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갔던 홍대의 카페.  
헌책 한권을 커피 한잔으로 바꿔주는 이 곳에 쌓여있던 책들의 리스트는
사실 좀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보물창고, 까지를 바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집어오고 싶은 책이 거의 존재하지 않던 곳.
너무 낡은 책들이 많아 책먼지에 정신이 매캐해지던 곳.  
그나마, 더치커피가 매우 저렴하고 맛이 있어 즐겁게 머무르다 나왔던 곳.

사실, 이런 컨셉의 카페를 나 역시 꿈꾸었던 적이 있는데,
이 카페가 처했던 현실을 보며,
스스로 아. 그야말로 그것은 로망이었구나. 를
실감할 수 밖에 없던 시간.




그때 올렸던 글과 사진에 누군가 남겨줬던 덧글.
그러게, 우리가 좋아하는 공간, 카페 불라에도
그 곳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끔 책을 갖다놓는데
다들 자기가 좋아하는 책들을 가져다 놓는다.


경제적 가치가 다시 경제적 가치로 환원될 때만큼
사람들 머릿속이 빠릿빠릿해지는 때도 없을 것 같다.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단돈 10원이라도, 내가 이익이다, 라는 뿌듯함을 얻기 위해서.


어떤 책을 가져와도 모두 커피 한 잔, 이라는 교환 원칙 앞에서는  
가급적이면 가장 저렴하게 커피를 마시고 싶다, 라는 대응원리가 성립되나보다.  
그래서, 자신에게 필요가 없는 책을 가져와
실질적 가치 0에 수렴하는 값을 지불하고 커피를 마시고는 뿌듯해한다.

그래서 가격경쟁 같은 '경제적인 영역'에서 싸우다 보면
결국에는 다같이 살을 깎아먹고, 시장을 비정상적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게 경제적 가치가 아닌, 다른 어떤 무형의 가치로 환산될 때, 
어떤 사람들은 기꺼이 바보가 된다.
특히나 그것이, '자신'을 표현하고 남겨주는 가치라면, 더욱 그러하다.  




<나름>에서 몇달 전에 있었던 재밌는 밤, 이라는 행사에서,
나는 저 두권의 책을 5만원을 주고 사왔었다.
지금 찾아보니 알라딘에서 샀으면 절반 가격 정도에 살 수 있었을 책들을.
그것도 무려 헌책으로.

게다가 내가 가지고 갔던 엔도슈사쿠의 <바다와 독약> 6천원짜리 절판본은 
무려 2만원에,
중고샵에서 5천원 주고 산 소세키의 <마음>은 1만원에 팔렸었지.


재밌는 건, 이렇게 기꺼이 바보가 되는 순간들이,
삶을 좀 더 즐겁고 풍성한 것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인데,
그 즐겁고 풍성함의 부가가치를 더하면,  
그 바보의 선택들이 오히려 더 경제적일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일반상거래에서도 이런 것들이 가능할까.
같은 상품이더라도, 같은 조건이더라도
가격을 뛰어넘는 즐거움, 재미, 의미의 부가가치들이 더해진다면  
소비자들은 기꺼이 그것들을 선택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것들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일반화할 수 있을까.

뭐 이런 것들이 궁금한 요즘.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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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11-22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엔도우 슈사쿠의 '침묵'은 내게 최고의 책이었지요.
영악한 현대인에게 일반화하기는 어렵지 않겠어요.^^

웽스북스 2009-11-25 02:46   좋아요 0 | URL
예. 아무래도 그럴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뭔가 놓고 싶지 않은 믿음이랄까요.
이래서 이상주의자 소리를 들어요 제가 ㅜㅜ

사과나무 2009-11-22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에게 최고의 책은 뭘까... 생각하게 되는군요.
불라에 책을 가져다 놓는다면 뭘 가져다 놓아야 할까도...

웽스북스 2009-11-25 02:47   좋아요 0 | URL
음. 그러고보니, 실은 저도 불라에 제 책을 갖다놓은 적은 없어요
우리나라씨가 그냥 한말이긴 하지만,
실은 책보다는 다른 것들을 많이 갖다놓죠. 차를 갖다놓기도 하고, 혼수 그릇을 갖다놓기도 하고, ㅎㅎㅎㅎㅎ

이런 2009-11-22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좋은 글에 재미있는 실수 하나 : "살을 깎아먹고" ㅎㅎㅎ, 뭐 그래도 되겠지만.
보람된 여행이 되길 바랍니다.

웽스북스 2009-11-25 02:47   좋아요 0 | URL
응? 이거 틀린건가요? ( '')

치니 2009-11-22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웬디양. :)

웽스북스 2009-11-25 02:48   좋아요 0 | URL
전 치니님이 손 안예쁜 남자가 좋다고 해도,
치니님의 옆에 계신 그 분의 손이 예쁠 것이라 일백프로 확신해요.

(이 말을 다락방님 서재에서는 차마 못하고 있다가 여기에 하는 조웬디씨 ㅋ)

마노아 2009-11-22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앨범이 나왔을 때, 천원 이상 소신껏 입금해 달라는 제작탐의 당부에 정말 천원씩 입금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구요. 배송비도 안 나오는데...ㅜ.ㅜ 그거 한정판이라서 딱 5천장 찍었나 했는데 참 너무한다 싶었어요. 이번에 학교 학생의 집에서 불이 나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이 전소했는데, 아들만 다섯인 극빈층 집안 아이였거든요. 성금을 거두는데, 단 천원을 아까워하며 안 내는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답니다. 참 각박하지요. 기꺼이 바보가 되어 값진 기쁨을 전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참 많아요...

웽스북스 2009-11-25 02:52   좋아요 0 | URL
정말 와닿네요. 각박하다고 쉽게 말하기엔 스스로 좀 반성되는 부분도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