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배우를 처음 본 것은 설특집극 "영도다리를 건너다"에서였다.

아무 생각없이 보게된 드라마였는데 사람을 잡아끄는 뭔가가 있었다. 첫째는 물론 주연을 맡은 정은채의 독특한 분위기였다. 나이를 종잡을 수도, 가끔은 성을 종잡을 수도 없었다. 아수라백작마냥 각도에 따라 얼굴이 달라지곤 했다. 그리고 그의 연기는 비에 젖은 옷처럼 몸에 착 들어붙었다.

이 드라마의 주된 매력은 극본에서 나왔다. 모든 대사들이 살아있었다. 그 대사들을 듣는 것이 너무도 즐거웠다. 급기야 나는 반수면 상태에서 드라마를 보고 계시던 어머니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 "엄니, 경상도 사람들은 진짜로 저렇게 얘기해!" 그랬다. 대사 하나 하나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지극히 시적이었다. 이런 이중적 구조는 좋은 글의 징표다. 나는 이렇게 살아있는 대사들이 시종일관하는 한국 드라마를 본 적이 없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드라마의 각본은 극본공모 최우수작이란다!

어쨌든 이리하여 이 배우를 기억하게 되었는데 얼마 전에 어머니랑 함께 드라마를 보는데 그 드라마에 이 친구가 나오는 것이었다. 나의 솔직한 마음은 실망. 일일드라마의 뻔한 설정들, 입에 발린 대사들, 과장된 연기들은 내게는 거의 공해였기 때문이다. 웬지 저 속에서 재능있는 한 배우가 소비되고 말 것이라는 편견.

어제 "우리집 여자들"이란 정은채 주연의 드라마 전편을 처음으로 다 보았다. 일일연속극이란 것이 보기 시작하면 계속 보게 되기 때문에 앞으로 더 볼 마음은 전혀 없다. 어제 방송편에서 양희경은 정은채의 얼굴에 컵에 든 물을 끼얹었다. 그후 일분여 동안 정은채는 앵글에는 잡히되 대사는 없는 연기를 했다. 공들여 연구한 것임에 틀림없는 과장없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나는 정은채가 참 매력적인 배우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감독이나 작가라면 저런 배우를 제대로 써먹을만한 작품을 하나 쓸텐데... 하는 뜬금없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나는 뜬금없는 생각을 계속 한다. 나는 스피노자라는 철학자를 제대로 써먹을 만한 데가 어디일까를 계속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궁리는 그리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니체말대로 한 철학자의 철학이란 그 철학자의 생리학이다. 그리고 사르뜨르의 말대로 나는 내가 선택한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스피노자의 말대로 그 선택은 언제나 필연적이다. 나는 내가 스피노자에 끌리는 이유를 안다. 그것은 나와 스피노자가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에게서 내가 발견하는 것의 진폭은 상대적으로 작을 것이다. 나는 스피노자에게서 놀라운 것을 발견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리 재미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관념과 실재 사이의 관계와 같을 것이다. 사르뜨르는 실재를 항상 초월하는 것을 관념(의식)이라고 말했던가? 나는 거꾸로 말하겠다. 관념을 항상 초월하는 것이 실재다. 실재는 항상 우리가 관념한 것 이상을 건네준다. 그러면 관념은 주섬 주섬 그 실재의 그림자를 자신의 구조 안으로 구겨 넣는다. 그렇게 관념화된 실재는 이제 우리에게 지루함을 준다. 지루함이 바로 관념의 징표다. 새로움, 즐거움, 당혹감, 좌절감, 안절부절 등등은 실재의 징표다. 예를 들면 영화 감독에게 독특한 분위기의 한 배우가 바로 그런 실재일 것이다. 그런 독특함, 특수함, 묘함 등이 실재임을 드러내는 징표일 것이다.   

그리고, 아다시피 스피노자에 있어서 관념과 실재는 대등하다. 그러므로 거기에 새로움이란 없다. 스피노자의 철학이 활기없어 보이는 이유가 이런 것일테다.

어떻든 우리가 실재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것이 어떤 배우이든, 어떤 그림이든, 어떤 음악이든, 어떤 철학이든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윤리를 지시한다. 즉, 어떤 배우이든, 어떤 그림이든, 어떤 음악이든, 어떤 철학이든 스스로를 실재로서 유지하여야 한다는 것. 당연히,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이 그래야 한다는 것.

(물론, 모든 것을 지나치게 관념화해서는 안된다. 꼭 이런 식의 안티 테제를 내거는 것에 나 스스로도 답답함을 느끼지만... 카프카에 대한 영화에서 제레미 아이언스는 이렇게 묻는다. "왜, 어제와 오늘이 똑같지요?" 그의 편집장은 무뚝뚝하게 응답한다. "왜 달라야 하는데?"
이런 변증법은 존재한다. 언제나.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실재이기 때문이다. 즉, 실재는 새로움,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당혹감, 좌절감도 준다. 그런 것이 실재이고 현실이다. 우리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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