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완의 프랑스 과거사 - 독일강점기 프랑스의 협력과 레지스탕스 ㅣ 우리 시각으로 읽는 세계의 역사 11
이용우 지음 / 푸른역사 / 2015년 9월
평점 :
잘못되었다.
다름의 문제가 아니라 잘잘못의 문제이다. 지금 현 시국은 ‘다름’이 아니라 ‘틀림’이다. 이 ‘틀림’은 어디서부터 기인하는 것인가. 18대 대통령선거에서부터 잘못되었나. 5.16군사정변에서부터 틀려 먹은 것인가. 이승만의 초대대통령 취임 에서부터 이미 틀린 것인가. 틀림의 기원을 찾고 싶었다. ‘다르다’면 토론하고 양보하고 맞춰가면 된다. 하지만, ‘틀렸다’면, 고쳐야한다. 하지만 지금 어디서부터 틀렸는 지부터 확신할 수 없기에 찾고 싶었다. 하나의 가설은 독립 직후 친일 부역자들을 제대로 숙청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들의 썩은 뿌리는 아직도 썩은 물을 먹으며 버티고 서서 새로이 태어난 떡잎이 햇빛을 보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다. 프랑스는 우리나라에 비하여 썩은 뿌리를 비교적 잘 잘라 냈다고 한다. 단순히 해방 이후에 빠르게 숙청한 점과 더불어 30,40년이 지난 이후에도 부역자들을 법정에 세워 형을 내리는 점이 특히 귀감이 된다. 인상깊은 부분을 통해 우리의 썩은 뿌리를 되돌아본다.
P.133 – 경제적 부문의 숙청이 미약했던 것은 다분히 당시 상황의 현실적 필요성에 따른 것이었다는 점이다. 피폐해진 경제를 다시 제대로 돌아가게 하는 데에 이들의 존재는 없어서는 안 되었고, 바로 그러한 사정이 이들의 숙청을 완화하는 데 작용했다.
-> 프랑스나 한국이나 경제인에 대한 숙청이 가장 미약했다. 독립과 해방 이후 기존의 구조를 그대로 가져간 것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 해방이 되었지만 해방 이전의 시스템이 선진의 문명이라 생각하여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경제적 지위의 유지는 정치적 이상보다 중요했다. 어떻게 보면 이건 도려낼 수 없는 암이었고 그래서 지금 추악한 정경유착을 보고 있는 듯 하다. 방법은? 극강의 반민특위가 생겨나 과거의 죄에 대해 물을 수 있는 파워를 줘야 하는데 그럴 수 없다. 세월호 특조위도 힘을 못쓰는 정부에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P.180 – 파퐁 재판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비시 시기에 그렇게도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자가 어떻게 전후에도 처벌받기는 커녕 장밋빛 대로를 달릴 수 있는지 의아해했고, 이와 관련하여 비시 체제 말기에 레지스탕스 활동에 관여했다는 것이 대체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의문을 표하게 되었다.
-> 독일 나치에 빌붙어 신나게 비시 정부에서 권력을 누리다 독일이 망할 것 같으니 급하게 레지스탕스 활동을 한 자들. 이들의 경력 세탁 혐의에 대한 의문은 프랑스인들 역시 가지고 있었다. 결국 마지막 경력으로 배반자와 애국자가 갈리는 것인지, 평균으로 봐야하는지, 시작으로 봐야하는지, 너무나 주관적이고 판단하기 힘들기 때문에 애매해다. 우리나라에서는 영화 ‘밀정’을 통해 부각된 황옥의 정체가 딱 여기에 들어맞는다. 그가 의열단의 일원이었나 일본의 밀정이었나 말이 많은데 진실은 누가 아는가. 김구 선생의 수첩에 황옥은 의열단원이었다는 말이 있었으나 이것이 효력을 가지고 있느냐는 다른 문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런 주관적 판단요소 때문에 숙청이 태생적으로 너무나 어려운 듯 싶다. 사실 숙청을 쉽게 봤다. 딱 보면 배반자라는 게 드러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이완용과 같은 대표적 케이스의 경우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빠져나갈 방법이 너무나 많다.
P.201 – 기대가 높았던 만큼 실망도 컸다. 1944년 9~10월에 여론의 주류를 이루었던 ‘철저하고도 급속한 숙청’에 대한 요구는 곧, 대체로 12월부터는 실망과 환멸로 바뀌었다. 대독협력자들에 대한 처벌을 조속히 개시하라는 요구와 압력은 10월 하순에 대부분의 지역에서 부역자재판소가 문을 열고부터 수그러들었지만, 재판 시작이후 질질 끄는 재판과정, 너무 미온적인 판결, 그리고 선고 형량들 간의 심한 불균등에 대해 불만이 제기되었다. 너무 관대하다고 느껴진 판결에 대한 불만은 때때로 성난 군중들이 그러한 판결을 받은 부역 혐의자를 법정이나 감방에서 끌어내서 직접 ‘처형’하는 상화로까지 이어졌다.
-> 프랑스 숙청의 역사가 우리에게 많은 귀감이 된다고 들었었는데 이런 경우를 보니 또 우리와 상당히 비슷한 것 같다. 앞서 말한대로 숙청은 태생적으로 어렵고 까다로운 점이 많은 것 같다. 법은 국민의 감정과 동일하게 가지 않는다. 그래서는 안되는 게 당연히 맞지만 누가 봐도 배반자인데 법에 의해 풀려나는 것을 보며 분통이 터지지 않는 국민이 있을까. 영화 ‘암살’에서도 마지막에 의열단원인척 했던 친일파는 법정에서 당당하게 무죄선고를 받는다. 그리고 법정에서 나온 직후 의열단원의 총에 의해 최후를 맞이한다. 이것이 해답인가, 골치아프다.
P.231 – 1970~1980년대의 프랑스인들은 1945년 재판 당시보다 대독협력의 최고책임자에게 훨씬 더 관대해졌던 것이다. 재판 당시 형사 처벌을 요구했던 이가 응답자의 4분의 3에 달했던 반면, 30여 년 뒤에는 페탱의 ‘유죄’에 동의하는 이가 절반에도 못 미치게 되었다. 이렇듯 ‘유죄’에 동의하는 이가 절반에도 못 미치게 되었다. 또 한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모르겠다’라고 답변한 이의 비율의 증가이다.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 자체를 아는가의 문제로 넘어가면 ‘모른다’는 답변의 비율은 더욱 높아졌다.
P.247 – 눈에 띄는 사실은 ‘해방 직후 부역자 숙청’이란 주제 자체에 대해 대부분의 교과서들이 극히 적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는 점이다.
-> 친일파들과 일본정부가 가장 좋아할만한 내용이다. 시간이 지나면 까먹는다. 인간이기에 당연하다. 그래서 점점 시간이 갈수록 친일파에 대한 악감정도 무뎌지고 위안부에 대한 인식도 무뎌질 것이다. 까먹을 것이다. 그래서 동상을 계속 세우고 기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영화도 계속 만들고 관련 기사도 계속 나와야 한다. 나도 얼른 무슨 활동에라도 동참해야겠다.
P.253 – 사람들은 숙청에 관한 한 드골보다는 아롱을 믿고 싶어했다. 사람들은 숙청의 필요성과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쪽보다는 ‘내전’의 비극에 슬퍼하자는 쪽에 더 귀를 기울였고, 해부와 분석보다는 애도를 선호했다.
-> 잔인한 것을 싫어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일 것이다. 피 보는 것을 싫어하고 분노보다는 애도를 더 선호한다고 하니 누군가 나서지 않는 이상 대부분 조용히 애도하고 기도할 것이다. 물론 애도도 비극적 상황에 처한 분들을 위한 고귀하고 숭고한 일이다. 서로에 대한 유대감이 올라가고 공동체 의식도 좋아질 것이다. 그러면서 누군가는 손에 피를 묻히며 할 일을 해야 한다. 아롱과 같은 사람이 다독여준다면 드골과 같은 사람이 칼을 뽑아야 한다. 우리 나라는 반민특위가 칼을 뽑으려 했으나 대통령이 중단시켰다. 세월호 조사위를 사실상 중단시킨 것과 다름 없다. 아직도 틀려 먹은 것 같다.
프랑스는 우리와 비슷해서 분통터지는 일이 많았음에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비율로 부역자를 차단했고 몇 십 년이 지난 문건이 발견되자 관련자를 법정에 세워 다시 형벌을 내렸다. 끊임없이 과거를 반성하고 고치려는 행동에서 배울 것이 많다. 우리는 항상 앞으로만 나가야 한다는 인식이 있어서 과거는 적당히 덮자는 인식이 있는 것 같다. 사실 이제와서 친일파를 처단하자 라고 외치면 ‘그때가 언젠데 뭘 그걸 이제서…’, ‘좌퐈인가…’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나부터 과거와 대면하는 자세를 견지해야겠다.
출처
1.프랑스국기
http://blog.daum.net/pysyy/414
2.레지스탕스사진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I1Jj&articleno=2242338&categoryId=315109®dt=20121220111828
3.드골사진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56606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