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형이상학에 대한 정의는 "형이상학은 정교한 시"라는 것이다. (출전은 기억나지 않는다) 형이상학은 일차적으로 시이기 때문에 형이상학은 제일철학일 수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형이상학을 모든 학문의 주춧돌로 삼고자 하는 시도들은 유치하거나 순진하거나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형이상학은 정교하여야 한다. 가능한 세계의 구석 구석을 다 포괄하여야 하며 정합적이어야 하며 구체적인 현실 앞에서 힘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것을 기준으로 우리는 형이상학에 대해 논할 수 있고 더 나은 형이상학을 선택할 수 있고 더 나은 형이상학을 꾸밀 수 있다. (물론 절대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형이상학은 시다. 이 말의 의미는 형이상학이 궁극적으로 기반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경험, 체험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감각적 경험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러한 경험들을 형이상학적 경험이라고 부르겠다. 이 말이 너무 크다면 철학적 순간이라고 부르겠다. 그리고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이란 형이상학적 경험을 절대화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형이상학의 강력함은 형이상학적 경험의 보편성과 고유성에서 나오는 것 같다. 이 말에는 어폐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문학 작품에서 강렬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그 작품이 우리가 보지 못하던 새로운 장면을 제공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그 작품의 고유성이다. 우리는 그 작품에서 강렬함을 느낄 뿐 아니라 그것을 나 자신의 경험으로 수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작품의 이러한 설득력이 보편성이다.

그러므로 이론적 형이상학의 관건은 독특한 체험과 보편성 사이에 굳건한 다리를 놓는 것이다. 이 다리 놓음이 곧 형이상학의 정교함이다.

체험과 이론 사이에 다리를 놓는 작업은 보통 철학자가 한다. 이 작업은 굉장히 아슬 아슬하다. 철학자는 자기가 말할 수 있는 만큼만 말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통은 실패한다.

2. 리처드 파인만은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있는 과학자 중 한 명일 것이다. 그에 대한 나의 첫인상 중 하나는 그가 철학적으로 깊이 있는 물리학자라는 것이었다. 철학을 논하지 않는 물리학자의 글에서 철학을 발견한다는 것은 그 과학자가 지극히 철학적이라는 뜻이리라. 나는 파인만이 지극히 철학적이라고 생각했다.

오, 그런데 이정우씨는 전혀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우연히 서핑을 하다가 읽게 된 글(http://blog.aladin.co.kr/799807193/1049435)을 보면 이정우씨는 리처드 파인만 등의 미국 과학자들을 거의 증오하는 것 같다.^^ (그럼 무엇이 그를 그토록 감정적으로 만들었을까? 절대로 철학적 이유는 아닐 것이다^^)

철학적 문제의 깊이를 파악하지 못하는 무능을 몰철학적이라 부른다면 파인만은 전혀 몰철학적인 사람이 아니다. 파인만은 단지 반철학적일 뿐이다. 그리고 반철학적인 것은 철학적인 것이다. 이 말에서 어폐를 느낀다면 그건 단어에 집착하기 때문일 것이다. 5초 동안 비트겐쉬타인이 철학의 영역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생각해 보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3. 스티븐 호킹은 "시간의 역사"에서 창조의 순간에 신이 어떤 선택지를 갖고 있었는지 알고 싶다고 말한다. 우리는 단번에 고전적인 철학적 논쟁을 머리에 떠올리게 된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논쟁의 큰 축을 담당한. 스티븐 호킹은 스피노자의 진영에 속한다. 신은 창조의 순간에 어떤 선택지도 가질 수 없었다는 것이 호킹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인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스피노자는 과학자들의 철학자다.

그러면 "시간의 역사"의 호킹을 철학적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보기에는 철학적이라기보다는 상업적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호킹은 자신의 저작을, 대중들이 읽고 즐길 수 있도록 "신의 실체를 찾아서"라는 구도 하에 짜 놓았을 뿐이다. 호킹의 신은 그저 당의정일 뿐이다. (호킹의 이런 "철학"은 분명 그의 편집자를 기쁘게 하였을 것이다)

파인만이 호킹의 책을 읽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파인만은 축구공 안으로 굴러 들어가 버릴 것이다. 파인만의 손발뿐 아니라 허리도 오그라들어 버릴 테니까! (사실은 내 손발도 오그라들었었다)

4. 파인만이, 그리고 비트겐쉬타인이 반철학적이라는 말이 이들이 형이상학적 경험을 부정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둘은 단지 형이상학적 경험을 절대화하고 체험과 이론 사이에 정교한 다리를 놓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혹은 비웃는 것이다) 모두들 인정하겠지만 이 두 천재의 주장은 지극히 정당하고 건전하다.

5. 철학은 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상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렇게 복잡할 수 없다. 인간의 체험이란 것이 그렇게 복잡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코를 푸는 방법을 언어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코를 푸는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복잡하고 미묘한 언어가 동원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코를 푸는 방법이 심오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적 개념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 그 철학적 개념은 건전한 것이리라. 철학은 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상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6. 위에 걸어놓은 동영상에서 파인만은 "What I cannot create, I do not understand."라고 말한다. 나는 이런 것을 형이상학적 경험, 혹은 철학적 순간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보라, 얼마나 시적인가! 그리고 우리는 이 표현이 단지 말인 것이 아니라 어떤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면 파인만의 이 말을 이런 식으로 해설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자신이 셰익스피어가 되지 않고서는 그의 극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고. (무한하게 다양한 버전이 가능할 것이다) 여전히 산문적인 서술은 아니지만 내가 (혹은 파인만이)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할 수 있다면 파인만의 저 말을 산문적으로 해설해 보라)

파인만의 경우 말에 있어서는 일단 여기서 멈춘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적 경험을 계속 밀고 나간다. 철학자들은 이러한 경험을 단초로 하나의 인식론을 수립하기도 한다. 철학자들의 문헌에서 심란한 개념들의 숲을 맞닥뜨리게 되면 그 개념들이 어떤 사상을 표현하고 있는지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상은 결코 복잡할 수가 없다. 앞서 말했듯이 코를 푸는 행위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7.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대상을 더 자세히 관찰하는 행위라고.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음악을 더 섬세하게 듣는 행위라고. 무대에서 배역을 연기하는 것은 희곡을 더 세밀하게 읽는 행위라고. 아마 진정한 관찰, 진정한 들음, 진정한 읽음 등등은 이러한 실제적인 행위와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즉, 진정한 이해는 이러한 실제적인 행위와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파인만식으로 이야기하면 진정한 이해는 그것을 자신 안에서 다시 창조하는 실제적인 행위와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실재의 엄중함이다. 즉, 실재의 무한함이다. 아무도 진정한 이해들을 포괄하려는 시도를 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인간의 수명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철학자는 불가능하다. 철학이 세계에 대한 궁극적이고 포괄적인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라면 철학자들은 시와 수학과 물리학 등등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철학자는 시인, 수학자, 물리학자 등등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철학자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이 철학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죽은 것은 철학자이지 철학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철학적 깊음은 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경험, 혹은 철학적 순간의 힘과 동의어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철학자는 형이상학적 경험, 혹은 철학적 순간에 압도되는 삶을 사는 사람일 것이다. 철학의 진정한 의미는 이런 것이 아닐까? 우리는 이미 이해란 무언가를 창조하는 실제적인 행위와 동의어임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세계에 대한 궁극적 이해는 이러한 행위 속에서 하나의 구도로 드러나는 것일 테다. 어쩌면 우리 시대야 말로 진정한 철학의 시대의 여명기일지도 모르겠다. 어쩐지 나는 그렇게 믿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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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히 궁금하여 "우리집 여자들" 최근 방영분 몇 편을 온라인에서 스킵하면서 보았다. 물론 정은채 출연분 위주로^^. 소감을 말하자면 그저 그랬다. 스토리가 워낙 개연성이 없고 문맥에서 튀는 대사들이 남발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정은채에게서 별 특별함을 찾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이런 드라마에 최적화되어 있는 양희경의 연기가 탁월해 보이고, 그 선상에서 연기하는 윤아정이 더 흡입력이 있어 보인다. 정은채는 평범한 신인 배우로 보였다.

어떤 딜레마. 정은채가 맡은 역은 가난하지만 꿋꿋하고 능동적인 젊은 여성이고 상대역은 덜 떨어진 재벌2세인 듯 하다. 하이틴 로맨스에서 늘상 그렇듯 둘이 사귀게 되면서 그 당찼던 여성은 갑자기 소극적이 되고(여성적이 되고?) 어설펐던 남성은 믿음직하고 능력있는 왕자님으로 변신한다. 그런데 정은채는, 물론 크고 선한 눈망울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와 동시에 큰 키와 단호한 턱을 갖고 있다. 남자 주인공은 "나만 믿어", "두려워 하지마"라는 대사를 반복하지만 그 말은 매우 강한 휘발성을 갖고 곧장 대기 중으로 사라져 버린다. 정은채는 이미 단호하여 누구한테 기댈 생각도 없는 것 같고, 무언가를 두려워 하지도 않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여자 주인공을 맡은 배우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우리는 익히 보아 알고 있다. 즉, 갑자기 여리고 눈물 많은 여성으로 변신한다는 것을. 그러면 시청자들은 캐릭터가 일관성이 없다며 비판을 해댄다. 이에 반해 정은채는 처음의 캐릭터를 고수하는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자 이번엔 남자 주인공과의 화학적 결합이 어려워지는 문제가 생겨 버린다.

물론 이런 걸 딜레마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에 응당한 이름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즉, 극본과 연출의 실패라는. 다시 말하면 작품의 실패. 사실은 작품의 실패라는 말조차 사치다.  왜냐하면 지금은 일일 드라마가 가능하지 않은 시대이기 때문이다. 매일 매일 각본을 쓰고 촬영을 하고 연기를 하고 편집을 해야 하는 환경에서 제작된 상품을 도대체 이 시대의 누가 만족하며 즐길 것인가? 만드는 사람도 소비하는 사람도 그런 걸 기대하지 않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은 것이다. 그러니 환경에 대한 불평일랑 집어치우자. 거기서 연기하든지 말든지, 그 드라마를 보든지 말든지, 오로지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가수의 절대적인 전제는 좋은 곡이고 좋은 배우의 절대적 전제는 좋은 영화다. 더스틴 호프만과 메릴 스트립은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라는 위대한 작품에서 연기한 위대한 배우들이고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는 이 두 배우 덕에 위대해졌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와 같은 작품 없이 더스틴 호프만(그리고 메릴 스트립)이 위대한 배우일 수는 없을 것이다. 내 말은 선택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가로서 위대한 영화를 만들든지, 연예인으로서 그럴 듯한 영화에 만족하든지. 너무 과도한 이분법일까? 글쎄, 그럴까? 최상의 제품을 만들고자 하는 열의와 에너지 투여 없이 최상의 제품이 만들어 질 수 있을까? 위대한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야심 없이 위대한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터무니 없는 소리다. 그저 선택을 회피하려는 소리일 뿐.

영화를, 음악을, 문학을, 그림을, 철학을 진지하게 여긴다면 그것을 진지하게 여겨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영도 다리를 건너다"에서 정은채를 발견하고 흥분을 했다. 그렇다면 정은채는 그 흥분에 값해야 한다. 왜? 그것이 윤리니까. 어떤 작가가 독특한 시각과 빼어난 표현력을 선보였다면 이제 그 작가는 자신의 재능에서 최선의 작품을 뽑아내는 것을 자신의 윤리로 삼아야 한다. 지금 보라, 한국의 문학 시장에서 읽을 만한 작가가 도대체 누가 있는지? (제발 김훈이라는 이름은 말하지 말자.) 이러한 황폐함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윤리의 부재! 그러니 나의 신경질적으로 심각한 어투를 탓하지 말자. 지금의 이 황폐함을 기꺼이 용납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것이 문학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철학이든 그 어떤 분야든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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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가져갈 책들을 골라 내고 있다. 가능하면 한국어 책은 가져가지 않으려 하는데 "스피노자 철학에서 개인과 공동체"는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기 힘들었다. 한국어 번역판이니 원칙대로라면 하차를 시켜야 옳지만 원서가 (영어가 아니라) 프랑스어라서 머뭇거려졌다. 게다가 스피노자에 관한 참고 문헌 목록에 빠짐없이 이름을 내미는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반면 쪽수가 900여 페이지에 달하는데다 체감하는 물리적 두께는 그 이상이어서 부피상으로 꽤 부담이 된다. 전에 이 책을 읽다가 중간에 집어 던진 기억이 났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하나만 대자면 이 책에서 진지함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에티카"의 자연학 소론을 가지고 이상한 수식을 꾸미는 대목을 읽다가, '이런 게 스피노자와, 에티카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람!' 하면서 미련없이 책장을 덮었고 그 후론 펴보지도 않았다.  

도서관에 들고 가서 차분히 읽어 보기로 했다. 할 수만 있다면 빨리 읽어 버리고 싶었다. 사실은 이런 철학책을 읽고 있을 시간 내지 여유가 없지만 말이다.

"여기에서 결과란 활동 자체와 다른 것이 아니다. 사실, 그것은 활동이 전개되면서 취하는 구조일 뿐이며, 바로 이런 의미에서 결과는 활동에 의해 인식되며 마찬가지로 활동 안에 있다... 활동은 자기 구조의 내재적 원인이다."(24~25페이지)

역자가 말한 대로 마트롱은 스피노자에게서 개체성의 형이상학을 읽어내려 시도하고 있다. 위의 문장에서 활동 대신에 신이나 실체라는 단어를 써넣으면 문자 그대로 스피노자의 철학이 된다. 단, 주어는 실체나 신이 아니라 개체가 된다. 나는 마트롱의 해석이 대단히 독창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스피노자가 실제로 저런 식으로 사고했을까 하는 의문이 튀어 나왔다.

마트롱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이를 전통적인 어휘로 말해 보자. 이와 같은 순수 산출성이 곧 실체이며, 실체가 전개되면서 취하는 구조들이 바로 실체의 양태들이다. 그리고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 곧 실체가 자신의 구조들을 산출하는 방식이 곧 속성이다." (27페이지)

마트롱의 논증은 대단히 명료해 보인다. 그러나 첫째, 스피노자의 정의에서 보이는 불투명성이 마트롱의 해석에서 명료해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둘째, 스피노자의 정의에서 대단히 불투명해 보이는 부분은 마트롱의 해석에서는 아예 회피되기도 한다. 위 문장의 경우를 보면 마트롱은 아무 문제도 없다는 듯이 속성의 정의를 스쳐 지나간다. 그러면 스피노자가 속성을 "지성이 지각한 것"이라고 한 부분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마트롱은 이 부분을 해결하고 넘어간 걸까? 난 잘 모르겠다. 지금 그런 거 같지 않아서 꺼림직하다고 말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대목들이 내가 마트롱을 읽으면서 미심쩍어 하는 부분이다. 마트롱은 거칠 것 없다는 듯,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휘두르며 질주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 칼은 파란 페인트를 칠한 나무칼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예는 내가 읽은 페이지들에서 더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마트롱이 발생적 정의, 운동과 정지에 대해 너무 가볍게 얘기하고 넘어가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적어도 홉스는 참조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며 소심해 하는 것이다. 적어도 17세기 자연철학, 요컨대 물리학과 의학은 참조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혹은 스피노자의 다른 저작, 요컨대 "행복에 관한 소론"은 참조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혹은 철학사의 한 부분, 요컨대 플로티노스는 참조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 하게 된다. 책의 뒷 부분에서 이런 것들에 대한 참조와 좀 더 진득한 해명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미 책장을 넘길 의욕을 잃어 버렸으니 책 뒷 부분을 뒤적거리지는 않았다. 책을 하차시킬 적당한 꼬투리를 찾고 있던 판국에 말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저 포도는 시다, 가 될 것이다.

내가 마트롱의 책이 진지하지 못하다고 못마땅해 하는 부분은, 역자의 말에 따르면 마트롱의 방법론에 해당하는 것인 듯 하다. 역자에 따르면 마트롱은 텍스트 외부에의 참조는 가능한 억제하고 텍스트 자체의 내적 논증 구조를 철저하게 파고 들었다고 한다. 나는 이런 방법론의 의미나 장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소리를 하게 되는데, 내 생각에는 내게 어떤 텍스트가 주어진다면 그 텍스트 안에 있는 문장들만을 조합하여 그 텍스트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새로운 구조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예컨대, 마트롱은 "지성개선론"과 "에티카"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철저하게 정합적으로, 마치 두 텍스트가 한 텍스트인냥 다루고 있지만 그것은 실재하지 않았던 영원으로 완결된 스피노자를 창조하고 있을 뿐이 아닐까 하고 나는 미심쩍어 한다.

간단한 이야기를 길게 했다. 위의 얘기는 "마트롱의 책이 두꺼워서 영국까지 가져 가기 귀찮아서 짐짝에서 빼 버렸다."라는 문장에서 "두꺼워서" 부분을 길게 늘인 것에 불과하다. 그 정도 무게를 갖는 얘기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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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네와 강원도 인제로 휴가를 다녀왔다. 출국일이 가까와져서 이것 저것 챙겨둬야 할 일들을 챙겨두어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하루 일정 정도로 홀로 강원도에 다녀올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나네와 여행을 떠나는 것에 많이 미적거렸었다. 어쨌든 막상 강원도에 도착하자 오길 잘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을 자는데 등에 전혀 땀이 배지 않아서 오랜 만에 푹 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튿날 아침에는 방태산에 다녀왔다. 꼭대기까지는 올라가지 못하고 휴양림까지만 갔다가 내려왔다. 내려 오는 길목에 있는 이단 폭포에 자리를 깔고 앉아 복숭아와 키티 과자를 안주로 맥주 한 캔씩을 마셨다. 여정도 음료도 음식도 공기도 부드러웠다.


(강원도 인제 방태산: 내가 직접 찍음)

오후가 되자 또 한팀이 합류했다. 누나의 동창네 가족이다. 민박하는 집 바로 옆에 있는 계곡에서 삽결살을 구워 먹었다. 그러는 동안 민박집 마당에 차들이 들어차기 시작했고 아이들 소리가 많아졌다. 바야흐로 휴가철의 절정인 듯 했다.

다음날은 라면으로 아침을 가볍게 해결했다. 그러나 내 코 밑에서는 전날의 삽겹살 냄새가 붙어 가셔지지가 않았다. 아침 먹고 쉬면서 계곡 벤치에 누워 아이리스 머독의 "그물을 헤치고"를 읽었다. 원제는 "Under the net"인데 역자가 지나치게 자신의 낙관성을 드러내려 한 것 같다는 생각을 꼬박꼬박하게 된다.

점심 무렵에 물이 잔잔한 계곡을 찾아내서 튜브를 타고 놀면서 배를 굶주린 후 송어회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나는 휴가 동안 홀로 여행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면 집으로 돌아올 즈음에는 몸은 거의 탈진하고 머리는 새로운 계획으로 가득차 있곤 한다. 반면 동반 여행은 늘 움직이고 늘 먹게 되는 것 같다. 돌아갈 시간이 되자 서울의 습기 많은 공기가 두려워졌다. 돌아오는 길에 내 머리를 지배한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서울에 돌아오자 공기가 확실히 텁텁해 졌다. 그래도 바람이 제법 불어서 그리 덥지는 않았다. 밤에는 제법 서늘하기도 하였다. 아침에 들으니 태풍이 올라온다고 하더라. 곧 영국으로 떠난다. 영국은 그리 무덥지 않다고 한다. 출국하는 날까지 열대야 없는 잘만한 밤들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내 머리를 가장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생각은 이런 것들이다. 물론 이번 휴가 여행의 영향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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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배우를 처음 본 것은 설특집극 "영도다리를 건너다"에서였다.

아무 생각없이 보게된 드라마였는데 사람을 잡아끄는 뭔가가 있었다. 첫째는 물론 주연을 맡은 정은채의 독특한 분위기였다. 나이를 종잡을 수도, 가끔은 성을 종잡을 수도 없었다. 아수라백작마냥 각도에 따라 얼굴이 달라지곤 했다. 그리고 그의 연기는 비에 젖은 옷처럼 몸에 착 들어붙었다.

이 드라마의 주된 매력은 극본에서 나왔다. 모든 대사들이 살아있었다. 그 대사들을 듣는 것이 너무도 즐거웠다. 급기야 나는 반수면 상태에서 드라마를 보고 계시던 어머니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엄니, 경상도 사람들은 진짜로 저렇게 얘기해!" 그랬다. 대사 하나 하나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지극히 시적이었다. 이런 이중적 구조는 좋은 글의 징표다. 나는 이렇게 살아있는 대사들이 시종일관하는 한국 드라마를 본 적이 없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드라마의 각본은 극본공모 최우수작이란다!

어쨌든 이리하여 이 배우를 기억하게 되었는데 얼마 전에 어머니랑 함께 드라마를 보는데 그 드라마에 이 친구가 나오는 것이었다. 나의 솔직한 마음은 실망. 일일드라마의 뻔한 설정들, 입에 발린 대사들, 과장된 연기들은 내게는 거의 공해였기 때문이다. 웬지 저 속에서 재능있는 한 배우가 소비되고 말 것이라는 편견.

어제 "우리집 여자들"이란 정은채 주연의 드라마 전편을 처음으로 다 보았다. 일일연속극이란 것이 보기 시작하면 계속 보게 되기 때문에 앞으로 더 볼 마음은 전혀 없다. 어제 방송편에서 양희경은 정은채의 얼굴에 컵에 든 물을 끼얹었다. 그후 일분여 동안 정은채는 앵글에는 잡히되 대사는 없는 연기를 했다. 공들여 연구한 것임에 틀림없는 과장없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나는 정은채가 참 매력적인 배우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감독이나 작가라면 저런 배우를 제대로 써먹을만한 작품을 하나 쓸텐데... 하는 뜬금없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나는 뜬금없는 생각을 계속 한다. 나는 스피노자라는 철학자를 제대로 써먹을 만한 데가 어디일까를 계속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궁리는 그리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니체말대로 한 철학자의 철학이란 그 철학자의 생리학이다. 그리고 사르뜨르의 말대로 나는 내가 선택한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스피노자의 말대로 그 선택은 언제나 필연적이다. 나는 내가 스피노자에 끌리는 이유를 안다. 그것은 나와 스피노자가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에게서 내가 발견하는 것의 진폭은 상대적으로 작을 것이다. 나는 스피노자에게서 놀라운 것을 발견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리 재미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관념과 실재 사이의 관계와 같을 것이다. 사르뜨르는 실재를 항상 초월하는 것을 관념(의식)이라고 말했던가? 나는 거꾸로 말하겠다. 관념을 항상 초월하는 것이 실재다. 실재는 항상 우리가 관념한 것 이상을 건네준다. 그러면 관념은 주섬 주섬 그 실재의 그림자를 자신의 구조 안으로 구겨 넣는다. 그렇게 관념화된 실재는 이제 우리에게 지루함을 준다. 지루함이 바로 관념의 징표다. 새로움, 즐거움, 당혹감, 좌절감, 안절부절 등등은 실재의 징표다. 예를 들면 영화 감독에게 독특한 분위기의 한 배우가 바로 그런 실재일 것이다. 그런 독특함, 특수함, 묘함 등이 실재임을 드러내는 징표일 것이다.   

그리고, 아다시피 스피노자에 있어서 관념과 실재는 대등하다. 그러므로 거기에 새로움이란 없다. 스피노자의 철학이 활기없어 보이는 이유가 이런 것일테다.

어떻든 우리가 실재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것이 어떤 배우이든, 어떤 그림이든, 어떤 음악이든, 어떤 철학이든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윤리를 지시한다. 즉, 어떤 배우이든, 어떤 그림이든, 어떤 음악이든, 어떤 철학이든 스스로를 실재로서 유지하여야 한다는 것. 당연히,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그래야 한다는 것.

(물론, 모든 것을 지나치게 관념화해서는 안된다. 꼭 이런 식의 안티 테제를 내거는 것에 나 스스로도 답답함을 느끼지만... 카프카에 대한 영화에서 제레미 아이언스는 이렇게 묻는다. "왜, 어제와 오늘이 똑같지요?" 그의 편집장은 무뚝뚝하게 응답한다. "왜 달라야 하는데?"
이런 변증법은 존재한다. 언제나.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실재이기 때문이다. 즉, 실재는 새로움,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당혹감, 좌절감도 준다. 그런 것이 실재이고 현실이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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