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형이상학에 대한 정의는 "형이상학은 정교한 시"라는 것이다. (출전은 기억나지 않는다) 형이상학은 일차적으로 시이기 때문에 형이상학은 제일철학일 수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형이상학을 모든 학문의 주춧돌로 삼고자 하는 시도들은 유치하거나 순진하거나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형이상학은 정교하여야 한다. 가능한 세계의 구석 구석을 다 포괄하여야 하며 정합적이어야 하며 구체적인 현실 앞에서 힘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것을 기준으로 우리는 형이상학에 대해 논할 수 있고 더 나은 형이상학을 선택할 수 있고 더 나은 형이상학을 꾸밀 수 있다. (물론 절대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형이상학은 시다. 이 말의 의미는 형이상학이 궁극적으로 기반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경험, 체험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감각적 경험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러한 경험들을 형이상학적 경험이라고 부르겠다. 이 말이 너무 크다면 철학적 순간이라고 부르겠다. 그리고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이란 형이상학적 경험을 절대화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형이상학의 강력함은 형이상학적 경험의 보편성과 고유성에서 나오는 것 같다. 이 말에는 어폐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문학 작품에서 강렬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그 작품이 우리가 보지 못하던 새로운 장면을 제공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그 작품의 고유성이다. 우리는 그 작품에서 강렬함을 느낄 뿐 아니라 그것을 나 자신의 경험으로 수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작품의 이러한 설득력이 보편성이다.

그러므로 이론적 형이상학의 관건은 독특한 체험과 보편성 사이에 굳건한 다리를 놓는 것이다. 이 다리 놓음이 곧 형이상학의 정교함이다.

체험과 이론 사이에 다리를 놓는 작업은 보통 철학자가 한다. 이 작업은 굉장히 아슬 아슬하다. 철학자는 자기가 말할 수 있는 만큼만 말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통은 실패한다.

2. 리처드 파인만은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있는 과학자 중 한 명일 것이다. 그에 대한 나의 첫인상 중 하나는 그가 철학적으로 깊이 있는 물리학자라는 것이었다. 철학을 논하지 않는 물리학자의 글에서 철학을 발견한다는 것은 그 과학자가 지극히 철학적이라는 뜻이리라. 나는 파인만이 지극히 철학적이라고 생각했다.

오, 그런데 이정우씨는 전혀 반대로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우연히 서핑을 하다가 읽게 된 글(http://blog.aladin.co.kr/799807193/1049435)을 보면 이정우씨는 리처드 파인만 등의 미국 과학자들을 거의 증오하는 것 같다.^^ (그럼 무엇이 그를 그토록 감정적으로 만들었을까? 절대로 철학적 이유는 아닐 것이다^^)

철학적 문제의 깊이를 파악하지 못하는 무능을 몰철학적이라 부른다면 파인만은 전혀 몰철학적인 사람이 아니다. 파인만은 단지 반철학적일 뿐이다. 그리고 반철학적인 것은 철학적인 것이다. 이 말에서 어폐를 느낀다면 그건 단어에 집착하기 때문일 것이다. 5초 동안 비트겐쉬타인이 철학의 영역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생각해 보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3. 스티븐 호킹은 "시간의 역사"에서 창조의 순간에 신이 어떤 선택지를 갖고 있었는지 알고 싶다고 말한다. 우리는 단번에 고전적인 철학적 논쟁을 머리에 떠올리게 된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논쟁의 큰 축을 담당한. 스티븐 호킹은 스피노자의 진영에 속한다. 신은 창조의 순간에 어떤 선택지도 가질 수 없었다는 것이 호킹이 주장하고자 하는 바인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스피노자는 과학자들의 철학자다.

그러면 "시간의 역사"의 호킹을 철학적이라고 해야 할까? 내가 보기에는 철학적이라기보다는 상업적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호킹은 자신의 저작을, 대중들이 읽고 즐길 수 있도록 "신의 실체를 찾아서"라는 구도 하에 짜 놓았을 뿐이다. 호킹의 신은 그저 당의정일 뿐이다. (호킹의 이런 "철학"은 분명 그의 편집자를 기쁘게 하였을 것이다)

파인만이 호킹의 책을 읽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파인만은 축구공 안으로 굴러 들어가 버릴 것이다. 파인만의 손발뿐 아니라 허리도 오그라들어 버릴 테니까! (사실은 내 손발도 오그라들었었다)

4. 파인만이, 그리고 비트겐쉬타인이 반철학적이라는 말이 이들이 형이상학적 경험을 부정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둘은 단지 형이상학적 경험을 절대화하고 체험과 이론 사이에 정교한 다리를 놓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혹은 비웃는 것이다) 모두들 인정하겠지만 이 두 천재의 주장은 지극히 정당하고 건전하다.

5. 철학은 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상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렇게 복잡할 수 없다. 인간의 체험이란 것이 그렇게 복잡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코를 푸는 방법을 언어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코를 푸는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복잡하고 미묘한 언어가 동원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코를 푸는 방법이 심오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적 개념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 그 철학적 개념은 건전한 것이리라. 철학은 말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상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6. 위에 걸어놓은 동영상에서 파인만은 "What I cannot create, I do not understand."라고 말한다. 나는 이런 것을 형이상학적 경험, 혹은 철학적 순간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보라, 얼마나 시적인가! 그리고 우리는 이 표현이 단지 말인 것이 아니라 어떤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면 파인만의 이 말을 이런 식으로 해설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자신이 셰익스피어가 되지 않고서는 그의 극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고. (무한하게 다양한 버전이 가능할 것이다) 여전히 산문적인 서술은 아니지만 내가 (혹은 파인만이)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할 수 있다면 파인만의 저 말을 산문적으로 해설해 보라)

파인만의 경우 말에 있어서는 일단 여기서 멈춘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형이상학적 경험을 계속 밀고 나간다. 철학자들은 이러한 경험을 단초로 하나의 인식론을 수립하기도 한다. 철학자들의 문헌에서 심란한 개념들의 숲을 맞닥뜨리게 되면 그 개념들이 어떤 사상을 표현하고 있는지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상은 결코 복잡할 수가 없다. 앞서 말했듯이 코를 푸는 행위는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7.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대상을 더 자세히 관찰하는 행위라고.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음악을 더 섬세하게 듣는 행위라고. 무대에서 배역을 연기하는 것은 희곡을 더 세밀하게 읽는 행위라고. 아마 진정한 관찰, 진정한 들음, 진정한 읽음 등등은 이러한 실제적인 행위와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즉, 진정한 이해는 이러한 실제적인 행위와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파인만식으로 이야기하면 진정한 이해는 그것을 자신 안에서 다시 창조하는 실제적인 행위와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실재의 엄중함이다. 즉, 실재의 무한함이다. 아무도 진정한 이해들을 포괄하려는 시도를 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인간의 수명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철학자는 불가능하다. 철학이 세계에 대한 궁극적이고 포괄적인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라면 철학자들은 시와 수학과 물리학 등등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철학자는 시인, 수학자, 물리학자 등등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철학자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이 철학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죽은 것은 철학자이지 철학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철학적 깊음은 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것은 형이상학적 경험, 혹은 철학적 순간의 힘과 동의어다. 그러므로 우리 시대의 철학자는 형이상학적 경험, 혹은 철학적 순간에 압도되는 삶을 사는 사람일 것이다. 철학의 진정한 의미는 이런 것이 아닐까? 우리는 이미 이해란 무언가를 창조하는 실제적인 행위와 동의어임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세계에 대한 궁극적 이해는 이러한 행위 속에서 하나의 구도로 드러나는 것일 테다. 어쩌면 우리 시대야 말로 진정한 철학의 시대의 여명기일지도 모르겠다. 어쩐지 나는 그렇게 믿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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