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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평점 :
1973년 1월 1일, 컬럼비아의 수도 보고타에서 변호사 부부 알프레도 바스케스와 파니 벨란디아의 아들로 태어난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는 어려서부터 좋은 환경 속에서 자라서 그랬는지 어려서부터 글짓기 하나는 잘했다. 물론 공부도 잘 했겠지. 10대 시절에 본격적으로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거장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카를로스 푸엔테스 등을 섭렵했으나, 정작 보고타 시내에 있는 로사리오 대학에서는 법학을 전공했다. 그래서 그런지 바스케스의 장편소설은 대부분 보고타 시내, 주로 로사리오 대학 주변을 무대로 한다고. 법학을 공부하면서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훌리오 코르타사르 등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을 탐독하면서 제임스 조이스와 버지니아 울프 등에 관심을 갖는다. 1996년 “<일리아드>에서 합법적 본보기에 입각한 복수”로 학위를 따지만 이미 작가로서의 커리어를 쌓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졸업과 동시에 바스케스는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당시 컬럼비아를 휩쓰는 폭력과 범죄의 일상이 두려운 것도 있어서 파리 소르본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문학을 공부하고 이후 16년간 파리, 벨기에 아르덴, 바르셀로나를 거쳐 2012년 다시 조국 컬럼비아의 보고타로 귀환해 여태 살고 있다. 이 동안 전 세계 코카인의 80% 공급했던 메데인과 칼리의 마약 카르텔은 괴멸됐고, 80~90년대를 풍미했던 무차별 폭발 테러, 기관총 테러와 암살 같은 치안도 비교적 정상을 되찾았다. 정작 작가 자신은 범죄와 폭력이 판을 치던 당시엔 조국을 떠나 선진국에서 잘 먹고 살다가 평화로워진 다음에야 귀국을 했으면서, 그의 대표작인 <추락하는 모든 것의 소음>에서는 폭력이 판치던 시기에 스물여섯 살 때 애먼 총알에 맞아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에 시달리는 젊은이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2009년 중순에 화자 ‘나’는 뉴스를 통해, 보고타에서 250킬로미터 북쪽에서 흑진주 색의 1.5톤 하마를 사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나’ 안토니오는 얌마라 하마에 관한 뉴스를 통해 1995년 말의 기억을 소환한다.
당시 며칠 있으면 26세가 될 청년 안토니오는 2년 전에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으며, 대학을 수석졸업하고, 지금은 역사상 가장 젊은 교수로 학생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면서 대단한 권위를 즐기고 있었다. 가히 인생의 황금시기였으리라. 자신의 과목을 들었던 여학생과, 이젠 더 이상 가르칠 기회가 없어진 상태에서 연애를 시작했고, 지금은 모르겠지만 조금 있으면 임신을 하고, 결혼까지 하게 될 예정이다.
이때 젊은 교수님의 취미 가운데 하나가 당구였는데, 같은 장소에서 당구를 즐기던 늙수그레한 리카르도 라베르데가, 당시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신화적인 영토였던 나폴레스 아시엔다의 개인 동물원을 탈출한 하마를 취재해 내보낸 TV 방송을 보고 “동물들은 죄가 없어.”라고 했던 것이 생각났던 것.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누구인가 하면, 마약왕. 암흑의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던 철권의 사나이로 ‘암흑왕’의 집권 시기는 1980년대부터 시작해 컬럼비아 특수부대와의 싸움 끝에 탈출하다가 총에 맞아 1993년에 죽을 때까지였다. 그는 자기 사업에 방해가 되는 인물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보고타에서만 무려 4백 명에 가까운 시민들을 죽이거나 죽이도록 사주했는데, 많은 피해자가 무고한 시민들이었다. 누가 재수 없게 표적 근처에 서있거나 지나가라고 했느냐고. 이렇게 변명하면서.
반면에 전성기 시절 약 250억 달러의 재산으로 세계에서 일곱 번째 부자로 포브스에 이름을 올린 에스코바르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거대한 동물원을 자신의 영토 안에 짓고 적도에서는 구경할 수 없었던 벵골호랑이, 아마존의 과카마야 앵무새, 조랑말, 손바닥만 한 나비, 코뿔소 한 쌍, 사자 등을 들여왔는데 여기에 하마가 끼어 있었던 것. 93년 말에 에스코바르가 한 세상 잘 때려먹고 44세의 나이에 험하게 죽자 그의 영토를 돌보는 사람도 뿔뿔이 흩어져 정부에 의해 대강대강, 대충대충 유지되고 있었다. 이때 일가를 몰고 짐승우리를 탈출해 적도의 강에 자기 영토를 분양받은 것이 바로 흑진주 색의 하마였던 것. 그러니까 탈출하고 10년이 넘는 동안이다. 그간 강 근방의 논밭을 얼마나 망가뜨려놓았으면 웬만한 피해쯤은 천주의 뜻이라고 여길 컬럼비아 촌사람들이 지방정부에 의뢰해서 사냥을 해버렸겠느냐고.
근데 흑진주 색 얌마라(동물원 이름) 하마는 스토리를 끌어내는 기재에 불과하다. 리카르도 라베르데가 한 말 “동물들은 잘못이 없어.”는 저 뒤, 책의 막판에 다시 한 번 화자 ‘나’의 입에서 리카르도의 딸 마야를 향해 나올 뿐이고, 정말로 중요한 건, 1996년에 갑자기 리카르도에게 돈이 필요해졌고, 자기한테 곧 큰돈이 생길 것이니 그걸 받으면 이자까지 즉각 돌려주겠다고 약속해서 믿을 만한 사람에게 돈을 빌렸으나, 돈이 필요했던 사유가 소멸되어 비통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비틀비틀 보고타 시내를 걸어가다가, 오토바이를 탄 두 명의 남자에게 총을 맞아 죽어버린다. 이때 검은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에 탄 두 명의 남자, 이 가운데 뒷자리에 앉은 남자의 품속에서 은빛 권총이 나오는 것을 보고 기겁을 해 리카르도를 향해 돌진해 팔을 잡아당기던 오지랖 넓은 ‘나’ 안토니오의 복부에도 총알이 하나 덤으로 박혀버린다. ‘나’의 배로 진입한 총알은 친절하게도 장기를 전혀 손상하지 않고 그저 근육과 힘줄만 지나 골반뼈 위에서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왜 리카르도 라베르데에게 돈이 필요했느냐고? 리카르도는 근 20년 동안 교도소에 있다가 나온 인물이다. 무슨 죄목으로 복역을 했는지, 알고 있지만 구태여 아직 안 읽은 분께 가르쳐드리기는 싫다. 하여튼 그 전에 저 존 F. 케네디가 승인을 해서 설립한 미국의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플로리다에 살던 일레인 프리츠가 컬럼비아로 파견되어 오는데, 처음엔 보고타의 가난한 집에 하숙을 하다가 후에 몰락한 부유층 댁인 라베르데 가로 이사를 하면서, 이 집의 외아들이며 대 페루 전쟁의 위대한 영웅 조종사 라베르데 대위의 손자인 리카르도를 만난다. 소설책이니만큼 둘은 보자마자 확 한눈에 ‘반했다’기 보다 끌리는 느낌이 들었고, 며칠 안 있어서 드디어 뜨거운 사이가 되고, 나중에 결혼도 한다. 미국 새댁 일레인과 시부모 사이는 끔찍하지만. 일레인이야말로 시금치도 안 먹는 새댁이었다.
일레인 엘레나 프리츠, 미국여성이라 자기 성을 고집하던 아내는 남편 리카르도 라베르데가 석방되어 보고타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득달같이 보고타를 향해 비행기를 탄다. 아메리카 에어라인 965편, 보잉 757기. 직행편은 아니다. 칼리에서 갈아타야 하지만 가장 빠른 비행편을 고른 것이다. 이 비행기가 칼리 근처에서 갑자기 자동항법장치가 고장이 나고, 고장이 나자마자 비상상황을 알 수 있도록 설계되지 않아(이 사건 이후에 항법장치 고장의 알람 설계를 개선했다고 한다.) 낌새를 너무 늦게 알게 된 기장과 부기장은 나름대로 성실하게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이어 서서히, 서서히 포기하면서 엘딜루비오 산 서쪽허리에 충돌해 155명 승객 가운데 네 명만 중상을 입고 나머지는 모두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일레인 프리츠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중상을 입은 채 살아남아 지독한 고통을 겪는 대신 죽는 순간까지 위험도 모르고, 긴장도 하지 않은 채 순식간에 삶을 접어버리고 말았다.
리카르도 라베르데가 이 비행기의 블랙박스 녹음 사본을 얻기 위해 돈을 필요로 했던 것. 일레인이 돌아와서 예전과 비슷하게 여생을 보내려고 일을 해 조만간 큰돈이 생길 것이었는데 그것보다 더 빨리 돈이 필요했던 것임을, 아주 오랜 후에 알게 된다.
재미있다. 전형적인 소설이다. 어떤 사건을 알게 되고, 그것으로 지난 시절의 한 인물을 떠올리고, 그 인물의 사연을 조금씩 알게 되는 내용을 여러 에피소드를 섞어 풀어나가는 구성. 익숙해서 쉽게 읽히기도 한다.
이 작가가 일곱 편의 장편소설과 두 권의 단편집을 냈다는데 우리말로 번역한 건 이 책 한 권밖에 없는 게 아쉬울 정도다. 물론 명작이라고는 못하지만 컬럼비아의 흥미롭지만 어두웠던 시절을 훔쳐보는 취미를 만족시킬 수 있다. 어제 오늘 이 책 덕에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