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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의 수탉
미셸 투르니에 지음, 이규현 옮김 / 현대문학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짐작도 안 했다. 이 책이 열네 단편을 실은 단편집이란 것은. 투르니에도 단편소설을 썼다는 거 자체를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책의 제목도 근사했다. 《황야의 수탉: Le Coq de bruyère》. 저 러시아 땅엔 푸시킨이 타타르나 몽고족 등의 이민족이 침략할 징조가 보이면 긴 울음을 우는 <황금 닭: Leq d'Or>을 만든 적이 있잖았나 말이지. 책 제목 하나 가지고 대단한 서사를 가진 장편소설일 것이라고, 벌컥벌컥 김칫국물부터 들이켰구나. 단편집이란 걸 알고 지레 실망한 가장 큰 이유는, 요즘 유난히 단편소설집을 자주 읽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비교적 짧은 작품들, 소설과 비교해보면 금세 읽을 수 있는 희곡을 연달아 읽었기 때문에 좀 유장한 장편을 읽고 싶어서였고, 미셸 투르니에라면 이 기대를 충족시켜 주리라, 기대가 커서였을 것이다.
책에 실린 단편들을 쓴 시기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여호와가 제일 먼저 만든 인간은 유방이 달린 자웅동체라고 주장하는 <아담가家>부터 시작해서, 여성의 속옷만 보면 흥분을 넘어 환장하는 주인공을 다룬 <페티시스트 - 1인 단막극>까지 참 다양한 주제들이다. 심지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대신 등장한 산타 할머니, 사제가 설교단에 오르는 순간부터 울어제끼는 아기 예수 역을 맡은 진짜 아기에게 풍만한 가슴을 내미는 <산타 할머니>도 들어있다. 그렇다고 종교적인 작품들만 있는 것도 아니다.
표제작 <황야의 수탉>의 주인공은 환갑이 넘었지만 건장한 신체와 근육과, 펜싱실력과, 전설적인 마장마술은 30대 초반의 신체 건강한 장정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난 신사다. 투르니에의 주요 무대인 알랑송의 펜싱장엔 제1 기병대에서 가장 출중한 두 검객이 사브르를 겨누고 있었는데 결국 깊은 찌르기로 승리를 거둔 인물은 반백의 퇴역 대령 기욤 조프로아 에티엔 드 생 퓌르시 백작이었다. 이 양반이 사브르만 잘 찌르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다른 걸로도 숱하게 찌르고 다녀 근 40년 간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오귀스틴 생 퓌르시 백작부인의 복장이 터져나가기 일보직전이었다. 나이 먹으면 저절로 시들겠지, 라는 일말의 희망을 여지없이 무너뜨리고 40년 내내, 어떻게 쉬지 않고 찌르고, 찌르고, 또 찌르는지 말이지. 알랑송 사람들도 백작의 이 찌르기 실력을 처음엔 비웃다가, 어느 수준에 이르니 감탄을 하다가, 이젠 경외의 수준에 달해 생 퓌르시 백작에게 “수탉”이라는 별호를 붙여주기에 이르렀다. 이이의 집에 나이 많은 하녀가 이젠 은퇴해서 새롭게 쉰 살 먹은 하녀가 들어와 사달이 생기는데, 설마 원기 왕성한 백작께서 못생기고 힘만 센 으제니한테 흑심이야 품으려고. 으제니의 열여덟 먹은 조카 마리에트면 몰라도. 희극 같지? 희극은 분명 희극인데 작가 푸르니에가 한 사람의 인생에 호락호락하게 희극을 선사하지는 않을 인물이니 문제다.
표제작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만큼 또 재미나게 읽은 작품이 40톤 화물을 정기적으로 남프랑스까지 수송하는 스무 살의 트레일러 운전수 피에르와 그보다 두 배 이상 많이 산 것 같은 파트너 가스통의 이야기 <은방울꽃 휴게소>였다. 이 책이 이규현 번역이다. 유럽 언어에서도 경어와 평어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경어는 경어고, 평어로 말할 거 같으면, 우리나라에서 쓰는 평어와는 좀 다르지 않나? 예를 들어 이 작품에서 피에르와 가스통은 평어를 쓰는 사이다. 나이가 두 배 차이 나는데도 불고하고. 그래서 스무 살짜리 피에르가 가스통을 호칭하는데, “자네.” 말은 평어, 우리말로 해서 반말을 쓰되, 가스통이 젊어서 사고라도 쳤으면 아들뻘인데, 아빠뻘한테 자네, 라고 하기엔 무리라 그저 “형님” 수준으로 번역했으면 어땠을까? 나이 차이가 이렇게 많이 나는 줄 몰랐다가 나중에 알게 되면 얼빵 없어진다. 그리고 작품이 끝날 때까지 계속 ‘자네’로 일관하면, 미쳤을까? 의심하게 된다.
성실한 운전수 피에르한테는 펄펄 끓는 스무 살의 피가 흐른다. 도버해협 근처의 블로뉴에서 새벽에 고속도로에 올라 리옹까지 왕복해야 하는 일. 첫날 새벽엔 언제나 피에르가 운전을 하고 파트너 가스통은 의자 뒤 공간에서 잠을 잔다. 트레일러 타보신 분은 알겠지만 진짜로 의자 뒤편에 작은 공간이 있다. 오랜 운전에 피곤해지면 차에서 내려 스트레칭을 하고, 이 공간으로 옮겨 잠깐 눈을 붙일 수 있게 설계가 되어 있다. 고속도로를 타다가 은방울꽃이 하나도 없는 ‘은방울꽃 휴게소’에 들러 차 청소도 하고, 점검도 하고, 운전자도 바꾸는데, 잠깐 쉬는 틈에 피에르가 적은 수의 소떼, 그리고 소들을 돌보며 잔디에 앉아 있는 뤼지니 마을의 아가씨 마리네트를 만난다. 그러나 아쉽게도 휴게소와 들판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철조망. 이들은 무도회를 이야기하고, 라디오를 켜놓고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몸이 떨어진 상태로 왈츠를 추기도 한다. 바야흐로 스무 살 핏줄에 불을 붙여버리는 마리네트. 어떻게 됐을까? 어떻긴 어때. 순식간에 불 맞은 들짐승으로 변해버리는 것이지. 고속도로를 달리는 인간이라면 절대 옆을 바라보면 안 된다는 가스통의 진심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피에르. 이 아이의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비극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한 시절엔 만발했지만 그 위에 고속도로가 나는 바람에 은방울꽃이 한 송이도 남아 있지 않은 은방울꽃밭 옆의 은방울꽃 휴게소에서 시작하는.
이외에도 <트리스탄 복스>, <베로니크의 수의壽衣> 등 재미있는 작품들이 들어 있는 책. 그러나 전편이 다 좋은 수준은 아니고, 무엇보다 아마 품절일 걸? 위에서 얘기했듯 몇 몇 부분에서 번역한 우리말 표현이 깔끔하지 않은 것도 있고, 전통의 출판사 ‘현대문학’으로는 예외적으로 오타도 몇 개 눈에 보인다. 그러니 안 보인 오타까지 합하면…… 이런 얘기는 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