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트로모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14
조지프 콘래드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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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의 핵심>, <비밀요원>, <로드 짐>에 이어 네 번째 읽은 콘래드. 그의 데뷔작 <올마이어의 어리석음>을 읽으면 현재 구입할 수 있는 콘래드의 픽션은 다 읽는 셈이다. 일찍이 제임스 미치너가 제인 오스틴, 조지 엘리엇, 헨리 제임스와 더불어 네 명의 잉글랜드 대표 소설작가로 꼽은 인물이다. 이런 굉장한 상찬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말로 번역해 출간한 책이 너무 적다. 이이 스스로도 전업작가 치고는 과작인 편이기도 했으니. 역시 콘래드의 전성기라고 하면 20세기가 시작되던 부근에 출간한 일련의 장편소설을 들 수 있다고 하는데, 우연히도 내가 읽은 네 편과 목록이 일치한다. 나는 처음 읽은 <암흑의 핵심>이 그렇게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오래 전에 읽었지만 내가 읽었는지도 모른 채 다시 사서 읽어봤고, 내용이 아주 아주 조금밖에 기억이 나지 않아, 아, 지금 두번째 읽는 것이구나, 알아챘을 정도였다. 인터넷 이전 시절의 독서란 그냥 혼자만 읽는 행위였으니 이런 일도 흔했다. 쉰 살이 넘어 다시 읽어도 별로 인상깊지 않았다가, <비밀요원>과 <로드 짐>에 한방이 아니라 원투펀치 제대로 얻어맞고 훅, 갔다. 이 책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14. 415번으로 나왔지만 알라딘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로 구분이 되어 있지 않은 바람에 신간 도서 알람이 뜨지 않아 여태 나온 줄 모르고 있었다가 우연히 발견해 서둘러 읽게 됐다.

<암흑의 핵심>은 콩고 내륙으로 이어지는 강을 따라 가서 깊숙한 내지로 들어갔고, <비밀요원>은 런던의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실제로 있었던 테러 사건을 그렸으며, <로드 짐>은 말레이 반도 정도의 오지에서 ‘주님’ 또는 ‘주인님’으로 섬김을 받던 짐이라는 이름의 백인 이야기라서 차례로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를 무대로 했다. 아다시피 콘래드가 젊은 시절 오래 선박 노동자, 심지어 처음엔 선박 주방보조로 일하다가 영국인으로 귀화를 했으며, 자격시험에 차근차근 합격해 차례로 항해사, 선장까지 했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익숙하게 오지의 환경을 책에 담을 수 있었다. 근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쓴 재미있는 소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을 보면, 당연히 카리브해의 이름없는 바닷가 도시가 무대인데, 난데없이 조지프 콘래드라는 이름의 산적이 산맥에 횡행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이 이야기가 마르케스 특유의 허풍 또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하는 구라가 아닐까 여태 생각했었다. 하지만 웬 걸. 콘래드가 젊은 시절에 정말로 라틴 아메리카에 무기, 그래봤자 소총류가 아닐까 싶긴 하지만, 무기를 밀수한 전력이 있다니 그럼 정말 산적질 한 것하고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어쩐지 <노스트로모>에서 가상의 코르디에라 산맥과 대평원을 누비는 도적떼를 기가 막히게 묘사하더라니까. 산적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무기 밀수도 이 책에서 나온다. 마르케스가 이 책을 읽고 콘래드라는 이름의 도적 두목을 만들어 낸 것이 확실하다!

미리 말하고 시작하자. 이 책, 대박이다. 명작, 걸작이라고 말하기는 조금 미진할 수도 있지만 이 선 바로 아래 작품군에서는 윗길로 칠 만하다.

몇 작품 읽지 않았다. 콘래드는 19세기 말에 서인도 제도를 비롯해서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등 세계적 오지를 다니지 않은 곳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귀화한 영국인으로 오히려 영국인보다 더 영국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다녔던 유사 영국인으로, 얼핏 보면 가난하고 미개한 유색인들에게 친밀하고 후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밀한 곳의 콘래드는 세상은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백인들에 의하여 굴러가고, 그렇게 되는 것이 마땅하며, 기타 지역의 나라들은 부정과 부패와 야만과 가난과 독재와 고문과 폭력과 살인과 기타 등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미개”로 충만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상태를 극복하기 위하여 유럽 백인들에 의한 간섭이 필수적이라는 의견이 의식의 기저에 깔려 있다(이런 의견은 백낙청의 역작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을 읽은 영향이 크다는 것을 고백한다). 또는 그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콘래드의 작품이 다른 작가들의 것보다 낫게 읽히는 이유는, 특히 <노스트로모>가 그런데, 백인(영국)에 의한 개선 또한 그들의 이익과 이익에 의한 종속에 의한 것이고, 결과 역시 처음엔 현지인에게 도움이 되었지만 나중엔 현지 유색인들의 저항을 수반하게 될 것이라는 정치적 견해를 보여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오지 속에서 군주 비슷한 위치를 확보했다가 실제로 멸망하거나(암흑핵심, 로드짐) 그렇게 될 조짐이 확연하게 보인다(노스트로모).

<노스트로모>는 칠레 위에 태평양을 면한 가상의 나라 코스타구아나 공화국의 옛 옥시덴탈 주, 지금 이름으로 술라코 주, 술라코 시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가장 중요한 주인공은 찰스 굴드라는 이름의 영국 이민 3세. 할아버지는 볼리바르 휘하의 영국 군대를 이끌고 코스타구아나의 독립전쟁에 참전한 독립운동가이며, 탐험가, 상인으로 당연히 이름난 상류계급의 지위를 향유했다. 주지사를 역임한 삼촌 해리는 연방제를 주창하다가 독재자 구스만 벤토에 의하여 체포되어 총살당했고, 아버지는 사업을 해 큰 돈을 벌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미 문을 닫은 산토메 은광산의 채굴권을 주는 대신 5년 간 예상하는 채굴 수익을 대가로 미리 지불하라는, 거의 집행 명령을 내려버린다. 이때 찰스 굴드는 공부를 하기 위해 영국에 있었는데, 아버지는 이로 인해 이름만 채굴권을 얻었을 뿐 거의 빈 손이 되어버린 것을 한탄한 반면, 찰스는 새롭게 흥미가 생겨 본격적으로 광산학을 공부하다가, 자신이 직접 광산 엔지니어가 될 게 아니니까 차라리 광산 경영을 공부해보자고 마음을 바꿔 이 방면으로 뛰어 든다. 그러다 운이 좋아 미국의 철광왕 홀로이드 씨와 연결이 되어 그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은광을 개발하고, 부패한 코스타구아나의 원주민(또는 혼혈)출신 고위관리들에게 뇌물을 듬뿍 뿌려가며 번창일로로 접어든다.

이제 세계의 금고로 떠오른 술라코. 이 사이에 민주주의자 리비에라 대통령이 국방장관 몬테로이 군대에 패망해 험한 코르디에라 산맥을 넘어 술라코로 피신하고, 술라코에서도 정권이 바뀌어 폭동이 일어나지만, 천 명에 한 명 나올까 싶은 대장부, 명성을 먹고 사는 남자, 부패할 수 없이 청렴한 사나이, 미첼 선장 수하의 노동자 십장인 일명 노스트로모, 본명 잔 바티스타, 별칭 카파티스 데 카르가도레스가 부하를 이끌고 어렵사리 실권한 대통령을 구해 망명시킨다. 하지만 권력을 쥔 정권이 틀림없이 술라코 세관 창고에 쌓여 있는 은괴더미를 모른 척할 수는 없는 법. 부패 정권과 하수인은 은괴를 포탈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고, 상상하기도 쉽지 않은 가치를 지닌 은괴를 그들에게 넘겼다가는 불법, 야만, 폭력적인 정권이 확고하게 정착할 것이라, 술라코의 왕이라고 불리는 찰스 굴드 사장은 부패할 수 없는 사나이 노스트로모에게 은괴를 싣고 바다를 건너 모처로 옮기라고 전한다. 술라코 시는 불법, 야만적인 적과 투쟁을 할 것인가, 그들의 처분에 맞게 적응을 할 것인가의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이때 갑자기 나타난 프랑스계 언론인 청년 돈 마틴 드쿠. 그는 과감하게 술라코의 분리독립이라는 화두를 던진다. 이 시에는 전직 장군 바리오스와, 드쿠가 북아메리카에서 밀수해 온 중고, 그러나 현지에서는 최고급 성능을 지닌 라이플로 무장한 군대도 있고, 산적이라는 불명예를 씻고자 방위군으로 편입하고자 하는 에르난데스도 있으며, 무엇보다 독립만 된다면 시민 전부에게 복지를 약속할 은광이 있음에야.

이 작품엔 이런 것들만 있는 건 아니다. 고독. 그것도 절대 고독이 또한 큰 의미를 지니고 등장한다. 굴 속에서 온갖 보석과 금덩이를 지키던 용 부름Wurm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왜 이런 말을 하느냐고? 그거야 읽어보면 아시지. 책 좀 읽는 사람이면 책장에 보관해야 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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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2-02 1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민음사 출간되고 첫 독자 리뷰 맞죠?
저도 이 책 찜해놨는데 🌟 5라니 참 반갑습니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 조지프 콘래드라는 산적이 나온다니 정말 재밌네요. 슬라브 인들을 보면 참으로 강하고 무서운 데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콘라드 작가가 저에겐 그렇게 다가왔습니다. 20살에 배운 영어로 이렇게 영문학사에 한 획을 긋다니 대단한 거 같아요.
저도 <암흑의 핵심> <로드 짐> <비밀요원> 세 권 읽었는데 <올마이어의 어리석음>과 이 책도 꼭 봐야겠어요.
올마이어는 중고로 한 권 있던데 담아만 뒀네요.
먼저 이렇게 읽어주시니 감사합니다~~🤭

Falstaff 2023-02-02 14:14   좋아요 1 | URL
옙. 그렇더라고요, 첫번째 독자 리뷰.
잉글랜드 톱4 - 여자 두 명, 남자는 전부 외국인 출신의 영국인입지요? ㅎㅎㅎ 재미납니다.
올마니어, 흠 이거 얼른 사야겠습니다. 도서관에도 없던데요.
농담입니다. ^^

coolcat329 2023-02-02 14:21   좋아요 1 | URL
톱4 중 남자는 모두 외국 출신 맞네요. ㅎ
올마이어 그 사이 중고가 14권이나 나와있네요~
사셔도 되네요~^^

yamoo 2023-02-03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스트로모 꼭 구입하겠어요! 불끈~~!!

Falstaff 2023-02-03 16:11   좋아요 0 | URL
옙. 너무 기대하지는 마시고요. 명작, 걸작까지는 아닙니다.
 
내 이름은 루시 바턴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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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순 무렵. 다섯 살, 여섯 살, 연년생 두 딸의 엄마 루시 바턴은 맹장수술 후 염증 증세가 심각해져 무려 아홉 주 가량 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다. 조부모와 세 분의 친척 아주머니가 수용소에서 학살당한 유대인 담당의사로부터 자상한 치료를 받고 있었지만, 열네 살 때 독일군 병사 출신인 아버지가 병원에서 숨을 거두는 바람에 병원에 오기를 매우 꺼려하는 남편 윌리엄은 일리노이주의 벽촌 앰개시 마을에서 남편 그리고 중년에 접어든 아들과 함께 살고 있던 루시의 어머니에게 뉴욕까지의 항공료, 공항에서 병원에 가는 택시요금을 보내주고, 오셔서 자기 대신 딸 좀 보살펴주시라, 장모를 호출한다. 이렇게 모녀는 정말 오랜만에 만남의 닷새를 보내는데, 심지어 루시-윌리엄 부부의 결혼식 때 마저 루시의 가족은 아무도 참석을 하지 않았던 터였다.

왜 그랬을까? 어떤 의미에서 <내 이름은 루시 바턴>, 이 책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 PTSD에 관한 소설이다. 17세기 초, 최초로 대서양을 건너 매사추세츠주의 플리머스에 정착했던 청교도였다가 세월이 흘러 이 가운데 용맹한 사람들이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서쪽으로 영역을 넓힌 소수의 대열이 있었고, 이들은 한 편으로 원주민을 학살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그들을 기만하고,사기를 치고, 뒤통수를 때렸으며, 위스키로 현혹해가며 광활한 농장을 개척하였지만 모든 이가 다 그랬던 것은 아니라서 이 가운데 극히 일부는 같은 청교도 후예들의 하부 구조를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 가운데 바턴 씨도 있었다. 바턴 씨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돌아와 일리노이주 앰개시 마을에 정착해 지독하게 가난하게 살았으며 혼인 후에도 삼촌의 집에 딸린 차고를 조금 보수해 그곳에서 살았다. 그는 농기구를 수리하는 기술자로 종종 농기구수리점에서 해고를 당했지만 며칠 후 다시 고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아 좋거나 훌륭한 수리 기술을 보유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의 아내는 바느질을 해 마을사람들의 옷을 지어주고 삯을 받아, 안팎으로 벌이를 해도 아들, 딸, 딸로 구성된 세 남매는 종종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다고 기억한다. 이들은 작은 시골마을에서도 지평선까지 다른 집이 거의 없는 옥수수 밭 가장자리에 살았으며, 삶의 고단함은 부모로 하여금 때때로 아이들에게 충동적으로 매질을 하게 만들었다. 주로 엄마가. 이런 집안의 아이들은 학교에서도 환영받지 못해 학교 친구들은 남매들을 보면 코를 쥐는 시늉을 하면서 “너희 식구들한테서는 냄새가 나!”라고 놀려댔으니, 또래에 의한 가혹한 말의 회초리는 남매들에게 평생 짊어지고 다닐 수밖에 없는 상처를 남겼을 수밖에. 비록 지금은 아니라고, 그렇게 크게 아프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말이 없고, 제스처도 없고, 터치도 없는 아버지 바턴 씨는 전쟁 당시 독일에서 갑자기 독일 청년 두 명을 마주친 적이 있는데, 화들짝 놀란 바턴 씨는 도망가는 그들의 등을 향해 총을 발사했으며 이들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바턴 씨가 다가가 시신을 똑바로 돌려놓자 그들이 생각보다 훨씬 젊은 청소년들이었고, 군인은 물론 아니고, 청년도 아직 채 되지 못한 이들을 죽였다는 죄책감은 그를 더욱 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이끌었으나, 당시엔 참전 후유증에 관한 연구도 없었고, 사례도 (많이는) 보고되지 않았으며, 그리하여 당연히 인정받지도 못했다. 바턴 씨는 전쟁이란 폭력 속에서 자신이 직접 가한 폭력과, 전투 중 수도 없이 목격했을 피폭력과 위험상황을 경험하는 물리적/직접적 외상을 겪었으며, 이 후유증으로 발생한 사회부적응은 이이가 가정을 이룬 다음에 차례로 아내와 아이들로 하여금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정서적 내상을 입게 만들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가운데 막내 루시. 처음에는 추운 것을 싫어해 학교가 파한 후, 집에 가봤자 보온을 하지 않은 추운 집에서 덜덜 떠는 것보다, 중앙난방이 되는 교실에서 숙제를 다 하고, 교실의 학급도서를 어두워 글자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아 이게 습관이 되었는데, 즉각 숙제를 하고, 책을 읽는 일을 몇 년 하는 바람에, 비록 가족 가운데는 좋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학교를 마칠 때는 전액, 전 학년 장학생으로 시카고 소재 대학 입학 자격을 따버리게 됐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에 진학하고, 공부를 하고, 두 번째 사랑을 해 스무 살에 윌리엄과 결혼해서 딸 둘을 낳고 키우다가, 맹장염 후유증으로 입원을 하고 나서야 정말 오랜만에 모녀는 상봉한다. 남편 윌리엄의 아버지 역시 2차 세계대전에 참전은 했지만 독일군으로 미군에게 잡혀 동부 해안에서 감자를 재배하는 노역을 하다가 한 유부녀와 사랑을 했던 사람. 종전이 되자 독일로 돌아갔다가 연인을 잊지 못해 다시 미국으로 와, 유부녀와 야반도주를 감행해 매사추세츠에 정착한 이였다. 이 사실을 알고 바턴 씨는 독일인과 만나는 일을 피하기 위해 막내딸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던 거였다.

루시를 제외한 바턴 가족은 여전히 일리노이 주 앰개시 마을 또는 이 근방에 살면서 아직도 아버지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에서 비롯한 집단 PTSD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예가 오빠. 1980년대 중반에 나이 서른여섯의 미혼이며 직장이 없고, 저 지평선 가까이에 있는 피더슨 씨네 헛간에서 내일 도살장에 끌려갈 돼지들 옆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농촌마을을 배경으로 마음씨 좋은 가정의 꼬마 아가씨가 주인공인 동화적 소설을 주로 읽으며 지낸다. 책 뒤편에 오빠가 루시를 만나는 장면을 보면 그리 이상한 성격은 아닌 듯하지만 이이 역시 사회부적응 기질이 있는 건 분명하고, 더구나 시골 마을에서 어머니의 속내의와 하이힐을 신고 읍내를 활보하여 자신이 게이라는 걸 만방에 고한 바 있어 더욱 외톨이가 되었을 수 있다. 그나마 나중엔 아버지와 같은 직업인 농기구 수리 기술자로 일하며, 아버지와 달리 수시로 해고당하는 일은 없다고 하니 아주 느린 개선 또는 회복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의 개선 또는 회복.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방법으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꼽은 건 사랑이다. 그리하여 소설은 필연적으로 사랑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내용의 소설은 주변에 많이 있지만, 별로 특별하지 않은, 어쩌면 상투적인 스트라우트에게 많은 독자들이 감탄하는 것은, 이이의 독특한 감수성을 잘 담아낸 그릇, 문장이 아닐까 싶다. 한 방향으로 가면서 에피소드들조차 방향에 어긋나지 않으며 극한의 가난과 고통과 외로움과 다툼 같은 것을 부정하지 않는 솔직함. 이런 누추함의 적절한 배치가 독자를 아리게 만들었음이 틀림없다. 스트라우트는 루시 바턴의 딸들에게도, 이런 상처까지 상속된다는 것을 구태여 밝히고 있다. 어차피 사는 일이 상처를 치유하고 또다른 상처를 입히는 것임을 잊지 말라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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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1-31 07:4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 님의 이 리뷰를 읽으니 저는 제가 얼마나 소설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는지 깨닫게 되네요. 뭐랄까, 골드문트 님은 소설의 바깥에서 책을 읽고 그 소설의 흐름을 짚어내시는 것 같거든요. 그런데 저는 소설의 안에서 읽어서 전체적 흐름을 보지 못하는 것 같아요. 저 루시 바턴 두 번 읽었는데 골드문트 님의 이 리뷰를 읽노라니 또 이 책이 완전히 새롭게 보입니다. 골드문트 님의 이 리뷰가 참 좋습니다!!

Falstaff 2023-01-31 17:03   좋아요 1 | URL
아휴.... 이제야 하루 일정이 끝났습니다. 댓글이 늦어 죄송합니다.
제 독후감은 말 그대로, 제가 책 읽고 느낀 감상을 쓴 거뿐이예요. 그냥 하나의 의견이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충분할 거 같고요, ㅎㅎㅎ 다락방님한테 칭찬 들은 거 하나 가지고도 참 기분 좋습니다. ^^

그레이스 2023-01-31 1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모나 가족이 아닌 타인의 사랑에 기대서 살아간다는 주인공의 고백이 넘 가슴아팠습니다. 가족들에게서 사랑을 받았다면, 그런 심리적 장애를 갖지도 않았겠죠?!

Falstaff 2023-01-31 17:07   좋아요 1 | URL
그니까 말입니다. 아쉽습니다. 근데 가족 가운데 사랑을 줄 여유가 있는 사람이 아예 없으면 어떻게 할지.... 루시 언니가.... 더 괴로울/힘들었을 거 같았다는 게 참.....
지금 오후 5시인데요 이미 혈중 알코올이 더 이상의 댓글을 쓰지 말라네요. ㅎㅎㅎ

yamoo 2023-02-03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어보니, 이 책은 제가 읽으면 대량 실망할 거 같습니다. 사랑타령하는 책은 이제 더이상 안 읽고 싶어요..ㅎㅎ

Falstaff 2023-02-03 16:12   좋아요 0 | URL
ㅎㅎㅎ 개인 취향이 제일입니다.
근데 사랑 타령은 아니고 가족 사이 특유의 파문 같은 거 있잖아요. 그걸 파고 드는데 옴찔합니다.

자목련 2023-02-07 1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윌리엄>도 읽어주시면 안 될까요?

Falstaff 2023-02-08 06:11   좋아요 0 | URL
다음 스트라우트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인데 2월 28일에 페이퍼 올릴 예정이고요, 그 다음 스트라우트으로 <오, 윌리엄>이 올라올 겁니다. 별 거 아닌 제 서재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고맙습니다. ^^
 
조지프 앤턴 - 살만 루슈디 자서전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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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작품 <그리머스>를 출간하는데 성공한 루슈디는 여전히 “젊은 소설가 지망생 겸 카피라이터로 절망에 빠진 한 마리 새”에 불과했다. 이때는 자기 또래 작가들, 예를 들어 마틴 에이미스와 이언 매큐언은 진즉 뾰족머리, 즉 두각頭角을 나타내고 있었던 반면, 루슈디는 런던에서 최고는 아니지만 좋은 광고회사의 카피라이터로 일하며 꽤 괜찮은 연봉을 받고 있기는 했으나 원하는 바가 아니라서 쉴 새 없이 습작을 끼적여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머스>가 평단의 평은 좋지 못했더라도 영국은 물론이고 프랑스와 이스라엘에까지 판권이 팔려 짭짤한 저작료가 들어오자 광고회사인 오길비를 그만 두고 나중에 맏아들 자파르 하룬의 어머니이자 첫 번째 아내가 될 클래리사를 꼬드겨 인도에 다녀온 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 클래리사가 먼저 생을 마친 후 루슈디는 성인이 된 하룬과 함께 다시 인도를 방문해, 과거에 네 엄마하고도 왔었다, 라고, 추억 그득한 목소리로 이야기해주게 된다) 클래리사와의 합의 하에 가난하게 살 각오를 용감하게 하고 필생의 대표작이 될 <한밤의 아이들>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게 대박. 1981년에 출간을 하고, 그 해에 도리스 레싱, 뮤리엘 스파크, 이언 매큐언, D.M. 토머스 등을 가볍게 누르고 부커 상을 수상해버린다. 게다가 훗날 이 작품은 부커상 20년 역사상 가장 훌륭한 부커상 수상작품, ‘부커 오브 부커’에도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이제 본격적으로 살만 루슈디는 세계적인 스타 작가의 반열에 오름과 동시에 작품만 썼다 하면 적지 않은 선인세를 받고, 입맛에 맞는 출판사를 고를 수 있는 일종의 권력을 쥐었다는 말씀. 이후 <수치>를 발표해 작은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수치> 5년 후, 루슈디의 평생을 좌우하고 나중엔 기어이 그의 멱살을 잡아 땅바닥에 메다 꽂을 <악마의 시>를 출간해, 루슈디의 의견도 그렇고 나도 직접 읽어보니까 별 문제도 없어 보이는데,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이 당대의 이맘, 이란의 호메이니를 간질거려 <악마의 시>를 최악의 신성모독으로 규정, 그것을 쓴 살만 루슈디에게 만 년 동안 지속할 사형선고, 이른바 파트와를 선언해버리고 만다. 전세계에 퍼져 있는 이슬람 광신도들은 이때부터 살만 루슈디를 죽여 불멸의 영광을 얻기 위해서, 아니면 루슈디의 목에 걸린 수백만, 적어도 백만 달러가 넘는 현상금을 얻기 위하여 소총을 기름칠하기 시작했으며, 1964년에 루슈디가 시민권을 딴 영국의 경찰은 자국민을 테러리즘에서 보호하기 위해 영국 여왕에 준하는 경호를 시작한다. 이 책 <조지프 앤턴>의 8할 이상은 ① <악마의 시>가 결코 신성모독이 아니라는 점, ② 과중한 경호에 자신이 얼마나 피폐해졌는지, ③ 문학적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신성한지, 그리고 ④ 기타 자기 잘난 척하는데 할애하고 있다. 그러니까 회고록은 회고록이되 이슬람 테러 (위협)에 의하여 부당하게 자유를 침탈당한 한 작가의 억울함을 호소하는데 전력을 다했다는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왜 자서전 또는 회고록을 좋아하지 않는지를 다시 한번 절절하게 알았으며, 그러면서도 어찌하여, 아무리 내가 살만 루슈디를 좋아할지언정 그의, 회고록을 골라서, 그것도 8백 페이지를 가뿐하게 넘는 길고 긴 회상, 궁상, 잘난 척을 읽었는지 참, 감회, 라기보다 후회가 새로웠다. 역시 사람은 신념을 함부로 바꾸는 게 아니다.

책을 다 읽고 도서관 지하 휴게소에 내려가 천 원짜리 백제 컵쌀국수에 뜨건 물 부어 하나 먹고 곧바로 올라와 독후감 쓰는 거니까 이제 한 시간도 안 지났는데, 거의 모든 인간들이 그렇기는 하겠지만 살만 루슈디 역시, 그가 좋은, 아니다 이걸로 부족해서 좀 올려 이야기하면, 훌륭한 작가라는 점만 빼놓고 그를 평하자면 천하의 이기적인 잡놈이다. 이 책 읽으신 분 가운데 내 얘기가 틀리다는 사람 있으면 거수 바람. 물론 작가, 화가, 음악가, 가수, 배우 등의 연예인, 하여간 예술 주변에서 예술로 밥 먹고 사는 사람들이 나하고 비슷한 보통 인간들하고 같으면 안 되겠지만, 이들 무리 만을 생각하더라도 살만 루슈디의 사물을 보는 방식은 대단히 이기적이고, 안하무인이고, 거만하고, 잘난 척하고, 이 모든 것을 다 합쳐서, 매우, 매우 밥맛이다. 뭐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하여간 나는 이이의 작품을 좋아하니까. 하긴 루슈디도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자기 팬이란 걸 아니까 그렇게 밥맛이긴 하겠지만.

왜 이리 침을 튀는지 한 번 설명해보겠다.

루슈디는 가난을 각오하고 시절을 함께 헤쳐나간 첫째 아내 클래리사와 살림을 시작하면서 맏아들 자파르 하룬을 낳았고 이들 처자식을 자랑으로 여기면서도 작가 매리앤 위긴스와 불륜을 저질러 결국 이혼하고 매리앤과 결혼한다. 뭐 그럴 수 있다. 여기까지는. 그러나 루슈디는 회고록에서 매리앤이 좀 정신이 왔다갔다 하는 사람으로 보일만큼 악의적으로 평가하는데 주저함이 없으며 그 틈을 노려(진짜로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젊고 아름답고 선한 아가씨 엘리자베스 웨스트와 또다시 불륜을 저질러 매리앤과 이혼한다. 엘리자베스와 몇 년에 걸쳐 사이 좋게 잘 지내다가 둘째 아들 루카를 낳고, 그동안 영국과는 달리 경호원 없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뉴욕으로 거처를 옮기는 문제와 산후 우울증, 이어서 두번째 출산을 원하는 엘리자베스와의 갈등이, 내가 봐도 거의 엘리자베스의 귀책으로 몰고가는 등, 비록 혼인신고 하기 전이지만 파리에서 또다른 불륜을 저지른 것이 엘리자베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게 된 결정적 이유란 것을 애써 모른 척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루슈디는 뉴욕에서 엘리자베스보다 더 젊고 아름다운 인도 출신 여성 모델 파드마 락쉬미를 만나 거의 동거하다시피 하다가 끝내 엘리자베스와 이혼하고 파드마와 네번째 결혼을 올린다. 그리고 또다시 파드마의 왔다 갔다 하는 성격으로 네 번째 이혼을 하게 되는데, 살만 루슈디는 도대체가 반성이, 있긴 있다. 결국 다 내 책임이고 내 잘못이라고 말은 하지만 독자인 내가 읽기로는, 주로 잘 나가는 프로 운동선수들이 구단과 연봉협상 할 때 즐겨 쓰는 용어로, 진정성이 없다, 진정성이.

둘째로, 이이는 어떻게 됐거나 하여튼 자신이 쓴 <악마의 시> 때문에 이란을 위시한 아랍 여러 나라의 이슬람 교도로부터 살해 위협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자기 국적이 있는 영국정부한테 보호를 요청하는 것까지는 좋다. 당연한 권리니까. 세금 내잖여? 세금도 일종의 보험 아녀? 그런데, 그러면 만일 영국 정부가 루슈디의 가족을 몽땅, 이 책에 비유적으로, 비아냥도 아니지만 좀 우스꽝스럽게 말했듯이, 오스트레일리아의 태즈메이니아 섬의 오두막에 쑤셔 박아놔도 그리 크게 불평할 수 없을 거 같다. 물론 설마 내가 그 정도를 바라겠는가, 말이 그렇다는 거지. 루슈디는 자신이 도시형 인간이라 외딴 곳이나 시골에서는 살지 못할 것이라고 구태여, 죽어도 런던이나 런던 근방의 주택이나 아파트에서, 아파트는 경호문제 때문에 불가능하지만, 자신의 자유를 최대한 확보한 채로 살고 싶어 한다. 경호원이 그의 행동반경과 노출 수위를 정할 때마다 짜증이 듬뿍 묻어나는 문장과 단어를 구사하는데, 이게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말도 일리가 있다. 왜 살만 루슈디의 경호를 위해 (그들의 주장대로 ‘막대한 수준’은 아니지만) 세금을 써야 하는지 국민들이 불평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말이지. 루슈디는 자신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려 하고 모든 것을 경호상 편리를 위한 과잉 경호 때문에 벌어지는 자유의 구속으로 보려고 애쓴다. 그러다가 어찌어찌 해서 주로 아가씨의 원피스에 흔적을 묻히는데 취미가 붙은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을 만나고, 그로부터 자신을 지지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오히려 영국 경찰과의 관계에 거의 완벽한 권력을 잡는 행운까지 나꿔챈다. 이후부터는 당연하게 더, 더, 더 밥맛이 없게 되는 건 물론이고. 그러다가 2022년의 뉴욕에서 그 봉변을 당한 거 아닌가 말이지.

하긴. 그래, 그래. 너나 나나 별 거 있니. 재주 빼고, 가진 돈 빼고, 가방끈 빼고, 그냥 인간 대 인간, 발간 알몸 대 알몸으로 비교하면 뭐 하나 다를 거 있겠니.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그래도 살만 루슈디, 하나만 기억해라. 이 책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까지나 당신 팬이다. 부상에서 얼른 회복해 현란한 당신의 요설을 조금만 더 들려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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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3-01-28 0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욕하면서 읽었어요!!! 나쁜 놈이네 이거! 근데 제밌게 쓰다니, 더 나빠!!!

그리고 루슈디가 신작 Victory City를 내놓았다는군요. 역자 (당연 김진준)를 재촉하고 싶어요.

Falstaff 2023-01-28 13:39   좋아요 0 | URL
오호, 신작이 나왔군요. 얼른 번역해 깔리기 바랍니다. 반가운 소식이네요. ^^

싱글오이 2023-01-28 0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곧 읽으려고 쟁여둔 책인데,
이 글 보니 더 기대 됩니다 ^-^;;

Falstaff 2023-01-28 13:39   좋아요 0 | URL
ㅎㅎㅎ 재미나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moonnight 2023-01-28 1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_@; 살만 루슈디가 이런 인물이었군요. 어질어질@_@;;;

Falstaff 2023-01-28 13:41   좋아요 1 | URL
뭐 다들 본성은 비슷한데 누가 더 참고 사느냐, 도를 많이 닦았느냐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이 책 읽으면서 저 천재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도 비슷했겠거니 싶었습니다. ^^

stella.K 2023-01-28 1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 그렇지 않아도 이이의 책이 최근에 또 나온 걸 보고
문트님 생각했는데 말입죠. 재밌게 쓰셔서 킥킥대고 읽었습니다.
자서전은 뭐 꼭 인격이나 도덕성이 뛰어난 사람만 쓰는 건 아니죠.
그냥 그 사람은 어떤 생각과 체험과 경험이 있었나 관음증 때문에
읽는 것 같습니다.
더구나 작가라면 좀 고상하고 발라야 한다는 뭔가의 이미지가 있긴하죠?
아무래도 문트님은 건강을 위해서 읽지 않는 게 좋으실 듯 합니다. ㅋ
전 솔직히 살만 루슈디 생긴 게 좀 괴팍한 느낌이어서 별로 선뜻 손이 안 가더군요.

Falstaff 2023-01-28 13:44   좋아요 1 | URL
자서전이나 회고록 쓰고 한 십 년 흐른 다음에 읽어보면 작자 자신도 무지 쪽팔리지 않을까요? ㅎㅎㅎ 저는 여간해 읽지 않지만 간혹 자서전 읽어보면 이런 의문이 무지하게 생긴답니다.
오, 저는 작가를 비롯해서 하여간 예술 비슷한 직업에 종사하는 인간들은 오히려 더 방종할 거 같아요. 반듯하고 고상하기는요, 주위에 예술하는 인간들 가운데는 한 명도 없더라고요. 저도 예술 안 하기 얼마나 다행인지 말입니다. ㅎㅎㅎㅎ

바람돌이 2023-01-28 14: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본적인 인간성과 그 재능이 일치하게 좋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이렇게 인성을 욕할 수 밖에 없음에도 그 재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그래서 팬이 될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이 있지요. 암요..... ㅎㅎ

Falstaff 2023-01-28 14:39   좋아요 0 | URL
ㅎㅎㅎ 알아주셔서 고맙습니다.

파이버 2023-01-28 1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루슈디 작품만 알았는데 사적인 모습은 별로군요...;; 이정도 불륜이면 실수가 아니라 습관인 것 같아요...

Falstaff 2023-01-29 06:05   좋아요 1 | URL
뭐든 다 좋기는 힘들잖습니까. 바람둥이 작가들이 무척 많잖아요. 이들 가운데 한 명이지요 뭐.

그레이스 2023-01-30 2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서전 제목이 왜 조지프 애턴인가 했더니 그의 가명이군요.
<한밤의 아이들>만 읽었지만 루슈디의 글 방향을 좋아해요.
골드문트님의 말 듣고 얼른 일어나시길!

Falstaff 2023-01-31 05:55   좋아요 1 | URL
옙. 가명 하나는 정말 잘 지었습니다. ㅎㅎㅎ 계속 읽어보셔요. 재미난 작품 많습니다.

yamoo 2023-02-03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루시디 자서전이 나왔군요! 구매해야 겠으묘~~~~
루시디 전집, 가즈아~~!!ㅎㅎ

Falstaff 2023-02-03 16:12   좋아요 0 | URL
ㅎㅎㅎ 루슈디 팬이면 읽어볼 만합지요.
 
뜨거운 여름
우베 팀 지음, 오용록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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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베 팀은 1940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수공업자 가족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열여섯 살 터울의 형 모두 2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었는데, 악명높은 SS단의 일원이었던 형은 1943년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전사한다. 팀은 형과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중에 작품으로 써서 회고하기도 한단다. 굳이 읽어볼 마음은 없다. 전쟁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아버지가 모피 공장을 열어 초등학교를 마친 우베도 모피 가공업 실습교육을 이수해 아버지가 유명을 달리하자 사업을 이어받았다고 하는데 도대체 이 때가 몇 살이었던 거야? 팀은 스물한 살 때인 1961년부터 2년동안 공부해 63년에 대입 자격시험에 합격한다. 이때 공부하는 과정에 니더작센 주에서 67년 팔레비 이란 국왕의 국빈 방문을 반대하는 시위에 참석했다가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어 서독 학생운동에 본격적인 불을 붙이게 되는 베노 오네조르크와 알게 된다. 오네조르크는 <뜨거운 여름>에도 작지 않은 사건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우베 팀이 특히 베노 오네초르크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은 2005년에 출간한 <친구와 타인>이라고 한다. 이후 팀의 행적은 뮌헨과 함부르크에서 계속 공부를 했고,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60년대는 좌파학생운동의 본산인 사회주의독일학생연맹 SDS 회원이었으며, 1973년부터 81년까지 독일 공산당 당원이었다고 하면 얼추 감이 잡힐 것이다. 1981년에 독일 공산당을 탈당한 이유는 독일 공산당이 동독의 정책에 관해서 무비판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라고. 공산당 탈당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좌파적 사고를 견지하면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뜨거운 여름>은 1967년, 알프스를 넘어오는 푄 바람의 영향으로 극도로 기온이 올라간 뮌헨의 여름 이야기로 시작한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 독자는 설마 이런 문장과 수사와 어법을 가지고 60년대의 학생-노동운동을 이야기할 예정인지는 전혀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첫 장면도 뜨거운 여름, 가장 더운 오후에 섹스가 끝난 후의 침대 위임에야. 뮌헨 소재 대학에 다니는 공부 잘하는 학생 로타가 옆방에서 아침부터 모든 창문을 닫은 위에 젖은 수건을 덮고 방문까지 꽁꽁 닫은 다음, 이렇게 해야 방의 온도를 가장 낮게 유지할 수 있다고 믿고, 내내 논문을 쓰다가 잠시 바이올린 연습을 하는 동안, 주인공 울리히 크라우제는 5월에 레오폴트 거리의 카페에서 만나 사랑을 키운 잉에보르크와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하여간 하고야 만 섹스 뒤에, 난데없이 “네가 싫어 죽겠어, 지독히도 말이야.”라고 선언함으로써 그녀와의 이별을 확정시켰고, 벌거벗은 채 뒤통수를 맞은 잉에보르크는 굵은 눈물을 쏟기 시작했는데, 도무지 잉에보르크의 눈물을 상상할 수 없었던 울리히는 주 르비앙 화장품에서 출시한 향수를 많이 뿌린 그녀의 머리를 감싸주고 달래야 했음에도 도무지 울 것 같지 않은 잉에보르크가 왜 눈물을 흘렸는지가 의문스러웠다. 물론 이유가 있다. 기가 센 독일 젊은 여성이, 비록 1960년대라 할지라도 그깟 섹스 후에, 이깟 이별 통보 하나로 눈물을 흘리지는 않을 터, 잉에보르크가 자신이 울리히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는 걸 아직은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며칠 후 울리히는 잉에보르크의 낙태 비용 6백 마르크를 벌기 위해 이리도 뜨거운 여름날 며칠 동안 손바닥에 물집이 잡혔다가 터지고 또다시 잡히기를 반복하면서 노가다를 해야했지만.

지금 나는 스토리를 다 알고 있어서 될 수 있으면 한 방에 앞쪽 이야기를 쏟아내려고 이렇게 긴 문장을 쓰고 있지만 우베 팀의 문장은 짧고 건조하다. 게다가 시간 배열도 마구 헝클어져 있고, 따옴표를 사용하지 않아 좀 더 내밀한 호소를 전할 수 있지만 반면에 독자를 효과적으로 미궁으로 빠뜨리는 역할을 한다. 물론 이 작품이 기본적으로 1960년대 말의 서독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다 합해 사회운동과 유치한 수준의 테러리즘을 통틀어 보이기 위한 것이고, 독자도 결국엔 작가가 의도한대로 똑바로 하나, 둘, 셋, 넷, 줄 맞춰 스토리를 따라갈 수밖에 없기는 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운동소설 말고 작품의 앞부분 같은 모더니즘 소설이었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이게 책을 읽으며 내내 든 생각이었다. 알겠다, 알겠어. 우베 팀의 작품의 성격이 대략 좌파적 성향이며 그것도 사회주의의 왼쪽, 공산주의와 매우 가깝다는 건 알겠는데, 그럼 처음부터 저 오스트롭스키나 고리끼처럼 내놓고 쓰던지 하지 말이야.

올해가 어느 새 2023년. 지금 1960년대 말, 적어도 55년 전의 학생운동, 그것도 결국 실패 또는 마지막 낭만적 혁명의 흐지부지 정도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서구사회의 좌파 식 운동”을 다룬 작품을 읽는 것이 그리 즐겁지 않다. 만일 우베 팀이 남미나 아프리카, 아시아 같은 제3 세계 출신으로 제3 세계에서 벌어진/있었던 운동을 탐색했더라면 여전히 흥미롭게 읽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서독의 학생/노동자 운동을 다룬 <뜨거운 여름>이나 미국의 노먼 메일러가 쓴 비슷한 소설 <밤의 군대>나 내게는 그냥 그런 소설인 것은 마찬가지다. 그게 운동이고 (말로만)혁명이었는가 말이지. 물론 본인들은 심각했겠지.

생각해보자. 출발은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운동에서 시작한다. 이들은 호치민의 혁명투쟁가와 마오저뚱의 혁명가를 노래하면서 막연하게 서구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인간해방과 사회주의를 획득하고자 한다. 동시에 프리 섹스와 마리화나 등을 누리면서. 이들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 절박함이 없었다. “없었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내가 제3 세계 출신이라서 말할 수 있는 것이지 그들의 절박함을 평가절하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같은 시기의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어떻게 그렇게 똑같이 지독한 독재정권에 의한 폭력과 수탈과 가난과 공포 속에서 헤매고 있었는지. 입을 비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하자. 일단 퇴로를 확보하고 있는 북아메리카와 유럽의 학생, 지식인, 노동자들의 운동이, 어떻게 말 그대로 목을 내놓고, 내 목 하나도 아니고 여차하면 가족 모두의 목이 될 수 있는 걸 다 내놓고 죽기 살기로 투신하는(했던) 제3 세계의 젊은이들하고 같을 수 있는지. 같기는커녕 비슷할 수 있는지 말이다.

결국 <뜨거운 여름>의 주인공 울리히도 잉에보르크, 등꽃 색 손톱의 여인, 녹색 눈꺼풀의 검은 머리 여자, 크리스타, 레나테 등을 거치고, 동시에 뮌헨과 함부르크의 대학시절과 짧은 노동 현장을 겪은 후 초등학교 교사라는 쁘띠 부르주아로의 귀환을 선택하게 되는 거라고 단정한다.

차라리 작품 속에서 가끔 인용하는 알베르트 이야기를 선택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알베르트 이야기? 한스 팔라다가 쓴 <홀로 맞는 죽음> 또는 <누구나 홀로 죽는다>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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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잇 2023-01-26 1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태그가 멋져요~!

Falstaff 2023-01-26 16:54   좋아요 1 | URL
앗, 그러셨습니까? ㅎㅎㅎ 고맙습니다.

바람돌이 2023-01-26 17: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3세계에서 진짜 목숨걸고 싸우는 이들이랑 저 서구에서 반전운동 하던 사람들이 같을수는 없죠. 그래서 약간 그들의 방황이나 이런걸 보면 공감이 힘들때가 많은 건 역시 우리가 식민지의 경험과 독재의 경험을 겪어왔던 이유겠죠. ㅎㅎ

Falstaff 2023-01-27 10:15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그렇지요. 라틴 아메리카에서 사회운동하는 책들에 상대적으로 몰입할 수 있는 것과도 관련이 있지 않겠습니까. ^^;;
 
타인들의 나라 대산세계문학총서 179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황선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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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일라 슬리마니. 망상성 우울증에 시달리는 여인 루이즈가 자신이 돌보던 두 아이에게 심각한 폭행을 저질러 숨지게 한 일을 다룬 공쿠르상 수상작 <달콤한 노래>를 2018년에 충격적으로, 재미있게 읽고 대단한 흥미를 느꼈던 작가다. 이후 <그녀, 아델>이란 작품을 번역 출간했으나 어쩐지 손에 닿지 않아 미루다가 이번에 <타인들의 나라>를 도서관에 구입 신청해서 읽게 됐다. <타인들의 나라>는 레일라 슬리마니의 가계를 모델로 한 삼부작 대하소설이며 이 책은 삼부작의 첫번째 작품으로 원제가 <타인들의 나라 – 전쟁, 전쟁, 전쟁>으로 2020년에 출간했다고 한다. 2022년에는 2부 격인 <춤추고 있는 우리를 좀 보세요>를 출간했으면 지금 2024년 출간 목표로 3부를 쓰고 있단다. 이것을 알았다면 2024년 출간하고, 그걸 번역해 완전한 3부작이 모두 시장에 나왔을 때, 한 번에 읽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

<타인들의 나라>의 주인공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프랑스-독일 접경지역인 알자스 출신 여성 마틸드와 모로코 출신 2차대전 참전 장교 아민이다. 아민은 1940년에 참전했다가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혀 수용소에 수감된다. 수용소에서 홀로 탈출에 성공해 남부 독일의 검은 숲에 숨어 지내다 귀환에 성공해 모로코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다시 대위 계급을 달고 유럽 전선에 투입된 아민은, 프랑스 입장에서 조국해방전쟁의 최전방에서 독일로 동진을 거듭, 알자스에 주둔할 때 열여덟 살의 마틸드를 만나 사랑하게 된다. 모든 처녀 중 가장 키가 크고 어깨가 딱 벌어졌으며 장딴지가 남자 아이처럼 단단하면서도 초록색 눈을 가진 매력적인 아가씨. 남자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로마 가톨릭 신자 마틸드와 이슬람인 아민은 장소가 프랑스이니만큼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아민의 아버지 카두르 벨하지는 프랑스 말을 잘 해 식민지 주둔 부대의 번역자로 돈을 벌어, 그걸 갖고 자갈투성이 몇 헥타르 땅을 매입한다. 이 땅의 소출로 후손들이 대대손손 먹고 살 수 있는 번창한 경작지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안은 채. 그러나 불과 4년 후, 세상을 뜨고 만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 중에서도 오직 땅과 땅을 어떻게 경작할 것인지 만을 생각하던 아민은 비록 프랑스 처녀와 혼인은 했을지언정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으로 돌아갈 것임은 명백하다. 그는 전쟁 중 알자스에서 늘 외국인, 항상 신중을 기해야 하는 임시 체류자 신분으로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었으니까. 그리하여 전쟁이 끝나자마자 아민은 먼저 모로코로 향하고, 마틸드는 홀로 알자스-스트라스부르-알제를 거치고, 알제에서 낡은 융커스 기를 타고 모로코의 리바트에 도착, 남편을 만나면서, 세상 천지에 아는 사람 한 곳 없고, 모든 문화가 낯설기 그지없는, 유럽인의 시각으로 보면 야만인과 잔인한 자들의 난장판인 아랍 세계로 들어선다. 이제 알자스에서 아민이 겪었던 소외를 마틸드가 전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환경, 문화의 역전 현상이 벌어지게 된 것.

이쯤에서 레일라 슬리마니의 가계를 한 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슬리마니의 외할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 중에 모로코 부대의 장교로 참전한 라흐다르 도브. 이이는 독일 국경을 향해 동진을 거듭하다가 1944년 알자스의 한 마을에서 프랑스 중산층 여성 안 루에츠를 만나 결혼한다. 전쟁이 끝난 후 젊은 부부는 모로코로 이주해 정착하고, 훗날 안 루에츠는 모로코의 최고 명예 훈장인 위삼 알라위트 훈장을 받는다고 한다. 책 뒤에 실린 작가 연표에 나온 자료다. 라일라의 아버지는 오스만 슬리마니로 모로코의 은행가이자 경제부 장관을 지닌 고위 공무원이며 어머니 베아트리스는 프랑스-모로코 이중국적자로 모로코 최초의 여성 전문의라고 한다. 외할아버지 내외는 당연히 <타인들의 나라>의 두 주인공 마틸드와 아민을 떠올리게 되며, 어머니는 두 주인공 사이의 맏딸 아이샤와 비교할 수 있다. 작중 아이샤는 이슬람의 땅에서 기독교를 믿는 프랑스인 학교를 다니는데, 학업 성취가 워낙 뛰어나 비록 학급에서는 반쪽 프랑스 아이로 왕따를 당하지만 월반을 할 정도로 똑똑하며, 어머니 마틸드로부터 인체와 치료에 관해 상당한 관심을 쏟는 환경을 만나, 책을 읽으면서도 이 아이는 나중에 의사가 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타인들의 나라>를 작가 레일라 슬리마니와 연결시키지 않고 작품 그대로 읽는다면, 알자스 억양을 강하게 쓰는 프랑스 아가씨가 낯선 문화, 낯선 정도를 넘어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문화권인 모로코의 벽촌 중의 벽촌에 거주하면서 마주쳐야 하는 문화충돌로 읽을 수 있을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게 더 바람직할 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말한 “어떤 의미”라는 건, 이 작품을 대하소설의 삼부작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독립된 하나의 작품으로 생각할 경우를 말한다. 그러나 쉽게 그렇게 읽히지 않는다. 작중 초반에 마틸드가 딸 아이샤를 낳을 때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초점의 일부분이 아이샤를 향하면서 책의 후반부에는 아이샤가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비록 후반부가 아니라 다음 권에서 그렇게 되겠지만.

이 책의 원래 제목이 <전쟁, 전쟁, 전쟁>이라는 건 위에서 말했다. 물론 실제적인 전쟁이 나온다. 2차 세계대전. 그리고 모로코 독립전쟁. 이것만? 글쎄 보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모로코, 이슬람 국가 내에서 배우지 못하고, 나서지 못하고, 항상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매번 남성에 의하여 모든 것이 결정되는 여성들의 의식 발전이, 비록 조금씩이나마 싹트기 시작한다. 물론 말 그대로 발아기發芽期라서 움트는 싹은 여지없이 짓밟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싹, 떡잎들은 2권으로 가면 (마틸드가) 여간해 모로코 국민이 아니라면 주지 않는다는 모로코의 최고 명예훈장을 받을 수도 있고, 아이샤는 모로코 역사상 최초의 전문의로 이비인후과 의사가 되기도 하겠지만, 1권에서는 여지없다. 프랑스인 커뮤니티 안에서는 더러운 아랍인과 결혼한 여인으로, 아민이 프랑스 해방전쟁에 참전해 부상을 입고 프랑스 훈장의 서훈자가 얻은 기묘한 전리품 정도로 여긴다. 아랍인들에게는 희한하게도 문자를 읽고, 해석하고, 쓸 줄 아는 “여자”, 모로코 사람들을 지배해온 식민자와 같은 혈통을 가진 타도대상일 수도 있다. 집안에서도 거의 결정권이 없고 여차하면 남편 아민에게 얻어터져 눈자위가 보라색이 되거나, 코뼈가 부러져 권투선수의 코를 달고 다니게 되거나, 구타를 당하지 않더라고 이는 전적으로 딱 그 순간에 아민을 자제시킨, 위대한 알라 덕택인 사회이다.

여기에 들불처럼 번지는 모로코 독립전쟁. 프랑스 총독과 관리들은 프랑스가 없었으면 모로코는 절대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식민지 근대화론”자이며, 농촌마저 지금처럼 개간하고, 오렌지와 올리브를 심어 수확을 올리게 된 것 역시 전부 프랑스 식민자들이 움집에서 살며 연구하면서 노동을 한 덕택이 아니냐고, 공동묘지에서 여우가 해골 파먹는 소리를 하고 자빠졌다. 비록 비시 괴뢰이긴 했지만, 프랑스 정부가 레지스탕스를 테러리스트라고 불렀던 시절이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왜 모로코의 해방을 위한 프랑스인을 향한 폭력을 1대 10, 하나를 당하면 열을 갚아주는 식으로 보복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굳이 이런 모든 정치 현상을 모른 척하고 싶은 프랑스인, 모로코인을 남편으로 둔 프랑스 여성. 그를 향해 점점 조여오는 폭력의 느낌. 이런 것들을 잘 표현하고 있다.

딱 한 마디로 감상을 이야기하자면, “역시 슬리마니.” 아쉬운 건 삼부작 가운데 첫번째 작품이라 다 읽으면 갑자기 허탈해지는 느낌이, 많이는 아니고, 조금 든다는 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한살이를 찬미한다.

“타버려. 사라져버려. 죽게 내버려 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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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1-24 1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별 네 개 반은 없나?

coolcat329 2023-01-24 1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이 삼부작 중 1권이군요.
저노 <달콤한 노래> 너무 강렬해서 잊을 수가 없었는데, <그녀,아델>은 또 손이 안가더라구요. ㅎ

별 반 개 저도 되면 좋겠어요~^^

Falstaff 2023-01-24 13:55   좋아요 1 | URL
저도 아델은 안 읽었는데, 올해 안엔 꼭 읽을 겁니다. ^^

moonnight 2023-01-24 1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슬리마니의 책이었군요@_@; 나온 줄도 몰랐네요@_@; 그녀의 책을 세권 읽었는데 이 예쁜 아가씨가 쓴 책들이 벌벌 떨리게 무섭ㅠㅠ;;; 일단 (두려움을 누르고) 보관함에 넣어봅니다. 덜덜;;;;;

Falstaff 2023-01-24 13:57   좋아요 1 | URL
아델도 덜덜... 입니까? ㅎㅎㅎ 이 책에선 그런 장면은 없습니다. 작품을 재미나게 쓰더군요. ㅎㅎㅎ

moonnight 2023-01-27 19:25   좋아요 1 | URL
네 아델 덜덜 ㅠㅠ;;;;;;

yamoo 2023-02-03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별 다섯개 출현이네요...슬라마니라뉘...이것도 구매목록 추가...
으아~~도대체 몇권을 더 사야하는지...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