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죽음의 유희 범우희곡선 29
로맹 롤랑 지음, 유호식 옮김 / 범우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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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국제평화주의자이자 채식주의자인 로맹 롤랑은 고등사범학교에서 애초에 철학을 공부하다가 곧이어 역사학으로 범위를 넓혀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 철학 교수자격시험을 준비하려다가 역사로 바꾸어 역사 교수시험에 합격했고, ‘현대 서정연극의 기원, 륄뤼와 스칼라티 오페라의 역사’에 관한 논문으로 소르본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러니 문학창작 전 시절에는 틀림없는 역사학도로 처음엔 앙리 4세 고등학교, 루이르그랑 고등학교 역사 교사를 하고, 이어 차례로 파리 고등사범학교의 예술사 교수, 소르본의 음악사 교수를 지냈다. 그동안에도 꾸준히 창작을 해와, 드디어 1912년에 9년에 걸쳐 집필한 대표작 <장 크리스토프>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것에 힘입어 같은 해에 소르본에 사표를 제출하고 전업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젊은 시절의 짧은 이야기만 가지고도 독자는 롤랑에 대하여, ① 역사에 관한 일가견이 있으며, ② 연극과 극작에 대단한 흥미를 가졌고 , ③ 고전음악에 대하여도 전문가적 지식을 보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과 죽음의 유희>는 프랑스 혁명에 관한 극작품이다. 1789년 바스티유 감옥을 때려 부순 것으로 시작한 프랑스 혁명은 인간의 이성과 자유, 평등, 인권에 관한 사상을 온 유럽에 전파하기에 이르러 전 유럽의 왕정 국가, 왕실에 공포를 선사한다. 1792년에 설립한 국민공회의 계단식 강의실 비슷한 회의실에서 주로 윗자리에 앉아 버릇해 이름이 붙은 산악당山岳黨은 부르주아와 인텔리겐치아들이 중심이 된 지롱드 당을 이미 궤멸시키다시피 했고, 거의 모든 혁명에서 숨기지 못한 현실, 자코뱅 산악당에서도 권력투쟁이 일어나 1794년 봄, 산악 우파에 속해 극렬 공포정치에 반대한 조르주 당통이 체포당해 기요틴의 이슬로 사라져야 한다는 재판이 벌어지던 하루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무대는 당통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기명 투표가 열리던 국민공회의 회의실이 아니다.
  문학과 음악에 조예가 깊은 역사학자는 프랑스 혁명 당시 두 명을 되살린다. 첫 번째 사나이는 소설가, 극작가, 정치인이며 외교관이기도 한 장 밥티스트 루베 Jean Baptiste Louvet (1760~97). 루베는 지롱드 당원으로 왕에 대한 재판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지롱드 당을 변호하는 바람에 죽음의 위협을 견디지 못하고 파리를 떠나 전국을 유랑해야 했다. 그러다가 놀랍게도 죽음의 입구인 파리로 되돌아 왔는데, 내일 죽더라도 사랑하는 연인의 입술에 키스 한 번을 하기 위해서였단다. 전국에 지명수배당한 것도 모자라 현상금까지 붙은 인물이. 루베가 꿈에도 잊지 못했던 입술을 가진 여성이, 자기 때문에 함께 위험에 처한 아내 로도이스카인지는 롤랑이 밝히지 않았다.
  다른 한 명은 화학자이자 징세대리인이고 했던 앙투앙 로랑 드 라부아지예 Antoine Laurent de Lavoisier (1743~94). 징세대리인이란 것이 무거웠다. 부르봉 왕가 말기에 복잡한 조세제도 때문에 정부가 직접 세금을 걷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 세관이나 관세청에서는 징세대리인을 두어 세금을 거두는 권한을 부여했는데, 대부분의 대리인들은 원래 세금보다 더 많은 금액을 강압적으로 빼앗아, 세금에 대한 일정 비율의 수수료는 그것대로 받고, 초과 집행한 것도 당연히 뒷주머니에 챙기는 바람에 국민들의 원성을 효과적으로 높이 살 수 있었다. 라부아지에는 명색이 귀족이라 직접 징세행위를 하지 않았건만 어쨌거나 징세대리인이었다는 건 그가 발견한 질량보존의 법칙만큼이나 명확한지라 시민들의 열화와 같은 요구에 따라 기요틴의 칼날 아래 목을 늘일 수밖에 없었다.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화학자라서 성능 좋은 화약을 발명해 오스트리아와의 혁명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공을 세웠음에도 어쩔 수 없었다.

 

  로맹 롤랑은 내용을 각색한다. 화학자 라부아지에는 환갑이 넘은 과학자이자 국민공회의 의원인 제롬 드 쿠르부아지에로, 낭만적 사랑 지상주의자 루베는 제롬보다 딱 절반을 산 서른 살의 클로드 발레라는 이름의 추방된 지롱드 당 의원으로. 발레가 목숨을 걸고 마지막 키스 한 번을 위해 죽음의 입구인 파리로 되돌아오게 만든 베아트리체는 누구일까. 롤랑이 선택한 여성이, 어머나 짓궂어라, 제롬 드 쿠르부아지에의 서른다섯 살 아내 소피 드 쿠르부아지에로 만들었다. 18세기에 부부간 많은 나이 차이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안나와 카레닌 공작의 예를 봐도 그렇다. 카레닌 공작도 바랐듯, 자기 나이가 많아 아내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니 아내가 따로 애인을 두는 건 알고도 슬쩍 모른 척하고 그랬는데(안나는 공작의 마음을 몰라주고 동네방네 브론스키와의 염문을 뿌려 사달이 나버렸다), 발레와 자신의 아내 소피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임을 알아챈 제롬은 어떻게 했을까?
  실제로 라부아지에는 혁명정부의 국민공회에 참여해서 어려운 처지에 떨어진 사람들을 구해주고 했단다. 라부아지에가 변신한 제롬 드 쿠르부아지에 역시 공포정치에 반대하고 사람의 생명을 중요하게 아는 부처님 가운데 토막. 스물다섯 살 차이가 나는 아내 소피가 자신을 한 번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제롬은 자신을 구제하기 위하여 프랑스를 벗어나 해외로 도피할 수 있는 여권과 비자를 친분 있는 공안위원으로부터 넘겨받는다. 이 서류들은 청빈한 공포정치가이자 혁명가인 로베스피에르가 천재 과학자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알고도 묵인한 것이지만, 제롬은 전혀 고민하지 않고 소피와 발레에게 넘겨주고 기꺼이 체포당하는 편을 택한다. 내 말이 맞다. 진짜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다. 안 그런가?
  제롬은 오늘 밤에 체포될 예정. 왜냐하면, 오후에 있었던 국민공회에서 산악파 우파, 산악파도 또다시 온건, 강경으로 나뉘어 온건은 산악 우파, 강경은 산악 좌파로 찢어졌는데, 혁명기에는 언제나 강경파가 득세하는 것이 정석이라 잡혀 온 산악 우파의 대표선수 조루즈 당통은 애초부터 사형을 면할 수 없었다. 게다가 기명 투표를 하라고 하니 이건 반대를 해도 혁명의 적으로 찍힐 수밖에 없는 것. 혁명과 공포정치에 신물이 난 제롬은 스스로 이제 인생을 끝낼 각오를 하고 투표를 하지 않고 국민공회 회의장을 빠져나와 집으로 온 것. 이때가 언제? 1794년 봄. 실제로 라부아지에가 징세대리인들 무리에 섞여 단두대에 목을 뉜 것이 1794년 5월이니 날짜까지도 귀신처럼 맞혀놓았다.
  근데, 그러면, 과연 만사가 제롬 드 쿠르부아지에가 뜻한 바대로 이루어질까? 천만의 말씀. 제롬이 발레를 붙들고 앉아서, 세상을 더 살고 싶으면 아무 얘기 하지 말고, 자기 살자고 제롬이 죽어야 하니 자기 명예는 어떻게 되느냐는 잡생각 따위는 하지 말고, 그저 바라노니, 그동안 자기 혼자서만 사랑했던 아내 소피와 더불어 남은 생애를 사랑이 넘치게 가꾸며 행복하게 살기만 해달라고, 고목나무에 꽃 필 이야기만 하는 와중에, 소피는 저 한 귀퉁이에 있는 벽난로 앞에 앉아 자기가 받은 여권과 비자 서류를 갈기갈기 찢어 벽난로 불 속에 던져 넣는다.
  이 모양을 직접 눈으로 본 발레. 프랑스 지롱드 당 대표적 양심이자 용기의 저항아. 이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애인의 남편이 준 여권과 비자, 좌석 예약까지 마친 노선 마차 티켓까지 들고 일신의 생명보존을 위해, 아직 애초의 목적대로 소피의 입술에 마지막 키스도 하지 못했는데, 혼자, 홀로 이국으로 가는 마차에 오르겠는가, 하는 문제. 소피는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발레와 함께 떠나지 않고 늙어 냄새나는 남편 제롬과 남아 공포정부에 체포당하는 편을 택했을까. 이건 아무리 졸라도 절대 안 알려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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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2021-10-01 09:5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마지막 문장에서 뿜었어요. 폴스타프님 개구집니다. 흥. 그런다고 내가 궁금해할줄 알아, 이렇게 반응하고프나 급 궁금해져버린 1인. 깨갱^^;; 전 뭣보다 공전의 히트를 쳤다, 사표를 날렸다는 대목에 맘이 확 쏠렸어요. 부러워서~~~~^^;;;

Falstaff 2021-10-01 10:08   좋아요 4 | URL
ㅋㅋㅋㅋ 저 마지막 멘트 날리는 게 제 즐거움입니다! 이거 특허까지 냈어요!
이 양반이 장 크리스토프 한 편쓰고 사표낸 곳이 다른 데도 아니고요, 소르본 교수 자리예요. 잘만 하면 종신 교수 따기도 그리 어렵지 않을 당시에, 그 좋은 자리를 때려치웠으니, 아이고, 아이고, 그거 저 주지 말입니다. 하긴 제 팔자에 그런 횡재가 있겠습니까. ㅠㅠ

다락방 2021-10-01 12:0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또 안알려주시네요 아놔 ㅋㅋ

Falstaff 2021-10-01 12:08   좋아요 4 | URL
ㅋㅋㅋㅋ 제 즐거움입니다. (혹시 변태 아녀?)

공쟝쟝 2021-10-02 10:11   좋아요 0 | URL
안알랴줌ㅋㅋㅋㅋㅋ (현대인에게는 검색이라는 것이 있다 ㅋㅋㅋㅋ)

Falstaff 2021-10-02 17:20   좋아요 0 | URL
공쟝쟝님, 아마 검색해도 안 나올 겁니다. ㅋㅋㅋㅋ

잠자냥 2021-10-01 13: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흥 안 조를 거예요...!

대신,

*찰싹찰싹*

Falstaff 2021-10-01 14:21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폭력 잠자냥님!

막시무스 2021-10-01 13: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댓글 보기 직전까지 에밀 졸라도 절대 안 알려준다고 독해한 문해력 제로인 자수하고 갑니다!ㅠ 팔스타프님 리뷰로 어디가서 아는척 하기는 충분할듯합니다!ㅎ 누가 물어보면 졸라도 안갈켜 준다고 졸라 약 올리면 될 듯요!ㅎ 즐건 연휴되시구요!ㅎ

Falstaff 2021-10-01 14:30   좋아요 3 | URL
음하하하....
이번 주엔 졸라 이야기를 많이 듣네요.

루공-마카르 총서 1편을 드디어 번역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진행하고 있다니, 분명 저한테도 입조심 하라는 뜻일 터인데, 그러면 아예 얘길 하지 말든가요. 그죠? 독자는 입조심 할 이유가 없는 인종입니다.
하여간 졸라 책이 조만간 나올 거다, 근데 이걸로 끝이 아니고 계속 번역을 해서 드디어 루공-마카르 총서를 완역할 예정이랍니다. 기존에 나와 있는 건 좀 피해갈 생각인 모양이고요. 한 10년 걸리지 않겠습니까. ㅋㅋㅋㅋㅋ
저한테 입조심 해달라는 말이, 얼른 소문 좀 내달라는 주문 같았습니다.

알라딘에서 졸라 전성기는 지난 주였는데, 오늘까지 졸라 얘기가 계속 나옵니다.
근데 제가 쓴 거 누구한테 얘기하셨다가 진짜로 읽어보신 분 들으면 깜짝 놀랄지도 모릅니다. 그건 책임 안 집니다. ㅋㅋㅋㅋㅋ 3일 연휴네요. 즐겁게 보내셔요!

초딩 2021-10-03 22:08   좋아요 1 | URL
사실 졸라 약올려의 그 졸라는 참 쓰고 싶었습니다. 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