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가일
서보 머그더 지음, 진경애 옮김 / 프시케의숲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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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서보 머그더의 문장은 끝장이다. 문장도 문장이지만 장면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독자를 홈빡 빠뜨려버리는 눈물의 연못을 만들어내는 솜씨는, 아이고, 환장이다, 환장. 세 번 울었다. 사람을 울리고 지랄이야,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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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2-12-02 14: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거 만두 님이 전에 청소년 소설 같다고 해서 이거 읽을 생각은 없었는데..... 솔깃솔깃...

Falstaff 2022-12-02 14:50   좋아요 1 | URL
저도 독후감엔 청소년 소설....이라고 콕 대놓고 얘기하지는 않아도, 청소년 시절에 읽으면 참 좋았겠다, 라고는 할 예정입니다. 도서관 가셔요!

유부만두 2022-12-02 16: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우셨어요?? 소년 골드문트의 신선한 발견이에요!!
확실히 우리말 번역가들의 솜씨로 서보 머그더의 문장이 빛나는 것일지도 몰라요. 불어론 그냥 그랬거등요. … 그나저나 골드문트님의 감동 포인트는 어디였을까요? 정말 궁금하네요.

Falstaff 2022-12-02 18:11   좋아요 0 | URL
ㅎㅎㅎ 요즘 유난히 에스트로젠이 풀풀 분비되는 거 같아서 말입죠.
감동 포인트는요, 당연히 안 알려드립니다. ㅋㅋㅋㅋ

scott 2022-12-14 1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영어판으로 읽었는데 눈물은 단 한방울도 ㅎㅎ

Falstaff 2022-12-14 18:25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제가 어느새 테스토스테론 보다 에스트로젠을 더 분비하는 세월을 맞았나 봅니다. ㅋㅋㅋㅋㅋㅋ

그레이스 2022-12-14 1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어>의 작가군요^^
성장소설이라고 하니 눈물 날수도 있겠네요.

Falstaff 2022-12-14 19:13   좋아요 0 | URL
ㅋㅋㅋ 제가 좀 여린 남자라서 말입죠.

stella.K 2022-12-15 0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평이 강렬하네요. 읽을 것이 많아 행복한 세상입니다. ㅎㅎ

Falstaff 2022-12-15 13:15   좋아요 1 | URL
ㅎㅎㅎ 즐기기 딱 좋은 책입니다.

coolcat329 2022-12-19 18: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스콧님이 골드문트님 세 번 울었다고. 저도 책 읽고 울고 싶어요.
이 책은 꼭 읽으렵니다.

scott 2022-12-19 18:49   좋아요 1 | URL
헝가리 문학
작품들 깊이가 있습니다 산도르 마라이 머그더 모두 세계적인 문호들 ^^
 
지평선 너머
유진 오닐 지음, 이형식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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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벨 문학상과 무려 네 번의 퓰리처 상을 받은 유진 오닐은, 겨우 <밤으로의 긴 여로>와 <느릅나무 아래의 욕망>을 읽어봤을 뿐이지만, 한 마디로 말해서 독자에게 큰 한 방의 충격파를 주는 극작가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독자도 나처럼 오닐의 명성만 기억하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밤으로의 긴 여로>를 골라 별 생각 없이 읽어나가다 충격의 여파로 넋을 잃는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리하여 <밤으로의 긴 여로>를 읽고 쓴 독후감으로 “피를 토해 쓴 백조의 노래”라는 단 한 구절로 마무리해야 했다. 어떻게 더 보탤 말이 없어서. 이후 4년이 흘러 다시 <느릅나무 아래의 욕망>을 읽었는데, 이 작품은 에드워드 토마스가 오페라로 작곡한 것을 지난 세기말부터 듣고 있었던 터라 대본을 통해 스토리를 잘 알고 있어서 ‘백조의 노래’를 들은 여파에도 불구하고 선택에 시간이 걸렸었다. 세월은 자신의 속에 망각을 품고 있다. 나 역시 세월 속의 망각에 묻혀 오닐의 다른 작품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가 오랜만에 생각이 나 검색을 해보니 다른 작품도 꽤나 많이 번역 출판을 하고 있었다. 이번엔 놓치지 않으리. 이 가운데 유진 오닐에게 첫 번째 퓰리처 상을 안게 해준 초기 작품 <지평선 너머>를 동네 도서관에서 상호대출 신청을 해 읽었다.


  지평선 너머. 저 너머에 뭐가 있을까? 지리적 관점으로 말하자면 지구 표면적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바다가 나온다. 하지만 문학장르 가운데서도 시와 더불어 가장 함축적이어야 하는 희곡에서 지평선 너머에 있는 ‘무엇’은, 초등 고학년이던가 중학 저학년 시절에 교과서에서 배운 김동인의 단편소설 <무지개>에서 말하는 ‘무지개’ 비슷한 것이겠다. 꿈, 또는 의미도 없고 이룰 수도 없어서 허망하기 짝이 없는 야망 같은 것. <지평선 너머>에는 앤드루와 로버트 메이오 형제가 등장한다. 건장하고 튼튼한 앤드루는 아버지의 농장을 이어받아 주에서 가장 효율적인 농장으로 성공시키는 것이 꿈이고, 병약한 동생 로버트는 대학 1학년을 마치고 휴학중인데 농장생활을 답답하게 여기며 저 평야 밖에 있는 지평선 너머엔 아름다움, 자신을 부르는 아름다움, 멀리 있는 미지의 아름다움, 자신을 유혹하는 동방의 신비와 마력, 넓은 곳에서 자유를 누리고 싶은 마음 등이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힌, 조금은 몽환적인, 좋은 말로 시적인 청년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성격에 맞게 형은 농장에 남아 땅을 파고, 동생은 바다를 건너 동방으로 가면, 희곡도 안 되고 연극도 안 된다.

  우애 깊은 형제들 사이의 지극히 좁은 간극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있었으니, 사랑과 질투. 옆 농장의 병든 과부여인 슬하 외동딸 루스. 어린 시절부터 형제와 루스, 이렇게 세 명은 죽마를 타고 놀던 동무 사이였다.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다가 당장 내일 새벽에 외삼촌이 선장으로 있는 상선을 타고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자 하는 로버트한테 루스는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건 앤드루가 아니라 로버트였다고 고백하면서 농장에 남으라고 요구하고, 루스가 당연히 앤드루와 결혼할 줄 알았던 로버트는 감격에 차서 출발을 아홉 시간도 남기지 않은 밤, 떠나지 않고 루스와의 결혼을 위해 남아 있기로 결심을 바꾸었다고 가족들에게 선언한다. 외삼촌 딕 스콧 선장을 제외하고 온 가족이 로버트의 변심을 기뻐하지만, 이게 무슨 일인지, 형 앤드루가 루스의 변심으로 깊게 상심해 로버트 대신 외삼촌의 배를 타기로 한다.


  고향에 남아 옆 농장까지 합해 큰 농장을 경영하게 된 로버트는 당연히 하는 일마다 꼬박꼬박 실패해 농장은 나날이 황폐해지고 아내 루스와의 사랑 역시 희미해진다. 삼 년이 지나고, 기어이 항해를 떠나기 전에 앤드루와 부자간의 연을 끊은 아버지마저 2년 전에 돌아간 후, 이제 한 재산을 모은 앤드루가 다시 집에 돌아오는 것이 2막. 실패한 로버트는 형 앤드루에게 미묘한 열등감을 지니게 됐고, 루스는 살아보니까, 3년 전에 자신이 진심으로 로버트를 사랑했다는 것이 진심이었을지언정 진실은 아니었음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 살다 보면 그럴 수 있잖은가. 로버트가 내일 새벽에 떠난다고 하니, 사실은 안 그랬음에도 마치 자신이 남아 있을 형보다 떠날 동생을 진심으로 사랑해왔다고 과 포장하게 되는 것. 이거 하나 가지고도 그리스 사람이라면 수 없이 많은 신화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사실이 그렇더라도 일단 결혼을 하고 두 살 난 딸 메리까지 어리광을 부린다면 지나간, 진심 말고 진실은 마음 속에 가두고 절대 내보이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솔직히 당신도 그렇고 나도 그렇잖아. 근데 드라마의 주인공쯤 되면 그런 걸 못하는 법이라서 루스는 기어이 남편 로버트에게 삼 년 전의 고백이 거짓, 아니면 적어도 기가 막힌 후회스러운 과장이었고, 진실은 앤드루를 사랑했었다고, 그걸 이제야 알게 됐다고 남편에게 말하고야 만다. 그러나 앤드루는 동남아 근해에서 태풍을 만나 악전고투하며 채 1년도 되지 않아 루스와의 사랑은 깨끗하게, 완벽하게 정리를 해버렸다고 로버트에게 선언을 했다. 로버트는 이 사실을 루스에게 전한다. 앤드루 역시 직접 자기 입을 통해 루스한테 같은 내용을 말한 후 아르헨티나에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을 건설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급하게 떠난다.

  여기까지가 1막과 2막. 3막은 다시 5년 후, 백만장자 가까이까지 갔다가 곡물 선물거래에 손을 대 겨우 5만 달러만 남기고 다시 고향의 농장집에 앤드루가 들르면서 극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는데, 어떻게 되는지는 안 알려드리겠다. 물론 로버트는 완전 파산 일보직전이고, 양쪽 폐가 기능을 거의 정지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으며, 딸 메리는 8개월 전에 먼저 세상을 떠, 루스는 심신이 거의 상실한 채 남편의 죽음만 건조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배경만 소개한다.


  어떤 작가의 작품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이 불운한 앤드루-로버트 형제 같이 극단적으로 다른 성향을 갖는 한 쌍이 서로 다른 행로를 선택하고자 하지만 이들의 운명의 연못에 운명의 돌이 하나 떨어져 생긴 파장이 각기 서로 어긋난 행로로 가게 만드는 작품. 혹시 기억 나시나? 날 것도 같고 아닐 것도 같다. 그러나 그리스 로마 시절에 많고 많은 신들이 인간을 대상으로 저지른 숱한 장난이 전부 이런 식 아니었나 싶다. 기껏 최고의 능력을 부여해놓고 능력과 관계없는 길을 걸어야 하는 운명까지 심술궂게 툭 던져버리는 우롱의 신들. 또는 세상의 지복을 약속하는 동시에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단서조항을 달아버리는 장난꾸러기 신들. 이것들을 나는 유독 유진 오닐의 작품에서 볼 수 있었으니 첫째가 <밤으로의 긴 여로>의 제이미와 에드먼드. 그리고 <느릅나무 아래의 욕망>에서 시미언-피터와 이들의 이복동생 에벤.

  평생 떠돌면서 돈을 벌 목적의 멜로 드라마에만 출연하던 제임스 오닐 씨의 아들로 태어난 유진 오닐은 아버지를 반면교사 삼아 극작을 시작할 때부터 예술적인 작품을 염두에 두었다고 하는데, 유진 오닐의 작품 세계를 시기별로 3기로 나눌 때 2기에 그리스 극도 실험해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역자 해설 속에서 이 내용을 읽으며 오닐의 초기작인 이 <지평선 너머>에도 그리스 극과 유사한 내용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하긴 세상의 어떤 일이라도 굳이 가져다 짜맞추기로 하면 그리스 신화와 비교하지 못할 게 하나라도 있긴 한가 말이지만. 억지스런 독자의 감상일지언정, 이런 모든 것을 합해 어디서 이미 읽은 듯한 기시감을 느낄 수 있고 그래서 별점 하나를 뺐을지라도 유진 오닐, 참 드라마 하나는 재미있게 잘 쓴다. 오늘도 난 또 하나의 유진 오닐을 읽고 놀래 자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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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12-01 0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극단적으로 다른 성향을 갖는 한 쌍이 서로 다른 행로를 선택하고자 하지만 이들의 운명의 연못에 운명의 돌이 하나 떨어져 생긴 파장이 각기 서로 어긋난 행로로 가게 만드는 작품‘ 에서 저는 제일 먼저 ‘제프 린제이‘의 <음흉하게 꿈꾸는 덱스터>가 떠올랐지만, 아니겠죠. 골드문트 님은 덱스터를 안읽으시겠죠... ㅎㅎ
그러고보니 <차일드 44>도 형제들이었는데, 역시 골드문트 님은 차일드 44도 안읽으시겠죠..

저도 저 줄거리의 답을 기다립니다. 궁금하네요.

Falstaff 2022-12-01 16:22   좋아요 0 | URL
댓글이 늦었습니다. 이제 하루 루틴이 (조금 일찍) 끝나서 놋북 앞에 앉았습니다. ㅋㅋ
흠. 이야기하신 책들 참고 하겠습니다. 도서관 이용하면 좋은 것 가운데 하나가 어떤 책이 있다, 하면 그냥 읽을 수 있다는 점 아니겠습니까. 은근히 기대하겠습니다. ㅋㅋㅋ
줄거리의 답은요, (아씨, 스마트 폰으로 읽을 때 적절한 단어가 생각났었는데 그새 잊었습니다) 그냥 코메디아, 즉 일상극이랄까 그렇습니다.

바람돌이 2022-12-01 14: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리뷰를 읽을 때마다 세상에 내가 안읽은 작가가 왜 이리 많을까 절망하게 됩니다. 저는 오늘부터 미래에 자라서 골드문트님이 되기로..... 그러기 위해서 지금도 열심히 읽어야겠네요. ^^

Falstaff 2022-12-01 16:23   좋아요 1 | URL
에이, 그게 어딨어요. 책 읽는 거, 전 백퍼 취미활동입니다. 이까짓 거 가지고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아요. 아무쪼록 바람돌이 님도 그러시기 바랍니다. ㅎㅎㅎㅎ

yamoo 2022-12-08 1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밤으로의 긴 여로>를 골라 별 생각 없이 읽어나가다 그냥 덮었습니다. 희곡은 영 재미없네...라는 생각이 들어 몇 페이지 읽다 말았는데... 이거이거 완독을 해 봐야 겠습니다.충격과 넋을 잃을 정도라니...닥치고 완독해야 겠습니다. 사실 두 권 모두 있거든요..ㅎㅎ 밤으로, 느릅나무..

흠...그나저나 다락방 님 댓글을 보니, 전 차일드44를 너무도 재밌게 읽었는데 말이죠..ㅎ

Falstaff 2022-12-08 19:25   좋아요 0 | URL
사람마다 맞고 아니고가 있잖습니까. 아무리 셰익스피어라도 읽는 독자가 싫으면 싫은 것이지 뭐 별 거 있겠습니까. 근데 이렇게 써 놓고 봐도, 가지고 계신 이이의 작품 두 편은 ㅎㅎㅎ 다시 읽어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말입죠. ㅋㅋㅋ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이스퀼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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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이 돌 아래 에우포리온(Euphorion)의 아들, 아테나이의 아이스퀼로스가 잠들도다. 그는 곡식이 풍성할 젤라(Gela)의 들판에서 죽음에 제압되었으나, 그의 힘과 용맹은 마라톤의 숲이 말해줄 것이며, 또한 이를 시험해본 더벅머리 페르시아인들이 전해주리라.”


  이것이 아이스퀼로스 본인이 직접 쓴 자신의 묘비명이다. 즉, 죽음의 침상에서 아이스퀼로스는 자신을 그리스 비극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을 만든 극작가가 아니라 2차 페르시아 전쟁의 마라톤 전투와, 3차 페르시아 전쟁의 살라미스 해전에 마흔 다섯 살의 나이로 참전한 늙었으나 용맹한 전사로 기억되기를 바랐다. 역자 천병희는 아이스퀼로스가 참전한 페르시아 전쟁을 기점으로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가 소아시아 이오니아 지방에서 아테나이로 옮겨와 그야말로 찬란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읽어보면, 애초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병력을 비롯한 다양한 방면으로 무력의 열세를 딛고 그리스가 세 번의 승리를 이끌어낸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서도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의 기적은 아이스퀼로스로 하여금 10년 터울로 극적인 승전의 감격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게 만들었으리라.

  아이스퀼로스는 기원전 525/4년에 귀족 에우포리온의 아들로 아테네 근처,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 근방 부천 정도에서 태어났다. 지금부터 2,546년 전에 태어난 사람이니 그에 관하여 구체적인 자료는 당연히 남아있지 않아서, 군인으로서는 위 단락에서 이야기했고, 이제 극작가로만 남았는데, 문예진흥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던 그리스의 참주僭主tyrant 페이시스트라토스에 의하여 시작한 연중행사, 디오뉘소스 축제 중에 열린 비극경연대회에서 열세 번의 우승을 차지했던 그리스의 대표적인 극작가이다. 이이가 비극경연대회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했을 때는 마라톤 전투와 살리미스 해전의 딱 한중간 시절인 기원전 484년, 그의 나이 마흔 살 때였다. 천병희의 해설의 영향을 받아 조금 과장된 생각을 보탠다면, 마라톤 전투 승리의 기적을 경험한 아이스퀼로스는 죽음을 마주한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적진 앞에 섰던 비극적 분위기가 그로 하여금 위대한 비극작가로 등극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었지 않을까 한다.

  아이스퀼로스는 주인공 한 명과 코러스로 구성되는 그리스 비극의 전통에서 여러 등장인물과 코러스를 동시에 무대에 올려 드디어 대화가 가능하게 만들어 연극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의의가 있다고 한다. 이이 바로 앞에 읽은 그리스의 희극 전문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자신의 작품 곳곳에서 소크라테스를 시류에 영합하는 소피스트로 악평을 늘어놓은 반면, 자신의 전공인 희극과 반대로 비극만 쓰다가 죽은 아이스퀼로스에게는 열렬한 찬사를 쏟아냈다. 그러나 세상은 돌고 돌면서 발전하고 진화한다. 살라미스 해전이 끝나고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이스퀼로스는 훗날 로마의 베르길리우스가 죽음을 맞는 그리스 식민지 시칠리아의 쉬라쿠스로 가서 공연을 하고 작품도 만들며 지내다가 쉰일곱 살 때 아테나이로 돌아와 다시 뒤오니소스제의 비극경연대회에 참가하지만 대회에 첫 출전한 스물여덟 살의 소포클레스한테 밀리고 만다. 아이스퀼로스는 허탈했겠지. 그리고 다시 힘을 모아 『테바이』 3부작을 다음해 경연대회에 올려 다시 우승을 획득한다. 이후 또다시 10년이 흐른 후, 68세의 그는 필생의 역작인 『오레스테이아』로 경연대회의 열세 번째이자 마지막 우승을 차지하고 다시 시칠리아로 가서 70세를 일기로 자신의 묘비명을 쓰기에 이른다.

  아이스퀼로스 본인에게는 페르시아 전쟁, 이 가운데서도 두 번에 걸친 믿기지 않는 승리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마흔 살에 시작한 열세 번의 경연대회 우승도 전쟁의 신 아레스와 제우스의 손길이 스치지 않았더라면 도무지 이길 수 없던 전투와 비교해서 사소했을 정도로 경각에 스스로의 목숨이 왔다 갔다 했던 일종의 트라우마. 그래 자연스럽게 이이의 드라마에서 다수의 전쟁과 살육의 장면이 등장한다. 그렇다고 아이스퀼로스를 호전적인 작가라고 볼 수는 없다. 그리스 시대에는 숱하게 국가간 전쟁이 발발했고, 그게 없던 평화시절엔 하다못해 수다하게 내전이라고 발생했던 시기라, 전쟁, 습격, 도적/해적, 약탈 등은 쉼없이 벌어지던 일상의 한 가지였으니.


  이이의 작품은 ‘아테Ate’ 여신이 막강한 영향력을 빼놓고 말하기는 힘들 듯하다. 그의 거의 마지막 작품이자 백조의 노래인 『오레스테이아』에서도 아테 여신은 무대의 뒤편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천병희의 후주annotation은 이렇게 설명한다.

  “아테는 광기, 광기에서 저지른 행동, 거기서 벌어지는 불행.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의미하는 여신으로, 아이스퀼로스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 중 하나다.”

  이어서 네이버 지식백과의 설명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어리석은 실수와 미망을 의인화한 여신이다. 제우스와 불화의 여신 에리스의 딸인 아테는 신과 인간들을 현혹시켜서 어리석은 행동을 저지르게 만든다.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서 올림포스에서 인간 세상으로 내던져졌다.”

  그러니까 『오레스테이아』의 원형이 광기냐, 어리석음이나 미망이냐, 하는 차이로 해석할 수 있는데, 천병희의 후주가, 역자니까 당연하겠지만, 더 진실에 가깝다. 『오레스테이아』, 즉 오레스테스 3부작을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는, 세상의 어떤 가문보다 복잡하고, 질기고, 오래 지속하고, 추악하고, 비정하고, 난잡하기까지 한 오레스테스 가문의 저주받은 내력에 관해서 미리 읽어보고, 가능하면 충분히 익숙해질 만큼 다양한 작품을 섭렵한 뒤에 감상하는 것이 좋기는 하다. 그러나 바쁜 현대인이 어디 그럴 시간이 있을까. 이런 분들은 그저 간단하게 탄탈로스→펠롭스→아트레우스→아가멤논→오레스테스로 이어지는 골치 아프지만 세계적인 가문이라도 검색해보면 좋을 것이다. 독후감에선 가문 내력은 말고 작품에서 주로 문제가 되는 것들만 뽑아보면,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 원정을 위해 수천 척의 배를 띄웠으나 (남)서풍이 불지 않아 출전하지 못하고 나날만 보내고 있었다. 그리하여 점을 봤더니 아가멤논의 어여쁜 맏딸 이피게네이아를 죽음으로 희생시켜야 바람이 불어 출항할 수 있다는 신의 계시가 내려, 아가멤논은 정말로 자기 맏딸을 희생의 대 위에 서게 만든다. 전쟁이 끝나고 아폴로의 저주를 받은 명 예언자 카산드라를 대동해 개선한 아가멤논을 아내 클뤼타이메스트라(‘클뤼타임네스트라’의 고어형이라고 함)는 시사촌동생이자 연인인 아이기스토스와 공모해, 욕조에 누워있는 남편에게 천을 뒤집어 씌운 다음 자신이 직접 (칼 또는) 도끼로 머리를 쪼개 죽인다.

  어머니와 당숙이 자신을 해칠까 몸을 숨긴 오레스테스는 나그네인 것처럼 변장을 하고 친구 퓔라테스와 함께 궁으로 돌아와 누이 엘렉트라와 공모해서 어머니를 (칼 또는) 도끼로 찍어 죽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아이기스토스 역시 살해해버린다.

  죽은 어머니 클뤼타이메스트라의 혼백이 호출한 복수의 여신들에 쫓기는 신세가 된 오레스테스는 아폴론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아폴론은 아테나이에 가서 여신 아테네 주재로 심판을 받으라고 한다. 이에 아테나이에 도착해 재판을 받아 유무죄가 동수를 기록, 아테네 여신의 캐스팅 보트로 무죄를 선고하고 여신은 복수의 여신들을 설득해 자비의 여신으로 탈바꿈하게 만든다.

  이렇게 차례대로 <아가멤논>,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그리고 <자비로운 여신들>이란 제목을 달았고, 이 3부작을 합쳐 『오레스테이아』라고 칭한다. 이건 지극히 간략하게 내용만 스케치했을 뿐이고 직접 읽어보면 디테일이 무수하게 달려 있다. 특히 크리스타 볼프가 쓴 <카산드라>는 <아가멤논>과 내용이 거의 비슷하지만 볼프가 누군가, 지극히 재미있는 해석, 그리고 색다른 덧붙임을 엮어 나가고 있다. 휴고 폰 호프만슈탈이 대본을 쓰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엘렉트라>는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과 같은 플롯이지만 곁가지를 다 쳐내고 오랜 시간동안 냉혹한 어머니와 당숙의 위협 속에서 살아야 했던 엘렉트라에 초점을 맞춰 드라마틱한 오페라로 만들어냈다.


  『오레스테이아』외에도 라이오스→오이디푸스→에테오클레스/폴뤼네이케스 3대를 그린 『테바이』 3부작도 매우 훌륭한 것처럼 보인다. 3부작 가운데 남아 있는 유일한 작품이 마지막 3부 격인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인데, 아시는 것처럼 테바이의 일곱 성문을 일곱 명의 장수가 제비를 뽑아 공격하기로 했고, 이중에 일곱 번째 성문은 성주 에테오클레스의 동생이자 오이디푸스의 아들인 폴뤼네이케스가 맡는다. 이에 형 에테오클레스는 자진해서 동생을 맞아 싸우기로 했다가, 서로가 서로한테 창을 꽂아 동시에 죽음을 맞는 비극이다. 이 라이오스→오이디푸스→에테오클레스/폴뤼네이케스 가문을 좌우한 것 역시 아가멤논의 집안과 마찬가지로 아테 여신의 작업이라고 봐도 괜찮겠다.

  졸지에 왕 에테오클레스가 죽음을 맞아 섭정을 맡게 된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에겐 국장을 베풀지만 테바이 공격에 적극 협조한 폴뤼네이케스는 시신을 거두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고 개들의 먹이가 되도록 만든다. 시신에 손을 대기만 해도 참형에 처한다고 공고를 했으나 누이 안티고네는 형벌을 기꺼이 감수하고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 주는 이야기 <안티고네>로 이어진다. 이 이야기는 소포클레스 비극전집과 카를 오르프가 작곡한 동명의 오페라에 실려 있다. 이렇게 다양하게 섞여 있는 그리스 비극을 서로 연결해서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다만 주의할 것은 비슷비슷한 구성으로 쓰인 작품을 단번에 여럿 읽으면 간혹 멀미가 나는 수가 있으니 짬짬이 다른 책들도 함께 읽으면서 감상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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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11-29 0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스퀼로스에 관해 쏙쏙 들어오게 정리를 넘 잘해주셨네요. 저도 아이스퀼로스 읽을 때, 이 내용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다시 기억을 끄집어내서 정리했습니다^^
👍

Falstaff 2022-11-29 11:58   좋아요 1 | URL
ㅋㅋㅋ 고맙습니다. 이 책, 정말 재미나요! 을유에 이어 두번째 읽었다니까요! ^^
 
쇼샤 페이지터너스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지음, 정영문 옮김 / 빛소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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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읽으셔요! 제가 5년 전에 쓴 독후감 제목이 "이 책 찍어줄 다른 출판사 없나요?" 였을 만큼 재미납니다. 열린책들에서 나온 <원수들, 사랑 이야기>하고 비슷한 내용인데요, 둘 다 좋아요! 다만 시대가 변해서 유대인들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조금 거슬리기는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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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11-28 19: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예~~
저장하고 갑니다^^
하고 나니 집에 있을것 같네요ㅋㅋ
있다고 하네요^^

Falstaff 2022-11-28 19:10   좋아요 2 | URL
ㅎㅎㅎ 그레이스 님은 그럴 거 같았습니다. ^^

햇살과함께 2022-11-28 20: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첨 들어보는데 폴란드 작가네요.
노벨문학상도 탔고요.
골드문트님 무작정 영업에 궁금하네요!!

Falstaff 2022-11-28 20:39   좋아요 3 | URL
아 글쎄 재미있다니까요! ㅎㅎㅎㅎ
재미 없으면 제가 책값 드리겠습니다.....라고 쓸까 말까 하다가 ㅋㅋㅋ 아닌 걸로.
 
자유 국가에서
V. S. 나이폴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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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겔 스트리트>, <도착의 수수께끼>, <비스와스 씨를 위한 집>, <세계 속의 길>에 이어 다섯 번째 나이폴로 고른 책. 아메리카 본토는 물론이고 도서지역까지 모조리 점령한 유럽인들은 트리나다드 섬에 상륙하여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원주민들을 거의 멸종시켜버렸다. 이후 섬에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을 건설, 유지하고자 했으나 노예해방 이후 노동력이 필요해진 백인들은 이를 보충하기 위해 인도, 중국 등지의 이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는데, 이때 인도에서는 그래도 영어 깨나 하는 최상위 브라만 계급을 중심으로 많이 몰려와 정착했고, 이 속에 뭄바이에서 출발한 나이폴 가족이 들어 있었다. 이리하여 1932년에 V.S. 즉 비디아다르 수라지프라사드 나이폴이 태어난다. 이후 V.S의 성장과정은 웬만한 건 그의 작품에 모두 들어 있다. 후에 트리니다드 토바고가 되는 섬의 미겔 스트리트에서 소년기를 보내고, 학교를 다녔고, 학교에서 단연 발군의 학업 성취로 열여섯 살에 트리니다드 정부에서 장학금을 받아 가족, 친척의 열광적인 배웅을 받으며 섬을 떠나 열여덟 살에 옥스퍼드에 입학한다. 3년 후인 1953년에 아버지가 심장발작으로 별세했을 때, 나이폴은 생애 마지막으로 고향을 방문하고 다시는 트리니다드 섬에 발을 딛지 않는다. 즉 갈색 피부의 영국인으로 살고자 했을 뿐이다. 이리하여 나이폴의 원형질에는 인도의 뭄바이, 트리니다드의 포트오브스페인, 런던의 얼스코트, 옥스퍼드, 그리고 만년의 삶을 살게 될 스톤헨지가 바라다보이는 월트셔의 농촌 마을로 이어진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나이폴의 영혼은 뭄바이, 포트오브스페인, 영국에 국한하지 않고 전 세계를 끊임없이 떠도는 새로운 유형의 디아스포라로 규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때때로 작품을 읽기 시작해 진도를 나가다 보면 분명히 아름다운 문장, 섬세한 감성의 포착, 삶과 전원과 자연과 인간에 관한 명상들이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이런 묘사가 하도 장황하여 오히려 나가 떨어질 위험이 있는 경우가 있다. 나이폴도 이런 작가 가운데 한 명이다. 그러나 오늘 소개하는 <자유 국가에서>는 잘 읽히고 심지어 재미도 있다. 430쪽 분량으로 부담도 별로 없다. 그의 장기이기는 하지만 지루함을 느끼게 만들 수도 있는 장황한 사색 없이 그리스에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인도 뭄바이에서 미국 워싱턴으로, (트리니다드토바고일 수 있는) 제3 세계에서 영국 런던으로, 정치상황이 매우 복잡한 아프리카 한 나라의 수도에서 남부 관할구역으로,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다시 이집트의 룩소르로 가는 로드 무비 식 옴니버스 형식이다. 결국 처음과 끝, <피레우스의 방랑자>와 <룩소르의 서커스단>를 내놓고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라고 주장하여, 모두 네 편의 단편과 중편 하나의 관계가 서로 이어져 있다고 읽을 수 있는데, 이게 작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 출판사가 규정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독자가 읽기에 그런 것은 별로 영향을 받지 않고 그저 순서에 따라 각기 독립된 이야기로 즐기면 되지 않겠나 싶다.


  독후감의 첫 문단에서 나는 V.S. 나이폴을 새로운 유형의 디아스포라 족race으로 규정하는 것이 옳다고 슬쩍 제안했다. 이 책에서 주인공의 방랑을 보면 오랜 세월 이방의 참견을 받거나 식민지였던 그리스에서 영국에 의하여 주권의 상당부분을 빼앗겼던 이집트로의 여행인 <피레우스의 방랑자>, 식민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인도인이 세계의 심장인 미국의 워싱턴에서 정착하는 <무리에서 벗어나 한 개인으로>, (영국 식민지였던 트리니다드토바고로 보이는) 제3국에서 런던으로 온 남자의 방황을 그린 <누구를 죽여야 하는지 말하라>, 과거 식민 모국 출신 백인이 대통령이 권력을 쥔 아프리카 나라의 수도에서 왕 시해가 진행중인 왕의 남부 관할지역으로의 여행을 다룬 <자유 국가에서>, 그리고 마지막 에필로그까지, 모두 과거에 식민지였거나, 식민지에 버금갈 정도로 주권을 빼앗겼던 나라였거나 식민 국가 출신 해당지역의 백인 공무원이다. 즉, 주인공이 흑백을 불문하고 해당 지역에서는 거의 완벽하게 이방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하여 역자 정희성은 책 뒤편의 작품해석 제목을 “포스트 식민 시대 유랑자들의 쓸쓸한 초상”이라고 적절하게 달았고, 내용 역시 충분히 수긍할 수 있었다. 물론 약간의 과장이 있는 것 같았지만.

  우리도 과거 일제에 의한 강점, 즉 식민 시절을 겪었다. 하지만 식민 모국인 일본이 전쟁 마지막에 인류 역사상 유일한 한 방, 리틀보이와 팻맨에 얻어터져 나이폴, 그리고 역자 정희성이 말하는 포스트 식민 시대를 겪지 않았고, 겪을 수도 없었다. 포스트 식민 시대라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식민주의에 의하여 수탈을 당하느라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피식민국가의 주민들이 상대적으로, 비교할 수도 없이 부유한 식민 모국,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승전국의 “필수적이지만 현지인들이 기피하는 작업을 위한” 하층 노동자로 유입하고, 이질적인 문화에서 생활하다가 차츰 적응하는 일을 말한다. 여기서 ‘적응’이라고 하는 건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상당한 시간 동안 죽도 밥도 아닌 상태를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난점이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면 적극적으로 식민 사업에 뛰어들지 않았던 미국으로의 유입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경우가 다를 뿐이지 결국 필요한 인력의 유입과, 유입한 인력들의 오랜 적응기간과 혼란이란 입장에서는 거기서 거기다. 우리도 한 시절에 아메리칸 드림 하나만 가지고 미국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경험이 있으니.

  뭄바이에서 고관집의 요리사 하인 출신이었던 ‘나’ 산토시는 계단 밑의 작은 공간, 이모네 집에서 일만 생겼다 하면 징벌로 처박혀야 했던 해리 포터의 계단 밑 창고 같은 곳에서 먹고 자야 했는데, 그것보다는 동네의 비슷한 또래 하인들과 함께 밤 늦게까지 두런두런 수다를 떨다가 가끔 술이라도 생기면 한 잔 씩 하면서, 그냥 길거리에서 자던 습관이 있었다. 주인이 정부 일로 워싱턴으로 발령이 나서 어렵사리 함께 워싱턴 비행기를 탔는데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피곤한 주인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 잠에 빠져버렸고, 산토시는 아무리 뒤져봐도 자기가 잘 공간은 보이지 않는지라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나가 문 앞에 몸을 구부리고 엎어져 잔다. 물론 아침에 눈을 떠보니 현관문은 자동으로 닫혀 있어서 집 안으로 들어갈 방법도 알지 못하고. 이런 상황이니 인도 출신의 디아스포라는 지역적 분리 이외에도 상상도 하지 못한 문화충돌까지 겪어야 한다.

  나도 한 번 폼을 내보기 위해 요즘 유독 유행하는 단어를 굳이 써보자면, 나이폴은 이런 현상을 핍진하게 서술하고 있다. 흠. “핍진”이라고 쓰니 발음은 뭔가 쿨 한 느낌이지만, 이 단어를 쓰려면 반드시 괄호 치고 한자어를 명기, 분명하게 밝혀야겠다. 逼眞과 乏盡이 발음은 같지만 내용은 거의 반대라고도 할 수 있구나. 웬만하면 이 단어는 쓰지 않는 게 좋겠다.


  하여간 결론은, 재미있는 책이라는 것. V.S. 나이폴을 처음부터 쉽게 읽은 독자는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깊은 사색을 동반해야 할 것 같은 치밀한 서술에 지쳤거나, 한 이야기 또 하고, 또 한 이야기 다시 한 번 더 하는 것이 걱정스러워 나이폴을 읽기 머뭇거린다면 이 책을 권하겠다. 가장 문턱이 낮아 쉽고 편한 나이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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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11-25 1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놔 항상 사두고 닐지 않은
책들이 피드에 올라올 때마다
이렇게 맴에 가책을 느끼게
되는지요 ㅠㅠ

나이폴 선생의 책을 잔뜩 사
두고 선뜻 못 집어 들고 있
습니다.

문턱이 낮다고 하시니 해가 가
기 전에 도전을...

Falstaff 2022-11-25 10:56   좋아요 2 | URL
ㅋㅋㅋ 그게 뭐 한 두 권이겠습니까. 책 좀 읽는 사람들은 다 그럴 거예요.

붉은돼지 2022-11-25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생은 뭐 워낙에 견문이 일천하고 당췌 근본이 천학이기는 허나, 나름 똥폼잡고 거들먹거리기를 좋아하는지라 뜻도 모르는 한자를 대충 통박으로 많이 쓰는 편인데, 핍진이 결핍의 그 핍진 말고 또 다른 뜻이 있는 줄은 오늘 아침에사 처음 알았습니다. 조문도면 석사가의라. 금일 큰 공부를 하였으니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지는....당연지사 않을 것이고.........................쓸데없는 소리는 각설하고, 가만 보니 골드문트님의 프사가 소생 프사의 거의 실사판이라 반가운 마음에 횡설수설 송구합니다.

Falstaff 2022-11-25 13:53   좋아요 0 | URL
알라딘 서재 터줏대감 님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리 댓글을 주시니 고맙습니다. 저 사진은 좀 된 거긴 합니다만 그래도 비슷하네요.

coolcat329 2022-11-28 0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작가가 인도인이었군요. <미겔 스트리트> 소설은 들어봤는데 작가가 인도인이라고는 전혀 생각못했습니다. 골드문트님의 작가 설명은 역시 재미납니다. ‘이방인‘을 주제로 하는 소설집~

Falstaff 2022-11-28 18:42   좋아요 0 | URL
나이폴은 충분히 집중 탐구해볼 만한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근데 정말로 ˝집중˝하려면 꽤나 지루한 게 문제이긴 합니다만. ㅋㅋㅋㅋ

그레이스 2022-11-28 19: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이폴도 모아놓기만 하고 아직 못읽었습니다.
한권 읽었는데 책제목이 생각이 안나네요
제 기억으로는 세계속의 길이었던 것 같네요
마구 읽던 때라 기억이 전혀 안납니다 ㅠ

Falstaff 2022-11-28 19:10   좋아요 1 | URL
세계속의 길이 만만하지 않은데.... ㅎㅎㅎ 뭐 어떻습니까. 다 그런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