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마다 페로에는
미셸 도이취 지음, 서명수 옮김 / 연극과인간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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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희곡을 쓴 사람이 ‘도이취’라고? 알파벳으로 쓰면 ‘Deutsch’. 구글링 여차 잘못해서 불어-한국어로 변환하면 ‘독일 미첼’도 구경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이이가 1948년 프랑스 알자스 주의 스트라스부르 태생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알자스. 지금은 유럽연합으로 뭉쳐서 위험이 없지만, 만일 독일이 프랑스와 또 한 번의 전쟁을 벌인다면 여전히 알자스 땅의 소유권이 중요한 원인이 아닐까, 하는 나의 의견. 일본인들이 헛소리를 해대는 독도 소유권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을 듯하다. 프랑스 국적의 이 양반의 경우는 이름 자체가 그냥 ‘독일’일 정도니까.
  1948년생이어서 1970년에 스물두 살. 미셸 푸코, 롤랑 바르트, 자크 라캉 등, 이름만 들어본 기호학, 심리학, 사회학 학자들에게 경도된 청년은, 당대 프랑스 연극의 물결이었던 일상극에 전념하다가, 역시 변증법, 정·반·합, 50~60년대 부조리극에 대한 반동으로 출현한 일상극에 다시 반동하여 “시적이고, 몽환적이고, 극적인 성격이 강한 작품들, 또는 지적이며 동시에 감각적이고, 무거우면서도 동시에 유머가 돋보이는 작품”(역자 해설 요약)을 발표하는 집단에 합류한다. 사실적인 묘사에 치중한 일상극에 대한 반동이니 어떠하겠는가. 작품은 다시 난해하고, 이미지즘적 요소가 많아지는 쪽으로 변할 수밖에. 이게 1980년대 프랑스의 연극판이었다고 한다. 프랑스만? 천만의 말씀. 1980년대 우리나라 창작극도 다수의 대중을 확보하기 위한 홀딱쇼 수준의 벗기기 연극과, 난해한 연극이 많이 등장했다. 언뜻 기억나는 연극이 (성추행, 성폭행 피의자 이윤택이 1988년에 연출하기 훨씬 이전의 공연) <산씻김>이다. 물론 <산씻김>은 프랑스 일상극의 반동으로의 난해와는 성격과 많이 달라, 차라리 죽음에 관한 ‘제의祭儀 연극’이라 해야 마땅하겠지만 말이 그렇다는 거다. 내 개인사로 보면 이 <산씻김>을 관람한 1980년대 중반 이후로 실제 연극을 보는 일이 극히, 극히, 지극히 드물게 되는데, 당시 지방 제조업 회사에 근무하는 대부분 봉급쟁이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밤마다 페로에는…>을 발음해보시라. ‘페로’라는 지역이 있어서 밤마다 그곳에서 모종의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기대감을 품게 한다. 음, 거기서 밤마다 좀 야한 일이 벌어졌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틀렸다. ‘페로에’라는 이름의 복싱 챔피언이 주인공이다. 그러니 페로에가 밤마다 뭔가를 한다는 의미.
  작품은 모두 2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다만 지문만 실려 있는 것도 있으며, 길고 긴 독백을 해야 하는 장면도 있다. 애초에 이야기했듯이 24개의 장을 순서에 따라 읽거나, 실제로 공연을 보더라도 나를 포함한 무수한 독자나 관객들은 미셸 도이취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단언하노니, 도이취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포착해서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서 미셸 도이취 한 명밖에 없을 것이고, 그가 아직 살아 있으니, 지극히 관심이 있다면 전화를 하거나 메일이라도 보낼 수밖에 없는데, 아쉽게도 나한텐 그런 정성까지는 없다.
  그렇다고 무슨 ‘열린 결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스물네 개의 장면이 서로 버석버석, 마치 모래가 서로 부딪는 것처럼 별로 특별한 관련이 있는 것 같지 않아서, 한 번 공연에 98명의 관객이 들었다면, 98개의 개별적인 감상을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챔피언에 오르지 못한 페로에는, 밤마다 무엇을 하느냐 하면,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부터 동녘이 부옇게 밝아올 때까지 도무지 어떤 인간인지 알 수도 없는 호적수를 거리에서 만나 싸움박질을 한다.
  이 결과, 페로에는 발열, 녹초, 반상출혈, 정신적 무력감, 전신의 혈종,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른쪽 엉치뼈가 부러져 다리를 절게 된다. 권투 선수가 누군지 모를 상대와 싸우다가 다리를 절게 되다니. 나는 이 에피소드를 읽는 순간, 거의 즉각, 여호와의 천사와 씨름을 하다 평생 다리를 절게 된 야곱을 떠올렸다. 근데 페로에는 죽을 때까지 여호와에 의지해야 하는 야곱과는 달리 그 다리를 하고도 나중에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니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아, 페로에가 챔피언에 오르는 해피엔드 연극이라는 얘기도 전혀 아니다. 권투 선수고, 날마다 밤새도록 싸우다가 절름발이가 됐는데, 페로에조차도 자기와 싸움을 하는 호적수가 도무지 누군지 몰라, 상대의 정체를 밝히려다가 사건이 커져 애초엔 예상하지도 못한, 인류사를 향한 장례로 끝을 보게 되는 엽기 연극이다.
  결론을 공개 독후감에서 이야기해도 되느냐고? 된다. 여태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극의 해석은 감상하는 독자와 관객에 따라 전부 다를 것이라고. 내가 내린 결론, 인류사의 장례 역시 무수하게 많을 해석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실제로 <밤마다 페로에는…>에서는 천사와 씨름하다 다리에 장애가 생긴 야곱으로 볼 수도 있는 페로에의 야간 싸움박질도 등장하고, 무인도의 생체과학자 시르세가 인간을 변형시켜 만든 반인반마를 비롯한 돼지인간, 개인간, 소인간, 양인간, 곰인간 등도 등장하여 단숨에 독자로 하여금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를 연상하게 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건 극작가가 <오뒷세이아>를 염두에 두었다기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워낙 장대하여 웬만한 작품은 어떻게 해서든지 <오뒷세이아>에 가져다 붙힐 수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로사라는 이름의 아가씨가 등장하여 페로에를 사랑하게 되지만, 로사는, 페로에가 싸움의 천사가 누구인지 밝히기 위해 대가로 자신의 육신과 영혼을 제공하기로 계약한 의사, 과학자 겸 사업가 스텐저 박사와 결혼을 해버린다. 일단 페로에는 사람이 앞날의 비전이 없는 반면, 결혼할 당시에 로사는 명배우가 되어 이름도 마리아라고 개명한 다음이기는 하다. 이런 우화적 줄거리를 가지고 있으니 적어도 한 명의 희생자가 필요하여, 스텐저 박사가 살해당하는데 당연하게 페로에가 유력한 용의자 선상에 올라 취조를 받는다. 죄가 없는 페로에는 석방되어 금방 나오지만 어처구니없게 배우 마리아를 숭배하는 형사1이 쏜 총 두 발을 맞고 길가에서 숨을 거둔다. 장면은 다시 스텐저 박사의 유산을 유증받은 상원의원이 “세계의 박물관”을 개관한 기념식장으로 바뀌고,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과 유력인사, 섬에서 본 적 있는 변형인간들이 참석한 가운데 스텐저 박사가 만든 거대한 수조 안에는 지난 역사상 유명 인사들의 몸 조각들이 둥둥 떠다니는 것으로 막이 내린다.

 

  그래서 이 작품의 의도가 뭐냐고? 내가 그걸 알 수준이면 휴일 오후에 희곡집 한 권 읽고 좁은 방에 앉아 독후감이나 끼적이고 있겠는가. 또 알더라도 어떻게 그렇게 힘들게 알아낸 것을 맨입에 말해줄 수 있겠는가 이 말이지. 하여튼 문화도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더욱 복잡해진다. 이미 미술과 시 같은 장르는 일반 독자의 품에서 많이 멀어진 거 같고, 극작도 곧 뒤쫓을 것으로 보인다. 더 복잡해지기 전에 얼른 읽는 게 남는 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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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11-11 10: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폴스타프님 스탈 유머를 알면서도 또 휘말려서^^ ˝밤마다 페로에는...˝거기서 딱 그 생각.ㅋ ㅋ 근데 boxer등장^^;;

페이퍼 마지막 문단까지 Falstaff님 찐 해학^^ 기분 좋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Falstaff 2021-11-11 11:05   좋아요 3 | URL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제 기분이 을매나 좋은지 말입지요. ㅋㅋㅋㅋ

붕붕툐툐 2021-11-11 2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아실 거 같은데~ 그러지 말고 알려주세요~ 맨입에 안되면 술이라도 사야할까요?ㅎㅎ

Falstaff 2021-11-12 08:12   좋아요 0 | URL
ㅋㅋㅋ 알면 제가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벌써 잘난 철 한 번 거하게 했지 말입니다. ^^;;;

coolcat329 2021-11-11 2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졸린 눈을 꿈뻑이며 초집중을 하며 읽었는데요..참 희한한 내용이네요. ㅎㅎ
신화적인 면, sf 요소도 있는거 같은데 인류사의 장례식이라함은 결국 멸망해가는 세상을 말하는거 같기도 하구요. ㅎㅎ

근데 프랑스 작가 성이 독일이라니 ㅋ

Falstaff 2021-11-12 08:14   좋아요 1 | URL
옙. 온갖 요소가 다 들어 있어서 뭐라 딱 꼬집기가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네요.
이런 걸 글쎄.... 문화의 잡탕밥이라고나 할런지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