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들의 나라 대산세계문학총서 179
레일라 슬리마니 지음, 황선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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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일라 슬리마니. 망상성 우울증에 시달리는 여인 루이즈가 자신이 돌보던 두 아이에게 심각한 폭행을 저질러 숨지게 한 일을 다룬 공쿠르상 수상작 <달콤한 노래>를 2018년에 충격적으로, 재미있게 읽고 대단한 흥미를 느꼈던 작가다. 이후 <그녀, 아델>이란 작품을 번역 출간했으나 어쩐지 손에 닿지 않아 미루다가 이번에 <타인들의 나라>를 도서관에 구입 신청해서 읽게 됐다. <타인들의 나라>는 레일라 슬리마니의 가계를 모델로 한 삼부작 대하소설이며 이 책은 삼부작의 첫번째 작품으로 원제가 <타인들의 나라 – 전쟁, 전쟁, 전쟁>으로 2020년에 출간했다고 한다. 2022년에는 2부 격인 <춤추고 있는 우리를 좀 보세요>를 출간했으면 지금 2024년 출간 목표로 3부를 쓰고 있단다. 이것을 알았다면 2024년 출간하고, 그걸 번역해 완전한 3부작이 모두 시장에 나왔을 때, 한 번에 읽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

<타인들의 나라>의 주인공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프랑스-독일 접경지역인 알자스 출신 여성 마틸드와 모로코 출신 2차대전 참전 장교 아민이다. 아민은 1940년에 참전했다가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혀 수용소에 수감된다. 수용소에서 홀로 탈출에 성공해 남부 독일의 검은 숲에 숨어 지내다 귀환에 성공해 모로코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다시 대위 계급을 달고 유럽 전선에 투입된 아민은, 프랑스 입장에서 조국해방전쟁의 최전방에서 독일로 동진을 거듭, 알자스에 주둔할 때 열여덟 살의 마틸드를 만나 사랑하게 된다. 모든 처녀 중 가장 키가 크고 어깨가 딱 벌어졌으며 장딴지가 남자 아이처럼 단단하면서도 초록색 눈을 가진 매력적인 아가씨. 남자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로마 가톨릭 신자 마틸드와 이슬람인 아민은 장소가 프랑스이니만큼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아민의 아버지 카두르 벨하지는 프랑스 말을 잘 해 식민지 주둔 부대의 번역자로 돈을 벌어, 그걸 갖고 자갈투성이 몇 헥타르 땅을 매입한다. 이 땅의 소출로 후손들이 대대손손 먹고 살 수 있는 번창한 경작지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안은 채. 그러나 불과 4년 후, 세상을 뜨고 만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 중에서도 오직 땅과 땅을 어떻게 경작할 것인지 만을 생각하던 아민은 비록 프랑스 처녀와 혼인은 했을지언정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으로 돌아갈 것임은 명백하다. 그는 전쟁 중 알자스에서 늘 외국인, 항상 신중을 기해야 하는 임시 체류자 신분으로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었으니까. 그리하여 전쟁이 끝나자마자 아민은 먼저 모로코로 향하고, 마틸드는 홀로 알자스-스트라스부르-알제를 거치고, 알제에서 낡은 융커스 기를 타고 모로코의 리바트에 도착, 남편을 만나면서, 세상 천지에 아는 사람 한 곳 없고, 모든 문화가 낯설기 그지없는, 유럽인의 시각으로 보면 야만인과 잔인한 자들의 난장판인 아랍 세계로 들어선다. 이제 알자스에서 아민이 겪었던 소외를 마틸드가 전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환경, 문화의 역전 현상이 벌어지게 된 것.

이쯤에서 레일라 슬리마니의 가계를 한 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슬리마니의 외할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 중에 모로코 부대의 장교로 참전한 라흐다르 도브. 이이는 독일 국경을 향해 동진을 거듭하다가 1944년 알자스의 한 마을에서 프랑스 중산층 여성 안 루에츠를 만나 결혼한다. 전쟁이 끝난 후 젊은 부부는 모로코로 이주해 정착하고, 훗날 안 루에츠는 모로코의 최고 명예 훈장인 위삼 알라위트 훈장을 받는다고 한다. 책 뒤에 실린 작가 연표에 나온 자료다. 라일라의 아버지는 오스만 슬리마니로 모로코의 은행가이자 경제부 장관을 지닌 고위 공무원이며 어머니 베아트리스는 프랑스-모로코 이중국적자로 모로코 최초의 여성 전문의라고 한다. 외할아버지 내외는 당연히 <타인들의 나라>의 두 주인공 마틸드와 아민을 떠올리게 되며, 어머니는 두 주인공 사이의 맏딸 아이샤와 비교할 수 있다. 작중 아이샤는 이슬람의 땅에서 기독교를 믿는 프랑스인 학교를 다니는데, 학업 성취가 워낙 뛰어나 비록 학급에서는 반쪽 프랑스 아이로 왕따를 당하지만 월반을 할 정도로 똑똑하며, 어머니 마틸드로부터 인체와 치료에 관해 상당한 관심을 쏟는 환경을 만나, 책을 읽으면서도 이 아이는 나중에 의사가 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타인들의 나라>를 작가 레일라 슬리마니와 연결시키지 않고 작품 그대로 읽는다면, 알자스 억양을 강하게 쓰는 프랑스 아가씨가 낯선 문화, 낯선 정도를 넘어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문화권인 모로코의 벽촌 중의 벽촌에 거주하면서 마주쳐야 하는 문화충돌로 읽을 수 있을 것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게 더 바람직할 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말한 “어떤 의미”라는 건, 이 작품을 대하소설의 삼부작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독립된 하나의 작품으로 생각할 경우를 말한다. 그러나 쉽게 그렇게 읽히지 않는다. 작중 초반에 마틸드가 딸 아이샤를 낳을 때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초점의 일부분이 아이샤를 향하면서 책의 후반부에는 아이샤가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비록 후반부가 아니라 다음 권에서 그렇게 되겠지만.

이 책의 원래 제목이 <전쟁, 전쟁, 전쟁>이라는 건 위에서 말했다. 물론 실제적인 전쟁이 나온다. 2차 세계대전. 그리고 모로코 독립전쟁. 이것만? 글쎄 보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모로코, 이슬람 국가 내에서 배우지 못하고, 나서지 못하고, 항상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매번 남성에 의하여 모든 것이 결정되는 여성들의 의식 발전이, 비록 조금씩이나마 싹트기 시작한다. 물론 말 그대로 발아기發芽期라서 움트는 싹은 여지없이 짓밟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싹, 떡잎들은 2권으로 가면 (마틸드가) 여간해 모로코 국민이 아니라면 주지 않는다는 모로코의 최고 명예훈장을 받을 수도 있고, 아이샤는 모로코 역사상 최초의 전문의로 이비인후과 의사가 되기도 하겠지만, 1권에서는 여지없다. 프랑스인 커뮤니티 안에서는 더러운 아랍인과 결혼한 여인으로, 아민이 프랑스 해방전쟁에 참전해 부상을 입고 프랑스 훈장의 서훈자가 얻은 기묘한 전리품 정도로 여긴다. 아랍인들에게는 희한하게도 문자를 읽고, 해석하고, 쓸 줄 아는 “여자”, 모로코 사람들을 지배해온 식민자와 같은 혈통을 가진 타도대상일 수도 있다. 집안에서도 거의 결정권이 없고 여차하면 남편 아민에게 얻어터져 눈자위가 보라색이 되거나, 코뼈가 부러져 권투선수의 코를 달고 다니게 되거나, 구타를 당하지 않더라고 이는 전적으로 딱 그 순간에 아민을 자제시킨, 위대한 알라 덕택인 사회이다.

여기에 들불처럼 번지는 모로코 독립전쟁. 프랑스 총독과 관리들은 프랑스가 없었으면 모로코는 절대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식민지 근대화론”자이며, 농촌마저 지금처럼 개간하고, 오렌지와 올리브를 심어 수확을 올리게 된 것 역시 전부 프랑스 식민자들이 움집에서 살며 연구하면서 노동을 한 덕택이 아니냐고, 공동묘지에서 여우가 해골 파먹는 소리를 하고 자빠졌다. 비록 비시 괴뢰이긴 했지만, 프랑스 정부가 레지스탕스를 테러리스트라고 불렀던 시절이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왜 모로코의 해방을 위한 프랑스인을 향한 폭력을 1대 10, 하나를 당하면 열을 갚아주는 식으로 보복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굳이 이런 모든 정치 현상을 모른 척하고 싶은 프랑스인, 모로코인을 남편으로 둔 프랑스 여성. 그를 향해 점점 조여오는 폭력의 느낌. 이런 것들을 잘 표현하고 있다.

딱 한 마디로 감상을 이야기하자면, “역시 슬리마니.” 아쉬운 건 삼부작 가운데 첫번째 작품이라 다 읽으면 갑자기 허탈해지는 느낌이, 많이는 아니고, 조금 든다는 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한살이를 찬미한다.

“타버려. 사라져버려. 죽게 내버려 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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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1-24 1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별 네 개 반은 없나?

coolcat329 2023-01-24 1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이 삼부작 중 1권이군요.
저노 <달콤한 노래> 너무 강렬해서 잊을 수가 없었는데, <그녀,아델>은 또 손이 안가더라구요. ㅎ

별 반 개 저도 되면 좋겠어요~^^

Falstaff 2023-01-24 13:55   좋아요 1 | URL
저도 아델은 안 읽었는데, 올해 안엔 꼭 읽을 겁니다. ^^

moonnight 2023-01-24 1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슬리마니의 책이었군요@_@; 나온 줄도 몰랐네요@_@; 그녀의 책을 세권 읽었는데 이 예쁜 아가씨가 쓴 책들이 벌벌 떨리게 무섭ㅠㅠ;;; 일단 (두려움을 누르고) 보관함에 넣어봅니다. 덜덜;;;;;

Falstaff 2023-01-24 13:57   좋아요 1 | URL
아델도 덜덜... 입니까? ㅎㅎㅎ 이 책에선 그런 장면은 없습니다. 작품을 재미나게 쓰더군요. ㅎㅎㅎ

moonnight 2023-01-27 19:25   좋아요 1 | URL
네 아델 덜덜 ㅠㅠ;;;;;;

yamoo 2023-02-03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별 다섯개 출현이네요...슬라마니라뉘...이것도 구매목록 추가...
으아~~도대체 몇권을 더 사야하는지...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