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 (파울라 헤르난데스)

갑자기 빗속으로 뛰어든 사람과의 우연한 만남. 우연한 교감. 

사실 내 이야기를 하기 가장 편안한 상대는 매우 오랜시간 동고동락해온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지속되는 빗소리에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은 세계 어디든 마찬가지인가보다.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던 마음들이 슬며시 흘러나오며 그렇게 소통해 나가는 영화. 

전주에 가면서 유일하게 골라갔던 영화다. 하하. 뭐, 순전히 제목때문이었고, 내용도 내용이지만, 일단 빗소리는 정말 실컷 들을 수 있었던 것 같다. 



* 테라마드레 (에르마노올미)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감독도 배우(?)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말이 필요 없다, 라는 말을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일까. 그저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이 삶이 어떻냐고, 훨씬 가치 있어보이지 않느냐고 영화는 관객들에게 묻는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잘 말하는 법을 아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테라마드레는 전세계적인 슬로우푸드 운동을 일컫는 단어이다. 영화를 함께 본 블리언니는 우리가 생명을 경시하는 이유가 어쩌면 우리 스스로를 살리는 일에 귀한 노력과 마음을 들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언니의 생각에 정말 공감한다. 

영화 중간에 철저하게 가난과 무소유를 몸으로 살다 간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는 그 사람의 삶을 보며 권정생 선생님이 떠올랐다. (그러고보니 오늘이 권정생 선생님 2주기네) 혼자서 그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혼자만의 삶으로는 그 무엇도 바꾸지 못하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나를 포함한) 그냥 거기 존재했다는 것만으로도, 이후의 사람들에게 그런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쳐준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되어버린 사람들. 당장 무엇을 바꿔내지 못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은 그 자체가 명확한 기준이 되어 일침을 가하는 듯하다. 


 


* 요시노 이발관 (오기가미나오코)

오기가미나오코 감독의 데뷔작. 정말 대단하잖아. 데뷔 때부터 이런 똑똑한 영화를 만들었다니. 

요시노이발관은 가장 멍청한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가장 똑똑하게, 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쉽지만 제법 진지하게 하고 있는 영화이다. 왜 아이들은 모두 바가지머리를 하고 있어야 하는지, 왜 산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할렐루야'를 불러야 하는지,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 것들에는 이상한 것들 투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에 다가오는 전학생들을 낯설어하지 말고, 그들이 우리의 삶에 던지는 물음들을 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겠다. 우리의 관념, 우리의 신앙, 우리의 삶 속의 작은 습관들까지도. 

2003년 제작되어 국내에는 2006년 전주에서 상영되었는데 다시 보고 싶은 과거 영화제 영화로 선정되어 올해, 다시 전주에서 만날 수 있었다. 절대 '서울로 안올라올 것 같은 영화'들만 보자고 했는데, 이건 데뷔작이어서 안올라올 줄 알았는데 6월 18일, 서울에서도 이 영화를 만날 수 있게 됐다. 우리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참 기쁘다. 이런 재밌는 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흐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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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9-05-17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시노 이발관 정말 느무느무 기대중. ㅎㅎㅎ
<비>도 괜찮을 것 같아요~~

웽스북스 2009-05-18 00:44   좋아요 0 | URL
흐흐 네네 전주에서 만난 세 영화 모두 좋았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