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난중일기
이순신 지음, 이은상 옮김 / 지식공작소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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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68년 현암사에서 나온 이은상의 역주해본을 지식공작소에서 2014년 다시 펴낸 책이다. 

세로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도록 편집되어있는대, 불편하지 않고 잘 읽힌다. 

편집이 시원하고 예쁘게 공들여 편집된 책을 읽는것은 기분좋은 일이다. 


임진년 정월초하루 부터 날마다 날짜를 적고 날씨를 적고 그날그날 주요한 일들을 적어놓았다. 

전라좌수사로서 공무로 무엇을 했고, 누가 방문했는지, 어떤 보고가 있었는지 뿐 아니라 

쉬는날은 왜 쉬었는지, 집안대소사와 친했던 동료들, 아끼는 벗들이 누군지, 그리고 누구를 싫어하는지도 보인다. 

길지 않지만, 기록이 근면성실하고 담백하여 공무원이란 자고로 이래야 한다는 생각이 절로든다.


임진년은 1592년, 지금부터 423년전 이순신이 48살이던 때다. 

400여년전 내 또래의 한남자가 국가의 녹을 받아 먹으며 날마다 쓴 일기를, 본다.   



2. 

월화수목금토일의 1주일 개념이 없던 때, 쉬는 일요일이 없고 주로 나라제삿날 쉰다. 

대략 보름에 한번정도 일종의 공식 휴일처럼, 선대 임금이나 왕비들의 제삿날 쉬고, 명절에 쉰다. 재밌네.


그가 주로하는 공무는 점검과 관리다. 

새로뽑은 군사들을 점검하고, 훈련을 시키고, 본인도 자주 활쏘기를 한다. 

특히 화가 나는 일이 있거나 마음이 불편할때는 꼭 활을 쏜다. 

수군의 방비가 잘되었는지, 군량미는 새지 않고 잘 관리되는지, 무기들은 녹슬지 않고 정비되고 있는지 

망가진것은 보수하고 관리가 부족하면 담당자에게 곤장을 치며 벌한다. 

전쟁시기에는 군량미를 훔친 관리를 잡아오면 사형에 처해 목을 내다 걸기도 한다. 


중국의 사신에게 아부하며 큰소리치는 통역들을 보며 화가 치밀어 오르고

가끔 관할지역을 순시할때는 지방의 수화 관리들이 기생과 함께 술을 들고 마중을 나오기도 한다.

순시를 마친후 좋은 경치 구경도 하고 밤늦도록 술을 마실때는 하인들에게 술을 나눠 먹이기도 한다. 

이순신과 그의 측근 여필, 조이립, 우후 등의 사람들이 의기투합해서 손발이 되어 공무를 본다. 

팩트를 중심으로 일을 중심으로 씌어진 일기이다. 

동료들과 술을 자주 마셨고, 어머님 안부말고 가족의 얘기가 나올때는 크게 아파서 걱정할때 뿐이다.  

그가 이렇게 공무에 열중할때, 그의 아내는 노모와 아이들을 돌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3. 

날마다 날마다 아침먹고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고 활을쏘고 저녁에는 일기를 쓰고 그렇게 하루하루 일상을 보내던 4월 15일

부산에서 영남우수사 원균이 보낸 통첩을 받는다. 

왜선 구십여 척이 와서 부산앞 절영도에 대었다. 

곧이어 경상좌수사 박홍의 공문이 도착한다. 

왜선 삼백오십여 척이 벌써 부산포 건너편에 와 대었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것이다. 


초반 조선의 군인들을 참으로 오합지졸이다. 

대체로 일본 군인들은 저항없이 무혈입성한다.

왜적이 처들어왔는대 변변히 싸우는 놈이 없다. 

지방관졸들은 도망가기 바쁘고 혹은 부하들을 이끌고 왜적 근처까지 갔다가 먼발치서 보고 도망간다. 

이런 소식들을 들으며 이순신은 원통하다.  


그리하여 20일. 이순신이 최초의 공문을 받은날로부터 5일이 지난후 영남관찰사가 이순신에게 도와달라는 공문을 보내온다. 

거센 적들이 몰아치므로 그 앞을 당적해 낼 도리가 없고, 승리한 기세를 타고 마구 치달리는 품이 마치 무아지경에 들어온 것 같다. 

이 와중에도 이순신은 원통하다고 쓰면서도 늘 하던대로 쉼없이 공무를 본다. 머릿속은 엄청 복잡했을 터이다. 


5월 1일 수군들이 본영 앞바다에 모두 모였다. 

그사이 장수들은 도망가고, 심지어 무기고를 털어서 튀는 놈도있다. 

5월 29일 사천에서 이순신이 거느리는 군사가 처음으로 상륙해 산위에 진을 치고 있는 왜적을 물리치고 

산밑에 벌여놓은 적선 13척을 불태운다. 이순신의 첫승리다. 

6월 2일 당포앞 선창에서 첫번째 해전이고 여기서도 적들을 섬멸시키고 왜선 이십여척이 부산으로부터 오다가 이를 보고 도망간다. 

이날 이후 이순신 밑으로 장수들이 더욱 모이고 뭐랄까 여태 도망가서 짱보던 것들이 나타나기도 하고 

기세를 회복한 조선의 수군이 바다를 돌다가 일본군과 마주치면 번번이 승리한다. 

마침내 왜군의 배들이 바다에서 이순신을 만나면 기냥 내빼기 바쁘다. 


그후 6월 11일부터 8월 23일까지 일기가 없다.

날마다 바다를 돌며 왜적을 찾아 싸우고 밤에는 장수들과 회의하며 배에서 자고, 아마도 정신없이 바빴겠지. 

그많은 군사들을 어떻게 먹이고, 비오듯 쏘았다는 화살을 모두 어떻게 공수했을까. 

8월 27일 좀처럼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이 과묵한 사내가 

저물녁에 제포, 서원포를 건너니 밤이 벌써 이경인대 서풍이 세차게 불어 나그네 마음이 산란했으며 이날 밤에는 꿈자리도 어지러웠다. 고백한다. 

그래. 왜 안그랬겠어.

심란하고 긴장되고 한숨나고 피곤하고, 그랬겠지. 


모처럼 삼도 장수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싸움의 결의를 했는대 끝나고 뒤풀이 술들이 너무 과한 모양이다. 

다만 우후가 술주정으로 망령된 말을 하였다. 기막힌 꼴을 어찌다 말하랴. 어란도 만호 정담수와 남포도만호 강응표도 역시 마찬가지 였다. 이같이 큰 적을 무찌르는 일로 약속하는 마당에서 이렇게까지 술들을 함부로 마시니 그들의 사람됨에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빵 터졌다. ㅎㅎㅎㅎㅎ 

예나 지금이나 술이 문제다. 술이. 



4. 

갑오년 정월 열아흐레 

흐리다가 늦게 맑아졌다. 바람이 크게 불었는대 해가 진 뒤에 더 거세어졌다. 아침에 떠나 당포 바깥 바다에 이르러 바람을 따라 반 돛을 달고 순식간에 어느덧 한산도에 이르렀다. 사정에 올라 앉아 여러 장수들과 이야기 하였다. 소비포에서 영남 여러 배의 사부와 격군들이 거의 다 굶어죽게 되었다는 말은 참혹하여 차마 들을수가 없었다. 원 수사와 공연연수와 이극함이 서로 눈독들인 여자들을 모두 다 관계하였다고 한다. 


왜적의 침입으로 전쟁중. 

바람부는 겨울날 장수들이 한산도 정자에 보여 앉아 전황을 서로 보고하고 술을 먹는 장면은 자주 나온다. 

겨울이라 추운대 식량도 부족해 병사들이 굶어 죽는 지경인대 

원균과 몇몇 장수들이 여자들과 놀고 있다는 말들이 오간다. 

이순인은 원균과 전술에서도 다른 판단을 할 뿐 아니라 

싸움을 방해하고 약속을 어기고, 거짓 장계를 올리고 그러면서 남의 공을 가로채거나 시기하므로 

음흉하고 고약하고 심지어 가소롭다고 쓴다. 

싸움보다 젯밥에 관심이 많아 흉게를 꾸미는 음흉한 자라고 쓴다. 

적들과 싸우는것보다 내부의 적과 다투는 것이 더 피곤한 법이다. 


맑으나 큰 바람이 불었다. 살을 에듯 추워 여러배에 옷 없는 사람들이 목을 움츠리고 추워떠는 소리가 차마 듣기 어려웠다. 

전쟁 난지 2년째인 갑오년 정월의 일기에는 많은 병사들이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병들어 죽는 보고를 듣는 장면이 많다. 

민생들이 주려서 서로 잡아먹는다고 하니 장차 어떻게 살 것인가 물었다. 

병사들이 굶주리고 춥고 병이난다면, 인민들 또한 그렇지 않았겠는가. 


장기간 계속된 전쟁으로 고통이 더해가는대 

원균의 일당들은 싸움보다 공기든 여자든 술이든 젯밥에 더 관심이 많다. 

이 와중에 아전들은 문서를 거짓으로 꾸며 횡령을 일삼고 왜적에게 끌려갔다가 도망나온 사람들도 있고 

한편 횃불을 든 강도떼. 화적떼가 횡횡한다. 

난세라는 말이 뭔지 알겠다. 어떻게 살까. 


왜적들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유린하여 음식을 빼앗아가고 민간인들을 잡아가고 

나라의 관리들은 이 와중에도 제살길만 찾아 도망가거나 횡령하거나 

그러니 먹고 살 길이 없는 백성들이 화적떼가 된다. 


이순신은 배를 만들고 화살을 준비하고 옷을 마련하고 부패한 관리들을 찾아 처벌하고 

장수들을 불러 전황을 더듬고 논의하고 공문을 써서 왕과 세자에게 올리고, 그리고 자주 아프다. 


갑오년. 이 와중에 전쟁을 도와주러 왔다는 명나라 도사부 당종인의 '적을 치지 말라는 패문'을 받고 나는 몸이 봅시 괴로워 앉고 눕기조차 불편했다. 

이순신은 아프다. 

적과 싸우러 온것이 아니라, 적과 화해하기위해 왔으니, 분해서 몸이 아프다. 

비. 비. 종일 빈 정자에 홀로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밀어 회포가 산란했다. 무슨 말로 형언하랴. 가슴이 먹먹하기 취한듯, 꿈속인 듯, 멍청이가 된 것도 같고 미친것 같기도 했다. 



5. 

전쟁이 치열한대 대책이 없어 답답할때는 

꿈에서도 유성룡을 비롯한 지인들, 장수들과 정세를 논하고 작전을 짜는 회의를 한다. 

그래. 이런 상태를 알고 있다. 

꿈에서도 회의를 하고 전술을 다투고, 집회를 하고 전경을 밀치고, 그리고 두려워했었지. 

무쇠같은 이순신도 긴장과 스트레스로 자주 아프다. 


난중일기 내내. 그러니까 임진왜란 내내 이순신을 가장 성가시게 괴롭히는 것은 왜적이 아니라 원균이다. 

예나 지금이나 더 응하기 어렵고 더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내부의 적이다. 


정유년의 일기가 인상적이다. 

정유전 정월초하루부터의 일기가 없고, 사월 초하루날 옥 문 밖으로 나오면서 시작된다. 

병신년 기록이 시월 열하루 까지 있으니, 그 6개월 사이에 관직을 박탈당하고 옥에 갇혔다가 나온 것이다. 

옥에서 나와 성밖 윤간의 집에서 잠시 쉴 때부터 소식을 들은 온갖 사람들이 술과 보내고 떡과 음식을 보내온다. 

혹은 노자를 주기도 하고 혹은 벼루와 붓을 주기도 한다. 

직접 찾아온 사람들과 안부를 나누며 술을 엄청 먹기도하고 일종의 출소환영식에 마음들이 모여 풍요롭다.

백의종군하러 남으러 내려가는 여정역시 그렇다. 

머무는 곳마다 주변 사람들이 소문듣고 찾아와 환영하며 대접한다. 

대역죄인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라, 여전히 삼도수군통제사인듯이 마땅히 왜적으로 부터 나라를 구해낸 영웅에 대한 대접이다. 

임진왜란 내내 조선 수군이 왜군에게 패한 전투가 딱 한번인대, 그것이 이순신이 백의종군하던 시기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전투를 지휘하던 시기의 전투다. 원균은 이 전투에서 죽는다. 

원균이 죽은 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수군의 지휘부가 있는 쪽으로 부임하러 가는길 

동네마다 마을이 텅 비었다. 

관아의 물건들을 모두 챙겨서 왜적이 몰려 온다면서 관리들이 먼저 도망가고 

수군들고 군량미까지 훔쳐서 도망간다. 

이순신이 돌아와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군량미를 훔쳐 도망가는 놈을 잡아다 효수해서 목을 내 거는 일이다. 

그리고 그는 외롭고, 아프다. 


정유년 팔월 초아흐레 

일찍 떠나 낙안에 이르니 관청과 창고와 병기가 모두 타 버렸다. 관리와 백성들도 눈물 흘리지 않고 말하는 이가없었다. 이윽고 순천 부사 우치적, 김제 군수 고봉상이 산골로부터 내려와서 병사의 처사가 뒤죽박죽인 것을 말하면서 하는 짓을 보면 패망할 것이 뻔하다고 했다. 점심후 길을 떠나 십리쯤 오니 늙은이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다투어 술병을 가져다 바치는대 받지않으면 울면서 강권하는 것이었다. 

억울한 옥살이하고 돌아오는 이순신이 인민들은 반가웠겠지. 

삼도수군통제사로 돌아와 쓰는 일기들은 전투를 더 실감나게 다듬어 쓰기도 하고 

마지막 전투 전까지 여전히 성실하게 공무를 보는것이 변함없으나, 무거웠겠지. 

자주 아프다.  


한심한 왕과 관료들, 헐벗은 인민들, 약탈하러 오는 왜적들, 

외롭고 아프기도 하지만, 그의 주변에 좋은 동지와 부하들, 지인들이 또한 많이 있었다. 

자주 술을 먹고, 술보다 더 자주 활을쏘며 성실한 이순인이다. 명장의 자질이란 이런것인가봐. 

성실함과 담백함. 그리고 인민의 고통을 이해하는 책임감. 용기란 여기서 나오는것 아닐까. 

명장이고 늘 승리한 장수인대도 호연지기보다 아픔이 더 앞서 느껴지니, 

역시 한심한 관료들의 나라 조선의 장수였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완역본을 읽어보자 했고,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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