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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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1월 1일, 컬럼비아의 수도 보고타에서 변호사 부부 알프레도 바스케스와 파니 벨란디아의 아들로 태어난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는 어려서부터 좋은 환경 속에서 자라서 그랬는지 어려서부터 글짓기 하나는 잘했다. 물론 공부도 잘 했겠지. 10대 시절에 본격적으로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거장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카를로스 푸엔테스 등을 섭렵했으나, 정작 보고타 시내에 있는 로사리오 대학에서는 법학을 전공했다. 그래서 그런지 바스케스의 장편소설은 대부분 보고타 시내, 주로 로사리오 대학 주변을 무대로 한다고. 법학을 공부하면서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훌리오 코르타사르 등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을 탐독하면서 제임스 조이스와 버지니아 울프 등에 관심을 갖는다. 1996년 “<일리아드>에서 합법적 본보기에 입각한 복수”로 학위를 따지만 이미 작가로서의 커리어를 쌓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졸업과 동시에 바스케스는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당시 컬럼비아를 휩쓰는 폭력과 범죄의 일상이 두려운 것도 있어서 파리 소르본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문학을 공부하고 이후 16년간 파리, 벨기에 아르덴, 바르셀로나를 거쳐 2012년 다시 조국 컬럼비아의 보고타로 귀환해 여태 살고 있다. 이 동안 전 세계 코카인의 80% 공급했던 메데인과 칼리의 마약 카르텔은 괴멸됐고, 80~90년대를 풍미했던 무차별 폭발 테러, 기관총 테러와 암살 같은 치안도 비교적 정상을 되찾았다. 정작 작가 자신은 범죄와 폭력이 판을 치던 당시엔 조국을 떠나 선진국에서 잘 먹고 살다가 평화로워진 다음에야 귀국을 했으면서, 그의 대표작인 <추락하는 모든 것의 소음>에서는 폭력이 판치던 시기에 스물여섯 살 때 애먼 총알에 맞아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에 시달리는 젊은이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2009년 중순에 화자 ‘나’는 뉴스를 통해, 보고타에서 250킬로미터 북쪽에서 흑진주 색의 1.5톤 하마를 사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나’ 안토니오는 얌마라 하마에 관한 뉴스를 통해 1995년 말의 기억을 소환한다.
  당시 며칠 있으면 26세가 될 청년 안토니오는 2년 전에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으며, 대학을 수석졸업하고, 지금은 역사상 가장 젊은 교수로 학생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면서 대단한 권위를 즐기고 있었다. 가히 인생의 황금시기였으리라. 자신의 과목을 들었던 여학생과, 이젠 더 이상 가르칠 기회가 없어진 상태에서 연애를 시작했고, 지금은 모르겠지만 조금 있으면 임신을 하고, 결혼까지 하게 될 예정이다.
  이때 젊은 교수님의 취미 가운데 하나가 당구였는데, 같은 장소에서 당구를 즐기던 늙수그레한 리카르도 라베르데가, 당시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신화적인 영토였던 나폴레스 아시엔다의 개인 동물원을 탈출한 하마를 취재해 내보낸 TV 방송을 보고 “동물들은 죄가 없어.”라고 했던 것이 생각났던 것.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누구인가 하면, 마약왕. 암흑의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던 철권의 사나이로 ‘암흑왕’의 집권 시기는 1980년대부터 시작해 컬럼비아 특수부대와의 싸움 끝에 탈출하다가 총에 맞아 1993년에 죽을 때까지였다. 그는 자기 사업에 방해가 되는 인물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보고타에서만 무려 4백 명에 가까운 시민들을 죽이거나 죽이도록 사주했는데, 많은 피해자가 무고한 시민들이었다. 누가 재수 없게 표적 근처에 서있거나 지나가라고 했느냐고. 이렇게 변명하면서.
  반면에 전성기 시절 약 250억 달러의 재산으로 세계에서 일곱 번째 부자로 포브스에 이름을 올린 에스코바르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거대한 동물원을 자신의 영토 안에 짓고 적도에서는 구경할 수 없었던 벵골호랑이, 아마존의 과카마야 앵무새, 조랑말, 손바닥만 한 나비, 코뿔소 한 쌍, 사자 등을 들여왔는데 여기에 하마가 끼어 있었던 것. 93년 말에 에스코바르가 한 세상 잘 때려먹고 44세의 나이에 험하게 죽자 그의 영토를 돌보는 사람도 뿔뿔이 흩어져 정부에 의해 대강대강, 대충대충 유지되고 있었다. 이때 일가를 몰고 짐승우리를 탈출해 적도의 강에 자기 영토를 분양받은 것이 바로 흑진주 색의 하마였던 것. 그러니까 탈출하고 10년이 넘는 동안이다. 그간 강 근방의 논밭을 얼마나 망가뜨려놓았으면 웬만한 피해쯤은 천주의 뜻이라고 여길 컬럼비아 촌사람들이 지방정부에 의뢰해서 사냥을 해버렸겠느냐고.

 

  근데 흑진주 색 얌마라(동물원 이름) 하마는 스토리를 끌어내는 기재에 불과하다. 리카르도 라베르데가 한 말 “동물들은 잘못이 없어.”는 저 뒤, 책의 막판에 다시 한 번 화자 ‘나’의 입에서 리카르도의 딸 마야를 향해 나올 뿐이고, 정말로 중요한 건, 1996년에 갑자기 리카르도에게 돈이 필요해졌고, 자기한테 곧 큰돈이 생길 것이니 그걸 받으면 이자까지 즉각 돌려주겠다고 약속해서 믿을 만한 사람에게 돈을 빌렸으나, 돈이 필요했던 사유가 소멸되어 비통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비틀비틀 보고타 시내를 걸어가다가, 오토바이를 탄 두 명의 남자에게 총을 맞아 죽어버린다. 이때 검은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에 탄 두 명의 남자, 이 가운데 뒷자리에 앉은 남자의 품속에서 은빛 권총이 나오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해 리카르도를 향해 돌진해 팔을 잡아당기던 오지랖 넓은 ‘나’ 안토니오의 복부에도 총알이 하나 덤으로 박혀버린다. ‘나’의 배로 진입한 총알은 친절하게도 장기를 전혀 손상하지 않고 그저 근육과 힘줄만 지나 골반뼈 위에서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왜 리카르도 라베르데에게 돈이 필요했느냐고? 리카르도는 근 20년 동안 교도소에 있다가 나온 인물이다. 무슨 죄목으로 복역을 했는지, 알고 있지만 구태여 아직 안 읽은 분께 가르쳐드리기는 싫다. 하여튼 그 전에 저 존 F. 케네디가 승인을 해서 설립한 미국의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플로리다에 살던 일레인 프리츠가 컬럼비아로 파견되어 오는데, 처음엔 보고타의 가난한 집에 하숙을 하다가 후에 몰락한 부유층 댁인 라베르데 가로 이사를 하면서, 이 집의 외아들이며 대 페루 전쟁의 위대한 영웅 조종사 라베르데 대위의 손자인 리카르도를 만난다. 소설책이니만큼 둘은 보자마자 확 한눈에 ‘반했다’기 보다 끌리는 느낌이 들었고, 며칠 안 있어서 드디어 뜨거운 사이가 되고, 나중에 결혼도 한다. 미국 새댁 일레인과 시부모 사이는 끔찍하지만. 일레인이야말로 시금치도 안 먹는 새댁이었다.
  일레인 엘레나 프리츠, 미국여성이라 자기 성을 고집하던 아내는 남편 리카르도 라베르데가 석방되어 보고타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득달같이 보고타를 향해 비행기를 탄다. 아메리카 에어라인 965편, 보잉 757기. 직행편은 아니다. 칼리에서 갈아타야 하지만 가장 빠른 비행편을 고른 것이다. 이 비행기가 칼리 근처에서 갑자기 자동항법장치가 고장이 나고, 고장이 나자마자 비상상황을 알 수 있도록 설계되지 않아(이 사건 이후에 항법장치 고장의 알람 설계를 개선했다고 한다.) 낌새를 너무 늦게 알게 된 기장과 부기장은 나름대로 성실하게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이어 서서히, 서서히 포기하면서 엘딜루비오 산 서쪽허리에 충돌해 155명 승객 가운데 네 명만 중상을 입고 나머지는 모두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일레인 프리츠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중상을 입은 채 살아남아 지독한 고통을 겪는 대신 죽는 순간까지 위험도 모르고, 긴장도 하지 않은 채 순식간에 삶을 접어버리고 말았다.
  리카르도 라베르데가 이 비행기의 블랙박스 녹음 사본을 얻기 위해 돈을 필요로 했던 것. 일레인이 돌아와서 예전과 비슷하게 여생을 보내려고 일을 해 조만간 큰돈이 생길 것이었는데 그것보다 더 빨리 돈이 필요했던 것임을, 아주 오랜 후에 알게 된다.

 

  재미있다. 전형적인 소설이다. 어떤 사건을 알게 되고, 그것으로 지난 시절의 한 인물을 떠올리고, 그 인물의 사연을 조금씩 알게 되는 내용을 여러 에피소드를 섞어 풀어나가는 구성. 익숙해서 쉽게 읽히기도 한다.
  이 작가가 일곱 편의 장편소설과 두 권의 단편집을 냈다는데 우리말로 번역한 건 이 책 한 권밖에 없는 게 아쉬울 정도다. 물론 명작이라고는 못하지만 컬럼비아의 흥미롭지만 어두웠던 시절을 훔쳐보는 취미를 만족시킬 수 있다. 어제 오늘 이 책 덕에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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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5 09: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매. 풀어주신 내용만 보면 대하소설느낌인데요? 재밌게 읽으신게 느껴지는 글 ㅋㅋ 좋은 아침입니다 퐐스타프뉨!

잠자냥 2021-11-15 10:30   좋아요 1 | URL
글쎄 우리의 골드문트는 좋은 아침 아닐걸 숙취와 월요일 콜라보ㅋㅋㅋㅋㅋ

Falstaff 2021-11-15 10:38   좋아요 3 | URL
맞습니다. 일취월장. 일요일에 취하면 월요일이 장난 아닙니다.
다 늦은 시간에 마누라가 해장국에 쐬주 사가지고 기어 들어오는 거였습니다. ㅠㅠ
장쟝님. 분명 무지 재밌게 읽었는데 다 읽고나니 뭔가 남는 게 없는 거 있지요? ㅋㅋㅋㅋ

- 2021-11-15 11:29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 해장국에 쏘주 ㅋㅋㅋㅋ 월요일 아침부터 헤비해 ㅋㅋㅋㅋㅋ
 

킴 투이 지음, 윤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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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킴 투이는 1968년 북베트남 인민군과 남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 즉 파르티잔들이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포함한 전 지역에서 일시에 대공세를 펼쳤던 1월 30일, 구정대공세의 화염 속에서 태어난다. 이때부터 18년 전, 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에서 저질러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해당지역을 잠시 점령한 민족해방전선 측은 곳곳에서 민간인 수천 명을 처형/살육하지만 곧바로 전세를 회복한 남베트남군과 미군(그리고 한국 용병)에 의하여 잔인하게 진압되기에 이른다. 이렇게 대규모 기습작전이 비록 전쟁역사상 북베트남의 패전으로 규정된다고 하더라도 완전한 실패로 돌아갔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것은 미국대사관이 점령당하여 당연히 북베트남이 패전할 것이라는 세계 여론이 흔들렸고, 무엇보다 미국 내에서 대중들이 베트남 전쟁을 회의적으로 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반전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노먼 메일러의 <밤의 군대들>과 필립 로스의 <아메리카의 비극>를 통해 당시 반전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작전으로 보아 북베트남의 패배였을지언정 정치적, 전략적으로는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는 걸 당시엔 몰랐을 것이다.
  이때부터 7년 후인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함락하여 일단 남북 베트남 정부의 두 체제 형태로 하다가 1년 후인 1976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건국한다. 공산주의 정권이 권력을 독점한 후, 당연한 절차로 미국에 부역한 집단과 부르주아들에 대한 숙청작업이 이루어졌다. 이에 75년부터 작은 배에 수백 명을 빽빽하게 태우고 베트남을 탈출하기 시작한다.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은 박정희 정권은 유신독재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보트 피플의 “월남탈출” 장면과 사이공 함락 영상을 흑백 TV에 연일 방송함으로써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른다. 이 와중에 의사당 안에서 야당 의원의 조금 삐딱한 발언을 마음에 들지 않아하던 민주공화당 소속 아무개 국회의원이 크게 “공산 월남으로 가버려!”라고 소리친 것이 TV와 신문매체를 통해 대서특필된 적도 있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기억하는 사이공 함락, 보트 피플,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건국의 순간들이다.

 

  1978년, 2백 명의 보트 피플을 태운 조각배 한 척이 석양의 아름다운 말레이시아 해변, 바다거북이 보호구역이기도 한 프랑스의 휴양 바캉스 전문회사 클럽 메드 근방에 도착했고, 모두 하선하자마자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비와 더불어 큰 파도가 덮치는 바람에 한 순간에 타고 온 나무배가 박살이 나버린다. 이후 정원의 열 배를 수용한 거주지에서 옴과 기생충과 불결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한다.
  실제로 작가 킴 투이는 1978년에 목선을 타고 말레이시아에 도착해 수용소에서 4개월을 보내고, 난민 신분으로 프랑스 퀘벡의 동쪽 주거지역인 그랜비에 정착한다.
  애초에 이 책은 작가 킴 투이의 경험이 과하게 많이 침투한 것처럼 보여 문학과지성사와 캐나다 문단이 주장하는 대로 ‘프랑스 언어로 쓴 소설’로 보기보다는 자기 경험을 메모 식으로 나열한 에세이를 읽는 기분이다. 어쨌거나 킴 투이는 아시아 출신 부르주아의 자제답게 어려운 와중에도 몬트리올 대학에서 언어학과 번역으로 1990년에 B.A를 따고, 93년에는 법학 학위도 받는다. 1968년생이니 학업을 중단한 일이 없었다는 얘긴데, 친척의 학업을 지원해주는 이야기는 아시아 작가들 아니면 쉽게 구경하지 못할 일이다.
  주인공 ‘나’ 응우엔 안 띤은 8분의 1이 중국인인 부르주아 집안의 딸이다. 위로 오빠, 아래로 남동생. 75년에 사이공이 함락되었다 해도, ‘나’의 부모는 흰 운동복을 멋있게 차려입고 테니스를 치고 돌아와, 북베트남군이 집의 절반을 쓰겠다는 통보를 받았을 정도다. 이어서 얼마 후 나머지 반도 다 써야겠으니 집에서 나가라는 말을 듣고는 집안 여기저기에 숨겨놓은 순금과 다이아몬드를 창문 밖으로 던지고, 나중에 그것을 찾아 도피자금으로 사용했다. 그러니 대단한 부르주아였을 것이다. 산업이 발달한 나라도 아니고, 전쟁 중에 현금대신 황금과 다이아몬드를 마련해놓았을 정도이니. 유대인의 피가 아니라 엄마 혈액의 사분의 일 중국인이다. 이 대목에서 궁금한 것이, 중국인들과 유대인들을 한 행정구역, 예를 들어 황해북도에 몰아넣고 살라고 하면 어떤 민족이 더 잘 살까? <루>를 읽어보면 다른 건 몰라도 번식력은 중국인이 월등한 것 같다만.
  이미 퀘벡과 몬트리올을 거쳐 캐나다를 고향으로 생각하고 있는 보트 피플 출신의 ‘나’ 응우엔 안 띤, 프랑스 식 이름을 갖고 있는 서너 명의 남자와 연애 끝에 기욤과 결혼(혹은 동거)하여 파스칼과 앙리, 두 아들을 낳아 키우는데, 앙리는 틀림없이 자기 집안, 그러니까 베트남 혈통에서 온 유전자 문제로 자폐아인데 다행히 형 파스칼이 잘 보살피고 있다. ‘나’는 업무 또는 기타 목적으로 베트남 호치민 시에 갈 일이 잦은 커리어 우먼으로 적어도 두 주일 이상 베트남에 머물고 있으면서, 동시에 베트남과 캐나다에서 있었던 자신의 개인사를 액자 식, 또는 메모 분량의 기억을 나열하고 있다.
  황금 몇 킬로그램과 많은 다이아몬드를 챙겨 도망할 정도의 화려한 과거와, 패전 후 공산주의 권력, 말레이시아의 야만적 수용소, 캐나다에서 해야만 했던 밑바닥 생활, 그리고 현재의 베트남을 깔끔한 문장으로 써내려 가는데, 아놔, 나하고는 맞지 않는다. 문장 말고 스토리가.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으니 이건 맞지 않는 책을 고른 내 탓이지 작가의 삶과는 관련이 없다. 응우엔의 반대 진영, ‘나’의 집에 들어와 가택수색을 하면서도 할머니의 여섯 딸이 사용하는 많고 많은 비단 브래지어를 본 적이 없어, 브래지어 자체가 어떤 용도로 사용하는 것인지 몰라, 그게 커피 필터로 여기면서, 왜 필터가 쌍으로 달려 있는지를 궁금해 할 수 있는 소년병들의 삶에 더 깊은 관심이 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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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11-12 10:4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 뚝딱뚝딱 리뷰 기계! ㅎㅎ 이 책은 다부장님 영향으로 읽으셨나요?

Falstaff 2021-11-12 10:49   좋아요 3 | URL
이 책은, 역자 윤진 딱 하나 보고 골랐는데요, 독후감 쓰고나서 봤더니 다락방 님 페이퍼가 있더군요.
하나도 안 놀랐습니다. 베트남 좋아하시는 거 알고 있어거든요. ㅋㅋㅋㅋ
저도 베트남 좋아해요!

잠자냥 2021-11-12 11:38   좋아요 3 | URL
우리 다부장님 (미래의) 베트남 집에서 만나기로 했잖아요. 각자 좋아하는 술 챙겨와서... 다부장님 와인, 저는 맥주, 폴 님은 쐬주~ 안주는 쌀국수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11-12 12:46   좋아요 2 | URL
안그래도 오오 폴스타프 님이 이 책을??? 하였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1-11-12 11:5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 님은 번역자도 중요하게 여기고 책을 선택하시는 거 같은데(물론 다들 그렇겠지만요), 언제 한번 좋아하는 번역자 리스트 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단 윤진... ㅎㅎ

싫어하는 역자 리스트로 하면 더 재미날 거 같긴 하지만... 그러다 보면 폴 님이 저에게 싸다귀를 맞는 게 아니라 알라딘 및 출판사 및 역자들에게 따귀를 맞을 듯해. 그건 제가 여쭈지 않겠습니다. 일단 공 뭐시기 등등 몇몇은 압니다만...

Falstaff 2021-11-12 12:16   좋아요 4 | URL
몇 명 있기는 합니다. 근데 전적으로 역자만 보고 책을 사면, 똥 밟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이 양반들 직업이 번역 아닙니까. 그러다보니 제의가 오면 골라서 괜찮은 것들만 번역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주면 주는 대로 해치우는 수도 있고요.
이런 경우, 절대 역자하고 친분이 있으면 안 됩니다. 아니, 좋지 않습니다. 친분이 있더라도 이번에 나온 책은 개떡이다, 라고 걱정하는 마음이 들어 솔직, 진솔하게 얘기해주면 한 방에 친분 깨집니다. ㅋㅋㅋ 물론 필자도 마찬가지고요. 필자의 경우가 좀 더하더라고요. 절대 솔직해지지 마세요. ㅋㅋㅋㅋ
믿고 읽는 필자가 썼는데 믿고 있는 역자가 훌륭하게 번역해도 닫힌책에서 나온 <동부전선이상있냐> 같이 교정교열 개판인 경우도 있습니다.

역시 역자에 관해서는 까는 얘기가 재밌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생각만 해도 웃긴 역자도 있습니다.
역자 두 명이 파주 출판단지에서 택시를 타고 유명 역자 흉을 봤답니다. 그랬더니 택시 기사가, 아이고 그 양반, 진짜 번역하는 거 하나도 없어요. 우리 처제가 그 양반 마누란데, 번역은 처제가 다 하고 돈은 그 양반이 다 갖고 그래요, 했다는 전설도 내려오고 뭐 그렇습니다.
비문이 날라다니는 번역을 해놓고 증거를 딱 디밀면, 이상하다, 난 이렇게 쓴 적이 없는데 확인해봐야겠다, 이런 재랄을 하시는 분도 있고요.

하여튼 윤진 좋습니다. 졸라 번역엔 박명숙이 짱이고, 라틴 아메리카는 조구호(월요일 업로드 예정), 토마스 만은 홍성광, 영어책은 하도 많아서 딱 꼬집기 쉽지 않네요. ㅋㅋㅋㅋ

coolcat329 2021-11-12 12:34   좋아요 2 | URL
저도 부탁드립니다 ~~믿고 읽는 번역자 리스트요~

다락방 2021-11-12 12:47   좋아요 2 | URL
택시 에피소드 엄청 재미나네요!! >.<

잠자냥 2021-11-12 12:59   좋아요 2 | URL
<동부전선이상있냐>ㅋㅋㅋㅋㅋㅋ 이상 많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붕붕툐툐 2021-11-12 23:19   좋아요 0 | URL
닫힌책~ㅋㅋㅋㅋㅋㅋㅋㅋ
 
밤마다 페로에는
미셸 도이취 지음, 서명수 옮김 / 연극과인간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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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희곡을 쓴 사람이 ‘도이취’라고? 알파벳으로 쓰면 ‘Deutsch’. 구글링 여차 잘못해서 불어-한국어로 변환하면 ‘독일 미첼’도 구경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이이가 1948년 프랑스 알자스 주의 스트라스부르 태생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알자스. 지금은 유럽연합으로 뭉쳐서 위험이 없지만, 만일 독일이 프랑스와 또 한 번의 전쟁을 벌인다면 여전히 알자스 땅의 소유권이 중요한 원인이 아닐까, 하는 나의 의견. 일본인들이 헛소리를 해대는 독도 소유권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을 듯하다. 프랑스 국적의 이 양반의 경우는 이름 자체가 그냥 ‘독일’일 정도니까.
  1948년생이어서 1970년에 스물두 살. 미셸 푸코, 롤랑 바르트, 자크 라캉 등, 이름만 들어본 기호학, 심리학, 사회학 학자들에게 경도된 청년은, 당대 프랑스 연극의 물결이었던 일상극에 전념하다가, 역시 변증법, 정·반·합, 50~60년대 부조리극에 대한 반동으로 출현한 일상극에 다시 반동하여 “시적이고, 몽환적이고, 극적인 성격이 강한 작품들, 또는 지적이며 동시에 감각적이고, 무거우면서도 동시에 유머가 돋보이는 작품”(역자 해설 요약)을 발표하는 집단에 합류한다. 사실적인 묘사에 치중한 일상극에 대한 반동이니 어떠하겠는가. 작품은 다시 난해하고, 이미지즘적 요소가 많아지는 쪽으로 변할 수밖에. 이게 1980년대 프랑스의 연극판이었다고 한다. 프랑스만? 천만의 말씀. 1980년대 우리나라 창작극도 다수의 대중을 확보하기 위한 홀딱쇼 수준의 벗기기 연극과, 난해한 연극이 많이 등장했다. 언뜻 기억나는 연극이 (성추행, 성폭행 피의자 이윤택이 1988년에 연출하기 훨씬 이전의 공연) <산씻김>이다. 물론 <산씻김>은 프랑스 일상극의 반동으로의 난해와는 성격과 많이 달라, 차라리 죽음에 관한 ‘제의祭儀 연극’이라 해야 마땅하겠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다. 내 개인사로 보면 이 <산씻김>을 관람한 1980년대 중반 이후로 실제 연극을 보는 일이 극히, 극히, 지극히 드물게 되는데, 당시 지방 제조업 회사에 근무하는 대부분 봉급쟁이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밤마다 페로에는…>을 발음해보시라. ‘페로’라는 지역이 있어서 밤마다 그곳에서 모종의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기대감을 품게 한다. 음, 거기서 밤마다 좀 야한 일이 벌어졌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틀렸다. ‘페로에’라는 이름의 복싱 챔피언이 주인공이다. 그러니 페로에가 밤마다 뭔가를 한다는 의미.
  작품은 모두 2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다만 지문만 실려 있는 것도 있으며, 길고 긴 독백을 해야 하는 장면도 있다. 애초에 이야기했듯이 24개의 장을 순서에 따라 읽거나, 실제로 공연을 보더라도 나를 포함한 무수한 독자나 관객들은 미셸 도이취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단언하노니, 도이취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포착해서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서 미셸 도이취 한 명밖에 없을 것이고, 그가 아직 살아 있으니, 지극히 관심이 있다면 전화를 하거나 메일이라도 보낼 수밖에 없는데, 아쉽게도 나한텐 그런 정성까지는 없다.
  그렇다고 무슨 ‘열린 결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스물네 개의 장면이 서로 버석버석, 마치 모래가 서로 부딪는 것처럼 별로 특별한 관련이 있는 것 같지 않아서, 한 번 공연에 98명의 관객이 들었다면, 98개의 개별적인 감상을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챔피언에 오르지 못한 페로에는, 밤마다 무엇을 하느냐 하면,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부터 동녘이 부옇게 밝아올 때까지 도무지 어떤 인간인지 알 수도 없는 호적수를 거리에서 만나 싸움박질을 한다.
  이 결과, 페로에는 발열, 녹초, 반상출혈, 정신적 무력감, 전신의 혈종,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른쪽 엉치뼈가 부러져 다리를 절게 된다. 권투 선수가 누군지 모를 상대와 싸우다가 다리를 절게 되다니. 나는 이 에피소드를 읽는 순간, 거의 즉각, 여호와의 천사와 씨름을 하다 평생 다리를 절게 된 야곱을 떠올렸다. 근데 페로에는 죽을 때까지 여호와에 의지해야 하는 야곱과는 달리 그 다리를 하고도 나중에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니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아, 페로에가 챔피언에 오르는 해피엔드 연극이라는 얘기도 전혀 아니다. 권투 선수고, 날마다 밤새도록 싸우다가 절름발이가 됐는데, 페로에조차도 자기와 싸움을 하는 호적수가 도무지 누군지 몰라, 상대의 정체를 밝히려다가 사건이 커져 애초엔 예상하지도 못한, 인류사를 향한 장례로 끝을 보게 되는 엽기 연극이다.
  결론을 공개 독후감에서 이야기해도 되느냐고? 된다. 여태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극의 해석은 감상하는 독자와 관객에 따라 전부 다를 것이라고. 내가 내린 결론, 인류사의 장례 역시 무수하게 많을 해석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실제로 <밤마다 페로에는…>에서는 천사와 씨름하다 다리에 장애가 생긴 야곱으로 볼 수도 있는 페로에의 야간 싸움박질도 등장하고, 무인도의 생체과학자 시르세가 인간을 변형시켜 만든 반인반마를 비롯한 돼지인간, 개인간, 소인간, 양인간, 곰인간 등도 등장하여 단숨에 독자로 하여금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를 연상하게 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건 극작가가 <오뒷세이아>를 염두에 두었다기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워낙 장대하여 웬만한 작품은 어떻게 해서든지 <오뒷세이아>에 가져다 붙힐 수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로사라는 이름의 아가씨가 등장하여 페로에를 사랑하게 되지만, 로사는, 페로에가 싸움의 천사가 누구인지 밝히기 위해 대가로 자신의 육신과 영혼을 제공하기로 계약한 의사, 과학자 겸 사업가 스텐저 박사와 결혼을 해버린다. 일단 페로에는 사람이 앞날의 비전이 없는 반면, 결혼할 당시에 로사는 명배우가 되어 이름도 마리아라고 개명한 다음이기는 하다. 이런 우화적 줄거리를 가지고 있으니 적어도 한 명의 희생자가 필요하여, 스텐저 박사가 살해당하는데 당연하게 페로에가 유력한 용의자 선상에 올라 취조를 받는다. 죄가 없는 페로에는 석방되어 금방 나오지만 어처구니없게 배우 마리아를 숭배하는 형사1이 쏜 총 두 발을 맞고 길가에서 숨을 거둔다. 장면은 다시 스텐저 박사의 유산을 유증받은 상원의원이 “세계의 박물관”을 개관한 기념식장으로 바뀌고,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과 유력인사, 섬에서 본 적 있는 변형인간들이 참석한 가운데 스텐저 박사가 만든 거대한 수조 안에는 지난 역사상 유명 인사들의 몸 조각들이 둥둥 떠다니는 것으로 막이 내린다.

 

  그래서 이 작품의 의도가 뭐냐고? 내가 그걸 알 수준이면 휴일 오후에 희곡집 한 권 읽고 좁은 방에 앉아 독후감이나 끼적이고 있겠는가. 또 알더라도 어떻게 그렇게 힘들게 알아낸 것을 맨입에 말해줄 수 있겠는가 이 말이지. 하여튼 문화도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더욱 복잡해진다. 이미 미술과 시 같은 장르는 일반 독자의 품에서 많이 멀어진 거 같고, 극작도 곧 뒤쫓을 것으로 보인다. 더 복잡해지기 전에 얼른 읽는 게 남는 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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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11-11 10: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폴스타프님 스탈 유머를 알면서도 또 휘말려서^^ ˝밤마다 페로에는...˝거기서 딱 그 생각.ㅋ ㅋ 근데 boxer등장^^;;

페이퍼 마지막 문단까지 Falstaff님 찐 해학^^ 기분 좋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Falstaff 2021-11-11 11:05   좋아요 3 | URL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제 기분이 을매나 좋은지 말입지요. ㅋㅋㅋㅋ

붕붕툐툐 2021-11-11 2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아실 거 같은데~ 그러지 말고 알려주세요~ 맨입에 안되면 술이라도 사야할까요?ㅎㅎ

Falstaff 2021-11-12 08:12   좋아요 0 | URL
ㅋㅋㅋ 알면 제가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벌써 잘난 철 한 번 거하게 했지 말입니다. ^^;;;

coolcat329 2021-11-11 2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졸린 눈을 꿈뻑이며 초집중을 하며 읽었는데요..참 희한한 내용이네요. ㅎㅎ
신화적인 면, sf 요소도 있는거 같은데 인류사의 장례식이라함은 결국 멸망해가는 세상을 말하는거 같기도 하구요. ㅎㅎ

근데 프랑스 작가 성이 독일이라니 ㅋ

Falstaff 2021-11-12 08:14   좋아요 1 | URL
옙. 온갖 요소가 다 들어 있어서 뭐라 딱 꼬집기가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네요.
이런 걸 글쎄.... 문화의 잡탕밥이라고나 할런지요. ㅋㅋㅋ
 
황야의 수탉
미셸 투르니에 지음, 이규현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짐작도 안 했다. 이 책이 열네 단편을 실은 단편집이란 것은. 투르니에도 단편소설을 썼다는 거 자체를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책의 제목도 근사했다. 《황야의 수탉: Le Coq de bruyère》. 저 러시아 땅엔 푸시킨이 타타르나 몽고족 등의 이민족이 침략할 징조가 보이면 긴 울음을 우는 <황금 닭: Leq d'Or>을 만든 적이 있잖았나 말이지. 책 제목 하나 가지고 대단한 서사를 가진 장편소설일 것이라고, 벌컥벌컥 김칫국물부터 들이켰구나. 단편집이란 걸 알고 지레 실망한 가장 큰 이유는, 요즘 유난히 단편소설집을 자주 읽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비교적 짧은 작품들, 소설과 비교해보면 금세 읽을 수 있는 희곡을 연달아 읽었기 때문에 좀 유장한 장편을 읽고 싶어서였고, 미셸 투르니에라면 이 기대를 충족시켜 주리라, 기대가 커서였을 것이다.
  책에 실린 단편들을 쓴 시기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여호와가 제일 먼저 만든 인간은 유방이 달린 자웅동체라고 주장하는 <아담가家>부터 시작해서, 여성의 속옷만 보면 흥분을 넘어 환장하는 주인공을 다룬 <페티시스트 - 1인 단막극>까지 참 다양한 주제들이다. 심지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대신 등장한 산타 할머니, 사제가 설교단에 오르는 순간부터 울어제끼는 아기 예수 역을 맡은 진짜 아기에게 풍만한 가슴을 내미는 <산타 할머니>도 들어있다. 그렇다고 종교적인 작품들만 있는 것도 아니다.
  표제작 <황야의 수탉>의 주인공은 환갑이 넘었지만 건장한 신체와 근육과, 펜싱실력과, 전설적인 마장마술은 30대 초반의 신체 건강한 장정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신사다. 투르니에의 주요 무대인 알랑송의 펜싱장엔 제1 기병대에서 가장 출중한 두 검객이 사브르를 겨누고 있었는데 결국 깊은 찌르기로 승리를 거둔 인물은 반백의 퇴역 대령 기욤 조프로아 에티엔 드 생 퓌르시 백작이었다. 이 양반이 사브르만 잘 찌르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다른 걸로도 숱하게 찌르고 다녀 근 40년 간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오귀스틴 생 퓌르시 백작부인의 복장이 터져나가기 일보직전이었다. 나이 먹으면 저절로 시들겠지, 라는 일말의 희망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40년 내내, 어떻게 쉬지 않고 찌르고, 찌르고, 또 찌르는지 말이지. 알랑송 사람들도 백작의 이 찌르기 실력을 처음엔 비웃다가, 어느 수준에 이르니 감탄을 하다가, 이젠 경외의 수준에 달해 생 퓌르시 백작에게 “수탉”이라는 별호를 붙여주기에 이르렀다. 이이의 집에 나이 많은 하녀가 이젠 은퇴해서 새롭게 쉰 살 먹은 하녀가 들어와 사달이 생기는데, 설마 원기 왕성한 백작께서 못생기고 힘만 센 으제니한테 흑심이야 품으려고. 으제니의 열여덟 먹은 조카 마리에트면 몰라도. 희극 같지? 희극은 분명 희극인데 작가 푸르니에가 한 사람의 인생에 호락호락하게 희극을 선사하지는 않을 인물이니 문제다.
  표제작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만큼 또 재미나게 읽은 작품이 40톤 화물을 정기적으로 남프랑스까지 수송하는 스무 살의 트레일러 운전수 피에르와 그보다 두 배 이상 많이 산 것 같은 파트너 가스통의 이야기 <은방울꽃 휴게소>였다. 이 책이 이규현 번역이다. 유럽 언어에서도 경어와 평어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경어는 경어고, 평어로 말할 거 같으면, 우리나라에서 쓰는 평어와는 좀 다르지 않나? 예를 들어 이 작품에서 피에르와 가스통은 평어를 쓰는 사이다. 나이가 두 배 차이 나는데도 불고하고. 그래서 스무 살짜리 피에르가 가스통을 호칭하는데, “자네.” 말은 평어, 우리말로 해서 반말을 쓰되, 가스통이 젊어서 사고라도 쳤으면 아들뻘인데, 아빠뻘한테 자네, 라고 하기엔 무리라 그저 “형님” 수준으로 번역했으면 어땠을까? 나이 차이가 이렇게 많이 나는 줄 몰랐다가 나중에 알게 되면 얼빵 없어진다. 그리고 작품이 끝날 때까지 계속 ‘자네’로 일관하면, 미쳤을까? 의심하게 된다.
  성실한 운전수 피에르한테는 펄펄 끓는 스무 살의 피가 흐른다. 도버해협 근처의 블로뉴에서 새벽에 고속도로에 올라 리옹까지 왕복해야 하는 일. 첫날 새벽엔 언제나 피에르가 운전을 하고 파트너 가스통은 의자 뒤 공간에서 잠을 잔다. 트레일러 타보신 분은 알겠지만 진짜로 의자 뒤편에 작은 공간이 있다. 오랜 운전에 피곤해지면 차에서 내려 스트레칭을 하고, 이 공간으로 옮겨 잠깐 눈을 붙일 수 있게 설계가 되어 있다. 고속도로를 타다가 은방울꽃이 하나도 없는 ‘은방울꽃 휴게소’에 들러 차 청소도 하고, 점검도 하고, 운전자도 바꾸는데, 잠깐 쉬는 틈에 피에르가 적은 수의 소떼, 그리고 소들을 돌보며 잔디에 앉아 있는 뤼지니 마을의 아가씨 마리네트를 만난다. 그러나 아쉽게도 휴게소와 들판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철조망. 이들은 무도회를 이야기하고, 라디오를 켜놓고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몸이 떨어진 상태로 왈츠를 추기도 한다. 바야흐로 스무 살 핏줄에 불을 붙여버리는 마리네트. 어떻게 됐을까? 어떻긴 어때. 순식간에 불 맞은 들짐승으로 변해버리는 것이지. 고속도로를 달리는 인간이라면 절대 옆을 바라보면 안 된다는 가스통의 진심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피에르. 이 아이의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비극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한 시절엔 만발했지만 그 위에 고속도로가 나는 바람에 은방울꽃이 한 송이도 남아 있지 않은 은방울꽃밭 옆의 은방울꽃 휴게소에서 시작하는.
  이외에도 <트리스탄 복스>, <베로니크의 수의壽衣> 등 재미있는 작품들이 들어 있는 책. 그러나 전편이 다 좋은 수준은 아니고, 무엇보다 아마 품절일 걸? 위에서 얘기했듯 몇 몇 부분에서 번역한 우리말 표현이 깔끔하지 않은 것도 있고, 전통의 출판사 ‘현대문학’으로는 예외적으로 오타도 몇 개 눈에 보인다. 그러니 안 보인 오타까지 합하면…… 이런 얘기는 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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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1-10 08:49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투르니에 단편집이 있군요.
새상품도 있고 중고도 나와있네요. 바로 주문했어요. 늘 몰랐던 책 소개 고맙습니다 ^^
역시나 재미나게 읽었어요.

Falstaff 2021-11-10 08:58   좋아요 5 | URL
ㅎㅎㅎ 재미나게 읽어주시니 제 기분도 좋고, 어깨도 으쓱으쓱하고. 고맙습니다!
^^

얄라알라 2021-11-10 10:14   좋아요 3 | URL
와 프레이야님 정말 발 빠르심,
Falstaff님의 추천에 바로 주문하시다니요.
폴스타프님께서 ‘경어와 평어‘ 이야기를 해주신 덕분에 저도 다음에 혹시 이 단편집 읽는다면 유의해서^^

coolcat329 2021-11-10 09:1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황야의 수탉 🐓 제목이 멋지네요.
은방울꽃 휴게소가 저도 맘에 들어요. 도서관 가서 요것만 읽어봐야겠어요 ~

Falstaff 2021-11-10 09:43   좋아요 4 | URL
ㅎㅎ 좋은 선택입니다. 제일 재미난 것들이예요.

새파랑 2021-11-10 09:17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표지부터 품절 느낌이 나는데 역시 막줄에 품절이라고 알려주는 폴스타프님 ㅋ 작품이 전반적으로 혈기왕성(?)한 느낌이 나네요~!!

Falstaff 2021-11-10 09:44   좋아요 4 | URL
이이가 철학교수 지원했다가 미역국 먹은 사람입니다. 혈기방장하지만은 않습지요.

얄라알라 2021-11-10 10:14   좋아요 4 | URL
하하하 책고수님 새파랑님은 표지만 딱 보셔도 ˝품절 느낌˝ 아시다니!^^ 하긴 저도 이 책 아주아주 옛날에 도서관 서가에서 보았던 그 표지 그대로이네요.

얄라알라 2021-11-10 10:15   좋아요 4 | URL
이분이 철학 전공의 레비스트로스 강의도 들었다고, 들은 것 같아요^^ 철학교수 지원이라는 부분 더 알아보고 싶네요

새파랑 2021-11-10 10:37   좋아요 2 | URL
표지가 좀 오래된(?) 느낌이 나서요 😅

Falstaff 2021-11-10 10:48   좋아요 3 | URL
ㅎㅎㅎ 요즘 인터넷에 하도 많은 정보가 떠서, 이젠 오히려 사실 여부가 의심스러울 정도예요. 하여튼 푸르니에가 철학에 깊이 경도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황금구슬>이란 책도 근사합니다.
<마왕>이 대빵이고요. 아마 <방드르디>는 다들 읽어보셨을 걸로.... ^^;;

잠자냥 2021-11-10 09:56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여 그대, 어찌 이리도 품절 상품을 잘도 들이대는가?
그대 뺨을 갈기려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다가 도로 집어넣었소. 우리에겐 아직 까방권이 남았으니...
그나저나 단편 읽으면 장편 읽고 싶어진다는 그대의 말에 깊이 공감하오.

페넬로페 2021-11-10 10:12   좋아요 4 | URL
까방권의 유효기간은 언제까지 입니까? ㅎㅎ

잠자냥 2021-11-10 10:15   좋아요 3 | URL
그건 제 마음대로입니다. 이제 몇 장 안남았습니다.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1-11-10 10:45   좋아요 3 | URL
엇, 이럭저럭 다섯 개 까방권 얻어서 이제 두 개 소멸하고 세 개 남은 걸로.... ㅎㅎ

페넬로페 2021-11-10 10:12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은 1일 1독서 1리뷰를 하시는 겁니까? 어쩐지 이건 골드문트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러 종류의 얘기가 있는 단편집이라 좋을것 같아요.
도서관에 검색해봐야겠어요^^

잠자냥 2021-11-10 10:19   좋아요 4 | URL
주정뱅이라서 술 취해서 책을 막 읽어 젖힌다네요!

Falstaff 2021-11-10 10:45   좋아요 3 | URL
암만해도 내년 정월 초부터 골드문트로 바꿔야 하겠습니다. ㅋㅋㅋㅋ

얄라알라 2021-11-10 11: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방드르디는 제 인생책^^ 그 서문에서 철학 이야기가 나왔떤 것 같은데, 아...다시 찾아봐야할봐요^^ falstaff님께서 숙제 주셨습니다 ㅎ

Falstaff 2021-11-10 12:03   좋아요 3 | URL
아, 인생책입니까? ㅋㅋㅋㅋ
저도 대단히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전도 즉 생각의 거꾸러짐을 확 느꼈던 기억입니다. 진 리스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와 함께 말입죠.
숙제하듯 책 읽지 마세요. 즐겁자고 하는 일인데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 받으면 어쩝니까. ㅎㅎㅎㅎㅎ

그레이스 2021-11-10 12:19   좋아요 2 | URL
저도 이 책 3번은 읽은듯요
혼자서 한번, 토론하기위해 한번, 청소년용으로 한번 말씀하신 것처럼 사고의 전복이 일어난...!

Falstaff 2021-11-10 14:39   좋아요 2 | URL
윽! 세 번 읽으셨으면 찐 팬 인증입니다! ㅋㅋㅋ

얄라알라 2021-11-10 12:2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진정 인생책이었습니다! 저에게 19살 때 책 선생님이 있었거든요. 책을 한 아름 안겨주며 ˝너가 좋아할 거같아˝했던. 그 친구 덕분에 처음 <방드르디>접하고 불문학과 개설하는 교양 수업까지 기웃거리며 들었던

Falstaff 2021-11-10 14:43   좋아요 2 | URL
아우, 좋은 친구를 두셨군요.
제 동무들은 다 술꾼들입니다. 책 이야기 하는 놈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 한 명 있었군요. 지금은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교수하는 사제네요. 짜식이 전화 한 통이 없어요 그래.

얄라알라 2021-11-10 12: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께서도, Falstaff님께서도 ˝사고의 전복˝이야기하시니까, 정말 반갑고 좋습니다!

Falstaff 2021-11-10 14:44   좋아요 2 | URL
전복... 사고의 전복 보다도, 저는 완도 전복에 쐬주 한 병이 더 좋은데요. ㅋㅋㅋ

유부만두 2021-11-10 21: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황금수탉, 하니까 ‘황금물고기’ 생각나요.
le Poisson d’or 결국 금붕어인데 어감의 차이가 괭장하지요? ^^

Falstaff 2021-11-10 21:27   좋아요 1 | URL
아휴, 전 불어 몰라요. 겨우 읽을 줄만 안답니다. ㅋㅋ
 
브로크백 마운틴 에프 모던 클래식
애니 프루 지음, 전하림 옮김 / F(에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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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핑 뉴스>를 흥미롭게 읽어, 적어도 한 권은 더 읽으리라고 점찍어놓았던 애니 프루, Adna Ann Proulx의 단편집을 읽었다. 위키피디어 자료에 의하면 이이는 2018년까지 다섯 편의 장편소설과 네 권의 단편집을 출간했다. 이외 아홉 권의 논픽션이 있다. 1935년 을해생 돼지띠로 올해 나이 여든일곱. 아직 글을 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의 신간은 없다고 가정하면 더욱 더, 몇 권 되지 않는 저작들이 번역, 출간되지 않는 것이 매우 아쉽다. 내가 읽은 두 권 외에 데뷔작인 <엽서>가 지난 세기에 나온 적이 있지만 출판사조차 없어졌다.
  이이는 코네티컷에서 잉글랜드 부계와 프랑스-캐나다 모계 사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내내 미국의 북동부 지역의 각처를 옮겨 다니며 성장했다. 버몬트, 노스캐롤라이나, 메인, 로드아일랜드 등 상대적으로 좁은 면적을 가진 올망졸망한 주들에서 살았다. 작가의 추억이 서린 곳에서 조금만, 물론 우리나라 땅을 기준으로 하면 먼 거리지만 미국인들의 거리 기준으로 하면 얼마 멀지 않은 뉴펀들랜드를 무대로 한 <시핑 뉴스>를 읽으면서, 남자들은 언젠가는 얼음조각이 자박자박한 바다에 거꾸로 박혀 죽고, 여자들은 언젠가는 과부가 되는 땅의 황량함을 그렇게 잘 묘사했겠거니 했었다. 그렇지 않은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도착한 그 땅위에서, 하늘도 안 보이고 앞도 안 보이던 거대 밀림 속에 나무를 베고, 그루터기를 뽑아내 건설한, 개척자라고 부르는 초기 침략자들의 야만적인 습성이 그대로 남아 있던 땅 위에서의 삶을.
  그러나 틀렸다. 아니, 그게 다가 아니었다. 단편소설로 눈길을 돌리면, 애니 프루는 세 권의 단편집 제목을 <와이오밍 이야기>, <와이오밍 이야기 2> 그리고 <와이오밍 이야기 3>으로 펴냈다. 프루는 버몬트에서 30년 동안 살며 세 번 결혼하고, 세 번 이혼하고, 조너선, 질리스, 모건과 실비아, 순서대로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낳고 살다가, 뜻한 바 있어서 1994년에 와이오밍으로 이사를 간다. 물론 연중 일정기간은 <시핑 뉴스>의 무대, 캐나다의 뉴펀들랜드에서 지내기는 하지만. 와이오밍이라는 완벽한 내륙지방이자 황량함의 측면에선 셔벗 수준 바닷물과는 정 반대의 삭막한 환경에 지배받는 지역에 거주하며, 이 놀라운 적막과 가혹한 기후, 연간 80도 이상의 차이를 보이는 온도차와 폭설 등에 대하여, 처음엔 놀랬다가, 점점 반했을 수도 있는데 사실 반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어서 그건 그냥 넘어가고, 하여튼 와이오밍이라는 야만의 자연 속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써서 알리고자 마음먹는다.

 

  데뷔작 <엽서>로 펜-포크너 상, 우리말로 최우수 신인작가상을 수상한 애니 프루는 와이오밍으로 이사하기 바로 전 해인 1993년에 <시핑 뉴스>로 퓰리처 상과 전미 도서상을 휩쓴 다음이다. <시핑 뉴스>는 2001년에 영화로도 만들었고, 이 덕에 애니 프루도 주머니가 두둑해지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이제 1997년부터 와이오밍을 무대로 하는 단편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물론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브로크백 마운틴>. 2005년에 영화로 만들어져 78회 아카데미 영화상에서 감독상, 각색상, 음악상을 휩쓸고, 같은 해 골든 글로브에선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주제가상을 꿀꺽, 해치워버린다. 나는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은 보지 않았다. 2005년이면 내 인생에서 가장 바쁘게 보낸 시절로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회사에서 봉급 좀 더 받아볼까, 아니면, 잘리지 않고 좀 더 오래 다녀볼까, 이 둘 중의 하나를 위해 새벽부터 일하고, 술 마시고, 바가지 긁히고, 본격적으로 반항하기 시작한 아이들과 아내 사이에서 미치고 팔짝 뛸 당시였으니 말이지. 아, 인생은 언제나 엿 같아, 하면서.
  물론 시간이 있어도 안 봤을 거 같기는 하다. 동성애에 관해서 별로 관심이 없어서. 제발 부탁하는데, 나더러 관심 좀 가져달라고 하지 마라. 동성애를 반대하지 않는다. 물론 찬성하지도 않는다. 그냥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다. 그이들 취향은 존중하겠다. 이게 기본 마음가짐일 뿐. 그래도 같은 남성끼리의 섹스 씬이 나온다면 아직은 조금 어색할 거 같다. 뭐라 하지 말고 시간을 좀 더 달라. 적응이란 건 한 번에 확 해버리는 게 아니잖은가. 하여튼 <브로크백 마운틴>을 써서 애니 프루는 또다시 오 헨리 상을 받고, 영화로 만들어 이번엔 대박을 쳤는데, 얼마 만큼이냐 하면, 작가 자신이 리브레토, 대본을 써서 오페라로도 만들어 2014년 1월에 마드리드의 레알 극장에서 세계초연을 했을 정도였다. 너무 많이 놀라지는 마시라. 숀 펜과 수잔 서랜든이 주인공을 한 영화 <데드맨워킹>도 오페라로 만들어 미국에서 공연했고, 오페라가 CD 및 DVD로도 팔리고 있으니까. 그래도, 참, 이만하면 성공한 삶이다. 안 그냐? 남자 복이 없어서 세 번 이혼을 했지만 덕분에 다양한 아이들이 생겼으니 그것도 뭐, 좋게 생각하자.

 

  모두 열하나의 단편소설을 실은 책. 장소는 모두 와이오밍 중북부지역. 미국에서 열 번째로 넓은 면적이지만 가장 적은 인구가 산다는 와이오밍 주. 서부의 관문이라고 일컫는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한 잠을 자고 기내식까지 먹어도 계속 펼쳐지는 황무지의 중심지라고 생각하면 그리 많이 틀리지 않는다. 요즘 말고 30년 전 비행기로 그랬다는 말씀.
  딱 하나의 단편에서만 주인공이 와이오밍이 아닌 매사추세츠에 산다. 로키산맥의 북쪽, 빅혼산맥의 남쪽 끄트머리에 있는 기이한 땅의 목장을 1936년에 떠나 갖은 고생 끝에 전쟁에 나갔다 돌아오고, 결혼했고, 또 결혼했고, 통풍기와 보일러 청소사업과 영리한 투자로 많은 돈을 벌었고, 은퇴했고, 지역정치판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별 스캔들 없이 빠져나와 이제 편안한 노년을 지내는 동부의 부유한 80대 노인에게, ‘진드기’라는 영어 단어인 ‘틱’이란 이름을 가졌으나 여태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조카의 아내로부터, 노인의 친동생 롤로가 죽었다는 전화를 받는다.
  비행공포증이 있는 노인 메로는 그동안 철저한 건강관리를 해왔기 때문에 아직 젊은이 못지않은 체력을 자신해서 캐딜락을 몰고 와이오밍까지 달리기로 결정한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먼저 주간洲間고속도로에서의 교통사고와, 폭풍우와 폭설, 길 읽어버림과 함께 저 먼 시절 퍼포먼스가 있었던 유진 오닐의 <느릅나무 아래의 욕망>에서 애비와 에벤을 통해 본 듯한 장면을 회상한다. 날은 추워지고, 눈은 펑펑 내리는데, 바람은 매몰차게 불지, 사고 난 다음에 현금주고 산 중고차는 또다시 개골창에 박혔지, 키를 꽂아 놓은 상태에서 문이 걸려 버렸지, 돌로 창문을 깨서 문을 여니까 조수석 스위치는 개방되어 있던 상태였지, 걸어가기엔 너무 멀지, 광활한 미국대륙에서도 얼마든지 생존할 수 있게 해주는 위급배낭은 사고 낸 차의 트렁크에 있지, 딱 이럴 때, 60여 년 전에 아버지가 데리고 들어 온,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젊은 여자, 뒤에 지나가면서 한 번 철썩 때리고 싶게 만드는 말 궁둥이를 가지고 있는 여자, 아버지가 쓰다버린 찌꺼기가 아니라 온전한 내 것을 갖고 싶어 집을 나오게 만든 여자가 들려준 목격담, 겨울나기용 수송아지 도살 장면, 기어이 메로 노인으로 하여금 나머지 평생을 채식주의자로 만든 엽기난만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작품 <가죽 벗긴 소>가 인상 깊었다.
  거의 다 만족할 만한 단편들. 이 작품집을 읽고 <시핑 뉴스>도 매력적이었지만 애니 프루는 단편이 백미 아닐까 싶었다. 애초에 결론을 정해놓고 그곳을 향해 미리 예상할 수 있는 궤적을 따라가는 것보다, 호흡을 빨리 해 독자에게 결론에 대한 준비시간을 제공하지 않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 간략한 문장으로 그리는 대자연의 황량한 아름다움도 책을 읽는 즐거움이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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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1-11-09 08: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시핑뉴스 영화는 엄청난 망작이에요. 피하십시요! 전 라로님 조언을 무시했다가 엄청난 후회를 했지만요. ‘브로크백’ 꼭 읽어야겠군요. 풍광묘사나 사람들의 무심한 (하지만 섬세한) 행동 묘사가 또 얼마나 끝내줄까요?!!

Falstaff 2021-11-09 09:32   좋아요 3 | URL
아,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시핑뉴스는 안 보겠습니다!!
미국 서부의 광활함은 여성 작가들이 더 뛰어나게 묘사하는 거 같아요. 윌라 캐더를 비롯해서 말입니다. ^^

그레이스 2021-11-09 09:1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좋았던 책이예요. 눈이 시릴만큼 아름답다는 걸 글로 느꼈어요, 자연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해야하나?..동성애에 관한 글은 낯설고.... ;;

Falstaff 2021-11-09 09:34   좋아요 5 | URL
예. 이런 책이면 얼마든지 지갑을 비울 수 있다니까요. ㅎㅎㅎ
문장도 참 좋더라고요. 진즉 읽을 걸 그랬습니다. 영화가 너무 유명해 오히려 늦었나봅니다.

잠자냥 2021-11-09 09:2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정말 좋죠. 전 요즘 출근길에 단편 한 개씩 읽고 있는데(오늘 아침에도 읽었습니다. 오늘 제가 읽은 챕터는 ‘어느 박차 한 쌍‘에서 프리즈 부인이 드디어 떠나려는 부분입니다), 정말 묘사며 비유며 아주 찰지고 재미납니다. 코맥 매카시 쪽보다는 애니 프루가 그리는 서부 풍경이 더 마음에 들고요. 정말 좋은 단편집입니다.

Falstaff 2021-11-09 09:37   좋아요 5 | URL
오. 바로 이 책을 읽고 계시는구먼요! 와우!!
ㅎㅎㅎ 코맥 매카시 이야기 하지 않으려 무지 참았는데 결국 나오는군요.
저도 비교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해서, 저 위 유부만두 님 답글에 윌라 캐더 같이 여성 작가들이 더 뛰어나게 묘사한다고만. ㅋㅋㅋㅋ 뭐 전적으로 취향 차이겠지요.

잠자냥 2021-11-09 10:15   좋아요 4 | URL
저도 이 책을 이제야 읽는데,(저는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를 보기는 했는데, 영화 때문에 호들갑(?) 떠는 분위기가 싫어서 그땐 이 책을 읽지 않았어요. ㅎㅎ), 읽고 보니 코맥 매카시를 미국 서부 장르의 제왕처럼 평가하는 분위기에 좀 반발심이 들더라고요. 암튼 저는 개인적으로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이 훨씬 좋습니다요. 특히 ‘세상 끝자락의 레드월 목장‘에서 그 덩치 큰 카우걸 딸내미 캐릭터 정말 흥미로웠어요!!

아침 출근길에 읽으니 졸립지 않아 좋긴 한데, 이 책 이거 조용히 집에서 독서하면 더 좋을 것 같기는 합니다. ㅎㅎㅎ

Falstaff 2021-11-09 10:27   좋아요 3 | URL
매카시의 서부는 잘 쓴 무협지라고 생각합니다. 풍광묘사 같은 건 다음으로 하고, 스토리 자체가 마초적이라 사나워요. 물론 안 그런 것도 있겠고, 겨우 두 권 읽고 이렇게 평하는게 정당하지도 않겠지만,우짰든 더 이상은 읽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윌라 캐더나 레슬리 마몬 실코만 알았다가, 아우, 프루가 서부 소설을 이렇게 많이, 근사하게 썼다니 깜짝 놀랐습지요.ㅎㅎㅎㅎ
* 레슬리 마몬 실코, <의식> --- 절판!!!

조용히 집중해 읽으면 훨씬 더 좋습니다. 전 단편은 그래야 읽혀요. ㅋㅋㅋㅋ

새파랑 2021-11-09 11:1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시핑 뉴스의 작가와 이 책의 작가가 같군요. 전 이작품은 영화로만 봤었는데~ 윌라 캐더의 풍경묘사 너무 좋았는데 이 책도 읽어봐야겠어요 ^^

Falstaff 2021-11-09 12:12   좋아요 4 | URL
예. 꼭 읽어보셔요. 참 좋습니다.

coolcat329 2021-11-09 17: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단편집이군요! 시핑뉴스는 읽다 포기했는데 그 주인공 웃긴 남자 생각하면 다시 도전해볼까도 싶지만 우선 이 책을 읽어봐야겠어요.

Falstaff 2021-11-09 19:31   좋아요 2 | URL
옙. 단편집입니다. 무지 재미납니다! 저도 시핑 뉴스는 잘 쓴 책이지만 뻔한 결론 때문에 별 셋 준 인간입니다. ㅋㅋㅋㅋ

이 책은 세월이 흐른 다음에, 저 다음에 다시 읽어도 좋을 것 같아요. 와이오밍으로 이민이나 가버릴까요? ㅎㅎㅎ

잠자냥 2021-11-10 00:03   좋아요 1 | URL
골드문트여 멋진 박차를 준비하고 떠나시게나~ ㅋㅋㅋㅋ

Falstaff 2021-11-10 08:19   좋아요 2 | URL
겨울에 영하 40도, 여름에 영상 40도. 조금, 아주 조금 무립니다. ㅠㅠ

유부만두 2021-12-12 0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애니 프루가 추천한 서부 카우보이 소설 “파워 오브 도그 (토머스 새비지)” 읽어보세요. ^^

Falstaff 2021-12-12 09:48   좋아요 0 | URL
옙. 접수했습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