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가 아침에 눈을 떠, 처음 전화받는 사람이....... 본부장님이라면?
집이 멀다보니 출근에 변수가 많이 생긴다는 건 알고 있지만, 얼마전에는 서울역에 35분에 떨어졌음에도 충정로에 있는 회사에 9시 1분에 도착해버리고야 말았다. 그날이 12월의 세번째 지각. 우리회사는 원래 지각 정책에 굉장히 엄격해 인사고과에 반영이 되는데, 월 3회쯤 지각을 하면 아무리 죽어라 일을 열심히 해도 이미 소용없는 지경에 이르러버린다. 휴가도 아니고, 바로 월급이 깎여버리는. 9시 30분 출근에 5분 정도는 봐주고 월 2회까지는 지각해도 페널티 적용이 안되던, 집에서도 더 가까운, 비교적 프리한 광고관련회사에 다니던 아가씨가 엄격하고 짤없고 매일매일이 전쟁인 유통업계에 와서 왠 고생인가. 하지만 다른 경쟁사들은 8시까지라니, 이조차도 감지덕지이긴 하다.
12월의 두번째 지각을 하던날, 본부장님과의 1분 면담에서 한 번 더 지각을 하면 모닝콜을 하겠다는 본부장님의 말씀이 있고 얼마 후의 일이어서, 나는 그 다음날부터 본부장님의 모닝콜을 받는 직원이 되었다. 나의 이런 난감한 상황을 타개하는 방법으로, 매일 5분 전에 일어나 본부장님께 먼저, 일어났습니다. 하고 문자를 보내기가 어떻겠느냐고 물었더니, 예약문자를 해라, 하는 친구들도 있고 (아무리 그래도 그건....좀...그러다 또 지각이라도하면..) 그냥 받아들여라...나아가 즐겨라... 뭐 이런 여러 제안 중, 나는 그냥 뭐, 감사히 즐기기로 했다. (본부장님 감사합니다 ㅜㅜ)
그렇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살텐가. 계속 이렇게 월급 깎여가며, 지각을 일삼아가며, 하루 두시간반씩 지하철에 서서, 집에 가면 기진맥진 쓰러져 아무것도 못하는 질떨어지는 삶을 살텐가.
게다가, 연말에 이래저래 좀 신나게 놀다보니, 막차를 두번이나 놓쳤는데, 한번은 버스를 세번 갈아타고 돌아돌아 집에 가는 시간이 2시간이나 걸린 적도 있었고 (눈오고 감기에 걸린 날이었다 ㅜㅜ) 그 다음다음날에는 새벽 세시까지 택시가 잡히기를 기다리다가 겨우겨우 콜택시를 타고 들어갔다. 집에 가니 네시. 어휴. 뭐, 여러 가지 상황들이 콤보로 나에게 다가와 나로하여금 어떤 결심을 하게끔 몰아 갔으니...
그래, 새해에는, 집을 나와야겠어.
그리하여 조웬디씨는 그저께 집에 허가를 구하고, 거의 80% 정도의 오케이 사인을 받아낸다. 부모님이 허락을 해주지 않는 이유가 걱정 반 섭섭함 반이라는 이유를 알기에, 나 역시 최대한 그 마음을 고려해가며 여러가지 조건과 약속을 만들어가며, 이것 저것을 양보한다. (이를테면, 교회는 그냥 계속 다니기로 했다거나) 생각해보면 같이 살던 K양 나갈 때도 그렇게 섭섭해하던 엄마였는데, 나는 오죽하려고. 정말 재밌는 건 내 동생. 지하철로 한정거장 거리의 회사를 다니는 녀석은 내가 지금까지 그러고 회사를 다니는 게 절대 이해가 안됐다는 이야기를 하며, 본인도 회사를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곳으로 나가 살고 싶다는 어이없는 소망을 표한다. 물론 이녀석은 돈이 없으므로 패스. 실은 처음 엄마의 반응도 가관이다.
1. 회사를 옮기는 건 어때? (엄마!!!!!)
2. 결혼을 해. (좀 현실적인 대안을 주세요!!!!)
뭐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나가사는 일이 확정되고 나니, 일단 여러가지 후회가 밀려오는데, 나는 그간 왜 더 열심히 돈을 모으지 않았단 말인가. 누구나 해보는 슬픈 계산. 지금까지 받았던 연봉을 총 합한 금액에서 지금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금액을 빼보면. 우와. 나 정말 사치스러운 사람이었던건가. 내몸하나 건사하는데 무슨 돈이 이렇게 많이 들었던 거지? 그런데 도대체 남아있는게 뭐지? 차라리 명품 가방이라도 하나 있으면 덜 억울하려나 싶은 생각마저도 든다.
암튼, 가진 돈으로는 서울에 전세방 얻기에는 좀 무리스럽고, 대출을 슬쩍 받아야되는데, 도대체 내가 대출을 받을 수 있는 금액이 얼마일까, 부터가 까마득하다. 아. 이제 나도. 대출금 갚는 여자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좀 서글퍼지지만, 그래도 자기 공간 하나 마련하기 어렵다는 서울시내에, 어쨌든 부모님께 손 안벌리고 내 손으로 대출받고, 가진 돈 합해서 대충 대충 어떻게 원룸 전세 정도는 마련해볼 수 있겠다, 라는 생각에 뭔가 좀 진짜 스스로가 대견하고 어른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나오면 바로 후회한다는데, 나는, 어쩐지 나는 안그럴 것만 같은 것 같은 착각이 밀려오고, 샤방샤방한 삶을 살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어이없는 환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뭐, 그렇지 않을 거라는 거 알고 있다. 당장 오늘 만두와 떡을 넣은 김치찌개에 저녁 한그릇 신나게 먹으면서도 어휴. 이제 뭘 해먹고 사나. 라는 생각부터 들고. 하지만 또 박찬일의 보통날의 파스타 같은 책을 가지고 나는 보통날에도 이렇게 잘해먹고 살지 않을까, 라는 현실성 전혀 결여된 확신 같은 것도 갖게 되고. 그러다가도 한달 월급으로 예산만 잡아보면. 어휴. 어휴.
그러면서도 또 결심해 보는 건.
- 하늘이 잘 보이는 동네로 가야지
- 그래도 꽃이 피는 동네였으면 좋겠다
- 산책을 할 수 있는 공원도 좀 있었으면
뭐, 이런저런 고려 끝에, 나는 효창공원쪽을 1차 목표지로 잡았다. (ㅂㅂㄹ언니 도와주세요) 이대나 아현 쪽은 가깝지만, 그보다는 홍대나 상수동 쪽이 좀 더 좋을 것 같기도 하다. 혜화동은 동네가 정말 마음에 드는데 회사에서 너무 멀어 아쉽고. 뭐, 암튼 대략 이 정도 가이드라인 내에서 살 곳을 찾아 나설 계획이다. 적어도 봄이 오기 전까지는 살 곳을 정하고, 짐을 모두 옮기고, 들여놓고, 좀 안정적인 삶을 시작할 수 있어야겠다.
이제 새해도 밝았고, 새해에는 아무것도 결심하지 않겠다, 라고 결심한 나이건만, 이렇게 큰 변화 앞에 어쨌거나 마음 다잡지 않으면 안되겠다. 떨리고 걱정되지만, 설레고 기대되는 마음이 더 크기에 시작할 수 있는 일이다. 혼자 사는 몇몇 알라디너 분들께 불쑥 전화를 걸어 조언을 구할 수 있으니 친절히 대해주세요. ^-^ (ㅎㅁㄹ님 ㅈㅇㄷ님 ㄹㄹㅊㅇㅅㅈ님 ㅋㅋㅋ 그리고 이미 지난 30일, 집에 허락받기 전에 기습 전화 당하신 ㅇㅍㄹㅅㅅ님 ㅋㅋㅋ + 제보 환영!) 시집 가시는 옛날 팀장님 집에 가서 좀 저렴한 가격에 세간살이들을 퉁쳐와볼까 싶기도 하고... 어휴. 이제 주말에 다놀았어요. ㅎㅎㅎ
그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모두에게 복된 새해.
5월정도부터는 누가 놀러와도 내놓을 수 있는 요리신공도 하나 연마해놓을게요.
(이를테면, 고소하고 담백하고 꼬들꼬들하고 맛있는 치즈라면?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