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들은 꿈이 있었다
토마스 야이어 지음, 이선희 옮김 / 검둥소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1.
몽고메리에서 버스를 타지 않는 투쟁을 한후 남부의 보수적인 동네
기득권을 지키려는 백인들과 인간답게 살려는 용기를 내는 흑인들의 이야기.
마땅히 인간에게 주어진 권리, 평온한 삶을 얻기위해 용기내어 싸워야 하는
버스 빈 앞좌석에 탈수있기 위해, 학교와 식당에 차별없이 가기위해,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
2.
익숙한 것이란, 비록 그것이 노예의 삶이라도 편안한 것이다.
그걸 잘 보여준다.
법적인 노예에서 벗어났음에도 백인들의 일상적인 폭력에 저항하는 것이 대다수 흑인들에게 얼마나 어려운일이었는지
차라리 그냥 백인들을 피하며 그대로 살기를 바랬는지, 왜 그런지
남북전쟁 이후, 노예소유주와 노예 감독관이 없어진후에도 인종차별은 오래동안 계속되었구나.
최근까지 그렇구나.
3.
평범한 사람이 왜 정의를 위해 목숨걸고 저항하게 되는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이런 도식은 진부하다.
현실에서 정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걸고 앞서 싸우는 일은 바보 처럼 보인다.
그런데 누구나, 아주 평범한 사람조차 그럴수 있다는 설득력이 있어야 마음을 움직인다.
저 시대에 미국에 사는 흑인들은 누구든 참을 수 없다고 분노하며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 같아.
그러나 모두 싸우지 않았지.
정의를 위한 싸움은 옳바르다.
그렇지만 폭력에 대한 두려움을 무릎쓰고 싸우는 일은 누구에게나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 과정을 이렇게 도식적으로 보여주면 진부하다.
모야, 평범한 사람과 유전자가 다른 사람들이로군,
에드워드 같은 캐릭터는 이책의 리얼함을 떨어뜨리고 진부하게 만든다.
그는 흔들림 없고, 두려움도 없으며, 승리에 대한 확신때문에 심지어 분노도 없어 보인다.
이렇게 변화없이 잘난척하는 캐릭터는 죽은 캐릭터다.
믿음과 사랑으로 폭력을 이길수 있다고 틈만 나면 잘난척하면서 설교하는데, 말만 청산유수다.
제이제이를 위험에 빠트리더니 대처능력은 떨어지고 참말로, 이런 남자 질색이야.
그리하여 비폭력적인 믿음과 사랑의 방법으로 싸워야 한다는 에드워드의 말은 참, 설득력이 떨어진다.
왜 꼭 저항하는 자에게 비폭력을 강요하냐고.
학살을 일삼는 자들에 맞서는 사람에게 평화적인 방법만 쓰라는 말은 그자체로 폭력이다.
그냥 노예처럼 살라는 말이지.
4.
KKK 단의 모토 '우리는 어제도 있었다! 내일도 있을 것이다! 영원히 있을 것이다!'
KKK 단원들은 흑인들을 때리거나 죽일때 몸을 숨실 필요가 없었다.
단지 하얀 두건만 쓰면 벌건 대낮에도 충들고 몰려다니면서 학살했다.
그리고 두건을 벗기만 하면 그들은 처벌되지 않았다.
법이 노골적으로 그들편이기 때문이다.
백인들이 흑인들을 폭행하는 현장에 경찰은 30분늦게 나타난다. 그리고 폭행한 백인을 체포하지 않는다.
현대자동차 관리자들도 그렇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벌건대낮에 떼로 몰려 폭력을 행사하는 현대자동차 정규직 관리자들은 두건조차 필요없다.
아무것으로도 가리지 않고 사람을 팬다.
그들은 자기가 누군지 가릴 필요가 없다. 법이 현대자동차 편이니까.
현대자동차 관리자가 비정규직을 폭행하는 정문앞에서 경찰은 구경하다가 현대자동차 관리자가 넘겨주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체포해 간다.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며 폭력과 야만이 되풀이 된다.
흑인과 비정규직은 미국과 한국사회 내부의 식민지다.
백인과 정규직에 비해 2류인간이고, 노예다.
KKK 단과 현대자동차 관리자들은 모두 이 시스템이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싶겠지.
현대자동차 울산 1공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불법파견 교섭을 요구하며 점거한지 열흘이 넘었다.
부디 정규직화 쟁취하고 노예의 처지를 벗고 내려오길 바란다.
요구가 매우 정당함에도 부디 쌍용자동차 처럼 고립되어 깡패같은 경찰과 구사대에 진압당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