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런던에 온지 이주가 지난 어제서야 처음으로 미술관(혹은 박물관)에 갔다. 학원에서 함께 영어를 배우는 외국인 친구들은, 한국인들은 누구나 일본어를 잘 한다는 이야기는 철썩같이 믿으면서 내가 아직 영국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보지 않았다는 말에는 경악을 한다. 이제 더 이상 그네들을 당혹스럽게 할 수 없어 아쉽긴 하지만 나도 더 이상 갤러리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내셔널 갤러리를 전부 둘러 볼 수는 없다. 주로 거닌 곳은 19세기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이 많이 걸려 있는 방들이었다. 회화 유파로 말하자면 주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세잔의 그림을 보러 간 것이고. (아쉽게도 내셔널 갤러리는 세잔의 작품 등 19 세기 말 유럽 화가들의 작품에 강점이 있는 미술관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세잔의 작품 앞에서 감동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간 도판으로나마 세잔의 그림들을 많이 보아왔었고 그에 관한 글들도 많이 읽었으니까. 그런데 막상 세잔의 그림 앞에 서 있게 되자 별 감흥이 나지 않았다. 세잔은 자연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심사숙고하며 붓 터치 하나 하나를 더해가는 작가로 유명하다. 그러나 내가 그의 그림에서 발견한 것은, 말하자면 부주의하게 물감을 덕지 덕지 바른 흔적들이었다.
본 것이 그러하므로 나는 개념적 접근을 나 자신에게 허용할 수 없었다. 예를 들면 세잔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표면적 가벼움을 일종의 무게감, 깊이로 대체하고자 했다고 말해진다. 회화는 색들의 조화이고 대상들은 색면의 담지자이기 때문에 대상들 사이의 관계, 즉 구성에 심혈을 기울인 화가라고 말해진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에서는 색면을 약화시키는 전통적인 원근법이 무시되고 화면에 깊이와 질량감을 부여하기 위해 이러 저러한 기법들이 동원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나 자신에게 세잔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내가 본 것들이 해명될 수는 없었다. 나는 이 방 저 방을 둘러보다 몇 번이고 세잔을 다시 찾았다. 그러나 세잔에게서 발견한 뭔가는 없었다. 일단 퇴각.
내가 둘러 본 방들에서 가장 인기있는 화가는 단연 반 고흐였다. 특히 해바라기. 사람들이 해바라기 그림 앞에 죽 둘러서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그림을 건너 뛰어야 했다. (요즘 시력이 좋지 않다-.-) 나를 가장 즐겁게 한 화가는 르느와르. 파스텔풍의 화려하고 부드러운 작품들. 깜짝 놀랐던 건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얼굴 중 하나는 런던에서 흔히 마주치게 되는 얼굴이라는 것. 중년이 되어 비만하게 될 징조가 보이는 평범한 영국 소녀의 얼굴.
내셔널 갤러리를 나와 레이캐스터 레스터 역까지 걸어갔다. 그 근방에 중고 서점들이 있다는 걸 기억해 두고 있었다. 서점 서너 군데를 돌아 책 네 권을 샀다. 에릭 호퍼의 책, 마이클 더밋의 책, 세잔의 편지 모음책, 세잔에 대한 책. 그리고 한국으로 치면 교보문고 격인 Foyles라는 서점엘 갔다. 사고 싶은 책들이 엄청나게 쌓여 있었지만 점만 찍어둘 수 밖에. 런던을 걷다보면 발에 채이는 것이 스타벅스다. 거기 들어가서 책을 읽으려다, 이제부터는 먹을 걸 아껴 책을 사야 겠다 싶어 과감히 포기. 내셔널 갤러리 근처에서 모짜르트의 아이네 클라이네 나하트 뮤지크를 연주한다는 광고판을 본 기억이 났다. 가증스럽게도 연주 날짜는 "TODAY"! 길을 걷다 마주친 "피그말리온" 공연을 알리는 광고판도 외면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한국에서는 가방 안에 버나드 쇼우(인간과 초인, 피그말리온, 인간과 전쟁, 핫브레이크 하우스)를 상시 휴대하고 다니던 내가 아니던가! 차라리 굶겨 죽이라.
저녁 무렵의 런던은 혼잡 그 자체다. 인도에는 쓰나미같이 왕성한 사람들의 무리가 있다. 도로에는 이층버스, 버스를 두 개 붙여 놓은 이량버스, 정장에 핼멧, 쌕을 메고 신나게 자전거를 밟아대는 퇴근길 직장인 부대, 거칠게 거리를 질주하는 시대착오적으로 둔탁하게 생긴 택시들, 심지어는 인력거까지, 아 그리고 (나를 포함하여) 아무 데서나 도로를 건너는 사람들, 아 거기다가 올림픽한다고 도로 곳곳에 벌여놓은 공사판까지! 런던이 거대한 국제도시임을 자각하게 되는 순간이다. 갑자기 사뮤엘 존슨의 시건방진 말, "런던에 싫증난 사람은 인생에 싫증난 사람이다."라는 말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당신이 조용히 책 읽는 걸 좋아하든, 클럽에서 온 몸을 흔드는 걸 좋아하든, 음악을 좋아하든, 연극을 좋아하든,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담소하는 걸 좋아하든, 담배 연기 자욱하고 음악 소리로 귀가 멍멍한 펍에서 새로 만난 위험한 남자와 떠들고 춤추는 걸 좋아하든, 이 놈의 도시는 다 받아줄 것만 같다. 정말 그렇다. 여긴 그런 동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