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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마르탱 파주 지음, 이상해 옮김, 발레리 해밀 그림 / 열림원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가끔 책을 읽기도 전에 첫마디에서 그 책을 대하는 내 마음이 '헤에...^____________^' 하고 무장될 때가 있다. 동동주 한잔을 마신 알딸딸한 지하철에서 K에게 받아온 이 책의 첫머리를 읽는 오늘 내 마음이 딱 그랬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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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세상이 잠시 정지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패스워드다. 비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 그것은 다름을 긍정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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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좋은지, 눈이 좋은지, 뭐 이런 질문을 받게 되면 나는 고민 끝에 비를 좋아한다고 답해왔던 것 같다. 눈은 소리없이 내리지만 비는 소리와 함께 내리는, 시각적 예술성과 청각적 예술성을 겸비한 자연현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나는 소리없이 내리는 비보다 조금은 굵고 시원하게 내리는 비를 좋아한다. 눈은 통유리 안에서 볼 때 아름답다고 우스개처럼 말하곤 하는데, 비는 방음이 잘되는 통유리 안에서 보는 것은 매력이 없다. 무엇보다 비듣는 소리와 함께 보아야 제격이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나 역시 비로 인해 잠시 정지하는 그 세상의 풍경이 좋았나보다. 그리고 어쩌면 그와 함께 나도 잠시 정지하고 싶었나보다.
저자는 '눈을 내리깔도록 요구하는 일종의 복종의 상징'인 태양보다는 우리로 하여금, 독서를 하고, 영화관에 가고,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또한 예술가는 작업을 하고, 병사들을 막사에 머물도록 하는 비의 힘을 믿는다. 중요한 행사를 망치게도 하고, 우리의 삶의 균형을 잃게도 만드는 비이지만, 그런 '질서정연함'에 대항하는 '시적 무정부상태'에 도래하게 하는 비를 보며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다. 사람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무언가를 해결하려 애쓰는 것은 바로 이렇게 머리에 무언가를 맞은 순간(물, 비극, 사랑의 슬픔 등)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비 때문에 수없이 많은 전쟁들이 무위로 끝날 수 밖에 없었다며, 비는 '노벨 평화상'을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나는 잠시, 노벨 평화상 수상자에 비가 호명되는 순간을 상상해 본다. 얼마나 즐겁고 낭만적인 일인가. 이쯤 되면 자격은 정말 그 누구보다 넘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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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어린 시절의 유전자들을 품고 있다. 우리는 호스로 물을 뿌리며 장난을 쳤고, 물웅덩이에서 폴짝폴짝 뛰었고, 신이 나 물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물론 이젠 어른이 된 듯하기 때문에 우리는 실수를 가장해 도랑에 발을 빠뜨리고는 짜증이 난 것처럼 연기한다. 하지만 실제로 튀는 물에 젖는 것은 우릴 즐겁게 한다. 바지, 양말이야 젖건 말건, 어린 시절이 하늘에서 떨어진다. 우리는 남몰래 지저분한 개구쟁이로 되돌아가는 것을 자신에게 허락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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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비가 오는 날이면 스커트를 입거나, 발목 아래로 내려오지 않는 짧은 바지를 입고, 가급적 젖지 않는 신발을 신고는 길을 걸으며 횡단보도 앞 물웅덩이가 파인 쪽으로 일부러 퐁당 하고 발을 담그곤 했던 것 같다. 바지가 젖는 게 싫다며 온갖 무장은 하지만, 나도 모르게 발등에 찰랑 하고 와닿는 차가운 감촉이 주는 나름의 쾌감이 있었나보다.
우산이 없다는 핑계로 작은 바다의 양과 흡사할 정도로 쏟아진다는 비를 맞으며, 흠뻑 젖어 집까지 뛰어간 그 생생하던 순간도 기억난다. 나는 그 때의 느낌을 잊지 못한다. 온 몸에서 뚝뚝 물이 떨어지는데, 몸은 덜덜 추운데, 오히려 온몸이 흠뻑 젖으니, 그렇게 몸과 마음이 시원하고 좋을 수가 없다. (그리고 따뜻한 물로 샤워하는 느낌은 더욱 브라보!) 더 이상 분수대 같은 곳에서 아이처럼 나를 흠뻑 적시며 놀 수는 없다는 걸 알기에, 무의식중에 그런 흠뻑 젖는 시원함에서 오는 즐거움을 허락한 건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타인의 눈에 (우산이 없어서) 불쌍해는 보일지언정, 미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을테니. 어쩌면 내가 굳이 우산을 잘 들고 다니지 않는 데는 이런 무의식적 이유가 숨어있었던 건 아닐까?
집에 오는 길에 다 읽을 정도로 짧은 분량이지만, 이 책은 아무래도 빗소리를 좀 들으며 한 번 더 봐야겠다. 비오는 날 창문 열어놓고 전기장판 뜨끈하게 데워놓고 뒹구르르 하며 맘껏 무장해제한 마음으로. 그리고 잠시 비를 맞으러 나가도 좋겠다. 저자의 말처럼, 그 비가 딱딱한 바닥이 아닌, 따뜻하고 포근한 우리 위에 떨어질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