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분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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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겨워서 구역질이 났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내가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 기쁜 마음을 배운 것이었다. 할 일은 해야 한다는 것. -17쪽

실제로 아버지는 미쳤다. 소중한 외아들이 성인이 되어가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삶의 위험에 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걱정 때문에 미쳐버렸다. 어린 소년이 성장하고, 키가 크고, 부모보다 찬란하게 빛난다는 것, 그때는 아이를 가두어둘 수 없으며 아이를 세상에 내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바람에 겁에 질려 미쳐버렸다.-20쪽

"그런데 왜 이러시는 거에요, 아버지?"
"인생이 그래서 그래. 발을 아주 조금만 잘못 디뎌도 비극적인 결과가 생길 수 있으니까."-23쪽

나도 그것이 좋았다. 내가 어른이 되던 시점에서는, 갑자기 모든 것이 그렇게 까다로워지기 전에는, 나는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데 큰 재능을 보이던 사람이었다.-26쪽

나는 어른, 교양 있고, 성숙하고, 독립적인 어른이 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바로 그 점에 겁을 먹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가 젊은 성인의 가장 작은 특권을 시험적으로 사용해본 것을 벌하려고 나를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서도 나의 공부에 전념하는 태도, 대학생으로서 누리는 독특한 가족 내 지위는 더없이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29쪽

법률가가 되는 것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것이 피가 잔뜩 묻어 악취를 풍기는 앞치마 - 피, 기름, 내장 조각 등 손을 닦을 때마다 온갖 것이 묻었다 - 를 두르고 일을 하며 보내는 삶에서 가장 멀어질 수 있는 길이라는 것뿐이었다. 나는 나에게 요구될 때마다 기꺼이 아버지를 위해 일했고 아버지가 나에게 가르치는 정육점 일의 모든 것을 순순히 배웠다. 그러나 아버지도 내가 피를 좋아하도록 가르치지는 못했다. 아니, 나는 피 앞에서 무심해지지도 못했다. -47쪽

이래서 영원이 존재하는 것인가? 한평생에 걸쳐 있는 자잘한 것들을 계속 주물럭거리려고? 인생의 매 순간을 그 자디잔 구성요소까지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아니면 이것은 그저 나만의 내세일까? 각자의 삶이 독특하듯 각자의 내세도 독특한 것일까? 사람마다 다른 사람의 내세와는 다른, 지울 수 없는 지문 같은 내세를 갖게 되는 것일까?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삶에서처럼 나는 오직 있는 것만 알 뿐이고, 죽음에서는 있는 것이 있었던 것으로 바뀔 뿐이다. 살아 있는 동안에만 삶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사라진 뒤에도 계속 그 삶에 붙어 있게 된다. -64쪽

하지만 내세는 기억이 없는 곳이 아니었다. 아니, 기억이 전부인 곳이었다. 이럴 줄은 미처 몰랐다. -65쪽

꿈이건 아니건 여기에는 지나간 삶밖에 생각할 것이 없다. 이것이 '여기'를 지옥으로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천국으로 만드는 것일까? 망각보다는 나은 것일까? 아니면 나쁜 것일까? 죽음에서는 적어도 불확실성은 사라질 것이라고 상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내가 뭐하는 존재인지, 내가 이런 상태로 얼마나 오래 있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불확실성은 여전히 지속되는 것 같다. -65쪽

존재하는 모든 것이 기억된 과거뿐이기 때문이다. 복원된 과거가 아니다. 그러니까 감각의 영역이 직접 다시 살아내는 과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되풀이될 뿐이다. 내가 나의 과거를 얼마나 더 감당할 수 있을까? 육체에서 분리된 채 이 기억의 동굴 속에 숨어서, 시계 없는 세상에서 시곗바늘이 뱅뱅 돌도록 나 자신에게 나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하고 있으니, 벌써 백만 년이나 이러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66쪽

어떤 사람들은 일을 갈망한다. 어떤 일이든, 가혹하든 고약하든 상관없다. 자기 삶의 가혹함을 쏟아내고, 마음에서 자신을 죽일 것 같은 생각들을 몰아내기 위해. -1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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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4-01-27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65쪽 놀랍구나! 기억이 전부인 곳이라니....

웽스북스 2014-07-07 01:10   좋아요 0 | URL
네 언니. 너무 인상적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