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하나와 저녁 무렵에 펍(한국으로 말하자면 호프집)에 가서 치킨에 맥주를 먹고 한참 런던 거리를 쏘다녔다. 여기는 저녁 무렵이면 이미 서늘하다. 작으마한 프랑스 과자를 하나 사먹었는데 우리 돈으로 무려 3000원 정도 한다(게다가 너무 달다!). 닐스 야드라는 데서 커피. 한 잔에 1.5 파운드. 에소프레소 더블인데도 한국보다 오히려 싸다(점원이 싱글? 이라고 묻는데 나는 고집스럽게 투 샷이라고 대답했다.-.-). 

헌책방에 가려고 했었는데 이미 9시가 넘어 책방들이 문을 닫았을 것 같았다. 여기는 6시면 대충 영업을 종료한다더라. 스타벅스까지 포함해서. 그런데 책방 하나에 불이 환했다. 기억하기로 "I LOVE SOHO"라는 간판을 단 가게였다. 윈도우 넘어로 남성 누드집이 눈길을 끌었다. 예술 계통 책을 파는 것 같았다. 세잔이나 바우하우스라는 제목을 단 큼직 큼직한 판형의 컬러 도판 책을 8파운드(우리 돈으로 만사오천원 정도)에 팔고 있었다. 물론 헌책일 거다. 사고 싶었지만 이미 돈을 다 써버린 후였다. 지하에도 서가가 있기에 계단을 내려가다 중간쯤에서 다시 올라오고 말았다. 포르노 잡지와 성인용품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층에도 그런 책들이 있다. 기억하기로 "Big penis book" 이란 제목을 가진 3D 책 같은 거. 3D 안경이 딸려 있어서 시시를 해보았다. 재밌었다. (바로 옆에 "Big breast book" 정도로 기억되는 3D 책도, 물론 있었다)

책방을 나와 지하철역을 향해 걷는데 불이 환한 또 다른 헌책방 하나가 보였다. 작으마한 책방이었다. 탐정 소설과 과학 소설이 책장 하나씩을 온통 차지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영국이니까?) 별도의 실내 유리문 너머로 고서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는 방이 보였다. 파우스트 박사의 서재쯤 되나 보다. 나의 용무와는 거리가 있다. 무시. philosopy라는 레벨이 붙은 서가를 찾았다. 책장 한 칸 정도 분량 밖에는 안된다. 책 한권이 눈에 들어왔다. 에릭 호퍼의 "The true believer". 에릭 호퍼는 평생을 부랑하며 육체 노동으로 먹고 산 사람이다. 철학책을 내어서 그런지, 그것과 상관없이 그의 삶 자체가 그래서 그런지 에릭 호퍼에게는 철학자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다. 나는 그의 자서전을 읽었고 그의 책을 구하고자 했었다. 그러나 죄다 절판이라 좌절. 주머니 속에서 1 파운드 짜리 주화 몇 개가 굴러 다니고 있었지만 책값 5 파운드에는 미치지 못했다. 내일을 기약하자. 어짜피 나 말고는 살 사람이 없을 것이다. 가게 주인이 주섬 주섬 정리를 시작한다. 집에 갈 시간이다.

다정하게 손을 붙잡고 다니는 게이 아저씨도 있고, 행인에게 담배를 청하는 청년도 있고(한국적이다!), 우루루 몰려 다니는 파티 걸들도 있고, 런던의 모든 것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듯 카메라에서 눈을 떼지 않는 중년의 여성도 있다. 그것들을 뒤로 하고 지하철에 올라 읽다만 가디언을 펴들었다. 머릿 기사는 homeless가 중산계층마저 위협하고 있다는 분석 기사. 가디언은 조금 암울하다. 가디언은 영국의 양극화 문제, 주택 보급률 문제, 청년 문제들을 햇빛 아래 드러내어 놓으려고 애쓰고 있다. 그것들을 죽죽 읽어나가다가 예술 섹션을 펼쳐들었다. 눈길을 잡아 끈 것은 로열 앨버트 홀에서 있을 이번 주 "BBC Proms" 공연 광고. 오늘 학원에서 BBC Proms의 기원 등에 대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지하철 벽에 광고가 붙어 있는 것을 더러 보기도 했다. 나는 프로그램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내일이고 또 밤이다. 이번 것은 그냥 넘겨야 겠다. 어쨋든 밤은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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