놓았어요. ^^

Falstaff 2021-05-14 15:48   좋아요 2 | URL
ㅋㅋㅋ 만족하실 겁니다!

붕붕툐툐 2021-05-14 23: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이 리뷰를 쓰기 힘든 책도 존재한단 말입니까? 왠지 황량할 거 같은 제목인데 실제로도 아리게 읽을 수 있다니, 기대가 됩니다!!

Falstaff 2021-05-15 11:00   좋아요 2 | URL
그럼요!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랬다가는 책의 결론에 너무 가깝게 가게 되는 경우가 있잖아요. 이 책이 딱 그렇답니다. 그래서 결국엔 별 내용 없이 소설 주변에서만 왔다리갔다리, 이렇게 별 볼 일 없는 독후감이 돼버리는 거예요. ㅠㅠ

또 시집 읽고 쓰는 독후감은 언제나 어려워요. 지금도 시집 읽은 독후감 쓰려 랩탑 열고나서 한 줄도 못쓰고 그냥 앉아 있는 거랍니다. ㅋㅋㅋㅋㅋㅋ
 
한눈팔기 을유세계문학전집 110
나쓰메 소세키 지음, 서은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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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열면 원서의 제목이 <길가의 풀 道草>이다. 어떤 내력으로 이게 <한눈팔기>가 됐을까? 엉뚱한 제목은 아니지만 원래의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터인데. 내가 아는 분 중에서 나쓰메 소세키를 가장 좋아하는 잠자냥 님의 컬렉션을 보면 출판사 이레에서 나온 책은 제목을 <길 위의 생>이라 뽑았다. 그럴 듯하다. 풀을 한 살이라고 바꾸었을 뿐이니.
  나쓰메 소세키는 나한테 찰스 디킨스 비슷한 인물이다. 두 양반의 작품 성격은 판이하지만, 판이 정도가 아니라 거의 완벽하게 저울의 양 끝에서 팔짱을 낀 채 서로를 꼬나보며 서 있다고 하고 싶은데, 내겐 뭐가 비슷한가 하면, 막상 읽어보면 확 다가오는 친숙감도 별로 없고, 큰 재미도 없어서 에이 이 양반들 책은 이제 그만 읽어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음에도, 인터넷 서핑 중에 안 읽어본 이들의 책이 눈에 띄면 어느 새 보관함에 들어 있고, 또 어느새 장바구니를 거쳐 아파트 현관 앞의 택배 박스에 들어 있게 된다는 거. 근데 이게 내가 앓고 있는 질환은 아니다. 병은커녕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언급을 했듯, 이게 소세키 파워 아니겠느냐, 주장을 해야겠다. ‘소세키 파워’라고 발음하니까 어감이 좋지 않기는 하지만.

 

  <한눈팔기>는 일본산 찌질이, ‘겐조’라고 하는 남자가 주인공이다. 자기 몸에서 버리고 온 먼 나라의 냄새가 배어있는 사람. 이 냄새, 이게 설마 정말로 체취 비슷하게 비강 깊숙한 곳에 있는 후각중추를 자극하는, 피부 분자의 브라운 운동을 말하는 건 아니라는 정도는 읽자마자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터. 먼 나라가 영국이고 겐조가 소세키 본인의 분신 또는 일부라는 것도. 겐조 스스로가 이런 냄새, 즉 이국적 분위기를 싫어하지만 그러면서도 냄새 속에 스민 긍지와 만족은 오히려 깨닫지 못하면서 은근히 풍기고 싶어 하는 것 역시. 소세키가 영국 유학을 떠난 것이 1900년, 노베첸토. 아시아에서 가장 많이 개화된 나라 일본이라고 해도 유럽의 중심으로 유학을 갔다 온 것이 어찌 어깨에 힘을 줄 이유가 되지 못할 수 있었을까.
  소세키 본인이 아버지의 두 번째 정실 아내가 낳은 막내로, 늦둥이의 탄생이 남부끄러워했던 부모에 의하여 유·소년기 때 동네 고물상(또는 배추장수)을 거쳐 어느 부부에게 입양을 보냈다고 한다. 소세키를 입양한 부부는 자신들이 늙은 다음에 노후 부양을 위해 소세키를 애지중지 키웠다고 하는데, 이 장면이 책 속에서 겐조를 입양한 시마다 부부의 모습으로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다가 시마다 부부가 이혼을 하면서 입양한 겐조를 다시 생부모 집으로 복적復籍시키는 과정에 친부모가 그간 겐조를 부양하는데 들어간 시마다 부부의 비용 등을 정산하고, 더 이상의 요구를 하지 않을 것임을 문서로 작성한다. 세상에 아름다운 이별이 어디 있나. 이렇게 겐조 가족과 시마다 가족은 금전적 결산을 통해 완벽하게 절교 상태로 돌입하여, 이후 겐조가 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취직을 하고, 당시만 해도 잘 나가던 공직자의 딸과 혼인을 하고, 맏딸을 낳고, 영국유학을 다녀오고, 둘째딸을 낳을 때까지 20년 가까이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지낸다. 소세키도 혹시 이러지 않았을까. 그러나 소설은 아무리 자전적 소설이라 하더라고 완전히 같을 수는 없으니 짐작만 하고 넘어가자.
  어느 비 오는 날, 겐조는 비옷도 없고 장화도 없이 그냥 우산만 쓴 채 외출을 하게 된다. 길을 가다 인력거 집 바로 앞에서 어느 노인을 마주친다. 아무리 적어도 육십오륙 세. 아직도 검은 머리카락이 성하지만 비 오는 날 모자도 없이 외출하는 버릇은 여전하다. 노인은 겐조가 지나갈 때까지 유심히 바라보고 이날의 만남은 그것으로 끝난다. 며칠 후, 또다시 외출을 한 겐조 앞에 다시 등장한 모자를 쓰지 않은 노인. 겐조가 살아가면서 결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중류 이하로 살고 있는 외모를 한 것을 본 겐조는 적어도 그보다는 더 부유하게 살았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이가 한 시절 자신이 아버지라고 불렀던 남자, 시마다 씨. 일찍이 교만하다는 말을 들었던 인물로, 겐조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 극도로 인색하고 오직 돈을 모으기 위해 인심을 잃었었다고 저 먼 기억들이 조금씩 새롭게 떠오른다.
  글쎄, 이게 어떤 기분일까. 7~8년 엄마, 아빠로 알고 살다가 파양을 하고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만나는 느낌은.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하기 쉽지 않을 듯하다. 나도 그렇다.
  이렇게 <한눈팔기>는 시작한다.
  영국 유학을 다녀와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겐조. 그동안 부유하던 처갓집은 공직에서 쫓겨나고 주식에 실패, 금광에 투자한 것도 실패를 해 거의 거덜이 났고, 이복누나에게 매달 조금씩 용돈을 부쳐주었는데 용돈을 조금 올려주기를 부탁한다. 동복형은 장례식에 입고 갈 하카마(일본 전통의상 중 남성 정장 바지)를 겐조에게 빌려 입어야 하는 신세. 자기 월급 130엔 가지고 인색한 아내가 아무리 수건 짜듯 해도 결국엔 결혼할 때 입고 온 기모노를 전당포에 맡겨야 하는 살림. 여기다 겐조는 경제 개념이 하나도 없고, 오히려 소학교만 나온 아내보다 더 완고한 의식으로 무장해 자기밖에 모르는 천생 샌님. 앞뒤 아래위 왼쪽 오른쪽을 둘러봐도 어디 한 군데 비빌 언덕이 없는 신세다.
  여기에 새롭게 등장한 모자 안 쓰는 노인이자 옛적의 아버지 시미다. 처가에선 장인이 은행 차입을 위한 보증을 서달라고 해서, 은행 보증 서주는 게 지옥을 향한 하이웨이인 줄은 들어서 아는 겐조는 보증 대신 친구의 친구에게 4백 엔을 빌려 장인에게 넘겨주고, 이제 새롭게 나타나기 시작한 한 시절의 아버지가 자기 집에 들를 때마다 돈을 뜯기기 시작한다. 여기에 어떻게 알았는지, 아니면 지독한 우연인지 역시 한 시절의 어머니도 등장해 한 번 올 때마다 5엔씩 교통비 조로 받아간다. 대학교수 월급이 130엔이니까 5엔이면 얼마나 될까? 여기서 끝나나, 어딜. 아내의 배는 나날이 부풀어 올라 작품 후반에 가면 산파가 도착하기도 전에 셋째 딸을 겐조의 손에 낳아버리니 참으로 안타까운 생활전선으로 몰린다고 할 수 있을 것.
  솔직히 얘기하자. 겐조. 정말 지질한 남자다. 딱 한 가지, 남보다 공부하는 머리 좋아 영국 유학을 한 덕분에 사회적 가치가 오른 대학교수일 뿐, 소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아내와 비교해도 고리타분하기 이를 데 없는 천생 꼰대.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적 사고방식은 책이 끝날 때까지 하나도 개선되지 않는 속물. 아내에 대한 변하지 않는 우월감에 전 전근대적 가부장. 근데 이렇게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귀엽다. 왜 그럴까? 이건 나쓰메 소세키가 한 ‘인간’을 등장시켰기 때문이라고 본다. 세상의 어느 소설 주인공이 <한눈팔기>의 겐조처럼 할 것, 해줄 것 다 하고, 다 해주고 칭찬은커녕 오히려 욕(아니면 적어도 쪼잔한 비난)을 먹겠는가 말이지.

 

  그런데, 소세키를 읽는 덴 이런 스토리도 자잘한 재미가 있지만 역시 등장인물들의 심리상태와 일본인들 특유의 섬세한 감정의 묘사가 압권이다. 이건 일본인이 아니면 습관 속에 새겨져 있지 않기 때문에 흉내 내기 어려운 세밀화라고나 할까, 하여튼 사소설적 하이퍼 레알리즘 비슷하다 해야 할까 싶은 감각과 특색 있는 의식의 충돌이랄 수 있을 것. 초두에 디킨스와 소세키가 저울의 양 극단에서 서로 꼬나보고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걸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디킨스는 죽어도 소세키처럼 쓰지 못했을 것이고, 거꾸로도 마찬가지지만, 도무지 두 양반 다 읽지 않고 그냥 넘기긴 지극히 섭섭하다는 공통점. 그리하여 어감은 좀 그렇지만 독후감의 마지막을 이렇게 쓰지 않을 수 없다.

 

  소세키 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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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5-13 09:3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별 다섯 개를 주고 싶어도, 별 다섯은 주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 받아 작성˝한 독자들이 줘서 말입니다, 별 네 개에서 멈췄습니다.
내돈내산은 별 네 개가 만점?

잠자냥 2021-05-13 10:27   좋아요 4 | URL
ㅋㅋㅋ 그래서 전 제 돈 주고 산 책 별 다섯 개 줄 때 아주 쾌감을 느낍니다. ㅋㅋㅋ 이게 진짜 진솔한 별 다섯이다!!!! 막 이러면서 ㅋㅋㅋㅋㅋ

tobewhat 2021-05-13 10:0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일어 道草가 길 가의 풀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길 가는 도중 딴짓을 하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역자는 내용도 고려해서 그렇게 제목을 붙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Falstaff 2021-05-13 10:13   좋아요 2 | URL
아, 그렇습니까. 그래 모르면 병이라니까요. 가르쳐주셔서 고맙습니다.

잠자냥 2021-05-13 10: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 소세키 파워 ㅋㅋㅋㅋ 폴스타프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전 처음 소세키 읽었을 땐 이게 뭐야... 되게 심심하네 했는데, 그 심심함에도 불구하고 자꾸 읽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소세키 작품은 다 읽었는데, 그걸 또 읽고 있더랍니다(제가 한 번 읽은 책 또 읽는 경우는 정말 드물거든요. 세상에 읽을 책이 넘나 많아서리...). 디킨스는 재미나서 계속 읽는다면 소세키는 심심한 맛에 자꾸 읽는 것 같아요. 암튼 그것이 소세키 파워 같습니다.

Falstaff 2021-05-13 10:27   좋아요 2 | URL
그러니까요.
디킨스하고 소세키는 정말 저울의 완전 반대쪽이예요. ㅋㅋㅋㅋ

잠자냥 2021-05-13 10:2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그나저나 겐조=소세키 그 자신이라고 볼 수 있는데, 소세키 정말 한 인간으로는 좋아하기 어려운 남자 같아요. 영국 유학 시절 부인한테 보낸 편지 보면 정말.... 이빨 닦았냐는 둥 머리는 어떻게 손질하라는 둥, 잔소리 장난 아님... 그래도 제자들은 그를 칭송해 마지 않았으니 ㅋㅋㅋㅋ 사회적으로 명성 있는 남자들이 집안에서도 좋은 남편이기 어렵다는 걸 보여준 사례1. ㅋㅋㅋㅋ

Falstaff 2021-05-13 10:30   좋아요 3 | URL
악. 그 정도예요? ㅋㅋㅋ 저런 잔소리 하는 건 아내가 무척 맘에 들지 않는다는 건데 하긴 당시에 눈 맞아 결혼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근데, 그러면 더 잔소리 안 하게 되는 거 아닌가....가 아닌가요? ㅋㅋㅋㅋ

제자가 소세키 칭찬하는 게, 윌리엄스가 스토너 쓰는 거하고 뭐가 달라요. 인간적인 면은 다 꼬부쳐놓고 눈에 좋게 보이는 것만 열라 나열하면 말입니다.
전 스토너를 계기로 모스크바의 로스토프 백작도 다시 보기 시작했다니까요! ㅋㅋ

잠자냥 2021-05-13 10:40   좋아요 4 | URL
나쓰메 소세키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잠깐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하도 웃기고 어처구니 없어서, 제가 메모해둔 내용입니다. 이빨 닦았냐는 건 제 기억 오류고 틀니 하란 잔소리였네요-

-------------------------------------------

틀니는 하는 게 옳을 것 같소. 머리는 둥글게 묶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소. 자주 감으시오. (85쪽, 아내에게 보낸 편지 중)

출산 후 경과가 좋아 건강해지면 틀니를 하시구려. 돈이 없으면 장인께 빌려서라도 하시오. 돌아가서 갚아 드리겠소. 머리는 묶지 않는 편이 머리카락을 위해서도 뇌를 위해서도 좋소. 오드키닌이라는 물이 있소. 비듬이 생기지 않는 약이오. 써 보시구려. 탈모가 멈출지 모르오. (95쪽, 아내에게 보낸 편지 중)

무엇보다 무정하기 그지없는 내가 아내에게만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편지를 보내니 기특하지 않나. 그런 다각형 얼굴이라도 돌아가면 좀 잘해 줄 생각일세. (96쪽, 친구에게 보낸 편지 중)

편지의 분위기를 보아 밤에는 12시를 넘기고 아침에는 9시, 10시경까지 자는 듯하구려. 밤은 그렇다 치고 아침엔 좀 일찍 일어나도록 하시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면 병이 없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니 그건 잘 알고 있을 것이오. 9시나 10시까지 자는 여자는 첩이나 창부, 하급 사회의 여자들뿐이라 생각하오. 적어도 좋은 집안에 태어나 상응하는 교육을 받은 사람 중에 그렇게 단정치 못한 사람은 별로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소. 야라이초 3번지를 한번 살펴보오. 당신을 제외하고 그런 부인들은 하나도 없소. 이건 유학 전에도 항상 하던 말 같은데 당신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구려. 나쓰메의 부인은 아침 9시, 10시까지 잔다고 수군거리면 좀 창피하지 않겠소. 당신은 어찌 생각하오. 당연히 신병은 특별한 일이지만 요전의 편지에 의하면 아주 건강해졌다고 하니, 몸에 이상 없는 한 일찍 일어나도록 신경 써야 할 것이오. 게다가 아이들 교육상 좋지 않을 것 같소. 후데가 성인이 되어 시집을 가서 당신처럼 9시나 10시까지 잔다면 나는 미래의 사위에게 아주 미안한 마음일 게요. 당신 부모님들은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나는 다르오. 노력해서 자신의 결점을 없애는 것이 인간 제일의 의무일 게요. (124쪽, 아내에게 보낸 편지 중)

출처: 나쓰메 소세키, <소가 되어 인간을 밀어라>

Falstaff 2021-05-13 10:49   좋아요 5 | URL
와와와...... 이건 정말, 너무 하네요. ㅋㅋㅋㅋ

저도 (19세기 말 태생이신)외조부가 외조모에게 쓰신 편지 읽어본 적 있는데, 아내를 사랑하는 (아니면 적어도 척하는) 남편이었던지 ‘무뚝뚝한 사랑‘이 은근히 깔려 있어서,
소세키의 편지는 제 고정관념을 완벽하게 깨버리는 데요! 세상에나!!
거 참. (근데 웃음나는 건 참을 수가 없군요. 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1-05-13 21:12   좋아요 2 | URL
하하하하하하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요 ㅋㅋ

mini74 2021-05-13 10: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고양이주인놈이나 다이스케나 너무 쪼잔하다고 일본남자 아웃 이라던 친구가 생각나네요. 일본남자도 괄괄한 내 친구를 아웃할 거 같지만 ㅎㅎㅎ

Falstaff 2021-05-13 11:37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
근데 아무리 찌질하고 쪼잔해도 그걸 구태여 찾아 읽잖아요. ㅋㅋㅋㅋ

유부만두 2021-05-13 11:4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소세키 찌질한데 나긋한 문장과 이야기를 어느새 읽고 있는 나;;;라는 이상한 상황에 어이없지만 그런게 또 매력인가 생각합니다.

Falstaff 2021-05-13 12:15   좋아요 3 | URL
ㅋㅋㅋ 이상하지 않습니다. ㅋㅋㅋ
소세키 파워라니까요!!!

새파랑 2021-05-13 12: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겐조는 향수 아닌가요? ㅎㅎ 몇 작품 안읽어봤지만 소세키 책의 주인공은 전부 경제관념이 없는것 같더라구요 ㅋ 알라딘 우주점 구경가면 항상 소세키 작품 검색해봅니다~

Falstaff 2021-05-13 12:37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소세키 주인공이 경제 개념 없는 건, 소세키가 없어서 그래요.ㅋㅋㅋㅋ
 
따뜻한 흙 문학과지성 시인선 280
조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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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은의 세 번째 시집. 물론 처음 읽는 조은이다. 이름이 참 재미있다. 조은. 검색해보면 조은 DA, 조은 주택, 조은 푸드 육가공, 조은 성모 안과의원, 조은 타이 마사지 등이 나오고 이어서 시인 조은의 사진을 구경할 수 있다. 1960년 안동 생. 1988년에 데뷔하고 몇 권의 시집을 낸 이력밖에는 정보를 구할 수 없다. 특히 바이오그래피는. 하긴 그런 거 알면 뭐 하나. 시인이 시만 좋으면 그만이지.  조은의 시에 관해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 시집을 샀고, 읽었다. 이 시인 역시 주된 관심사는 탄생과 삶과 죽음의 사이클. 이렇게 또 한 명의 시인이 쓴 또 한 권의 나와 맞지 않는 시집을 읽었다. 왜 시인들은 이리도 무거울까. 뭐 진짜로 만나면 내가 번쩍 들 정도의 체중밖엔 나가지 않겠지만 그들이 품고 있는 삶의 정체는 어떤 이유로 이렇게 우울과 죽음의 색조화장을 하게 되었는지 이젠 궁금증을 넘어 의례 그러려니 할 정도가 됐다. 중국에서 열린 시인대회에 참석해 중국의 유명 여류 시인한테 다른 건 몰라도 오줌발 하나는 지기 싫어 중국식 개방형 화장실에서 힘을 줘 오줌을 눴다는 시를 쓴 김민정이 그리울 지경이다. 하긴 지금은 만 61세지만 조은이 이 시집을 낼 당시의 나이가 43세.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아직도 그렇다면 좀 문제지만.
  시집의 제일 앞에 실린 시부터 누군가가 죽는다.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
  여럿이, 한꺼번에, 잠재운 고통을 깨우며,

 

  울고 있다
  동네 개는 모두 짖어대고
  불을 켜려 허둥거리며 나는
  재빨리 모르는 한 죽음에다
  나의 죽음을 겹쳐본다

 

  누군가 죽었다
  누군가 죽었다

 

  어둠의 노른자위에 있는
  나의 손 닿는 어딘가가 썰렁하다
  이곳 어딘가는
  세상을 버린 자와 닿아 있었다
  가쁜 소리를 내던 문도 숨을 멎었다

 

  한때 숨쉬던 흙덩이는
  오열 속에 해체되고 있으리라

 

  이웃들도 불을 켠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죽었다  (전문)

 


  시인이 노래하는 것은? 죽음의 사발통문. 정확하게 이야기해서 시인이 들은 것은 울음소리다. 누구의 울음일까. 둘째 연에서 보듯 동네 개가 한 마리 짖으니 모든 동네의 개들이 이를 따라 짖는 걸 여럿이 한꺼번에 잠재운 고통을 깨우며 울고 있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 여럿이 한꺼번에 잠재운 고통을 깨우며 울고 있어서 이것을 들은 동네의 암캐 수캐들이 따라서 달도 없는 캄캄한 밤에 짖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하여튼 (사람 또는 개들의) 울음소리에 잠이 깨 허둥지둥 불을 켜기 위해 손짓을 하는 시인은, 자신의 방에서 ‘고통을 깨우며’ 누군가가 죽었다고 지레짐작을 하며 거기다 자신의 죽음을 겹쳐버린다. 이 시에서 자신이 잠자고 있던 방은 이 시집 전체에 중요한 기재로 등장한다. 시인은 이미 죽음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이곳 어딘가, 시인이 몸을 뉜 방 어딘가 세상을 버린 자, 죽은 자와 닿아 있다. 문도 숨을 멎었으니 이젠 다시는 열리지 못할 것. 이 문은 다른 시 <문고리>에서 이렇게 표현된다.

 

  삼 년을 살아온 집의
  문고리가 떨어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열고 닫았던 문
  헛헛해서 권태로워서
  열고 닫았던 집의 문이
  벽이 꽉 다물렸다
  문을 벽으로 바꿔버린 작은 존재  (하략)

 

  숨을 멈춘 문은 문고리가 떨어져 이제 열고 닫히는 기능이 없어지면서, 소통의 장소인 문이 단절의 대명사인 벽으로 바뀐 것. 사람을 완전히 단절시킬 수 있는 것은 죽음 또는 묘혈로써의 문이 숨을 멎은 방이다. 이번에 시집 좀 읽으려고 여덟 권이나 사 놓았는데, 죽음이라, 다른 시집들도 이러려나.
  두 번째로 실린 시에는 새로운 시적 상징이 등장한다.

 


  한 번쯤은 죽음을

 


  열어놓은 창으로 새들이 들어왔다
  연인처럼 은밀히 방으로 들어왔다
  창틀에서 말라가는 새똥을
  치운 적은 있어도
  방에서 새가 눈에 띈 건 처음이다
  나는 해치지도 방해하지도 않을 터이지만
  새들은 먼지를 달구며
  불덩이처럼 방 안을 날아다닌다
  나는 문 손잡이를 잡고 숨죽이고 서서
  저 지옥의 순간에서 단번에 삶으로 솟구칠
  비상의 순간을 보고 싶을 뿐이다
  새들은 이 벽 저 벽 가서 박으며
  존재를 돋보이게 하던 날개를
  함부로 꺾으며 퍼덕거린다
  마치 내가 관 뚜껑을 손에 들고
  닫으려는 것처럼!
  살려는 욕망으로만 날갯짓을 한다면
  새들은 절대로
  출구를 찾지 못하리라
  한 번쯤은 죽음도 생각한다면……  (전문)

 


  첫 번째 시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에서 죽음 또는 묘혈의 상징이 된 방에 그만 새들이 들어왔다. 연인처럼 은밀하게 들어왔다니까 두 마리인 듯하다. 방의 주인 ‘나’는 새들을 방관한다. 해치지도 않고 방해도 안 하고 그냥 내버려둔다. 새가 정말로 방 안으로 들어온 경험이 있으신가? 투명한 창문이 아니라면 벽에 부딪히지 않는다. 좁은 방이라면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큰 사무실에선 그렇다. 대신 투명한 유리벽에 온몸을 쿵쿵 박아 죽음에까지 이른다. 시인은 이 모양을 자신이 마치 관 뚜껑을 손에 들고 닫으려 하는 것처럼 보고 있다. 새들이 살려는 욕망으로만 날갯짓을 한다면 결코 들어온 곳으로 다시 나갈 수 없단다. 한 번쯤 죽음도 생각해보면 혹시 모르겠다면서. 그럼 새는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이기에 허락도 없이 방에 무단침입을 해서 쿵쿵 머리를 박고 있을까.

 


  새

 


  새가 내 머리 위를 불덩이처럼 맴돈다. 언제 저 새가 이 방으로 들어왔을까? 애써 침잠시킨 어두운 한 세계가 역행하고, 숨골이 활짝 열리는 열기. 어떻게 저 새가 이 방으로 들어왔을까? 웅크린 내 몸이 깔고 있는 지렛대 같은 어둠을 극도로 부풀리며 새는 활기차게 난다. 내 몸에서 번쩍 눈을 뜨는 먼지들, 전신을 뒤집으며 소용돌이치고, 휘청거리며 내게서 떨어져나가는 깜깜한 길 하나. (전문)

 


  ....란다. 세상을 버린 자와 닿아있는 내게서 떨어져 나가는 깜깜한 길? 맞아? 그럴 리가 있나. 물론 조은의 시가 전부 이런 건 아니다. 이 시집에서도 더 눈에 띄는 건 탄생과 죽음이란 사이클의 연속, 죽음이 있는 곳에 탄생이 있고, 거꾸로도 마찬가지인 장면이긴 하다.
  조은의 시가 좋은 시라고들 한다. 하여튼 조은의 시가 시를 감상하는 재주가 없는 내게 와서 고생을 좀 한 건 확실하게 맞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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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5-11 10: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분석을 해주신 부분들이 흥미진진한걸요? 맞지않았다고 하셔도 궁금해질만큼요ㅋㅋ시인은 아마도 가까운 사람의 죽음 때문에 침잠했었나 봐요.

Falstaff 2021-05-11 10:39   좋아요 3 | URL
ㅎㅎㅎ 잘 읽어주셨군요. 고맙습니다.
근데 전 시도 잘 몰라요. 요즘 시집을 대강 이런 식으로 읽더라고요. 그래 저도 모르게 시를 ‘감상‘하는 대신 따져본 거 같습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언제나 쉽지 않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