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너머
유진 오닐 지음, 이형식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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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벨 문학상과 무려 네 번의 퓰리처 상을 받은 유진 오닐은, 겨우 <밤으로의 긴 여로>와 <느릅나무 아래의 욕망>을 읽어봤을 뿐이지만, 한 마디로 말해서 독자에게 큰 한 방의 충격파를 주는 극작가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독자도 나처럼 오닐의 명성만 기억하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밤으로의 긴 여로>를 골라 별 생각 없이 읽어나가다 충격의 여파로 넋을 잃는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리하여 <밤으로의 긴 여로>를 읽고 쓴 독후감으로 “피를 토해 쓴 백조의 노래”라는 단 한 구절로 마무리해야 했다. 어떻게 더 보탤 말이 없어서. 이후 4년이 흘러 다시 <느릅나무 아래의 욕망>을 읽었는데, 이 작품은 에드워드 토마스가 오페라로 작곡한 것을 지난 세기말부터 듣고 있었던 터라 대본을 통해 스토리를 잘 알고 있어서 ‘백조의 노래’를 들은 여파에도 불구하고 선택에 시간이 걸렸었다. 세월은 자신의 속에 망각을 품고 있다. 나 역시 세월 속의 망각에 묻혀 오닐의 다른 작품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가 오랜만에 생각이 나 검색을 해보니 다른 작품도 꽤나 많이 번역 출판을 하고 있었다. 이번엔 놓치지 않으리. 이 가운데 유진 오닐에게 첫 번째 퓰리처 상을 안게 해준 초기 작품 <지평선 너머>를 동네 도서관에서 상호대출 신청을 해 읽었다.


  지평선 너머. 저 너머에 뭐가 있을까? 지리적 관점으로 말하자면 지구 표면적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바다가 나온다. 하지만 문학장르 가운데서도 시와 더불어 가장 함축적이어야 하는 희곡에서 지평선 너머에 있는 ‘무엇’은, 초등 고학년이던가 중학 저학년 시절에 교과서에서 배운 김동인의 단편소설 <무지개>에서 말하는 ‘무지개’ 비슷한 것이겠다. 꿈, 또는 의미도 없고 이룰 수도 없어서 허망하기 짝이 없는 야망 같은 것. <지평선 너머>에는 앤드루와 로버트 메이오 형제가 등장한다. 건장하고 튼튼한 앤드루는 아버지의 농장을 이어받아 주에서 가장 효율적인 농장으로 성공시키는 것이 꿈이고, 병약한 동생 로버트는 대학 1학년을 마치고 휴학중인데 농장생활을 답답하게 여기며 저 평야 밖에 있는 지평선 너머엔 아름다움, 자신을 부르는 아름다움, 멀리 있는 미지의 아름다움, 자신을 유혹하는 동방의 신비와 마력, 넓은 곳에서 자유를 누리고 싶은 마음 등이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힌, 조금은 몽환적인, 좋은 말로 시적인 청년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성격에 맞게 형은 농장에 남아 땅을 파고, 동생은 바다를 건너 동방으로 가면, 희곡도 안 되고 연극도 안 된다.

  우애 깊은 형제들 사이의 지극히 좁은 간극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있었으니, 사랑과 질투. 옆 농장의 병든 과부여인 슬하 외동딸 루스. 어린 시절부터 형제와 루스, 이렇게 세 명은 죽마를 타고 놀던 동무 사이였다.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다가 당장 내일 새벽에 외삼촌이 선장으로 있는 상선을 타고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자 하는 로버트한테 루스는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건 앤드루가 아니라 로버트였다고 고백하면서 농장에 남으라고 요구하고, 루스가 당연히 앤드루와 결혼할 줄 알았던 로버트는 감격에 차서 출발을 아홉 시간도 남기지 않은 밤, 떠나지 않고 루스와의 결혼을 위해 남아 있기로 결심을 바꾸었다고 가족들에게 선언한다. 외삼촌 딕 스콧 선장을 제외하고 온 가족이 로버트의 변심을 기뻐하지만, 이게 무슨 일인지, 형 앤드루가 루스의 변심으로 깊게 상심해 로버트 대신 외삼촌의 배를 타기로 한다.


  고향에 남아 옆 농장까지 합해 큰 농장을 경영하게 된 로버트는 당연히 하는 일마다 꼬박꼬박 실패해 농장은 나날이 황폐해지고 아내 루스와의 사랑 역시 희미해진다. 삼 년이 지나고, 기어이 항해를 떠나기 전에 앤드루와 부자간의 연을 끊은 아버지마저 2년 전에 돌아간 후, 이제 한 재산을 모은 앤드루가 다시 집에 돌아오는 것이 2막. 실패한 로버트는 형 앤드루에게 미묘한 열등감을 지니게 됐고, 루스는 살아보니까, 3년 전에 자신이 진심으로 로버트를 사랑했다는 것이 진심이었을지언정 진실은 아니었음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 살다 보면 그럴 수 있잖은가. 로버트가 내일 새벽에 떠난다고 하니, 사실은 안 그랬음에도 마치 자신이 남아 있을 형보다 떠날 동생을 진심으로 사랑해왔다고 과 포장하게 되는 것. 이거 하나 가지고도 그리스 사람이라면 수 없이 많은 신화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사실이 그렇더라도 일단 결혼을 하고 두 살 난 딸 메리까지 어리광을 부린다면 지나간, 진심 말고 진실은 마음 속에 가두고 절대 내보이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솔직히 당신도 그렇고 나도 그렇잖아. 근데 드라마의 주인공쯤 되면 그런 걸 못하는 법이라서 루스는 기어이 남편 로버트에게 삼 년 전의 고백이 거짓, 아니면 적어도 기가 막힌 후회스러운 과장이었고, 진실은 앤드루를 사랑했었다고, 그걸 이제야 알게 됐다고 남편에게 말하고야 만다. 그러나 앤드루는 동남아 근해에서 태풍을 만나 악전고투하며 채 1년도 되지 않아 루스와의 사랑은 깨끗하게, 완벽하게 정리를 해버렸다고 로버트에게 선언을 했다. 로버트는 이 사실을 루스에게 전한다. 앤드루 역시 직접 자기 입을 통해 루스한테 같은 내용을 말한 후 아르헨티나에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을 건설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급하게 떠난다.

  여기까지가 1막과 2막. 3막은 다시 5년 후, 백만장자 가까이까지 갔다가 곡물 선물거래에 손을 대 겨우 5만 달러만 남기고 다시 고향의 농장집에 앤드루가 들르면서 극은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는데, 어떻게 되는지는 안 알려드리겠다. 물론 로버트는 완전 파산 일보직전이고, 양쪽 폐가 기능을 거의 정지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으며, 딸 메리는 8개월 전에 먼저 세상을 떠, 루스는 심신이 거의 상실한 채 남편의 죽음만 건조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배경만 소개한다.


  어떤 작가의 작품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이 불운한 앤드루-로버트 형제 같이 극단적으로 다른 성향을 갖는 한 쌍이 서로 다른 행로를 선택하고자 하지만 이들의 운명의 연못에 운명의 돌이 하나 떨어져 생긴 파장이 각기 서로 어긋난 행로로 가게 만드는 작품. 혹시 기억 나시나? 날 것도 같고 아닐 것도 같다. 그러나 그리스 로마 시절에 많고 많은 신들이 인간을 대상으로 저지른 숱한 장난이 전부 이런 식 아니었나 싶다. 기껏 최고의 능력을 부여해놓고 능력과 관계없는 길을 걸어야 하는 운명까지 심술궂게 툭 던져버리는 우롱의 신들. 또는 세상의 지복을 약속하는 동시에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단서조항을 달아버리는 장난꾸러기 신들. 이것들을 나는 유독 유진 오닐의 작품에서 볼 수 있었으니 첫째가 <밤으로의 긴 여로>의 제이미와 에드먼드. 그리고 <느릅나무 아래의 욕망>에서 시미언-피터와 이들의 이복동생 에벤.

  평생 떠돌면서 돈을 벌 목적의 멜로 드라마에만 출연하던 제임스 오닐 씨의 아들로 태어난 유진 오닐은 아버지를 반면교사 삼아 극작을 시작할 때부터 예술적인 작품을 염두에 두었다고 하는데, 유진 오닐의 작품 세계를 시기별로 3기로 나눌 때 2기에 그리스 극도 실험해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역자 해설 속에서 이 내용을 읽으며 오닐의 초기작인 이 <지평선 너머>에도 그리스 극과 유사한 내용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하긴 세상의 어떤 일이라도 굳이 가져다 짜맞추기로 하면 그리스 신화와 비교하지 못할 게 하나라도 있긴 한가 말이지만. 억지스런 독자의 감상일지언정, 이런 모든 것을 합해 어디서 이미 읽은 듯한 기시감을 느낄 수 있고 그래서 별점 하나를 뺐을지라도 유진 오닐, 참 드라마 하나는 재미있게 잘 쓴다. 오늘도 난 또 하나의 유진 오닐을 읽고 놀래 자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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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12-01 0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극단적으로 다른 성향을 갖는 한 쌍이 서로 다른 행로를 선택하고자 하지만 이들의 운명의 연못에 운명의 돌이 하나 떨어져 생긴 파장이 각기 서로 어긋난 행로로 가게 만드는 작품‘ 에서 저는 제일 먼저 ‘제프 린제이‘의 <음흉하게 꿈꾸는 덱스터>가 떠올랐지만, 아니겠죠. 골드문트 님은 덱스터를 안읽으시겠죠... ㅎㅎ
그러고보니 <차일드 44>도 형제들이었는데, 역시 골드문트 님은 차일드 44도 안읽으시겠죠..

저도 저 줄거리의 답을 기다립니다. 궁금하네요.

Falstaff 2022-12-01 16:22   좋아요 0 | URL
댓글이 늦었습니다. 이제 하루 루틴이 (조금 일찍) 끝나서 놋북 앞에 앉았습니다. ㅋㅋ
흠. 이야기하신 책들 참고 하겠습니다. 도서관 이용하면 좋은 것 가운데 하나가 어떤 책이 있다, 하면 그냥 읽을 수 있다는 점 아니겠습니까. 은근히 기대하겠습니다. ㅋㅋㅋ
줄거리의 답은요, (아씨, 스마트 폰으로 읽을 때 적절한 단어가 생각났었는데 그새 잊었습니다) 그냥 코메디아, 즉 일상극이랄까 그렇습니다.

바람돌이 2022-12-01 14: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리뷰를 읽을 때마다 세상에 내가 안읽은 작가가 왜 이리 많을까 절망하게 됩니다. 저는 오늘부터 미래에 자라서 골드문트님이 되기로..... 그러기 위해서 지금도 열심히 읽어야겠네요. ^^

Falstaff 2022-12-01 16:23   좋아요 1 | URL
에이, 그게 어딨어요. 책 읽는 거, 전 백퍼 취미활동입니다. 이까짓 거 가지고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아요. 아무쪼록 바람돌이 님도 그러시기 바랍니다. ㅎㅎㅎㅎ

yamoo 2022-12-08 1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밤으로의 긴 여로>를 골라 별 생각 없이 읽어나가다 그냥 덮었습니다. 희곡은 영 재미없네...라는 생각이 들어 몇 페이지 읽다 말았는데... 이거이거 완독을 해 봐야 겠습니다.충격과 넋을 잃을 정도라니...닥치고 완독해야 겠습니다. 사실 두 권 모두 있거든요..ㅎㅎ 밤으로, 느릅나무..

흠...그나저나 다락방 님 댓글을 보니, 전 차일드44를 너무도 재밌게 읽었는데 말이죠..ㅎ

Falstaff 2022-12-08 19:25   좋아요 0 | URL
사람마다 맞고 아니고가 있잖습니까. 아무리 셰익스피어라도 읽는 독자가 싫으면 싫은 것이지 뭐 별 거 있겠습니까. 근데 이렇게 써 놓고 봐도, 가지고 계신 이이의 작품 두 편은 ㅎㅎㅎ 다시 읽어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말입죠.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