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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인물들과의 송년회. 흐흐. 올해의 인물은 그야말로 올해 알게된 사람들인데, 어느덧 이들이 없는 올 한해를 상상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소중해져버린 사람들. 네이버에 있는 책모임에서 만났는데, 언제부턴가 이 사람들의 모임에 그 책모임의 이름을 붙이기가 어색해지던 순간, 내가 이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영역의 소중한 자리를 떼주고 있음을 알게 됐다. 아무리 시간을 맞추고 맞춰도 어려워 결국 내가 약속 하나를 버리기로 했다. 이들과의 송년회를 하지 않는다면 한 해를 보내는 일이 허전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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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모임에 가기 전에 M언니와 함께 G언니의 가게로 갔다. 언니가 매니저로 있는 아름다운 가게 00점은 웅진에서 후원하는 곳이어서 2층이 어린이 도서관 겸 헌책방으로 꾸며져 있고, 올해 나는 몇번 그곳에서 책정리를 했다. 웅진 '마술피리' 시리즈 어린이 도서가 있는데, 요 시리즌 아주 사람 정리벽을 제대로 발동시킨다. 책마다 크기가 다 다르다는 거. 1권과 6권의 크기가 똑같은 경우도 있다는 거. 그리고 모든 책이 여러 권 있다는 거. 다 여기저기 꽂혀져 있는데 식별할 수 있는 코드는 위에 '마술피리'라고 써있는 정도라는 거. 나는 특유의 집착을 발휘해 마술피리 도서를 보기 좋게 정리했었는데, 다음번 정리하러 갔을 때 2층에 올라가려는 날 보며 언니가 '선아야, 너무 상처받지 마'라고 말하고, 나는 올라가서 바로 OTL 그 이후로는 좀 '덜 집착'하게 됐달까. 하지만 매장에 처음 간 우리의 M언니, 80권짜리 과학 전집에 꽂혀버린 사건! 그 이후로는 말하지 않아도 상상이 가능하겠다
두번째로 한 일은 들어왔던 기증도서 중 상품가치가 없는 책들을 빼서 버리는 일. 정말 버리자니 한도끝도 없다. 순천여고 학급 문집, 10년 넘은 지도책, 그 외 정말 말도 안되는 책들.... 기증을 쓰레기 버리기를 좀더 이타적으로 승화시킨 행위,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것들은 폐지 주우시는 할머니들에게 드릴 예정이라고 하시는데, 가격표를 떼라고 말하는 게 의아해 물어봤더니, 가격표 붙은 책들은 가져와서 환불해달라고 하는 분이 계신단다. 둘 다 속상한 일이다,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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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모임 장소였던 대학로의 '담아'는 한 팀만을 위한 집,이라는 컨셉이다. 다소 허름한 가게에 테이블은 딱 하나. 4인-8인까지, 점심, 저녁, 각 한팀만 예약이 가능하다. 예약을 받으면 사람 수에 맞게 식재료를 사와서 예약된 시간에 식사가 가능하도록 세팅해 주신다. 박완서를 좋아하고, 차를 좋아하는 우리의 H님은 여기 사장님의 취향과 딱 맞아 떨어져 아주 이쁨을 받으셨다. 만들어주는 음식 맛있게 먹는 거 보고 싶어서 식당을 내신 분 같았다. 우아한 소녀취향,이랄까? 하하
음식 맛도 깔끔하다. 계속 푸짐한 메뉴가 나와서 감탄에 감탄을 하며 잘 먹었다. 가격은 1인당 3,4,5만원 코스가 있다는데, 우리는 2만원인 줄 알고 예약을 해서, 그냥 그 가격에 맞춰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와인은 가져가면 컵을 준비해 주신다. 콜키지는 따로 받지 않는다. 와인 맛과 잘 어울리는 담백한 메뉴가 나오면서도 콜키지를 받지 않아 와인 동호회들의 모임이 많다고 한다. 우리도 내년에는 책동호회 말고 와인동호회로 바꿔볼까, 막이랬다 ㅋㅋ
식재료 좋은 거 쓴다는 자부심, 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으신 듯한데, 그날 쓴 홍합이 살짝 싱싱하지 못했던 것 같아 오늘 아침에 속이 약간 부릉부릉했다. 난 단순무식한 미각을 가지고 있어 맛있게 먹었는데, 우리의 장금이 G언니의 예리한 미각은 잡아낸 것이지. 사장님께 전화를 하면 분명 너무너무 속상해하실 분이셔서, 그냥 넘어간다. 음식 맛은 괜찮은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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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준비해간 책 혹은 음반들을 다 꺼냈다. 나는 루시드폴의 국경의 밤 앨범을 가져갔다. 하나 더 산다는 심정으로. 역시 나만 음반을 가져왔다. 나머지는 책. (우리 나름 책모임이었거덩) 나는 책은 한권만 고르기가 어려웠지만, 음반은 올 가을 폴아저씨 음반을 너무 많이 들었다. 그런데 음반을 소개할 때 약간 취기가 올라와 "그냥, 디게 많이 들었거든요- 디게 좋아요" 요 수준의 유치버전 소개를 해버렸지 하하
G언니는 올 한 해, 그 무엇도 자신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킨 것이 없다며 아름다운 가게의 커피 히말라야의 선물을 사람수에 맞춰 가져왔다. 이 커피는 남편이 없는 네팔 여인들이 손으로 만든 거에요. 가끔 이 커피의 맛이 섬섬한 건, 그 여인들의 섬섬한 마음이 들어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라는 언니의 말. 아, 섬섬한 커피의 맛을 저렇게 설명할 수 있다니. 그래 이 커피의 마음이 책 한 권, 음반 하나보다 감동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래서 언니의 매력에서 못헤어나오지. 하하하! 알라딘에도 얼마 전 히말라야의 선물이 들어왔다. 난 앞으로 계속 G언니에게 사먹을 생각이지만.
이 책 음반들을 경품으로 걸고 우리는 서로의 내년의 노래를 맞혔다. 지난 번 책 맞히기 게임에서 당당하게 1등을 자랑했던 나는 이번에 양보해서 진행을 맡았다. 흐흐 이번에도 참여했음 1등을 했을 거다. 역시 내 노래는 다 맞히더라. 하하하! -_- ㅋㅋ
노래를 들으며 이름하야 롤링 크리스마스카드를 쓰는데, 고맙다,는 말을 나도 모르게 계속 하게 됐다. 남이 쓴 거 보면서 깔깔대기도 하고, 짠한 마음도 들고. 이 얼마만에 롤링페이퍼냐며, 그래도 나름 즐거웠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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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머리가 아팠던 건 책이름대기 게임이었다. 얼마전 알라딘 블로그에도 올렸던. 나는 안읽었는데 남들은 다 읽었을 것 같은 책 이름을 대는 게임이었는데, 서로의 책읽는 취향들을 잘 고려해서 답해야 하는 거다. 읽은 사람 1명당 1포인트. 다들 내가 이 책을 왜 읽었을까, 후회 막급. 우리의 H님은 '내가 어린 왕자를 왜 읽었을까'라며 원망했다. 가위바위보에서 진 죄로 제일 먼저 책이름을 댔던 나는 고심 끝에 '아리랑'을 댔다. 아리랑을 대고 4포인트나 얻다니. ㅋㅋ 그많던 싱아는 누가 다먹었을까,를 댄 G언니와 공동 1위. 영웅문을 대고 0포인트를 획득한 B언니는 아직 우리 취향 파악이 덜된 듯 하더니, 다음 라운드에서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이야기해 홈런을 친다. 나머지 5명 모두 읽은 사건 ㅋㅋ 나는 야심작 '폭풍의 언덕'을 꺼냈다. 3포인트. (우씨, 그걸 안읽은 사람이 나말고 또 있다니) 7점으로 G언니와 공동 1등, 역시 했다하면 1등, 승부에 집착한다. (^)_(^) 공부를 그렇게 했다면....(-)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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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시간이 짧다. 저녁 늦은 시간에 만났더니. 그러므로 우리는 신년모임을 약속한다. 하지만 알고보니 다음날 H님 둘째 다야 돌잔치에서 만나기로 돼있었던 사건. 흐흐. 하튼 단순한 우리들. 돌잔치는 잘 다녀왔다.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누군가를 보다가, 그 사람이 속한 세계와 함께 그 사람을 보게 된다는 건 참 새로운 경험이다. H님은 나이도 나보다 한살 밖에 많지 않은 데다가 초 동안이어서 애 둘 아빠라고 하면 다들 놀란다. 가정이 있는 H님을 자주 불러내서 노는 게 좀 미안하긴 했는데, 가족들도 보고, 말로만 듣던 애들도 보고 하니, 참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늘 우리가 걱정하던 H님의 부인께(부인이라고 하니 좀 그렇긴 하다만, 어휘력이 쫌 짧은 관계로) 인사드리고 담번에는 같이 보자고 약속도 잡아놓는다 ^^ 아빠가 차를 좋아하고 자연을 좋아해서 첫째 이름은 다산이, 둘째 이름은 다야다. 셋째를 낳으면 다해라고 지을 예정인데, 다해 소식은 아직 감감 ^^ 올 한해 H님 덕분에 차 마시는 입맛만 고급이 돼버렸다며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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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또 주말을 보낸다. 쌓여있는 옷가지들이 나좀 치워줘-라며 간절한 눈빛을 보내지만, 난 가뿐히 외면해준다. 미안해 얘들아, 선거날 치워줄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