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링 있음)
좋아하는 영화의 기준이 무어냐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학교에 다닐 때 그 흔한 영화이 이해 수업 한번 듣지 않은 자로서, 솔직히 영화의 만듦새나 이런 것들을 잘 볼 줄도 모르고, 제대로 평가할 줄도 모른다. 촬영 기법, 미장센, 이런 것들을 세밀하게 보지도 않는다. 그냥 나에게 중요한 건, 영화가 무엇을 /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이다. 음. 다른 말로 표현해본다면, 그 영화는 나를 건드리는가, 그렇지 못한가, 이기도 하다.
픽사의 이 애니메이션에 망설임 없이 별 10개를 날리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아이들에게는 아이들 나름의 모험과 신비, 흥미로운 스토리, 뭐 이런 것들로 인한 즐거움을 모자람 없이 주었을 이 영화는, 긴 세월을 살아온 노인들을 통해 어른들에게는 플러스 알파의 재미를 하나 더 선사한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 등장하는, 칼과 엘리(그러니까, 그 노인들)의 삶을 축소한 영상은 그 자체로도 굉장히 아름답다. 그냥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그득 그득. 함께 터전을 꾸미고, 넥타이가 여러 번 바뀌며 세월이 흐르고, 기쁨과 좌절의 순간을 함께 나누며, 그러는 중에 그들의 꿈인, 파라다이스 폭포에 가기 위해 함께 모으던 동전들은 자꾸만 바닥을 드러낸다, 나는 이 여러 장면들 중 이 우편함 장면이 개인적으로 제일 좋았다. (역시 난 영화에서조차 우편함을 못지나치는건가 ㅋ) 우편함에 손을 얹고 페인트칠을 하던 아내를 사랑스럽게 쳐다보다가 그만 우편함에 실수로 내버린 칼의 손자국 옆에, 살짜기 웃으며 자신의 손자국을 더함으로써 그조차 아름다운 추억의 흔적으로 만들어내는 엘리. 그 앞에서 어떻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을까. 칼 할아버지가 아내 엘리를 그토록 잊지 못한 이유도 아마 거기 있을 게다. 이 장면은 이후 그들의 생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응? 진짜, 이동진 기자 말처럼, 픽사 구내식당에서는 무슨 음식이 나오는 거야? 뭘 먹으면 이런 장면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건지, 심히 초궁금)
그들은, 결국 꿈을 이루기 전에 이별을 맞이해야 했기에 칼 할아버지는 혼자서라도 그 길을 가야겠다고 다짐하고, 그들의 삶의 터전인 집을 그대로 풍선으로 띄워올린다. 이것은 아마 그가 생각한 최선의 동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아내 엘리에게는 그들이 함께하는 그 삶의 순간 순간들이 이미 삶인 동시에 모험이었다. 파라다이스 폭포에서 할 일들로 채워나가기로 했던 그녀의 모험 노트는 이미 그들이 함께한 삶의 흔적들로 채워져 있었다. 파라다이스 폭포에 가기로 하며 모았던 동전들은 그들의 삶을 위해 한 번 두 번 비워졌지만, 그렇게 어려움들을 딛고 한걸음 한걸음 함께 걸어온 그 삶이 결국 그녀에게는 꿈보다 귀했던 것이다.
꿈보다 귀한 삶, 삶보다 귀한 당신, 그것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세상에나, 탄탄하고 흥미로운 스토리만으로도 충분히 재미가 차고도 넘쳐 서른살 먹은 아가씨들을 연신 흥분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는 (실제로 이건 뭐 거의 정신연령 7세의 수준으로 심히 감정이입하며 소리지르면서 봤다는 후문이 ㅋ) 돌아갈 때는 이런 뭉클함까지 듬뿍 안겨주는, 기억력 나쁜 나조차도 매우 오래도록 기억날 것 같은 영화다. 이거, 너무 고맙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