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M은 최근 교회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좀 많이 보고픈 웬디누나'라고 나를 지칭했는데 사람들 사이에 웬디가 누구냐는 파문을 일으켰다. 선아가 없는 걸 보니 선아가 웬디인가봐,라는 추측에 S집사님, 어? 웬디는 작고 귀여운 요정이잖아 -_- 너무해요 집사님. 크고 안귀여운 나는 가서 '작고 귀여운 요정은 팅/커/벨이에요 흑'이라고 말해줬다. M아 민망하다. 다음부터는 그냥 이름 써주라)

M이 편지를 써달라고 하는데, 난 동생이 군대에 있을 때 한번도 편지를 쓰지 않은 죄인이라 M에게 편지할 수가 없다고 했다. 내가 M을 아무리 이뻐라해도, 동생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이러면서 -_- 그런데 벌써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M의 부재를 느끼는 건 능숙한 반주자가 사라진, 사모님의 가끔 틀리는 반주 소리를 들어야 하는 찬양 시간이 아니다. 그 시간은 이미 각오한 시간이었으니까. 난 아동부 예배를 마치고 늘 간이의자에 앉는다. 그리고 M은 마지막 반주를 마치고 내 옆에 와 앉았다. 우린 그냥 아무 말 없이 앉아 있거나, 예배시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거나 했다. 이건 그냥 일상적인 시간이어서, 미처 각오하지 못했던 시간이었다. 허전함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느껴지더라.

2

저녁엔 인사동에서 친구들을 만났다. 대학 동기인 우리는 숟가락 친구들,이라는 별칭이 있다. 같은 선생님 밑에서 같은 걸 배우며 자란 우리는 서로 매우 개성있다,고 여기지만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는 비슷비슷할 거다.

나는 내가, 우리 학교 내에서 나름 시니컬한 편인 우리 친구들 중에서도 나름 시니컬한 편에 포지셔닝돼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학교 사람들이 아닌, 다른 그룹의 사람들을 만날 때는 사람들이 나를 너무 반듯한 이미지로 봐서 당황스럽다고 이야기했다. 그녀들은 내 말에 맞장구를 친다. C양왈 "야야 나도 완전 긍정적인 이미지잖아" Y양 왈 "나는 천연기념물이라고 그러더라" 그리고 덧붙이는 한마디의 말에 난 또 쓰러진다

"사람들이 나한테 물어보잖아, 도대체 니가 말하는 광란의 밤,의 의미는 뭐냐고 -_-"

3

이제 우리는 곧 스물 아홉이다. 아무래도 내년에 결혼을 할 것 같은 Y는 대학원 진학과 결혼 두 가지를 모두 해내야 하는데 만만치 않은 현실이 고민이다. C는 회사에서 인사기록표를 작성해 내면서 자신이 작성할 게 없었다,며 본인이 빈칸 인간이 된 것만 같아 자기 발전을 위한 한 해를 보내야겠다고 결심했단다. R은 그토록 하고싶어하던 다큐멘터리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문화인류학과 영상을 함께 전공하는 프랑스의 학교를 찾아, 2월, 랭귀지부터 시작해야 하는 막막한 유학길에 오른다.

그리고 나는, 모르겠다. 올 한 해는 안주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쓰면서 이런 저런 도전을 했고, 여러 번 좌절을 했으며, 지금은 그냥 안주해버릴까,라는 생각을 했다가, 떨쳤다가, 했다가, 떨쳤다가, 하고 있는 중. 적당히 안정적인 직장에서 이제 일도 많이 익숙해진, 가끔 야근이 많아 피곤하지만, 좋은 사람들과 일해서 다행스러운, 현실에 안주하려면 뭐 할 수도 있겠다. 

돈도 별로 없으면서, 몸값 올리기,는 늘 내 관심사의 밖에 있다. 올 한해 관심 가졌던 곳들을 보면 그렇다. 나는 그런 곳들은 내가 '마음을 먹으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며 힘들게 마음을 먹었는데, 우습게도 마음을 먹는 것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덕분에 준비되지 않은 나 자신에 대해 많은 것들을 느끼고 반성할 수 있었던 한 해였다. 그렇지만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는 여전히 막막하다. 어쩌면 자기개발,과는 거리가 먼 나의 새해 계획은 현실성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그냥 몸값 올리기,에 충실하는 삶이 더 편하고 쉬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는 지금의 방황들을 그만두고, 그 길을 선택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또 그 확률이 결코 적지만은 않음을 알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닌 듯 하다.

역시나 이나이 먹도록 무엇 하나 확실한 것 없는 우리들. 다시 뭔가에 도전하고, 여전히 끊임없이 고민하는, '안정'과는 거리가 먼 우리들의 삶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황스럽지는 않다. 안정,이라는 건 어쩌면 찾아오지 않을 그 무엇인지도 모른다. 평생. 그러니 내가 지금 안주를 선택한다해도, 나는 여전히 흔들리고 또 흔들릴 예정임을 안다. 

4

돌아오는 길 지하철, 책을 읽으며 앉아있는데, 옆자리 아주머니가 자꾸만 내게 기대온다. 그런데 무의식적으로 기대는 게 아니라, 좀 의식적으로 기댄다는 느낌이 든다. 기댔다가, 몸을 뗐다가, 하는 주기, 혹은 상황을 살피면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 살짝 술을 한 잔 드신 듯한 이 아주머니는 자다 깨서 자꾸만 누구에게 전화를 건다.

나에요, 나 술을 좀 마셔서 지하철에 돈도 안내고 탔어요. 그냥 담 훌쩍 넘어서.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겠어요.

누군가에게 계속 이 얘기를 하고 싶었나보다. 내가 지금 지하철에 돈도 안내고 타는 일탈을 감행했으며,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나 상대는 모두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지 않는 것 같다. 자꾸만 다른 누군가를 찾는 것을 보니. 피곤한 육체를 내 몸에 기대는 아주머니는, 다른 누군가에게 그 곤한 마음을 기대고 싶었던 것 같다.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피하던 내가 아주머니의 마음에서 외로움을 읽어내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상대방의 이런 마음이 읽힐 때마다, 나는 묘한 마음이 되곤 하는데, 내가 이렇게 상대방의 마음이 보일 정도로 나이를 먹었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그게 실은 곧 내 모습이기에 더 알기 쉽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화를 끊은 아주머니는 누군가에게 기대는 것을 체념했는지 차가운 지하철 의자 옆 쇠기둥에 몸을 기대어 잠이 든다. 사람에게 기대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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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스물아홉, 귀차니즘
    from 지극히 개인적인 2008-01-24 00:16 
    실은 내가 삘받으면 좀 오버스럽다 싶게 챙기는 편이다. 학교 다니던 시절 학보사 동기였던 K가 군대를 갈 때, 동기들의 편지를 쌩오버를 해가면서 다 받아내고는 그걸 접착식 앨범에 친구들 사진 한장씩과 함께 붙여서 전달해줬었다. 실은 K와 내가 그렇게 친했던 것도 아니고, 별 감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괜히 '동기가 군대에 간다'는 사실 자체에 좀 취해 있었던 것 같다. 과도한 의미부여랄까? 연대의식 강한 연극영화과에 다니던 친구 P가 동기사
 
 
Mephistopheles 2007-12-24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는 일도 어려울 뿐더러 기댈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점점 어려워지는 듯 합니다.^^

웽스북스 2007-12-24 09:52   좋아요 0 | URL
아울러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일 또한 어렵죠-
세상엔 어려운 일 투성이인 것 같습니다

무스탕 2007-12-24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가 없어 내가 허전할거라는거 알면 대처하기 좋을까요..?
그냥 그렇게 익숙해 지는거.. 조금 아쉽기도.. 조금 쓸쓸하기도..

웽스북스 2007-12-24 12:13   좋아요 0 | URL
알더라도, 사실 존재 자체를 그 무엇으로 대처할 수 있겠어요
그냥 각오하는 거죠

깐따삐야 2007-12-24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예기치 못한 순간에 느껴지는 허전함. 혼자 속으로만 짠-하죠.
2 웬디양님 반듯하고 조신한 거 맞는 것 같은데요.
3 우리가 벌써 스물하고도 아홉이군요. 되게 늙어보인다.ㅋㅋ
4 이젠 어른이어서 그런가. 기댈 때도 폼을 중시한다는.-_-

웽스북스 2007-12-24 12:14   좋아요 0 | URL
1. 의외로 사소하고 작고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그런 경우가 많아요
2. 이봐이봐 이렇다니까요 ;;
3. 그죠. 스물 넷쯤에 싱글즈를 보면서 저 나이는 아직 멀었다고만 생각했었는데
4. 역시 나이가 들면 '가오'로 먹고 살아야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