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후로도 자주 섭섭함을 느꼈지만 그런 이유로 선생님과 소원해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섭섭한 마음이 들려고 할 때마다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더 다가가면 갈수록 내가 예상하는 어떤 것이 언젠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어렸다.-17쪽
나는 처음 선생님을 뵈었을 때 다가가기 어려운 묘한 분위기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가까워져야겠다는 의지가 내 가슴속 어딘가에서 강하게 발동했다. 선생님을 상대로 이런 느낌을 갖은 사람은 어쩌면 나 혼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직감이 나중에 사실로 입증됐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들이 유치하다고 하더라도, 바보 같다고 비웃더라도 그것을 미리 예견한 나의 직감에 대해서는 아무튼 믿음직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사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사람, 그러면서도 자신의 품 안으로 들어오려는 것을 두 팔 벌려 껴안을 수 없는 사람 - 그것이 선생님이었다. -23쪽
"나는 외로운 사람입니다만 때에 따라선 댁도 외로운 사람 아니오? 나는 외로워도 나이를 먹었으니 흔들리지 않고 견딜 수 있지만 젊은 당신은 다르지요. 움직일 수 있는 만큼 움직이고 싶을 거요. 움직이면서 무엇엔가 충돌해보고 싶을 거란 말이오" "전 조금도 외롭지 않습니다" "젊은 것만큼 외로운 것도 없지요. 그렇지 않다면 왜 당신은 그렇게 자주 날 찾아오는 겁니까?" 여기서도 이전에 했던 이야기가 다시 선생님의 입에서 반복되었다. "당신은 나를 만나도 아마 어딘가에는 외로움이 남아 있을 거요. 나에게는 당신을 위해 그 외로움의 뿌리를 끄집어낼 만큼의 힘은 없으니까요. 당신은 이제부터 밖을 향해 팔을 벌려야 할 겁니다. 그때부턴 내 집 쪽으로는 발길을 돌리지 않게 되겠지요"-27-28쪽
"나는 훗날 그런 모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지금의 존경을 물리고 싶네. 나는 지금보다 더 지독한 외로움을 참기보다 차라리 외로운 지금의 상태로 버텨가고 싶네. 자유, 독립 그리고 나 자신으로 가득찬 현대에 태어난 우리는 그 대가로 모두가 이 외로움을 맛봐야겠지"-49쪽
자신에게도 생각이 있따는 것을 상대방에게 보여주고 거기서 달콤한 희열을 느낄 정도로 사모님은 현대적인 분이 아니셨다. 내 눈에 사모님은 깊은 곳에 묻혀 있는 마음을 소중히 여기는 분으로 보였다.-55쪽
사모님과 나, 두 사람은 오랫동안 같은 화제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나는 근본적인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모님의 불안도 근저에서 표류할 뿐 실체에 접근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 말씀하신 사건에 대해서는 사모님도 많은 걸 알지 못했다. 그리고 알고 있는 내용을 전부 내게 밝힐 수도 없었다. 따라서 위로하는 나도, 위로받는 사모님도 똑같이 등대 없는 검은 바다 위를 부유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떠다니면서 사모님은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하는 심정으로 미덥잖은 내 판단에 의지하려고 했다. -65쪽
나는 마음속으로 아버지와 선생님을 비교해 보았다. 두 분 모두 세상 사람들 눈에는 있는지 없는지 모를 만큼 눈에 띄지 않는 분들이었다. 요즘 세상 사람들의 가치 기준으로 점수를 매기면 두 분 모두 빵점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장기 두기를 좋아하는 아버지는 단순한 놀이 상대로서도 내게는 영 모자랐다. 한편 시간이나 보내려고 왕래해왔던 것이 아닌 선생님은 반복되는 만남에서 생겨나는 친밀함 이상으로 언제부턴가 내가 사고하는 데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잠깐, 단순히 사고라고 말하니 너무 딱딱한 느낌이 든다. 나의 가슴속이라고 바꿔 표현하고 싶다. 내 살속에 선생님의 힘이 스며 있다고 해도, 내 피 속에 선생님의 생명력이 흐르고 있다고 해도 나에게는 조금도 과장된 표현이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가 나와 피를 나눈 친아버지이고, 선생님은 두말할 것도 없이 완전한 타인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새삼스레 떠올리고 비로소 큰 진리라도 발견한 듯이 신기해했다. -75쪽
대대로 유교인 집안에 기독교 신자 냄새를 풍기며 들어오는 것처럼 내게 묻어 있던 냄새는 우리 부모님과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물론 그러 점에 대해 나는 입밖에 내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몸에 밴 것이기 때문에 굳이 숨기려 해도 알게 모르게 부모님 눈에는 거슬려 보였던 것이다. 마침내 이곳 생활이 지겨워졌다. -76쪽
"요즘은 왜 예전만큼 책을 많이 읽지 않으세요?" "딱히 왜라고 할 것까지는 없는데- 어차피 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도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리고 또 이유가 있나요?" "또 있다고 할 정도의 이유는 아니지만 예전에는 말이야, 사람들과 만나 얘길 하다가 다른 사람의 질문에 내가 잘 몰라 대답을 못하면 속으로 굉장히 수치스럽게 생각했는데 요즘엔 모른다는 것이 그렇게 수치스럽게 생각되지 않기 때문에 굳이 책을 읽어서 답을 알아내려는 의욕이 생기지 않아. 뭐 간단히 말해서 늙었다는 얘기지."-81쪽
너무 진부한 대답이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난 냉철한 두뇌로 새로운 발견을 입에 담기보다 뜨거운 혀로 평범한 원리를 이야기하는 편이 살아있는 것이라고 믿네. -197쪽
아무리 그의 머릿속이 위대한 사람들의 이미지로 가득 차 있어도 그 자신 스스로가 인간미를 겸비한 사람이 되지 않는 이상 그런 건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난 이미 깨닫고 있었네. -247쪽
다시 말해서 난 정직한길을 걸어갈 생각을 하면서도 발을 헛딛는 바보였네. 혹은 아주 교활한 남자였지. 그리고 그 사실을 아는 건 오늘날까지 하늘 아래 오직 나의 마음밖에 없네. -313쪽
작은 아버지에게 배신당했을 때 사람은 믿을 게 못된다는 점을 절실히 느낀 건 사실이지만 그건 타인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지 내 자신에게만큼은 그때까지만 해도 확실한 믿음이 있었네.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나 자신은 멋진 인간이라는 신념이 마음속 어딘가에 있었단 말이지. 그 믿음이 K로 인해 무참히 깨져버리고 나 자신도 작은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마음은 심하게 흔들리게 됐네. 인간들에게 등을 돌린 나는 결국 나 자신도 저버리고 닫힌 공간에 날 가두게 된 것이지. -329쪽
이 세상에서 내가 유일하게 믿고 사랑하는 사람마저 날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생각하니 씁쓸했지. 이해시킬 방법은 있지만 이해시킬 용기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 더욱 슬퍼졌네. -3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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