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묻어버린 것들
앨런 에스킨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들녘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1. 

들녘이 왜 표지를 저렇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속도와 가학을 즐기는 정신분열의 크라임스릴러 같이 보인다. 

책이 갖고 있는 진지함과 성찰, 인물들의 유난한 색깔, 뭐하나 표현하지 못하는 저 표지는 참 안어울린다. 



2. 

도서관 다른 장소를 보면 책장이 전부 영웅적이고 유명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가득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문서보관창고에는 위궤양 걸린 기자들이 귀 뒤에 꽂아놓은 연필을 가지고 쓴 신문기사들이, 어디서나 만날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 조용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보관되어 있었다......문서보관창고에서는 교회 비슷한 느낌이 났다. 조그만 병에 담긴 향로처럼 수백만의 영혼들이 마이크로필름 속에 보존되어, 누군가가 그들의 본질을 느끼고, 맛보고, 빨아들여 숨 쉬어주기를, 단 한번 만이라도 그래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조 탤버트 

알콜중독자 어머님 때문에 어릴때부터 더 어린 자폐아 동생을 돌봐야 했던, 가난한 청년 

그가 전기문 쓰기 숙제를 왜 하필 살인범으로 선택했을까, 싶었다.

앨런 에스킨스는 가난한 삶. 벼랑끝에 내몰린듯이 불안하고 위태로운 그을린 삶을 섬세하게 쓴다. 

문장이 좋아. 

읽다보면 멀미나는, 남루하고 지루한 삶을 살아내고 있는 조가 왜 칼을 선택했는지 알아진다. 


14살 소녀를 살해하고 불태워버린 혐의로 30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췌장암에 걸린 노인이 되어 3개월 

이제 3개월 밖에 더는 살 수 없는 몸으로 요양원에서 하루하루, 째깍째깍 죽어가는 

시체처럼 보이는 두 팔은 근육이나 지방이 전혀 없어 뼈에 얹힌 힘줄만이 두드러졌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어린애가 나뭇잎을 집어들듯 그의 팔을 들어올려 햇빛에 비추어 볼 수 있을것 같았다. 

조와 칼이 처음 만난날, 서로 질문하고 답하는 장면을 보며

서로 외롭고, 병들고, 가난하고 심지어 억울한 사람끼리 주파수가 통해서, 이 우정이 서로에게 빛이 되기를 

주인공들에게 남다른 힘든 삶을 안겨놓고, 그들의 끈질긴 삶의 마무리 까지 비참하다면 

앨런에게 화 날것 같았다. 


칼의 분대장은 키가 작고 욕을 잘하는 깁스 하사였다. 잔혹함이라는 가면으로 내면의 심각한 심리적 외상을 감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장교와 사병 모두에 대한 분노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명령이 내리면 불만이었고 '씹병아리(신병)'들은 병을 옮기는 쥐새끼처럼 취급했다. 그는 자기가 가진 야만성의 가장 날카로운 부분을 베트남 사람들, 즉 '국'들에게 겨누었다. 깁스의 세상에서는 베트남 사람들이 모든 악의 근원이었다. 그들을 모두 박멸해버리지 않는 지휘부의 뜨뜻미지근한 태도가 그의 성질을 긁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 시체를 보는것이 일상이 되는 전쟁이라는 상황의 경험이 사람을 괴물로 만든다. 

물론 그도 피해자이겠으나, 이런 사람들 실제로 보면 엄청 혐오스럽다. 

관에 동원되어 생존이 걸린 싸움을 하는 농성장을 망치러 오는 사람들 중에 군복을 차려입은 참전 용사들이 있더라고.  


가끔 미국의 대중소설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성적 회고가 보인다.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보슈 시리즈 첫번째 편도 그랬고 

우리가 묻어버린 것들중 하나가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칼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억이다. 

총을든 적군이 아니라,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경험에 노출된 칼은 베트남에서 죽고 싶었고, 살아나와서는 잊고 싶었는대 

이웃소녀를 죽인 누명을 쓰고는 차라리 감옥에 가서 30년을 산다. 

민간인을 학살하는 가해자였던 그의 양심은 세상이 온통 감옥으로 조여와 죽고 싶었고 

차라리 감옥에 가는것이 묻어버린 것에 대한 댓가인듯이 느껴저 그렇게 산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학살을 미국을 건국하며 원주민들을 학살했던 경험과 동일한 것으로 회고하는 것도 인상적이고 

미국의 성찰이 반갑다. 그래야 사람이다, 라고 쓴후 

대한민국 소설에서 이만큼 베트남을 반성하고 성찰한 적이 있나, 생각에 이르러

우리는 아직 사람이 아니구나.   



3. 

라일라 

조와 제리미의 어둡고 습한 일상에 나타난 햇살같은 라일라. 

부디 그녀가 외롭고 서투른 형제에게 따듯한 손길이 되어주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다가 

그녀가 알았을까? 그녀의 키스가 남긴 맛은 내 입술에 여전히 머물러 있었고, 그녀의 손가락이 닿았던 뺨은 아직도 얼얼했다. 그녀의 살갗에서 풍기는 향기가 마치 중력처럼 나를 끌어당겼다.     

 

앨런은 스토리와 구성을 잘 엮는다. 

조와 자폐아 동생이야기. 조가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갖게된 죄책감

조가 학교숙제로 자서전을 쓰게된 살인자 칼의 사연, 칼의 베트남 참전 경험

남다른 공감능력을 지닌 라일라의 사연 

그리고 조와 라일라의 사랑이야기 

이 각각의 이야기들이 흩어졌다 엇갈렸다, 만나고 나뉘면서 

마치 시냇물이 졸졸졸 흐르는 순리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퍼즐들이 맞춰진다. 

우리가 묻어버린것이 무엇인지. 이렇게 솔직한 제목이 있을까 싶다. 


오래간만에 진지하고 담백한 이 소설이 심지어 해피앤드라는 걸 확인한 순간 

앨린 에스킨스, 다음 작품도 부탁해. 

좋아. 들녘. 표지 따위 안좋아도 좋으니까, 다음 에스킨스도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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