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하는 동안에는 
지휘자가 연주회장에 모인 군중의 영도자다. 
그는 맨 앞에 서서 앞장서 나아간다. 
다만 지휘자는 발이 아닌 손을 쳐들 뿐이다.

"그의 시선은 가능한 한 강렬하게 
오케스트라 전체를 휘어잡는다. 
단원들은 저마다 자기를 지휘자가 보고 있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자기가 내는 소리를 지휘자가 듣고 있다고 느낀다. 

그가 가장 날카롭게 주의를 기울이는 단원들의 
의견과 신념은 바로 악기 성부들의 소리다. 

그는 전지하다. 

왜냐하면 연주자들의 눈앞에 놓여 있는 것은 
자신의 연주자용 성부 악보뿐이지만, 
반면 지휘자에게는 완전한 홍보가 머릿속에 있거나
눈앞의 보면대 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휘자는 각각의 순간에 
각각의 연주자에게 무엇이 허용되어 있는지에 대해서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들 모두에게 한꺼번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그에게 편재의 명망을 부여한다. 

말하자면 그는 모든 단원 각자의 머릿속에 존재한다. 

그는 모두가 저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으며, 
모두가 저마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다. 

법의 살아 있는 총체인 그는 도덕적 세계의 양면을 마음대로 주무른다. 

그는 일어날 일을 자신의 손으로 지시함으로써 
지정하고,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을 저지한다. 

그의 귀는 금지된 것을 지향하는 공기를 잡아낸다. 

그래서지휘자는 오케스트라를 위해서 
사실 작품 전체를 한꺼번에 동시적으로 설명해 주기도 
하고 차근차근 연속적으로 설명해 주기도 한다.

그리고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세상을 이루는 것은 다름 아닌 작품뿐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는 바로 그동안만큼은 세상의 지배자다."
- P485

그가 원했고 끝없이 추구했던 것은
언제나 완전함이었다.

여기서 그는 세상에 완전함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그래, 물론 그 자신의 상상 속에서라면
확실히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앞에 있는 관현악단이 한낱 80명
혹은 100명의 인간으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사실,

그리고 그 인간들은 자기와 같은 천재가 아니라 
단지 솜씨 좋은 기능공들일 뿐이라는 사실을 망각했다. 

그는 이들 때문에 종종 너무나 지독히 격앙되어 
도저히 참기 힘든 지경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음악 독재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를 이해할 수도, 
너그럽게 볼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가 왜 그토록 냉혹하게 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어디서든 오해를 받았다. 

그에게는 이 점이 근본적으로 비극이었던 것이 
왜냐하면 가슴속 깊은 곳에 
그는 박애정신과 인간에 대한 호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스럽고, 
누구보다도 친절한 인간이었다.

단 지휘를 할 때만 아니라면 말이다. 
지휘봉을 손에 들자마자 그는 폭군이 되었다." - P486

말러가 당대의 가장 특이한 지휘자였던 것은 확실하다. 

심지어 그가 오케스트라를 데리고 
무엇을 의도하고 
무엇을 목표로한 것인지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조차도 
(그런 사람들이대다수였을지도 모른다) 
그의 거친 몸짓 언어에 당혹해 했지만, 
그러면서도 매혹되었다. 

묵과해서는 안 될 사실은, 
반유대주의자들은 당연히 이러한 특징을 장악하고서 

"이것이 유대인 지휘자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은 말을 할 때면 바로 그렇게 격렬한 제스처를 해 대니까, 지휘대에서 있거나 앉아 있을 때에도 이와 똑같이 격렬한 제스처를 한다는 것이다. 

말러가 지휘대에서 
"마우셀 말씨로 말한다"는 주장은
그가 빈 궁정 오페라 극장 감독으로 발탁되었다는 
소식이 퍼지자마자, 

빈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라이히스포스트Reickspost("제국통신)』 
1897년 4월 14일 자에서 말러에 대한 ‘환영사로 나왔다.

즉, 말러는 올바른 독일어를 구사하려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도를 하는 과정에서 
유대 언어의 특징을 지휘자의 몸짓 언어로
옮겨 놓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프리츠 가라이스의 것과 같은 풍자화는 
의도가 어떠했든 간에 이러한 측면을 부각시켜
그야말로 지휘대 위에서 
무도병 환자와 유사한 움직임을 보이는
"가시밭의 유대인"을 그려 낸다.  - P498

즉, 사방에 눈이 달려 있는 듯 오케스트라 속에서,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은 하나도 놓치지 않았던 
말러는 자신이 지휘하는 작품들을 완벽하게 
머릿속에 넣고 있어서 가수들이 부르는 가사를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함께 부를 수 있을 정도였고, 
최소한 중요한 배역이 나오는 부분에서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 P501

그리고 그가 자신의 음악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했던 것도 
바로 이날 저녁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로 그는 아무리 심한 타격을 입어도 
이러한 확신을 잃지 않았으며, 

"나의 시대가 올 것이야"라는 그의 명언은 
이러한 확신을 근거로 해서 설명할 수 있다. - P502

그는 자신이 여러 차례 조금씩 변형시켜서 표현했던 생각

즉 교향곡을 쓴다는 것은 
동원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하나의 세계를 세우는 것이라는 생각을 
이 작품(교향곡 제2번)에서 처음 실현시키려고 시도했다. - P516

이 침실에서 방문객은 초라한 침대와 
먼지가 살짝 앉은 월계관 말고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거기에 달린 리본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 

"함부르크 오페라 극장의 피그말리온에게 한스 폰 뷜로." 

그것은 함부르크에 사는 대지휘자가 
이 도시의 오페라 하우스를 다시 소생시키고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애써온 
말러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서 준 선물이었다.  - P5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년 반 말러는 그전까지는 한 번도 한 극장, 한 도시에서 그 정도의 세월을 버텨 본 적이 없었다. 

그가 견디지 못했거나 다른 사람들이 그를 견디지 못했거나 둘 중 하나였다.

(대부분은 전자의 경우였고, 너무나도 빨리 그렇게 되는 바람에 후자의 경우가 될 틈도 없었다)

부다페스트에서 보낸 시절은 말러가 
지휘자 생활과 극장 감독 생활을 하면서 
그때까지 겪은 시절 가운데 최고의 격동기였다. 

이 시절이 그토록 격동적이고 의미심장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이 시절이 나중의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빈 궁정 오페라 극장에서의 활약을 위한 
총리허설과도 같은 시절로 보이기 때문이다. - P451

이 업계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작곡에서 손을 놓지 않은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말러는 그야말로 믿기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에너지와 뚝심을 지니고 있었다.

22년 동안 거의 부업 삼아, 
규모만 해도 어마어마한 아홉 곡의 교향곡과 
<대지의 노래>를 쓰고 
열 번째 교향곡을 시작하는 것을가능케 했던 것도, 

1년 중 대부분의 시간을 관리자와 지휘자로서 일했고 
여름휴가 동안에만 작곡을 한 사람이 
그 모든 일을 해내는 것을 가능케 했던 것도 
바로 그 에너지와 뚝심이었다.  - P452

말러가 부다페스트에서 실패한 이유는 
특히 그가 독일어를 쓰는 보헤미아인인데다 
아직 너무 어렸고 (당시 그는 만 28세였다) 
거기다 유대인이기까지 했으므로 (당시에는 부다페스트에도 열렬한 반유대주의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 도시의 문화적 부르주아 계급 가운데 
마자르적 성향을 지닌 부류가 바라는 후보가 
결코 아닌 탓에 취임할 때부터 
이미 고래싸움에 끼게 된 새우 꼴이었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마자르 계열의 인사들이 
헝가리인 오페라 감독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 P455

헝가리에서는 한 공연에 두 가지 언어를 
한꺼번에 쓰는 일이 매우 잦다는 것은 
2중 군주국의 오페라 공연 업계에서는 
비밀거리도 아니었음에도불구하고, 

말러는 짐짓 그점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고 
그래서 부정적인 의미에서 대단히 놀랐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폐단은 예술적인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왜냐하면 그렇게 해서는 작곡자의 의도가 실현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민족적인 이유에서도 
하루빨리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저는 그렇기 때문에, 
이 오페라 극장을 헝가리의 진정한 민족 기관으로 
만드는 일에 온 힘을 쏟는 것을 
저의 첫 번째이자 가장 아름다운 의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 P463

환자 구스타프 말러를 평생동안 따라다닌 
병력이 근본적으로 보면 
부다페스트 시절에 시작되었던 것이다. - P475

1891년 3월 16일에는 말러가 사임을 발표한 지 
이틀밖에 안 되었는데도 
벌써 「로엔그린」 공연의 
(이것은 말러가 부다페스트에서 일구어 놓은 신연출작들 가운데 확실히 가장 중요한 작품이었다) 
지휘가 샨도르 에르켈에게 넘어갔다. 

그러자 친말러파들은 
몇몇 독일어 일간지들의 표현을 따르자면 

"독일 민족이라는 이유로 극장 지배인에게 쫓겨난" 
오페라 감독을 잃은 것을 슬퍼했으며, 
제1막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말러를 연호하는 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고 한다.  - P48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용히 자기 길을 간다는 것, 
그것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말러가 
(거의 예외 없이) 지켜 나간 좌우명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는 
프라하 시절부터 이미 보상을 받았다. 

우리가 아는 몇 안 되는중요한 비평문들을 보면 이 글들에서 논의되고 있는 말러가 
오페라 지휘자로서 이미 천부적인 재능을 나타내고 있었음을 어렴풋이 예감할 수 있다. 

이 점은 말러가 한 자선 연주회에서 칼 묵을 대신하여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공연하게 된 
1886년 2월 21일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 P376

이렇게 몰아 쓴 1번 교향곡은 
질풍노도와도 같은 작품이 되었다. 
이 곡은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처녀작이며, 
확실히 음악사를 통틀어 가장 대담한 교향곡이다. 

"폭발적으로 작품을 써 내려간 시기"라고 
말러가 묘사했던 기간은 나탈리의 말에 따르면 
6주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 기간은 말러가 마리온 폰 베버와 사랑에 빠졌던 일과 대단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 P382

1889년에 부다페스트에서 있었던 
세계 초연 때도 반응은 별반 다르지 않았었다. 

지휘자로 높이 평가받고 있던 말러에게 사람들은 더 잘할 수 있는 것이나 하라는, 

다시 말해 작곡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대가들의 위대한 작품을 해석하는 일에나 전념하라는 
식의 충고를 했다. - P401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니키쉬를 좋아했고, 
말러에 대해서는 
아무리 그의 능력을 인정했다고는 하나 거리를 두었다. 

그것은 말러가 지휘자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 줄곧 나타나던 전형적인 현상이었다. 

그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마음을 금방 얻을 수 있는 
그런 유형의 지휘자는 아니었다. 

연주자들은 언제나 말러에게 애정을 가지기보다는 
존경했고, 또한 두려워했다.  - P411

어쨌든 니키쉬와 말러는 
1890년에서 1911년 사이에 당대 지휘계의 
양대 거목이었다. 
경쟁의 중압감이 이에 대한 깨달음보다 컸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 P413

말러는 전체적으로 평가할 때 
음악언어를 혁명적으로 확대하거나 
음악언어에 과부하를 건 작곡가가아니었다. 

이 점은 이제까지 살펴본 것만으로도 분명하다. 

그는대체로 전통적이라 할 수 있는 어휘를 가지고서 
그때까지는 표현 불가능하다고 여겨져 온 
낯선 문장을 지어냈다. 

"교향곡을 쓴다는 것은 현존하는 기법이 제공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하나의 세계를 건설하는 것"
이라는 그의 유명한 문장은 
읽는 사람이 ‘현존하는‘이라는 낱말에 밑줄을 긋고 유의해서 읽어야만 비로소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말러의 가곡 세계는 
말러의 교향곡 세계보다 
더 제한적이고, 
더 작고, 
더 일목요연하며,
그에 따라 기법도 당연히 더 제한적이다.  - P431

두 번째로 지적할 것은, 
말러의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가곡 분야의 창작물과 교향곡 분야의 창작물이 
때로는 수면 밑에서, 때로는 수면 위에서 긴밀하게 얽히고 관련을 맺어 가는 모습은 음악사상 다른 작곡가들에게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 P43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즘 밤 10시 야간 독서 시간에는
구스타프 말러와 함께 하고 있다.

오늘은 말러가 대단한 독서가라는 대목을 읽었다.
그는 괴테, 장 파울, 도스토옙스키 매니아였다.

1. 급 도스토옙스키 작품들을 다시 읽고 싶다.
2. 말러를 만나니 브람스, 바그너도 알고 싶다.
3. 게다가 말러가 살았던 시대도 좀 살펴보고 싶다.

시간도 없는데, 욕심이 너무 많구나!

카셀에 왔을 때 그는 이제 막 만 스물셋이 되었고, 
이 도시에서의 활동은 그의 25번째 생일 바로 전날 
막을 내렸다. - P302

말러가 지휘자로서 걸어간 길을 이야기할 때 
그의 특징으로 일컬어진 능력, 
즉 믿기지 않는 활력과 불같은 열광, 
오케스트라와 가수들이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권위로 
공연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들이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지도 못했던 성과를 올리도록 독려하는 능력은 
지휘자로 활동한 첫날부터 엿보이기는 했었지만, 
카셀 시절에 와서 더없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러나 이러한능력에는 동전처럼 뒷면이 있었는데, 그것은 무기력하고 반예술적인 마음가짐을 고집하려는 음악가들에게 거꾸로 저항을, 아니 증오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우리는 말러가 만약 작곡을 전혀 하지 않았다면 
당대의 가장 천재적인 지휘자로서 
한스 폰 뷜로, 아르투어 니키쉬와 동급으로 평가받았거나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었으리라는점을 똑똑히 알 필요가 있다. - P310

‘마부석의 학자‘ 베른하르트 말러의 아들 구스타프는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대식가처럼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 댄 다독가였고, 스스로도 자신을 그런 식으로 표현했다. 

"나는 책을 갈수록더 많이 먹어치우고 있어! 
책은 정말로 언제든지 나와 함께하는
유일한 친구라고 할 수 있지! 
이런 친구가 어디에 또 있겠나! 
그런데 만약 내게 책이 없었다면! 
나는 ‘우리 사람들‘ 중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주변의 것들은 온통 잊게 된다니까! 
내게 책은가면 갈수록 더 친숙하고 
위안이 되는 존재가 되고 있어, 
진정한 형제요 아버지요 연인 같은" - P329

말러의 문학적 취향은 가장 깊숙한 곳에서는 
이글라우 본가에있는 부모의 서가에 의해, 
그다음으로는 또한 이글라우 김나지움에서 사용된 
교과서에 의해 각인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고전들은 말러가 자신이 읽으며 씨름했던 문학작품을 평가하는 확고부동한 발판을 형성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가 교과서에 나오는 고전 이외의 작품들을 
질풍노도기에 이미 섭렵했다는 사실을 배제한 것은 
아니다. - P346

괴테는 말러의 정신 세계에서 
천구의 정중앙에 위치한 태양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 천구에 
여러 개의 태양이 존재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다면, 
괴테와 장 파울 그리고 도스토옙스키를 
이 자리에 올려 놓아야 할 것이다. - P347

이런 재은 그의 독서 방식의 특징이었다. 
질 낮은 신간을 하나 읽느니
차라리 좋은 옛날 책을 몇 번이고 더 읽겠다는 것이다. - P348

장 파울은 

신과 신에 대항하는 자들에 대한 의문,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의문, 

사랑과 우정의 지속 기간에 대한 의문, 

선한 것과 악한 것에 대한 인간 감각의 구명 불가능한 깊이에 대한 의문을 매우 유려한 문장으로 제기했고, 

언제나 해학과 슬픔과눈물이 날 정도로 뭉클한 위안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방식으로 어우러진 글을 통해서 그 물음들에 대한 대답을 내놓았는데

(이러한 요소들이 어우러진 글은 그의 작품이 독자들에게 인기를 끈비결이기도 했다), 

이런 모든 의문들도 말러의 마음을 움직였다.  - P352

종종 철학적 해석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말러 만년의 독서가 괴테에 집중되어 있었고,
격동의 시기였던 
초년의 독서가 장 파울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도스토옙스키는 무엇보다도
말러의 30~40대 시절을 특징 짓는다. - P356

이제 장 파울의 아포리즘 하나로 독서가 말러의 초상을 그리는장을 끝마치려 한다.

장파울이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인쇄된 인간들(책들)과의 사이에 
실제 인간들 사이에서와는 또 다른 
어떠한 아름다운 우정을 맺을 수 있는가! 
그들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얼마나 의리있게 우리 안에 남아서 위안을 주는가, 
영원히! 
그들은 얼마나 한결같고, 
스스로는 질책을 받을 만한 
나약한 행동을 저지르지 않으면서 
우리의 나약함을 질책하는가!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왜 태고의 세계에서 
그저 친구들을 불러와서는 안 되는 것일까?
오직 이 친구들만이 시간도, 사리사욕도 모르고,
가장 내밀한 곳까지 우리와 유사해서,
우리 영혼의 일부 같고,
하나의 육체 속의 두 영혼 같은데." - P36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스타프 말러가 지휘법을
처음 본격적으로 익힌 것은 바로 이 ‘인물의 시대‘, 
다시 말해 자신만의 매력을 지닌 인물들이 
많이 살던 1880년대였다. 

그가 이 시기에 와서야 지휘를 제대로 배웠다고 말해야만 하는 까닭은 이미 말했듯, 

아무리 당대의 위대한 지휘자들을 
오페라 극장이나 연주회장에서 관찰하여 
귀감으로 삼았다고는해도 
음악원에서 지휘법을 딱히 정식으로 배운 것은 
아니었기때문이다. - P240

<탄식의 노래>는 사실 ‘op. 1‘치고는 
그 기획이 대단하고 거창한 작품이고, 
스무 살짜리 작곡가의 작품치고는 엄청난 노작이며 
말문이 막힐 정도로 거대한 대작이다. 

만약 말러가 <탄식의 노래> 이후에는 
더 이상 곡을 쓰지 않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페라 및 교향악 연주회 지휘자‘밖에 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한 사람의 크나큰 재능이 흐지부지 묻혀 버린 것을 안타까워해야 했을것이다. 

말러는 이 작품의 가사는 1878년에 이미 완성해 놓았고

제1부 ‘숲속 이야기‘는 
1879년에서 1880년 초에 걸쳐 작곡했으며, 

제2부 ‘음유시인‘은 1880년 3월에, 

제3부 ‘결혼식 장면‘은 같은 해 10~11월에 끝마쳤다. 

말러는 훗날 쓴 편지에서 이 작품 전체를 
한 편의 "동화"라 불렀는데, 
아닌 게 아니라 이 작품에는 
알베르 지로의 텍스트에 
쇤베르크가 곡을 붙인<달에 홀린 피에로>에 나오는 말처럼 "동화 시대에서 불어오는오래된 향기"가 엮여 있다. - P251

그는 어쨌든 류블랴나에 수석지휘자로 초빙되었고

(이것만으로도 이미 바트할에서의 지위에 비해 결정적인 진보라할 수 있다)

계약이 개시되는 날짜는 1881년 9월 3일이었다. 

안톤 크리스퍼가 마침 류블랴나 출신이었기에 
말러는 크리스퍼의 부모가 사는 집에 
거처를 마련할 수 있었고, 
가족처럼 편안한 분위기에서 지낼 수 있었다 - P273

말러는 단순히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공연, 
실력도 안 되는 협연자들을 데리고 
날림으로 제작한공연을 일생 동안 혐오했고, 

훗날 큰 무대에서 활동할 때에는 
그런 공연을 일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예술에 대한 열광적이고 경건한 믿음으로 대했는데, 

그러한 혐오감은 바로 
바트 할과 류블랴나, 올뭐츠에서의 지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P274

사실 푹스의 작품들과 
<탄식의 노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 
푹스를 절대적으로 신뢰한 심사위원단의 눈에는 
말러의 작품이 기이한 것들만 잔뜩모아 놓은 
무더기처럼 보였음이 틀림없다. 
그 저명한 심사위원들 가운데 
여기 한 젊고 재능 있는 작곡가가 계시처럼 나타났다는 예감을 한 사람은 오로지 칼 골트마르크뿐이었던 것 같다. - P279

말러는 세 악장으로 된 초판은 
살아생전에한 번도 듣지 못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지휘할 때는 두 악장으로 된 판본도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세 악장으로 된 초판이 원래 존재했다는 사실은 
1930년대 중반에 와서야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고, 

이 초판의 재발견은 1969년에 와서야 비로소 제대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1969년 당시 연주되고 음반으로 녹음된판본은 순수한 초판이 아니라 전거가 의심스러운 혼합판이었다(다시 말해 이 당시 사용되었던 악보는 초판에만 수록된 제1부를 2~3부만 수록된 개정판과 이어 붙인 악보다). 

구스타프 말러의 대담한 "작품 번호 1번"의 초판은 
수년 전 켄트 나가노가 지휘한 연주회 및 그가 취입한 음반을 통해서야 비로소 설득력 있는 모습으로 제대로 소개되었다. 

그때 이래로 <탄식의 노래>는 단 두가지 판본으로만, 
즉 두 악장으로 된 개정판이나 세 악장으로 된초판으로만 연주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마땅하다.
(그중에서도 가급적이면 후자로 연주할 것이 권장된다). 
두 판본을 혼합한 악보로 연주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 P28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