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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르인의 사막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3
디노 부차티 지음, 한리나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2월
평점 :
디노 부차티라고 하는 작가가 있었는지도 몰랐다.
부차티를 실존주의니 마술적 사실주의니 한다고 하는데, 그런 거 모르겠고, 적어도 내가 읽기로는 정말 아름다운 작품이다. 누구나 살면서 끊임없이 달고 살아야 했던 존재의 상실감에 대하여 이보다 더 애절한 공감을 쓸쓸하게 그린 작가가 있었을까.
디노 부차티.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북쪽으로 백 킬로미터 떨어진 벨루노의 주도 산 펠레그리노에서 수의사 어머니와 국제법 교수를 역임한 아버지 사이에서 1906년에 네 남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명문가의 자제답게 이이도 밀라노 대학에서 국제법을 공부하고 밀라노의 매체에 취직해 저널리즘에 종사한다. 일을 하면서 1933년부터 다수의 단편소설과 장편을 발표했으며 <타타르인의 사막>이 그의 대표작이라고 한다.
그가 태어난 산 펠레그리노. 흔히들 이탈리아라면 따뜻한 지중해성 기후만 생각하는데, 이곳은 북쪽으로 알프스 산맥이 둘러싸고 있다. 북위 46도 지역. 9월에 벌써 눈이 오고 3월까지 녹지 않는 지역. 그리하여 <타타르인의 사막>에서 북쪽에 광활한 스텝이 펼쳐지는 산악지역을 그렇게 아름답게 그릴 수 있었겠지.
이제 막 고생스러운 생도시절과 함께 풋풋한 청년기까지 끝내버린 초급장교 중위 조반니 드로고. 9월의 어느 아침, 홀어머니와 작별을 하고 최초 부임지인 바스티아니 요새로 출발하는 것으로 작품은 시작한다.
요새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친구 프란체스코 베스코비와 함께 요새로 통하는 골짜기 입구에 도착해 이별을 고한 다음 홀로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이 부분에서 부차티의 소설을 마술적 사실주의 운운할 수 있게 만드는 장면이 등장한다.
산그늘이 지고 자줏빛 어둠이 골짜기에 들어찼을 때 거대한 규모의 군사시설과 맞닥뜨린다. 오래되고 황량한 건물, 성벽과 주변 풍경 등 모든 게 음산하고 냉랭한 분위기. 입구를 찾을 수도 없고 불이 켜진 창문도 하나 없는 거대하지만 황량한 곳. 이때 부랑자나 거지로 보이는 남자가 자루를 하나 들고 지나가서 드로고는 요새에 관해 물어본다.
“이제 이곳에는 요새가 없습니다. 전부 폐쇄되었지요. 인적 끊긴지 족히 십 년은 될 겁니다.”
드로고가 고개를 들고 산등성이를 올려다보니 저 멀리 까마득하게 보이는 기하학적 구조물이 선을 긋듯 한 윤곽이 보인다. 사람이 닿을 수 없으리만치 세상과 동떨어진 고독한 성.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 같은 곳. 그곳이 바스티아니 요새다.
산길에서 노숙을 하고 아침이 되어 다시 말에 오르니 골짜기 저편 길에 말을 탄 대위가 가고 있다. 모자를 벗어 아는 척을 해봤으나 본 것 같지 않아, 무례한 짓인 줄은 알지만 크게 고함을 질러본다. 대위는 말을 멈추고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일단 마음이 놓이는 드로고. 30분 쯤 지나 두 길이 서로 합쳐져 만난 대위는 마흔 살 정도로 이름을 오르티츠라고 한다. 대위는 18년 동안 바스티아니 요새에 근무했으며, 드로고와 같은 왕립 사관학교 출신. 가파른 산길을 오르느라 길은 지그재그로 나 있고, 여전히 눈앞에 나타나는 점점 더 높은 길을 걸어 정오 무렵에 드디어 바스티아니 요새에 도착하는 조반니 드로고.
그곳은 오래되고 낡은 2급 요새. 죽은 국경선. 산맥이 끝나는 곳에서부터 펼쳐지는 광막한 스텝지역은 백 년 전과 똑같은 상태로 놓여 있고 저 북쪽 가는 푸른 선처럼 보이는 숲 너머에는 타타르인이라 칭하는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고 전해지는 곳. 그러나 최근 백여 년 동안 그들을 본 사람이 없는 비어버린 국경, 그리고 요새. 30 킬로미터 떨어진 가장 가까운 산로코 마을 말고는 아무런 즐길 것이 없는 극도로 외진 장소. 큰 꿈을 갖고 바스티아니 요새에 도착한 드로고는 곧바로 도시 근방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밖에.
그러나 노란 성벽을 바라보고 있는 오르티츠 대위의 시선을 따라 가보니 성벽 너머로 보이는 우뚝 솟은 봉우리, 근거 없는 환상과 비슷하게 다가오는 석양 또는 황혼의 빛을 받아 위엄을 더하는 암벽이 다가온다. 그것을 바라보는 오르티츠 대위의 얼굴에 기쁨과 슬픔이 섞인 엷은 미소가 서서히 번져가는 모습. 드로고 중위는 북쪽에 있다는 타타르인의 사막이 어떤 모습일지 보고 싶어진다.
나는 이 소설에 나오는 장소, 황량한 스텝이나 사막을 향한 로망이 있다. 그리하여 내 소원은 몽골의 초원이나 모래 속에 석굴이 잠긴 비단길을 따라가야 하는 서역지방,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에 가보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 속이 텅 비어버리는 듯 감정이 뭉클하다. 연이은 거대 암벽에 석양이나 아침놀이 비쳐 붉은 색깔이 칠해지는 반대편으로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지평선 너머 또 다른 지평선.
이 소설 <타타르인의 사막>은 이런 광경만 묘사되어 있지는 않다. 명예로운 죽음과 성취를 소망하는 군인들이 외딴 요새에서 벌어질 전투와 용맹의 시범을 가망 없이 수백 년 동안 기다리다 사라지는 상실. 무엇인가를 기다리기만 하다 평생을 보내버리는 요새의 파수병들. 그것이 무엇인지는 직접 읽어보시기 바란다. 절절한 절창.
책을 읽고 이번만큼 독후감 쓰기 어려운 적도 별로 없었다. 아름답지만 황량한 산악지역과 한도 끝도 없이 펼쳐진 돌과 먼지와 바람의 사막지역을 배경으로 얼마나 독자의 가슴을 아련하게 하는지. 무대가 군대라서 그렇지,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실패자 의식. 당신도 이 감정의 조금을 가지고 있다면 이 작품을 더 아리고 아리게 읽을 수 있을 터이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 작품과의 합이 조금쯤 필요할 듯.
소설 속 초원을 넘어 이쪽 요새를 향해 진군하는 북국의 군사들이 나올 때, 나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오페라 <보이지 않는 도시 키테츠>를 떠올렸다. 저 끝도 없는 벌판에 오밀조밀한 까만 점들이 점점 다가오면서 거대한 먼지구름을 일으키나 했다가 드디어 높은 음정의 군호와 함께 둥근 칼을 흔들면서 질주해 쳐들어오는 타타르 병사들. 거대한 스텝의 한 가운데에 있는 요새 도시 키테츠는 갑자기 타타르 군대의 눈에서 사라져버리는 반면, 바스티아니 요새엔 한 대의 안락하고 화려한 사륜마차가 도착한다. 저 먼 먼 날 조반니 드로고가 왔던 길을 따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