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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ㅣ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이스퀼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24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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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 돌 아래 에우포리온(Euphorion)의 아들, 아테나이의 아이스퀼로스가 잠들도다. 그는 곡식이 풍성할 젤라(Gela)의 들판에서 죽음에 제압되었으나, 그의 힘과 용맹은 마라톤의 숲이 말해줄 것이며, 또한 이를 시험해본 더벅머리 페르시아인들이 전해주리라.”
이것이 아이스퀼로스 본인이 직접 쓴 자신의 묘비명이다. 즉, 죽음의 침상에서 아이스퀼로스는 자신을 그리스 비극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을 만든 극작가가 아니라 2차 페르시아 전쟁의 마라톤 전투와, 3차 페르시아 전쟁의 살라미스 해전에 마흔 다섯 살의 나이로 참전한 늙었으나 용맹한 전사로 기억되기를 바랐다. 역자 천병희는 아이스퀼로스가 참전한 페르시아 전쟁을 기점으로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가 소아시아 이오니아 지방에서 아테나이로 옮겨와 그야말로 찬란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읽어보면, 애초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병력을 비롯한 다양한 방면으로 무력의 열세를 딛고 그리스가 세 번의 승리를 이끌어낸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서도 마라톤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의 기적은 아이스퀼로스로 하여금 10년 터울로 극적인 승전의 감격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게 만들었으리라.
아이스퀼로스는 기원전 525/4년에 귀족 에우포리온의 아들로 아테네 근처,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 근방 부천 정도에서 태어났다. 지금부터 2,546년 전에 태어난 사람이니 그에 관하여 구체적인 자료는 당연히 남아있지 않아서, 군인으로서는 위 단락에서 이야기했고, 이제 극작가로만 남았는데, 문예진흥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던 그리스의 참주僭主tyrant 페이시스트라토스에 의하여 시작한 연중행사, 디오뉘소스 축제 중에 열린 비극경연대회에서 열세 번의 우승을 차지했던 그리스의 대표적인 극작가이다. 이이가 비극경연대회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했을 때는 마라톤 전투와 살리미스 해전의 딱 한중간 시절인 기원전 484년, 그의 나이 마흔 살 때였다. 천병희의 해설의 영향을 받아 조금 과장된 생각을 보탠다면, 마라톤 전투 승리의 기적을 경험한 아이스퀼로스는 죽음을 마주한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적진 앞에 섰던 비극적 분위기가 그로 하여금 위대한 비극작가로 등극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었지 않을까 한다.
아이스퀼로스는 주인공 한 명과 코러스로 구성되는 그리스 비극의 전통에서 여러 등장인물과 코러스를 동시에 무대에 올려 드디어 대화가 가능하게 만들어 연극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의의가 있다고 한다. 이이 바로 앞에 읽은 그리스의 희극 전문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자신의 작품 곳곳에서 소크라테스를 시류에 영합하는 소피스트로 악평을 늘어놓은 반면, 자신의 전공인 희극과 반대로 비극만 쓰다가 죽은 아이스퀼로스에게는 열렬한 찬사를 쏟아냈다. 그러나 세상은 돌고 돌면서 발전하고 진화한다. 살라미스 해전이 끝나고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이스퀼로스는 훗날 로마의 베르길리우스가 죽음을 맞는 그리스 식민지 시칠리아의 쉬라쿠스로 가서 공연을 하고 작품도 만들며 지내다가 쉰일곱 살 때 아테나이로 돌아와 다시 뒤오니소스제의 비극경연대회에 참가하지만 대회에 첫 출전한 스물여덟 살의 소포클레스한테 밀리고 만다. 아이스퀼로스는 허탈했겠지. 그리고 다시 힘을 모아 『테바이』 3부작을 다음해 경연대회에 올려 다시 우승을 획득한다. 이후 또다시 10년이 흐른 후, 68세의 그는 필생의 역작인 『오레스테이아』로 경연대회의 열세 번째이자 마지막 우승을 차지하고 다시 시칠리아로 가서 70세를 일기로 자신의 묘비명을 쓰기에 이른다.
아이스퀼로스 본인에게는 페르시아 전쟁, 이 가운데서도 두 번에 걸친 믿기지 않는 승리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잊히지 않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마흔 살에 시작한 열세 번의 경연대회 우승도 전쟁의 신 아레스와 제우스의 손길이 스치지 않았더라면 도무지 이길 수 없던 전투와 비교해서 사소했을 정도로 경각에 스스로의 목숨이 왔다 갔다 했던 일종의 트라우마. 그래 자연스럽게 이이의 드라마에서 다수의 전쟁과 살육의 장면이 등장한다. 그렇다고 아이스퀼로스를 호전적인 작가라고 볼 수는 없다. 그리스 시대에는 숱하게 국가간 전쟁이 발발했고, 그게 없던 평화시절엔 하다못해 수다하게 내전이라고 발생했던 시기라, 전쟁, 습격, 도적/해적, 약탈 등은 쉼없이 벌어지던 일상의 한 가지였으니.
이이의 작품은 ‘아테Ate’ 여신이 막강한 영향력을 빼놓고 말하기는 힘들 듯하다. 그의 거의 마지막 작품이자 백조의 노래인 『오레스테이아』에서도 아테 여신은 무대의 뒤편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천병희의 후주annotation은 이렇게 설명한다.
“아테는 광기, 광기에서 저지른 행동, 거기서 벌어지는 불행.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의미하는 여신으로, 아이스퀼로스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 중 하나다.”
이어서 네이버 지식백과의 설명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어리석은 실수와 미망을 의인화한 여신이다. 제우스와 불화의 여신 에리스의 딸인 아테는 신과 인간들을 현혹시켜서 어리석은 행동을 저지르게 만든다.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서 올림포스에서 인간 세상으로 내던져졌다.”
그러니까 『오레스테이아』의 원형이 광기냐, 어리석음이나 미망이냐, 하는 차이로 해석할 수 있는데, 천병희의 후주가, 역자니까 당연하겠지만, 더 진실에 가깝다. 『오레스테이아』, 즉 오레스테스 3부작을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는, 세상의 어떤 가문보다 복잡하고, 질기고, 오래 지속하고, 추악하고, 비정하고, 난잡하기까지 한 오레스테스 가문의 저주받은 내력에 관해서 미리 읽어보고, 가능하면 충분히 익숙해질 만큼 다양한 작품을 섭렵한 뒤에 감상하는 것이 좋기는 하다. 그러나 바쁜 현대인이 어디 그럴 시간이 있을까. 이런 분들은 그저 간단하게 탄탈로스→펠롭스→아트레우스→아가멤논→오레스테스로 이어지는 골치 아프지만 세계적인 가문이라도 검색해보면 좋을 것이다. 독후감에선 가문 내력은 말고 작품에서 주로 문제가 되는 것들만 뽑아보면,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 원정을 위해 수천 척의 배를 띄웠으나 (남)서풍이 불지 않아 출전하지 못하고 나날만 보내고 있었다. 그리하여 점을 봤더니 아가멤논의 어여쁜 맏딸 이피게네이아를 죽음으로 희생시켜야 바람이 불어 출항할 수 있다는 신의 계시가 내려, 아가멤논은 정말로 자기 맏딸을 희생의 대 위에 서게 만든다. 전쟁이 끝나고 아폴로의 저주를 받은 명 예언자 카산드라를 대동해 개선한 아가멤논을 아내 클뤼타이메스트라(‘클뤼타임네스트라’의 고어형이라고 함)는 시사촌동생이자 연인인 아이기스토스와 공모해, 욕조에 누워있는 남편에게 천을 뒤집어 씌운 다음 자신이 직접 (칼 또는) 도끼로 머리를 쪼개 죽인다.
어머니와 당숙이 자신을 해칠까 몸을 숨긴 오레스테스는 나그네인 것처럼 변장을 하고 친구 퓔라테스와 함께 궁으로 돌아와 누이 엘렉트라와 공모해서 어머니를 (칼 또는) 도끼로 찍어 죽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아이기스토스 역시 살해해버린다.
죽은 어머니 클뤼타이메스트라의 혼백이 호출한 복수의 여신들에 쫓기는 신세가 된 오레스테스는 아폴론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아폴론은 아테나이에 가서 여신 아테네 주재로 심판을 받으라고 한다. 이에 아테나이에 도착해 재판을 받아 유무죄가 동수를 기록, 아테네 여신의 캐스팅 보트로 무죄를 선고하고 여신은 복수의 여신들을 설득해 자비의 여신으로 탈바꿈하게 만든다.
이렇게 차례대로 <아가멤논>,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그리고 <자비로운 여신들>이란 제목을 달았고, 이 3부작을 합쳐 『오레스테이아』라고 칭한다. 이건 지극히 간략하게 내용만 스케치했을 뿐이고 직접 읽어보면 디테일이 무수하게 달려 있다. 특히 크리스타 볼프가 쓴 <카산드라>는 <아가멤논>과 내용이 거의 비슷하지만 볼프가 누군가, 지극히 재미있는 해석, 그리고 색다른 덧붙임을 엮어 나가고 있다. 휴고 폰 호프만슈탈이 대본을 쓰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엘렉트라>는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과 같은 플롯이지만 곁가지를 다 쳐내고 오랜 시간동안 냉혹한 어머니와 당숙의 위협 속에서 살아야 했던 엘렉트라에 초점을 맞춰 드라마틱한 오페라로 만들어냈다.
『오레스테이아』외에도 라이오스→오이디푸스→에테오클레스/폴뤼네이케스 3대를 그린 『테바이』 3부작도 매우 훌륭한 것처럼 보인다. 3부작 가운데 남아 있는 유일한 작품이 마지막 3부 격인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인데, 아시는 것처럼 테바이의 일곱 성문을 일곱 명의 장수가 제비를 뽑아 공격하기로 했고, 이중에 일곱 번째 성문은 성주 에테오클레스의 동생이자 오이디푸스의 아들인 폴뤼네이케스가 맡는다. 이에 형 에테오클레스는 자진해서 동생을 맞아 싸우기로 했다가, 서로가 서로한테 창을 꽂아 동시에 죽음을 맞는 비극이다. 이 라이오스→오이디푸스→에테오클레스/폴뤼네이케스 가문을 좌우한 것 역시 아가멤논의 집안과 마찬가지로 아테 여신의 작업이라고 봐도 괜찮겠다.
졸지에 왕 에테오클레스가 죽음을 맞아 섭정을 맡게 된 크레온은 에테오클레스에겐 국장을 베풀지만 테바이 공격에 적극 협조한 폴뤼네이케스는 시신을 거두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고 개들의 먹이가 되도록 만든다. 시신에 손을 대기만 해도 참형에 처한다고 공고를 했으나 누이 안티고네는 형벌을 기꺼이 감수하고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 주는 이야기 <안티고네>로 이어진다. 이 이야기는 소포클레스 비극전집과 카를 오르프가 작곡한 동명의 오페라에 실려 있다. 이렇게 다양하게 섞여 있는 그리스 비극을 서로 연결해서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다만 주의할 것은 비슷비슷한 구성으로 쓰인 작품을 단번에 여럿 읽으면 간혹 멀미가 나는 수가 있으니 짬짬이 다른 책들도 함께 읽으면서 감상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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