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히 궁금하여 "우리집 여자들" 최근 방영분 몇 편을 온라인에서 스킵하면서 보았다. 물론 정은채 출연분 위주로^^. 소감을 말하자면 그저 그랬다. 스토리가 워낙 개연성이 없고 문맥에서 튀는 대사들이 남발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정은채에게서 별 특별함을 찾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이런 드라마에 최적화되어 있는 양희경의 연기가 탁월해 보이고, 그 선상에서 연기하는 윤아정이 더 흡입력이 있어 보인다. 정은채는 평범한 신인 배우로 보였다.

어떤 딜레마. 정은채가 맡은 역은 가난하지만 꿋꿋하고 능동적인 젊은 여성이고 상대역은 덜 떨어진 재벌2세인 듯 하다. 하이틴 로맨스에서 늘상 그렇듯 둘이 사귀게 되면서 그 당찼던 여성은 갑자기 소극적이 되고(여성적이 되고?) 어설펐던 남성은 믿음직하고 능력있는 왕자님으로 변신한다. 그런데 정은채는, 물론 크고 선한 눈망울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와 동시에 큰 키와 단호한 턱을 갖고 있다. 남자 주인공은 "나만 믿어", "두려워 하지마"라는 대사를 반복하지만 그 말은 매우 강한 휘발성을 갖고 곧장 대기 중으로 사라져 버린다. 정은채는 이미 단호하여 누구한테 기댈 생각도 없는 것 같고, 무언가를 두려워 하지도 않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여자 주인공을 맡은 배우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우리는 익히 보아 알고 있다. 즉, 갑자기 여리고 눈물 많은 여성으로 변신한다는 것을. 그러면 시청자들은 캐릭터가 일관성이 없다며 비판을 해댄다. 이에 반해 정은채는 처음의 캐릭터를 고수하는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자 이번엔 남자 주인공과의 화학적 결합이 어려워지는 문제가 생겨 버린다.

물론 이런 걸 딜레마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에 응당한 이름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즉, 극본과 연출의 실패라는. 다시 말하면 작품의 실패. 사실은 작품의 실패라는 말조차 사치다.  왜냐하면 지금은 일일 드라마가 가능하지 않은 시대이기 때문이다. 매일 매일 각본을 쓰고 촬영을 하고 연기를 하고 편집을 해야 하는 환경에서 제작된 상품을 도대체 이 시대의 누가 만족하며 즐길 것인가? 만드는 사람도 소비하는 사람도 그런 걸 기대하지 않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은 것이다. 그러니 환경에 대한 불평일랑 집어치우자. 거기서 연기하든지 말든지, 그 드라마를 보든지 말든지, 오로지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가수의 절대적인 전제는 좋은 곡이고 좋은 배우의 절대적 전제는 좋은 영화다. 더스틴 호프만과 메릴 스트립은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라는 위대한 작품에서 연기한 위대한 배우들이고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는 이 두 배우 덕에 위대해졌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와 같은 작품 없이 더스틴 호프만(그리고 메릴 스트립)이 위대한 배우일 수는 없을 것이다. 내 말은 선택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가로서 위대한 영화를 만들든지, 연예인으로서 그럴 듯한 영화에 만족하든지. 너무 과도한 이분법일까? 글쎄, 그럴까? 최상의 제품을 만들고자 하는 열의와 에너지 투여 없이 최상의 제품이 만들어 질 수 있을까? 위대한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야심 없이 위대한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터무니 없는 소리다. 그저 선택을 회피하려는 소리일 뿐.

영화를, 음악을, 문학을, 그림을, 철학을 진지하게 여긴다면 그것을 진지하게 여겨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영도 다리를 건너다"에서 정은채를 발견하고 흥분을 했다. 그렇다면 정은채는 그 흥분에 값해야 한다. 왜? 그것이 윤리니까. 어떤 작가가 독특한 시각과 빼어난 표현력을 선보였다면 이제 그 작가는 자신의 재능에서 최선의 작품을 뽑아내는 것을 자신의 윤리로 삼아야 한다. 지금 보라, 한국의 문학 시장에서 읽을 만한 작가가 도대체 누가 있는지? (제발 김훈이라는 이름은 말하지 말자.) 이러한 황폐함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윤리의 부재! 그러니 나의 신경질적으로 심각한 어투를 탓하지 말자. 지금의 이 황폐함을 기꺼이 용납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것이 문학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철학이든 그 어떤 분야든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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