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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크백 마운틴 ㅣ 에프 모던 클래식
애니 프루 지음, 전하림 옮김 / F(에프) / 2017년 9월
평점 :
<시핑 뉴스>를 흥미롭게 읽어, 적어도 한 권은 더 읽으리라고 점찍어놓았던 애니 프루, Adna Ann Proulx의 단편집을 읽었다. 위키피디어 자료에 의하면 이이는 2018년까지 다섯 편의 장편소설과 네 권의 단편집을 출간했다. 이외 아홉 권의 논픽션이 있다. 1935년 을해생 돼지띠로 올해 나이 여든일곱. 아직 글을 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의 신간은 없다고 가정하면 더욱 더, 몇 권 되지 않는 저작들이 번역, 출간되지 않는 것이 매우 아쉽다. 내가 읽은 두 권 외에 데뷔작인 <엽서>가 지난 세기에 나온 적이 있지만 출판사조차 없어졌다.
이이는 코네티컷에서 잉글랜드 부계와 프랑스-캐나다 모계 사이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내내 미국의 북동부 지역의 각처를 옮겨 다니며 성장했다. 버몬트, 노스캐롤라이나, 메인, 로드아일랜드 등 상대적으로 좁은 면적을 가진 올망졸망한 주들에서 살았다. 작가의 추억이 서린 곳에서 조금만, 물론 우리나라 땅을 기준으로 하면 먼 거리지만 미국인들의 거리 기준으로 하면 얼마 멀지 않은 뉴펀들랜드를 무대로 한 <시핑 뉴스>를 읽으면서, 남자들은 언젠가는 얼음조각이 자박자박한 바다에 거꾸로 박혀 죽고, 여자들은 언젠가는 과부가 되는 땅의 황량함을 그렇게 잘 묘사했겠거니 했었다. 그렇지 않은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도착한 그 땅위에서, 하늘도 안 보이고 앞도 안 보이던 거대 밀림 속에 나무를 베고, 그루터기를 뽑아내 건설한, 개척자라고 부르는 초기 침략자들의 야만적인 습성이 그대로 남아 있던 땅 위에서의 삶을.
그러나 틀렸다. 아니, 그게 다가 아니었다. 단편소설로 눈길을 돌리면, 애니 프루는 세 권의 단편집 제목을 <와이오밍 이야기>, <와이오밍 이야기 2> 그리고 <와이오밍 이야기 3>으로 펴냈다. 프루는 버몬트에서 30년 동안 살며 세 번 결혼하고, 세 번 이혼하고, 조너선, 질리스, 모건과 실비아, 순서대로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낳고 살다가, 뜻한 바 있어서 1994년에 와이오밍으로 이사를 간다. 물론 연중 일정기간은 <시핑 뉴스>의 무대, 캐나다의 뉴펀들랜드에서 지내기는 하지만. 와이오밍이라는 완벽한 내륙지방이자 황량함의 측면에선 셔벗 수준 바닷물과는 정 반대의 삭막한 환경에 지배받는 지역에 거주하며, 이 놀라운 적막과 가혹한 기후, 연간 80도 이상의 차이를 보이는 온도차와 폭설 등에 대하여, 처음엔 놀랬다가, 점점 반했을 수도 있는데 사실 반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어서 그건 그냥 넘어가고, 하여튼 와이오밍이라는 야만의 자연 속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글로 써서 알리고자 마음먹는다.
데뷔작 <엽서>로 펜-포크너 상, 우리말로 최우수 신인작가상을 수상한 애니 프루는 와이오밍으로 이사하기 바로 전 해인 1993년에 <시핑 뉴스>로 퓰리처 상과 전미 도서상을 휩쓴 다음이다. <시핑 뉴스>는 2001년에 영화로도 만들었고, 이 덕에 애니 프루도 주머니가 두둑해지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이제 1997년부터 와이오밍을 무대로 하는 단편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물론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브로크백 마운틴>. 2005년에 영화로 만들어져 78회 아카데미 영화상에서 감독상, 각색상, 음악상을 휩쓸고, 같은 해 골든 글로브에선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주제가상을 꿀꺽, 해치워버린다. 나는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은 보지 않았다. 2005년이면 내 인생에서 가장 바쁘게 보낸 시절로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회사에서 봉급 좀 더 받아볼까, 아니면, 잘리지 않고 좀 더 오래 다녀볼까, 이 둘 중의 하나를 위해 새벽부터 일하고, 술 마시고, 바가지 긁히고, 본격적으로 반항하기 시작한 아이들과 아내 사이에서 미치고 팔짝 뛸 당시였으니 말이지. 아, 인생은 언제나 엿 같아, 하면서.
물론 시간이 있어도 안 봤을 거 같기는 하다. 동성애에 관해서 별로 관심이 없어서. 제발 부탁하는데, 나더러 관심 좀 가져달라고 하지 마라. 동성애를 반대하지 않는다. 물론 찬성하지도 않는다. 그냥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다. 그이들 취향은 존중하겠다. 이게 기본 마음가짐일 뿐. 그래도 같은 남성끼리의 섹스 씬이 나온다면 아직은 조금 어색할 거 같다. 뭐라 하지 말고 시간을 좀 더 달라. 적응이란 건 한 번에 확 해버리는 게 아니잖은가. 하여튼 <브로크백 마운틴>을 써서 애니 프루는 또다시 오 헨리 상을 받고, 영화로 만들어 이번엔 대박을 쳤는데, 얼마 만큼이냐 하면, 작가 자신이 리브레토, 대본을 써서 오페라로도 만들어 2014년 1월에 마드리드의 레알 극장에서 세계초연을 했을 정도였다. 너무 많이 놀라지는 마시라. 숀 펜과 수잔 서랜든이 주인공을 한 영화 <데드맨워킹>도 오페라로 만들어 미국에서 공연했고, 오페라가 CD 및 DVD로도 팔리고 있으니까. 그래도, 참, 이만하면 성공한 삶이다. 안 그냐? 남자 복이 없어서 세 번 이혼을 했지만 덕분에 다양한 아이들이 생겼으니 그것도 뭐, 좋게 생각하자.
모두 열하나의 단편소설을 실은 책. 장소는 모두 와이오밍 중북부지역. 미국에서 열 번째로 넓은 면적이지만 가장 적은 인구가 산다는 와이오밍 주. 서부의 관문이라고 일컫는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서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한 잠을 자고 기내식까지 먹어도 계속 펼쳐지는 황무지의 중심지라고 생각하면 그리 많이 틀리지 않는다. 요즘 말고 30년 전 비행기로 그랬다는 말씀.
딱 하나의 단편에서만 주인공이 와이오밍이 아닌 매사추세츠에 산다. 로키산맥의 북쪽, 빅혼산맥의 남쪽 끄트머리에 있는 기이한 땅의 목장을 1936년에 떠나 갖은 고생 끝에 전쟁에 나갔다 돌아오고, 결혼했고, 또 결혼했고, 통풍기와 보일러 청소사업과 영리한 투자로 많은 돈을 벌었고, 은퇴했고, 지역정치판에 발을 들여놓았다가 별 스캔들 없이 빠져나와 이제 편안한 노년을 지내는 동부의 부유한 80대 노인에게, ‘진드기’라는 영어 단어인 ‘틱’이란 이름을 가졌으나 여태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조카의 아내로부터, 노인의 친동생 롤로가 죽었다는 전화를 받는다.
비행공포증이 있는 노인 메로는 그동안 철저한 건강관리를 해왔기 때문에 아직 젊은이 못지않은 체력을 자신해서 캐딜락을 몰고 와이오밍까지 달리기로 결정한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먼저 주간洲間고속도로에서의 교통사고와, 폭풍우와 폭설, 길 읽어버림과 함께 저 먼 시절 퍼포먼스가 있었던 유진 오닐의 <느릅나무 아래의 욕망>에서 애비와 에벤을 통해 본 듯한 장면을 회상한다. 날은 추워지고, 눈은 펑펑 내리는데, 바람은 매몰차게 불지, 사고 난 다음에 현금주고 산 중고차는 또다시 개골창에 박혔지, 키를 꽂아 놓은 상태에서 문이 걸려 버렸지, 돌로 창문을 깨서 문을 여니까 조수석 스위치는 개방되어 있던 상태였지, 걸어가기엔 너무 멀지, 광활한 미국대륙에서도 얼마든지 생존할 수 있게 해주는 위급배낭은 사고 낸 차의 트렁크에 있지, 딱 이럴 때, 60여 년 전에 아버지가 데리고 들어 온,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젊은 여자, 뒤에 지나가면서 한 번 철썩 때리고 싶게 만드는 말 궁둥이를 가지고 있는 여자, 아버지가 쓰다버린 찌꺼기가 아니라 온전한 내 것을 갖고 싶어 집을 나오게 만든 여자가 들려준 목격담, 겨울나기용 수송아지 도살 장면, 기어이 메로 노인으로 하여금 나머지 평생을 채식주의자로 만든 엽기난만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작품 <가죽 벗긴 소>가 인상 깊었다.
거의 다 만족할 만한 단편들. 이 작품집을 읽고 <시핑 뉴스>도 매력적이었지만 애니 프루는 단편이 백미 아닐까 싶었다. 애초에 결론을 정해놓고 그곳을 향해 미리 예상할 수 있는 궤적을 따라가는 것보다, 호흡을 빨리 해 독자에게 결론에 대한 준비시간을 제공하지 않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 간략한 문장으로 그리는 대자연의 황량한 아름다움도 책을 읽는 즐거움이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