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런던에 온지 이주가 지난 어제서야 처음으로 미술관(혹은 박물관)에 갔다. 학원에서 함께 영어를 배우는 외국인 친구들은, 한국인들은 누구나 일본어를 잘 한다는 이야기는 철썩같이 믿으면서 내가 아직 영국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보지 않았다는 말에는 경악을 한다. 이제 더 이상 그네들을 당혹스럽게 할 수 없어 아쉽긴 하지만 나도 더 이상 갤러리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내셔널 갤러리를 전부 둘러 볼 수는 없다. 주로 거닌 곳은 19세기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이 많이 걸려 있는 방들이었다. 회화 유파로 말하자면 주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세잔의 그림을 보러 간 것이고. (아쉽게도 내셔널 갤러리는 세잔의 작품 등 19 세기 말 유럽 화가들의 작품에 강점이 있는 미술관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세잔의 작품 앞에서 감동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간 도판으로나마 세잔의 그림들을 많이 보아왔었고 그에 관한 글들도 많이 읽었으니까. 그런데 막상 세잔의 그림 앞에 서 있게 되자 별 감흥이 나지 않았다. 세잔은 자연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심사숙고하며 붓 터치 하나 하나를 더해가는 작가로 유명하다. 그러나 내가 그의 그림에서 발견한 것은, 말하자면 부주의하게 물감을 덕지 덕지 바른 흔적들이었다.

본 것이 그러하므로 나는 개념적 접근을 나 자신에게 허용할 수 없었다. 예를 들면 세잔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표면적 가벼움을 일종의 무게감, 깊이로 대체하고자 했다고 말해진다. 회화는 색들의 조화이고 대상들은 색면의 담지자이기 때문에 대상들 사이의 관계, 즉 구성에 심혈을 기울인 화가라고 말해진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에서는 색면을 약화시키는 전통적인 원근법이 무시되고 화면에 깊이와 질량감을 부여하기 위해 이러 저러한 기법들이 동원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나 자신에게 세잔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내가 본 것들이 해명될 수는 없었다. 나는 이 방 저 방을 둘러보다 몇 번이고 세잔을 다시 찾았다. 그러나 세잔에게서 발견한 뭔가는 없었다. 일단 퇴각.

내가 둘러 본 방들에서 가장 인기있는 화가는 단연 반 고흐였다. 특히 해바라기. 사람들이 해바라기 그림 앞에 죽 둘러서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그림을 건너 뛰어야 했다. (요즘 시력이 좋지 않다-.-) 나를 가장 즐겁게 한 화가는 르느와르. 파스텔풍의 화려하고 부드러운 작품들. 깜짝 놀랐던 건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얼굴 중 하나는 런던에서 흔히 마주치게 되는 얼굴이라는 것. 중년이 되어 비만하게 될 징조가 보이는 평범한 영국 소녀의 얼굴.

내셔널 갤러리를 나와 레이캐스터 레스터 역까지 걸어갔다. 그 근방에 중고 서점들이 있다는 걸 기억해 두고 있었다. 서점 서너 군데를 돌아 책 네 권을 샀다. 에릭 호퍼의 책, 마이클 더밋의 책, 세잔의 편지 모음책, 세잔에 대한 책. 그리고 한국으로 치면 교보문고 격인 Foyles라는 서점엘 갔다. 사고 싶은 책들이 엄청나게 쌓여 있었지만 점만 찍어둘 수 밖에. 런던을 걷다보면 발에 채이는 것이 스타벅스다. 거기 들어가서 책을 읽으려다, 이제부터는 먹을 걸 아껴 책을 사야 겠다 싶어 과감히 포기. 내셔널 갤러리 근처에서 모짜르트의 아이네 클라이네 나하트 뮤지크를 연주한다는 광고판을 본 기억이 났다. 가증스럽게도 연주 날짜는 "TODAY"! 길을 걷다 마주친 "피그말리온" 공연을 알리는 광고판도 외면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한국에서는 가방 안에 버나드 쇼우(인간과 초인, 피그말리온, 인간과 전쟁, 핫브레이크 하우스)를 상시 휴대하고 다니던 내가 아니던가! 차라리 굶겨 죽이라.

저녁 무렵의 런던은 혼잡 그 자체다. 인도에는 쓰나미같이 왕성한 사람들의 무리가 있다. 도로에는 이층버스, 버스를 두 개 붙여 놓은 이량버스, 정장에 핼멧, 쌕을 메고 신나게 자전거를 밟아대는 퇴근길 직장인 부대, 거칠게 거리를 질주하는 시대착오적으로 둔탁하게 생긴 택시들, 심지어는 인력거까지, 아 그리고 (나를 포함하여) 아무 데서나 도로를 건너는 사람들, 아 거기다가 올림픽한다고 도로 곳곳에 벌여놓은 공사판까지! 런던이 거대한 국제도시임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이다. 갑자기 사뮤엘 존슨의 시건방진 말, "런던에 싫증난 사람은 인생에 싫증난 사람이다."라는 말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당신이 조용히 책 읽는 걸 좋아하든, 클럽에서 온 몸을 흔드는 걸 좋아하든, 음악을 좋아하든, 연극을 좋아하든,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담소하는 걸 좋아하든, 담배 연기 자욱하고 음악 소리로 귀가 멍멍한 펍에서 새로 만난 위험한 남자와 떠들고 춤추는 걸 좋아하든, 이 놈의 도시는 다 받아줄 것만 같다. 정말 그렇다. 여긴 그런 동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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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9-02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leiceter는 '레스터'라고 발음하지요 ^^

weekly 2011-09-03 06:52   좋아요 0 | URL
^^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영국의 모든 것이 낯설지만 지명 스펠링과 발음은 특히나 익숙해 지지 않는군요. 아이폰 지도 앱을 들고 있어도 지명 스펠링을 맞게 입력할 자신이 없어 무용지물일 때가 많다는...-.-
 

친구 하나와 저녁 무렵에 펍(한국으로 말하자면 호프집)에 가서 치킨에 맥주를 먹고 한참 런던 거리를 쏘다녔다. 여기는 저녁 무렵이면 이미 서늘하다. 작으마한 프랑스 과자를 하나 사먹었는데 우리 돈으로 무려 3000원 정도 한다(게다가 너무 달다!). 닐스 야드라는 데서 커피. 한 잔에 1.5 파운드. 에소프레소 더블인데도 한국보다 오히려 싸다(점원이 싱글? 이라고 묻는데 나는 고집스럽게 투 샷이라고 대답했다.-.-). 

헌책방에 가려고 했었는데 이미 9시가 넘어 책방들이 문을 닫았을 것 같았다. 여기는 6시면 대충 영업을 종료한다더라. 스타벅스까지 포함해서. 그런데 책방 하나에 불이 환했다. 기억하기로 "I LOVE SOHO"라는 간판을 단 가게였다. 윈도우 넘어로 남성 누드집이 눈길을 끌었다. 예술 계통 책을 파는 것 같았다. 세잔이나 바우하우스라는 제목을 단 큼직 큼직한 판형의 컬러 도판 책을 8파운드(우리 돈으로 만사오천원 정도)에 팔고 있었다. 물론 헌책일 거다. 사고 싶었지만 이미 돈을 다 써버린 후였다. 지하에도 서가가 있기에 계단을 내려가다 중간쯤에서 다시 올라오고 말았다. 포르노 잡지와 성인용품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층에도 그런 책들이 있다. 기억하기로 "Big penis book" 이란 제목을 가진 3D 책 같은 거. 3D 안경이 딸려 있어서 시시를 해보았다. 재밌었다. (바로 옆에 "Big breast book" 정도로 기억되는 3D 책도, 물론 있었다)

책방을 나와 지하철역을 향해 걷는데 불이 환한 또 다른 헌책방 하나가 보였다. 작으마한 책방이었다. 탐정 소설과 과학 소설이 책장 하나씩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영국이니까?) 별도의 실내 유리문 너머로 고서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는 방이 보였다. 파우스트 박사의 서재쯤 되나 보다. 나의 용무와는 거리가 있다. 무시. philosopy라는 레벨이 붙은 서가를 찾았다. 책장 한 칸 정도 분량 밖에는 안된다. 책 한권이 눈에 들어왔다. 에릭 호퍼의 "The true believer". 에릭 호퍼는 평생을 부랑하며 육체 노동으로 먹고 산 사람이다. 철학책을 내어서 그런지, 그것과 상관없이 그의 삶 자체가 그래서 그런지 에릭 호퍼에게는 철학자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다. 나는 그의 자서전을 읽었고 그의 책을 구하고자 했었다. 그러나 죄다 절판이라 좌절. 주머니 속에서 1 파운드 짜리 주화 몇 개가 굴러 다니고 있었지만 책값 5 파운드에는 미치지 못했다. 내일을 기약하자. 어짜피 나 말고는 살 사람이 없을 것이다. 가게 주인이 주섬 주섬 정리를 시작한다. 집에 갈 시간이다.

다정하게 손을 붙잡고 다니는 게이 아저씨도 있고, 행인에게 담배를 청하는 청년도 있고(한국적이다!), 우루루 몰려 다니는 파티 걸들도 있고, 런던의 모든 것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듯 카메라에서 눈을 떼지 않는 중년의 여성도 있다. 그것들을 뒤로 하고 지하철에 올라 읽다만 가디언을 펴들었다. 머릿 기사는 homeless가 중산계층마저 위협하고 있다는 분석 기사. 가디언은 조금 암울하다. 가디언은 영국의 양극화 문제, 주택 보급률 문제, 청년 문제들을 햇빛 아래 드러내어 놓으려고 애쓰고 있다. 그것들을 죽죽 읽어나가다가 예술 섹션을 펼쳐들었다. 눈길을 잡아 끈 것은 로열 앨버트 홀에서 있을 이번 주 "BBC Proms" 공연 광고. 오늘 학원에서 BBC Proms의 기원 등에 대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지하철 벽에 광고가 붙어 있는 것을 더러 보기도 했다. 나는 프로그램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내일이고 또 밤이다. 이번 것은 그냥 넘겨야 겠다. 어쨋든 밤은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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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짜지인 이브닝 스탠다드를 무시하고 1파운드(거의 2000원)를 주고 가디언을 샀다. 자유 학교 프로젝트에 hidden price가 있다는 사실이 누출된 이메일을 통해 드러났다는 게 첫 기사다. 물론 내막은 내가 모른다. 3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기사는 "Tax the rich, say the rich"다. 음... 좋다. 리비아와 관련한 기사들 중에서 내 눈을 끈 것은 "It feels good to be fighting for other people's freedom"이라는 한 반군 전사의 이야기였다. 분위기를 대충 알겠지?^^ 난 가디언 신문사에 매일 매일 1 파운드를 기부하기로 했다. (그리고 아울러 보수적인 시각을 대표하는 언론도 찾아볼 생각이다)

2. 어제 BBC4에서 러시아의 예술에 관한 다큐멘타리를 보았다. 한 마디로 충격. 어떤 그림이 있었는데 그걸 보면서 난 이렇게 말했다. "저 그림은 정말 충격인데." 친구가 말을 받았다. "그러네." 난 조금 더 나아가기로 했다. "저 그림을 보고나니 프랑스나 유럽 화가의 그림들은 다 장난같아 보여. 인상주의든 표현주의든 입체파든 뭐든 다 몇 무리의 화가 동아리 아니었을까? 지들끼리 밀어주고 당겨주고 띄워주던. 나중에 회화사를 쓸 때 정리하기에 요긴한 지표가 되긴 했겠지만..." 친구는 세잔에 무척 많은 애정을 갖고 있었고 근대, 현대 회화에 대한 많은 책을 읽은 터였다. 나 역시도 그 친구의 영향을 받고 있었고. 친구는 "그럴거야..." 하며 조용히 동의해 주었다.

(일주일쯤 후에 프랑스에 간다. 세잔을 찾아가는 여행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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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오늘(월요일)까지 휴일이다. 생각해 보니 영국에 온지 열흘이 넘었다. 그것 밖에 안되었나 싶어 새삼 놀랐다. 어제도 런던 이곳 저곳을 다녔다. 한 군데만 들자면 브릭 레인. 펑키한 차림새의 사람들, 담배를 손에 든 파티 걸들, 작은 종이 상자에 이국적인 음식을 담아 들고 걸으면서 먹는 사람들,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북적이는 펍... 오전에 갔었던 와이브릿지 근방 애슐리 파크의 조용하고 목가적이고 가족적인 풍경과는 또다른 장면이었다. 손자와 할아버지가 함께 낚시를 하던 모습 등등...

영국은 여행 가이드북이 필요없는 나라같다. 이쪽으로 걸으면 그곳만의 매력이 있고 저쪽으로 걸으면 또 그곳만의 매력이 있다. 시골 지역에는 온통 평지에 사시사철 푸른 잔디, 그림같은 집들, 나무들, 강들, 배들, 산책로들, 말들이 있다. 그리고 도심지역에는 돌로 된 웅장하고 오래된 건물들, 유리로 전면을 감싼 현대식 건물들, 이층버스, 잘 포장되고 걷기 좋은 도로들, 각종 미술관, 박물관, 수많은 인종의 사람들, 살 것들, 볼 것들이 있다. 그 밖에 각종 이벤트들. 주말에 노팅힐에서 있은 카니발이나 레딩 앤 리즈에서 있은 록 공연 등등. -멀리 걸을 필요도 없고, 힘들여 찾을 필요도 없다. 그냥 널려 있으니까...

나는 뭐, 무엇보다도 언어와 나의 촌스러움의 압박을 심하게 느낄 뿐이고... 내가 본 영국의 모든 것들은 유리창 저 넘어에 있다. 뭐 당연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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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재 전업 학생이다. 시간 여유가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거의 그렇지 않다. 그리고 매일 매일이 무지 무지 졸립다. 처음엔 시차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거 같고... 아마도 새로운 환경에서 받는,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스트레스때문인 것 같다. 내가 이 말을 했더니 친구들이 웃었다. 그래서 난 새로운 변명을 만들어 냈다. 부쩍 약해진 시력 탓이 아닐까? 이번엔 비웃음을 샀다...-.- 암튼 여차 여차해서 매일의 일상을 적어놓자는 계획은 그저 계획으로 남아있다.

1. 이곳 영국의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하는 말은 "sorry", "excuse me" "thank you" 등이다. 굉장히 사려 깊고 공중의식이 발달한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한번은 길을 걷는데 자전거가 오길래 길을 비켜 준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자전거를 타고 오던 아줌마가 나를 향해 활짝 웃으며 "땡큐"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감사의 말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 거기는 인도고, 너는 보행자이니 그 공간에 대한 우선권은 너에게 있다, 그런데 그 공간에 대한 우선권을 나에게 양보해 주었으니 고맙다. 내 생각에는 "sorry", "excuse me"라는 말이 사용되는 문맥의 거의 대부분이 공간과 관련되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물론 가장 기본적이고 기계적인 문맥이다.

영국의 사람들은 빨간불에도, 건널목이 아닌 곳에서도 예사로 길을 건넌다. 나는 이 사람들의 심리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한국에서 그랬기 때문이다. 보행권이 우선이고 시스템보다는 효율이, 즉 내 몸 편한게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한국의 거제도에서 살게 되기 전까지만 그랬다. 거제도에서 내가 배운 것은 보행권보다는 생명이 우선이라는 것이었으니까)

영국의 사람들은 보고 난 신문을 기차에 버려 두고 내린다. 그래서 기차가 종점에 가까와지면 좌석은 신문들로 뒤덮여 버린다. 나는 처음엔 차마 그걸 따라 하지 못했다. 그러다 곧 적응되어 버렸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텔레비젼 보는 것에 익숙해지면서 텔레비젼 시간표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영국에는 길을 걸으면서 담배를 피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주로 젊은 사람들이고 여자들도 많다. 어떤 여성이 담배를 피워 문 채 유모차를 밀고 가는 것을 본 적도 있다. 유모차 옆에는, 아마 딸인 듯한 아이가 따라 걷고 있었다.

한번은 내가 친구랑 나란히 지하철 연결통로를 걷고 있는데 어떤 큼직한 흑인 아저씨가 우리 곁을 크게 빙 돌아 비켜 간 적이 있었다. "excuse me" 하며 길을 비켜달라고 해도 되는 상황이었는데 아예 크게 반원을 그리며 비켜 간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아주 예쁜 여자 곁을 지나게 된 수줍은 남자나 택할 동선이리라.

영국의 사람들이 공중의식을 발휘하는 경우의 거의 대부분은 자신이 다른 어떤 특정 사람의 권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게 되는 때인 것 같다. 예컨대 그 사람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을 침해하게 되는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엔 우리가 공중의식이라고 일컫는 모습을 영국의 사람들에게서 찾아보기는 힘든 것 같다. 어쨌든 보고 난 신문을 기차에 버려두고 나온다고, 건널목이 아닌 곳에서 길을 건넌다고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2. 지금 런던은 조금 무섭다. 요즘 나는 저녁에 집에 올 때마다 역구내에서 공짜로 나눠주는 이브닝 스탠다드를 받아 읽는다. 이 신문은 조금 보수적인 것 같다. 요즘은 이민 규제나, 리비아에서의 영국의 역할을 축소할 것 등등을 매일 매일 주장한다. 어제 이 신문에 난 기사는, 경찰차에 누가 폭탄을 던져서 폭동 경보가 발령되었었다는 것, 이번 주말에 노팅힐에서 있을 카니발이 조금 위험해 보인다는 것, 영국으로 유입되는 이민이 20% 늘었다는 것, 싱가포르 출신의 캠브릿지 여학생이 버스에 치인 후 한참을 차에 질질 끌려가는 사고를 당한 후 병원에서 죽었다는 것 등등이었다. 한국에서는 듣기 힘든 뉴스들이고 미묘하게 인종적 문제와 연관될 수 있는 것들이어서 긴장이 되는 게 사실이다. (사실은 학원에서 알게 된 한국인 학생과 주말에 카니발에 갈까 했는데 그만 둬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기차 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나와 똑같은 기사를 읽고 있다는 사실이 그다지 유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3. 어제 BBC 1에서 토치우드를 처음 보았다. 닥터후 시즌1의 열렬한 팬이었기 때문에 토치우드를 찾아본 것이었는데 닥터 후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유머가 전혀 없었고 느닷없이 남성 동성애 장면이 등장했다. 두 남성의 전라와 성기가 자연스럽게 스쳐지나갔다. 사람의 이마에 총을 쏘니 이마에 총구멍이 생기는 장면, 주인공이 고층 난간에 서서 십자가 모양으로 팔을 벌린 후 뒤로 떨어져 자살하는 장면, 불사의 인간을 군중들이 칼과 도끼 등으로 끝없이 난도질하는 장면들이 화면을 휩쓸었다. 토치우드가 끝나고 곧 BBC 1 뉴스가 시작되었다. 한국의 드라마에서는 손에 든 흉기에 뿌연 안개 효과를 주고 거의 모든 프로그램에 시청가능 연령 표시가 된다. 나는 영국 텔레비젼의 적나라함에 적잖이 놀랐다. 친구 말로는 영국은 그나마 점잖은 편이라고. 유럽에서는 채널만 돌리면 다 그런 성적인 장면이라고.

4. 요즘 영국의 신문(내가 본 것은 이브닝 스탠다드), 텔레비젼(내가 본 것은 브렉퍼스트)이 난리를 피우는 소재 중 하나는 앤 해서웨이가 최근 개봉한 한 영화에서 영국 요크셔 액센트를 엉망으로 처리했다는 것이다. 어제 저녁에 신문에서 그 얘기를 읽고는 그냥 웃어 넘겼는데 아침에 BBC 1에서 똑같은 얘기를 다루는 것을 보고는 "이 나라 정말 유치하군!"이란 말이 저절로 튀어 나왔다. 그런데 어쩌면 그것은 자신의 언어에 대한 영국 사람들의 자긍심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 클래스의 강사도 툭하면 영어를 이상한 언어라고 하는데, 물론 잘 보이게 가리워진 자랑이다. 그런데 어쩌면 그것은 대영 제국의 마지막 향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의 영국의 혼란스러움을 놓고 제국의 일몰의  마지막 향수를 얘기하는 것을 종종 듣기도 한다. 이에 대한 내 친구의 코멘트. "해가 진지가 언젠데!" 하긴.^^

5. 어제 클래스에서 있었던 일. "used to"의 용법을 익히기 위한 상황극. 나는 전에 여자였다가 성전환을 받아 현재 남자가 된 역할, 나의 파트너(스페인 여성)는 나를 취재하는 기자 역할. 이러 저러한 질문과 답변이 오고가다가 이런 질문이 있었다. "이제 남자가 되었으니 아이를 낳을 수 없지 않느냐. 미련없나?" 나의 대답. "물론 내가 낳을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가정을 이루고 싶고 여자를 통해(through woman) 아이를 낳을 수 있을 거다." 그러자 그 친구가 "with woman" 이라고 정정해 주었다. 우리는 학생이기 때문에 서로의 문법적 오류나 발음상의 문제를 지적해 주지 않는다. 그럴 능력도 없다. 한 시간 가량 진행된 대화 중에서 누가 누구에게 어떤 정정을 해 준 것은 이것이 유일했다. 그것은 문법적 오류도, 발음상의 문제도, 표현상의 문제도 아닌, 어떤 올바름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빠르게 "with woman, sorry." 라고 정정과 사과를 했다. 대화가 끝나고 품평을 하는데 나의 파트너가 강사에게 나를 코멘트하면서 "완전히 남자예요." 하는 말을 들었다. 끙.

나는 내가 상황을 즐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법을 익히기 위한 상황극이었지만 나는 남성이 된 "여성"이었어야 했다. 나는 여성을 연기해야 했다. 즉, 여성을 이해하고 표현을 통해 그걸 보여주었어야 했다. 그런데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였을 뿐이다.

아다시피 남성성이란 없다. 어떤 자연스러운 경향성이 환경에 의해 강화되는 것일 뿐. 예를 들어 나의 자연스러운 성향은 오른손을 쓰는 것이지만 환경에 의해 그 성향은 과도하게 경화된다. 그래서 왼손 쓰는 것에 서툴다는 것은 나의 본질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무능의 표현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덕은, 그러므로 우리의 윤리는 우리의 모든 가능성을 가능한 풍부하게 계발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럴수록 우리는 더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너무 스피노자주의적인가? 아마 그럴 것이다.

많은 경우 솔직하다는 것은 자신의 본성의 필연성의 전개가 아니라 단지 게으르다는 것,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뜻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습관에 의해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집에 돌아가는 찻간에서 이브닝 스탠다드를 읽는데 Howard Jacobson이라는 작가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첫 문단에 있는 문장.

Aged eight, he already knew writing was a form of erotic power which he used to make his mother's friends laugh. "To get a woman to throw back her head in laughter is a hot thing."

끙. 유 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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