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한가을입니다. 이 좋은 시절에 지나간 3개월을 뒤돌아보는 것이 이제 생각하니 참 호강입니다. 여름은 언제나 나기 힘듭니다. 그런데도 또 언제나 지나고 나면 나른하고 여유로우면서도 풍성했었다, 싶기도 합니다. 책을 읽는 일도 그렇습니다. 더위 속에서 책으로 한 시절을 보내기가 쉽지 않았을 터인데도 지나고 보면 염천 속의 책 피서가 또 좋았던 듯한 이 속내는 도대체 뭔가 싶습니다. 한 더위와 초가을에 읽은 책 가운데 제일 좋았던 책 열 권을 소개합니다. 모두 쉰여섯 권, 다 합해 1만7천 페이지 안에서 골랐습니다. 우연히 두 작품, 위스망스와 보스코의 것은, 성격이 하도 극단적이라 무엇보다 독자와 작품의 궁합이 중요한 것들입니다. 따라서 정말 읽어보시려면 특별한 주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순서는 제가 읽은 날짜순입니다.
1. 조리스카를 위스망스, <저 아래>
만년 하급 공무원으로 사무실에서 쭈그려졌던 위스망스가 <거꾸로>의 세기말적 예술지상, 심미주의를 건너 극단의 탐미주의, 파괴적이고 과격한 악마숭배와 이교적 연금술에 탐닉할 수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 생각해보라. 상상하지도 못할 신성모독과 잔혹한 악마숭배 의식을 구상하는 허름한 하급 공무원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표정, 복장, 안경 낀 오목눈, 허연 비듬을 실은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140년 전 파리의 예술가들이 상상할 수 있었던 모든 악이 <저 아래> 또는 피안La Bas에 들어 있으며, 한 세기 반이 지난 지금의 독자라도 읽어내기가 그리 만만하지는 않은 것을. 위스망스에 비하면 사드의 등장인물은 소심한 부르주아 몽상가처럼 보일지도 모르니 자극적, 비도덕적, 비종교적인 작품이나 묘사에 적응하기 힘든 독자들은 애초에 첫 장을 넘기지 마실 것. 벨에포크와 함께 온 세기말. 이제 예술은 아름다움을 위해 복무하지 않는다는 선언일지도 모른다.
2. 대프니 듀 모리에, <레베카>
많은 분들이 읽어보라 추천하셔서, 어떤 면에선 비자발적으로 읽었다가 대박 났다. 특히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숱하게 쏟아진 탐정, 추리 소설에 질려있던 내게, 1938년, 지금부터 무려 84년 전 작품인 <레베카>는 여전히 추리소설이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추리소설이야말로 작가와 독자의 승부다. 작가는 모든 단서를 복선이라는 이름으로 공개해야 하고, 독자는 책을 읽으며 도처에 숨어있는 복선을 빠짐없이 찾아내 결말을 추리해내야 한다. 명작 추리소설은 독자가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한 장면에서 여지없이 독자의 빈 공간을 노려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법. 소설 <레베카>에서 등장하지 않는 주인공, 레베카가 그러했다. 여러 가지 가능한, ‘모든’ 방법인 줄 알았지만 천만의 말씀, 16세기에 학살을 모면하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간 프랑스인의 후예 대프니 듀 모리에는 전혀 생각지 못한 미세한 틈을 노려, 독자에게 독한 충격 하나를 안겨주었다.
3. 윌리엄 트레버, <펠리시아의 여정>
윌리엄 트레버의 책이라면 무조건 사서 읽는 나는 트레버의 팬임을 인정한다. 이 책 역시 신간이 나왔다고 알람이 뜨자마자 곧바로 구입한 책. 펠리시아는 아일랜드 시골 아가씨. 전형적인 트레버답게 펠리시아는 길을 떠난다. 다른 작품에서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돌아와야 하는데, 펠리시아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떠남이 있고, 그를 위한 기다림이 있고, 이에 따른 상실과, 상처를 남긴 치유를 다루는 윌리엄 트레버가 아닌 작품. 자신을 버린 애인을 찾아 잉글랜드 공단으로 떠난 펠리시아 앞에 등장하는 또 한 명의 외로운 나이 든 힐디치 씨. 힐디치 씨 역시 자기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외로움의 별을 타고 태어났다. 그러나 겉으로는 지극히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고도비만 초기의 50대 독신 남자. 이들은 면도날의 왼쪽과 오른쪽에서 마주보며 서 있다. 한 발자국만 앞으로 내딛어도 가차 없이 몸이 반으로 쪼개질 까마득한 위험 앞에서.
4. 존 버거, <결혼식 가는 길>
짧은 소설. 그러나 문장 하나하나를 손으로 짚어가며 읽을 수 있는 높은 순도의 작품. 존 버거의 글을 따라 지노와 니농의 결혼식장에 갔다 오자마자, 나는 또 한 권의 존 버거를 주문했다. 문단은 작가들의 고유한 지문이다. 이런 특별한 지문을 가진 작가는 도대체 얼마나 쓸쓸한 가슴을 가지고 있을까. 단 한 번의 실수로 후천성 면역결핍증에 걸린 니농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농을 사랑하여 기꺼이 청혼하는 이탈리아의 중고 옷장수 청년 지노. 이들의 결혼식을 위해 니농의 아빠인 철도원 장 페레로는 프랑스에서 이탈리아 포 강 하류의 작은 마을 고리노까지 모터 사이클을 타고 달리고, 엄마 즈데나 흘레체크는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에서 기차를 탄다. 좋은 의미의 광기와, 역시 좋은 의미로 쓰는 속임수와 보살핌으로 즐거운 결혼잔치가 벌어지는 순간에도, 누구나 다 축하를 하는 건 아니었던 시절. 책을 다 읽고 나면 마음이 텅 비어버리는 경험을 할지도 모르겠다.
5. 알리 스미스, <호텔 월드>
이제 나는 알리 스미스가 쓴 책이면 독자의 평과 관계없이 새 책이 나왔다는 거 하나만 가지고도 집중한다. 스미스의 개별 작품을 명작이나 걸작으로 말하거나 과장할 수는 없다. 모든 별이 다 시리우스별이 될 필요도 없다. 간혹 책을 읽다보면 작가의 어법이 내 취향하고 탁, 들어맞는 경우가 있는데, 스칸디나비아의 혈통이 흐르는 듯한 외모를 가진 스코틀랜드 여성 동성애 작가 알리 스미스가 바로 그랬다. 그러니 당신 취향하고는 다를지도 모른다. 세라 윌비라는 이름의 열아홉 살 먹은 접영과 다이빙 전문 수영선수가 글로벌 호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호텔에서는 식기나 음식을 나르는 소형 엘리베이터가 있었고 매사 장난이 심한 세라는 이 소형 엘리베이터에 들어갈 수 있다고 내기를 걸고는 자기 몸을 극적으로 구겨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순간 엘리베이터를 지탱하는 철선이 끊어져 세라는 몇 십 미터를 자유낙하 하여 산산이 부서지게 된다. 이 죽음을 묘사하는 세라의 유령. 참신한 아이디어.
6. 제프리 유제니디스, <미들섹스>
몇 년 전 <처녀들, 자살하다>를 고르면서, 설마 진짜로 자살이야 하겠어, 싶었다가 정말 자살을 감행, 사나운 모습으로 죽는 걸 보고 기겁을 했던 작가. 그 충격이 오래 가지는 못해 작가의 이름 기억하는 거 하나만 가지고 고른 <미들섹스>에 나는 충분히 만족했다. 그리스의 티레시아스 신화를 제외하면 문학 작품 가운데 한 번도 보지 못한 성 혼란을 주제로 다룬 작품. 1960년 디트로이트에서 그리스 이민자의 후예인 스테퍼니데스란 이름의 여자아이가 태어나는데, 여전히 그리스 시골 풍습에 익숙한 부모들이 아이의 생식기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않아, 사실은 남자아이이지만 생식기가 몸 안에서 이탈하지 않은 채 태어났다는 걸 알지 못한 채 여자아이로 키운다. 이 아이가 십대가 되어 곧 사춘기에 접어들 순간, 사실은 남자아이라는 게 밝혀지지만 당시의 의사들은 거세수술을 준비한다. 이런 메인 스토리를 능가하는 것이 그리스 이민자들이 그리스령 터키에서 미국에 정착할 때까지의 파란만장이기도 하다. 매우 재미있다.
7. 아라빈드 아디가, <화이트 타이거>
촌스런 표지 디자인 때문에 독자의 절반 정도는 읽기를 포기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이 책을 열고 다섯 장 넘기는 인내심만 발휘한다면, 이젠 절대로 읽기를 그만둘 수는 없을 터이다. 전형적인 뚝배기보다 장맛! 작가 아라빈드 아디가는 처음부터 작가가 되리라고 마음먹은 사람이 아니라, 펀드 매니저로 좋은 평가를 받아 <타임스>의 남아시아 담당자로 스카웃되어 직장생활을 하다 여가시간에 이 작품을 써서 단박에 부커상을 꿰찬 인물이다. <화이트 타이거>는 주인공 발람의 별호. 불가촉천민은 아니지만 상당히 낮은 카스트 출신의 발람이 부정과 부패, 뇌물, 범죄가 판치는 인도에서 고향을 떠나 델리를 거쳐 상당한 재산을 부당한 범죄적 방법으로 갈취해 벵갈루루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다음, 때마침 인도를 방문할 예정인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에 보내는 몇 통의 편지가 이 작품이다. 인도라는 거대한 개발도상국이라서 가능한 20세기 말 황야의 무법자. 무법자의 대표선수가 바로 화이트 타이거. 활극을 읽는 재미가 보통을 넘는다.
8. 아모스 오즈, <유다>
아모스 오즈. 1939년생. 소설의 치밀한 묘사를 거의 마지막으로 시도한 작가일 듯. 물론 앨런 홀링허스트 같은 이도 그렇기는 하지만 홀링어스트는 스스로 헨리 제임스의 후예를 자임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종교 이야기만 나오면 경끼(‘경기驚氣’라고 해야 하지만 이렇게 써야 제대로 된 어감이라서)하는 내가 제목부터 다분히 기독교적인 <유다>를 읽었고, 분기에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으로 꼽는다. 물론 이 책은 유럽인들이 최악의 배신의 대명사로 지목하는 유다와 그리스도에 관한 종교를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넓게 보면, 이스라엘 지역에서 팔레스타인과의 공존을 주장하여 유대의 배신자라는 오명을 들은 아모스 오즈 자신을 대변하는 인물 쉐알티엘 아브라바넬을 창조해냈다. 유대와 아랍의 공존을 주장하는 오즈는 신약성경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는 특권’을 지닌 이교도, 유대교인으로, 사실은 예수를 가장 사랑했던 인물 유다 역시 필연적으로 배신자의 낙인이 찍힐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9. 앙리 보스코, <이아생트>
정말로 재미있게 감상하기 위해서는 보스코의 삼부작 가운데 첫 번째 작품인 <반바지 당나귀>를 먼저 읽어보는 것이 좋다. 산골마을 오스피탈레에서도 한참 떨어진 외진 곳의 눈부신 마법사 시프리앵의 정원. 콩스탕탱을 그의 후계자로 점찍었으나 실패하고 엄한 이아생트만 납치해 사라진다. 저 북쪽의 먼 곳, 성가브리엘 고원. 딱 두 집, 라 코망드리와 라주네스트 외에 아무도 살지 않는 황량한 사막. 라주네스트에서는 고원에서 유일한 등불이 새벽까지 비추는 집에 바로 콩스탕탱이 살고 있다. 라코망드리에 자리한 화자 앞에 어느 날, 이아생트라는 이름의 여성이 등장하고, 이어 시프리앵마저 나타나는데, 스토리 말고 미학적 몽상에 집중하는 편이 좋다. 처음부터 아예 대놓고 펼치는 몽상적 문장이 성가브리엘 고원만큼 광활하게 펼쳐지니 앙리 보스코의 미학을 감당하지 못하면 애초에 책읽기를 그만두는 편이 나을 것. 가스통 바슐라르의 저작이 특정 작품이나 조형물을 대상으로 했다면, 앙리 보스코는 거대 자연지형으로 시선을 확장한다. 별점 다섯 개를 주는 독자나, 한 개를 주는 독자, 다 이해된다.
10. 막스 프리쉬, <호모 파버>
<슈틸러>, <내 이름은 간텐바인>과 함께 막스 프리쉬의 3대 소설로 꼽힌다는 작품. 놀라운 아이러니로 넘친다. 두 가지 관점. 세상을 벡터 스페이스로 해석하는 주인공 발터 파머가 자신의 믿음을 서서히 놓을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와, 현재 주인공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 저 2천3백 년 전 그리스 시대의 고전문학에서 이미 등장했던 것으로 회귀하는 아이러니. 유네스코에 근무하면서 전 세계 개발도상국에 댐을 건설하여 발전기를 조립해주는 일을 하는 독신의 엔지니어 발터 파머는 일을 위해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비행기 엔진 네 개 중에 두 개가 멈추는 바람에 멕시코 고원의 황무지 사막에 불시착한다. 여기서 만난 옛 친구이자 유일한 친구의 친동생.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그를 따라 중남미 밀림지역까지 들어가 사진부터 찍어야만 했던 친구이자 첫 애인의 남편이었던 요하임 헨케의 대롱대롱 매달린 시체를 내려 장사지내는 것으로 ‘그리스 드라마 적 우연’이 시작된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발터는 유럽까지 이번엔 크루즈 여객선을 타기로 결정했고, 배 위에서 운명의 젊은 여성 자베트를 만나는데, 어떤 드라마가 이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프리쉬의 작품에서 해피 엔드를 바라지는 못하리라.
위의 열 작품 말고도 이런 책들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 자리에 오르지 못해 많이 아쉽습니다. 목록을 소개합니다.
제임스 설터, <어젯밤>
레온 드 빈터, <호프만의 허기>
레이 브래드버리, <시월의 저택>
후안 마요르가, <비평가 / 눈송이의 유언>
윌리엄 트레버, <그의 옛 연인>
로맹 롤랑, <사랑과 죽음의 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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