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할 필요가 있겠다.

지난 시간들에 대해, 그러니까, 나는, 최고의...불량회원이었다. 몇개월간 책모임이 진행되는 동안, 누군가의 서평이 수권씩 올라오는 동안, 바쁨을 이유로 이직을 이유로 등등의 이유로 달과 6펜스, 그리고 설국 2권의 서평만 올려둔 채, 유유자적... 열심히 하는 거라곤, 때맞춰 책을 사는 것 뿐. 읽기도 쓰기도 부담스러운 곤궁한 일상을 핑계로 모임에 소홀했었다. 그리하여, 궁금한 마음에 서평을 체크하시는 분들께 늘 죄송한 마음이었고, 다른 분들의 블로그에서 일어나는 일, 쓰여진 서평들에도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니,

솔직할 필요가 있겠다.

이번 부산행이 다른 분들만큼 설레지 않았음을 미리 말해두자. 실은 내가 부산행을 결심한 건, 부족민들에 대한 궁금함 때문이 아니라, 좋아해 마지않는 언니들 때문이었다. 굿바이언니, 그리고 민정언니. 각자의 바쁜 삶 때문에 우리는 함께 지내온 시간에 반해 함께 어디론가 멀리 다녀온 기억이 없었다. 굿바이언니와 가장 멀리 가본 곳은, 세상에나. 방학동? 그리고, 민정언니와는 내소사에 다녀온 기억이 전부였다. 늘 말뿐이었던 다짐들, 약속들을 또 허공으로 보내고 싶지는 않아, 다음날 쉽지 않은 여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부산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전날 우리집에서 민정언니와 다음날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도 나의 기대감은, 실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내가 그 곳에서 만난 것들이 무엇이었는지를. 내가 그 곳에서 진짜로 만났던 것은, 길 양쪽으로 흩날리던 벚꽃도 아니었고, 숙소의 통유리 너머로 가득 담긴 봄바다도 아니었으며, 아름답게 펼쳐진 광안리의 야경도, 밤새 귓가에 찰싹 찰싹 울리던 파도소리도 아니었다. 밤새 바느질을 하며 가방을 만들던 마음이었고,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을 상상하며 나무를 깎던 마음이었다. 글로 만난 상대방의 취향을 생각해내며 영화를 고르던 정성이었고, 잠시 여행을 가서 맡은 차의 향기를 선물하고파 한가득 담아오던, 그 마음이었다. 선물할 게 없어 동동거리며, 밤새 고민해 고른 공정 무역 커피를 건네던 마음이었다. 한가득 여행짐을 챙기면서도, 제주산 귤을 두손 무겁게 가져오는 마음이었고, 늦게 들어가 피곤한 가운데서도 함께 먹을 김밥을 싸는 마음이었다. 빈 손으로, 다음날 또 멀리 가야하는데 짐이 많다며 징징거리고, 책 한 권을 겨우 챙겨갔던 내게 부족했던 건, 바느질을 하고 나무를 깎고, 김밥을 싸는 재주가 아니었고, 영화를 고르는 안목이 아니었다. 마음이었다. 나는 그 곳에서 마음을 만났다, 그리고, 마음을, 배웠다. 그 마음은, 다시 마음이 되어, 함께하는 시간 내내 손에서 손에서, 눈에서 눈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다시, 그 따뜻한 마음에서, 내 척박한 마음으로 살포시 자리잡았다. 참 고맙고 고마운 일이다.

나는 내밀 선물이 없어서, 가 아니라, 내보일 마음이 없어서 이내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평소보다 술을 많이 마셨고, (주량갱신 -_-v) 평소에 잘 부르지 않던 신나는 노래들을 불렀다. 즐겁게 함께하는 것 외에는 마음을 보일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죄송했고, 고마웠고, 실은, 매우 즐거웠다.

술을 잔뜩 마시고, 그만큼의 커피를 또 잔뜩 마시고, 결국 밤새 한잠도 자지 못하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리속을 지나간다. 다음날, 다시 떠나야 할 그 길고 긴 길만큼이나, 나는,

아직도 멀었다. 인정할 필요가 있겠다.

지난 시간, 열심히 함께하셨던 다른 분들은, 지난 부산행이 어떤 정점을 찍는 그 무엇이었겠지만, 나는 이제서야 시작하는 기분이다. 지난 부진한 리뷰숙제들을 만회라도 하듯, 열심히 숙제를 한다. 뒤늦게 내딛은 한걸음이 너무 늦은 건 아니길.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앞으로도 시간이 많이 남아있어야 할텐데. 어쩐지 그럴 것 같다. 매우 예감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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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읽는 부족 부산 모임 후기, 함께 올립니다.
    from 바느질하는 오후 2010-04-15 16:23 
    1. 동우님 http://blog.daum.net/hun0207/13291027 (책읽는 부족 그이들) 2. 도치님 http://blog.daum.net/shave4ever/17145186( 뜻밖의 만남) http://blog.daum.net/shave4ever/17145189(첫 대면) 3. 굿바이님..
 
 
마그 2010-04-15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반성문 인척하는 즐거웠다는 여행기. 참신하군요~ ^^ 오랜만에 폭풍블로깅~ 좋습니다아~

웽스북스 2010-04-16 02:23   좋아요 0 | URL
아이쿠. 폭풍 블로깅이라니. 찬란한 제 과거가 울어요. ㅎㅎ

굿바이 2010-04-15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르를 넘나드는,실로 놀라운 감동인데^^
웬디에게서 흘러 나오는 글들이 꼭 웬디같다. 앞으로,얼마간의 시간이 허락될 지 모르겠지만, 말뿐이었던 다짐들과 약속들 많이 거두도록 하자.

뭔가 잔뜩 얻어오기만 했는데, 어찌 다 갚을지, 아득하다~

웽스북스 2010-04-16 02:23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언니.
전 언니에게 진 빚도 한가득인데요.

어휴. 어휴.

후니마미멜라니아 2010-04-15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음에 만나면 웬디야 ! 라고 불러 버릴게요
요렇게 예쁜 마음이라니, 솔직한 마음이라니
꼭꼭 마음에 들어요.

반성문 처럼 여행기 만들어 내신 게
어딘가 논술 교사를 하고 있다면 제가 만약
어디선가 글 갖고 장사를 하고 있다거나
해서 글 재료가 부족했다면

요 글을 반성문은 이렇게 쓰는 거야
라든가
여행기는 이렇게 써야 하는 거야 라고
보여주고 싶어요

아마, 우리 책 부족에 자주 들락거리지 못한 거는
이 집의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고
연결선이었던 민정이는 미국에 가 있는데다가
이쪽 다음이 낯설어서였을 거에요

웬디님, 굿바이님과 빨리 친하고 싶어서 저도 알라딘에
집을 만들긴 했지만 시작과는 달리 거미줄 친 걸
거둘 시간도 없네요
집과 집이 양식이 다른데서 오는 일이었는데
그게 솔직해지자 하면서 반성문에 쓸 내용이 되었네요
착한 웬디양.

그나저나 블랑쉬를 추천해 주셨지만
그 여자가 빨리 죽는 역할이어서
오래 살려고 저는 블랑쉬 보다 오래오래 산 여자를
닉으로 했어요

마미라고 익숙해졌으니까 그렇게 부르시는 건 그대로 하시고
여기 와서 멜라니아라고적으면 그게 저인 줄 아숍소

웽스북스 2010-04-16 02:25   좋아요 0 | URL
저작권료는 안받을게요. 멜라니아님.
그런데, 애들이 진짜 반성문을 저모양으로 쓰면 어쩌죠?
무한 책임 느낄 것 같은데요.

알라딘에 집 만들지 않으셔도,
자주자주 놀러갈게요.
한군데라도, 열심히 해야죠. 흐흣.

그나저나 저 착각해서 멜라니아마미라고 부르면 어쩌죠? 헤헤.

토깽이민정 2010-04-15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력적인 막내 웬디양
누누히 말하지만
'왕림해 주시는 것 만으로도' 그대의 등장이 선물이었다니까! 그죠 부족민 여러분~

나도 3월의 숙제를 (마음대로) 제껴버렸고
4월의 숙제는 아직 시작도 못했는데,
아무래도 우리 이번 모임을 계기로 한동안 출석일수가 상당히 좋아질 것 같지?
뭐 그러다가 약발 떨어지면 이제 막내인 웬디가
혹은 서울에 들어오실 심샛별님이나 쟁이 (언제가 되실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다음 모임을 기획하면 될 것이고...

이제 우리 손을 맞잡고 열심히~ 출석확인 하자~~ ^^




웽스북스 2010-04-16 02:27   좋아요 0 | URL
언니. 그렇게 말하기엔 제가 너무 뻘쭘하고요. ㅎㅎ
저는 4월의 책이 오늘 왔어요. 열심히 다시 읽어야지요.

여튼, 이 모든 게 다 언니덕분이지요.
고마운 인연들에 감사하면서,
저는 남의 출석 확인전에, 제 출석부터 좀....;
(이미 개근상은 글러먹었으니 원)

도치 2010-04-16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만담같고 시트콤 같은 제 후기와는 달리 참으로 멋드러진 후기에 박수보냅니다.

지금도 두고두고 후회스러운 점은 잠이 덜깨어 반가웠다고 조심히 올라가시라고
제대로 인사를 못했던 점입니다. 그날 참~ 반가웠던거 아시죠? ^^

웽스북스 2010-04-18 02:30   좋아요 0 | URL
만담도 시트콤도 모두 제 분야인데, 도치님도 그 분야를 아끼고 계셨군요.
마음같아서는 배틀이라도 한 판 붙자고 하고 싶지만
제가 감이 심히 떨어진 관계로, 만담과 시트콤 분야는 도치님께 내어드립니다.
부디 녀석들, 잘 보살펴 주시고...흑!

반가운 마음이야 전하지 않는다고 모르겠습니까.
그날 이미 충분히 전해졌고, 또 느껴졌으니 염려 놓으시고요,
언제고 좋은 기회로 또 뵙게 되기 바라겠습니다.

2010-04-16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기 저기 모임후기 읽을때 마다 빵빵 터지고, 이거 다들 독후감쓰실때 그 분들이 맞나 싶어요. 기행문과 반성문을 이렇게 절묘하게 울남편의 표현을 빌리자면 "비벼"내시다니, 웬디양님때문에 오밤중에 또 웃다 쓰러졌어요.

몸이 많이 힘드셨을텐데 그래도 기분 좋은 발걸음을 하셨다니 보는 저도 기분이 좋아졌어요.

웽스북스 2010-04-18 02:32   좋아요 0 | URL
아. 저의 이 진지한 반성문과 여행글을 읽으면서 웃다 쓰러지셨다는 쟁님 덕에 한참을 당혹스러워했습니다. 네. 도치님께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런 글로조차 사람을 웃기는 재주가 있는 저는, 역시 여기보다는 만담과 시트콤 분야로 가는 것이...(도치님. 아무래도 제가 이긴 것 같습니다.)

그간 이래저래 쟁님 블로그도 몇번 못가보고 많이 소원했지요. 몸은 멀리 있어도 마음은 가까이 있을 수 있게 도와주는 고마운 기술들이 많은 세상이니, 쟁님 뵙는 날 어색하지 않도록 종종 놀러갈게요.

동우 2010-04-16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야아, 웬디님.
글도 글이거니와, 이런 솜씨라니.

일거에 점수를 따 만회하는 이 노회함.하하하
예서도 넘치게 엿보이는 웬디님의 노숙함..

웽스북스 2010-04-18 02:34   좋아요 0 | URL
동우님. 어디 다녀오셨습니까.
후기 하나 남기시고 슬쩍 사라지셔서, 은근 드나들며, 이제나 저젠 다시 들여보시려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거에 점수를 따 만회하는...노회함...하하...
동우님 눈을 피해갈 수는 없겠군요.
제가 너무 얄팍했습니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