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는 책 - 세계 최고의 미스터리 작가들이 꼽은 세계 최고의 미스터리들
존 코널리 외 엮음, 김용언 옮김 / 책세상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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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 세계 미스터리 작가들에게 그들이 사랑하는 소설에 대해 열변을 토할 기회를 주기로 한 기획이 재밌다.

추리소설에 대한 베스트 리스트들은 대체로 내 취향과 잘 안맞는대  

미스터리 작가들이 사랑하는 소설이라니, 당연히 주관적일 것이고 그래서 더욱 기대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사랑하는 소설이 어떤 작품일지 궁금하고 

내 리뷰와 그들의 사랑하는 이유가 어떻게 다를지도 궁금하다. 

미스터리 소설을 잘 쓰는 소설가가 좋아하는 미스터리 소설은 어떤 작품들일까. 


읽어보니 작가들이 무엇에 집중하며 소설을 쓰는지 저절로 알아진다. 

맛있는 책이다. 



2. 

리타 매 브라운이 두도시 이야기를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 쓰며 미스터리는 보수적이라고 주장한다.

진실의 발견이 언제나 범인이 국가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걸 의미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 진실을 찾음으로써 균형, 혹은 균형의 형태가 어떻게든 재구축된다. 존재는 다시 한번 질서 정연해진다. 이것이 바로 보수성이다. 미스터리의 결말에서 독자가 갈곳을 잃고 허우적거리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디킨스가 이천년간 이어온 관습을 거꾸로 뒤집었다는 점 또한 인정할 만하다. 진실은, 정체성은 어떤 정의의 형태는 언제나 밝혀지고 만다는 관습 말이다. 

디킨스는 정확히 그 반대의 이야기를 썼다. 

그래서 두도시이야기를 가장 좋아한다는 리타의 말에 동의한다. 

관습과 다르게 현실은 선과 악, 진실과 정의가 늘 명확하게 밝혀지는 것은 아니다,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늘 흐리멍텅 하거나, 안개처럼 뿌옇거나 진실이 있어도 힘이 무서워 밝히지 못하거나 


린다 반스는 셜록 홈즈의 모험을 가장 좋아하는 소설로 내놓으며 회상한다. 

아마도 열살 정도의 초등학생 때 처음 읽은 걸로 기억한다. 어쩌면 열한 살이었을지도 모른다. 지칠줄 모르는 독자였던 나는 책을번개처럼 순식간에 읽어치웠고, 학교 도서관 사서는 소설에 대한 내 욕구를 만족시키느라 동분서주했다. 

이 문장을 읽고 어찌나 부럽든지. 

내가 열살 초등학생일때 우리학교 도서관은 늘 문이 잠겨있었고, 

아무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볼 수 있다는걸 가르쳐주지 않았으며, 사서도 없었다. 

지칠줄 모르는 독자였던 나에게도 소설에 대한 내 욕구를 만족시키느라 동분서주하는 사서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는 늘 책이 고팠거든. 


작가와 소설의 인연, 그 사적인 애정고백도 좋으네. 역시 린다의 고백이다. 

내가 선택과목으로 펜싱을 고른 건 홈즈의 부추김 때문이었다.  

홈즈의 부추김으로 펜싱을 선택과목으로 고를 수 있는 학교에 다닌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린다는 알까.  


살인사건을 베네치아풍의 꽃병 속에서 뽑아내어 뒷골목에 떨어뜨려놓은 사람이 바로 해밋이다. 

이런 문장 재밌다. 무슨 말인지 알것 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 

영국의 부르주아 신사 탐정이 미국으로 건너와 뒷골목의 노동자와 비슷해졌지. 

신분이 바뀌니 문장도 바뀌고 감성도 바뀌고 


이 글을 쓰기 위해 <연기 속의 호랑이>를 새로 구하려 했지만, 유통되는 판본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다른 걸작이 절판된 상황에 봉착한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범죄가 아닌가. 

이런 문장 좋다. 어떤 느낌인지 알아 이야말로 범죄라고 성토하는 미스터리 독자들 많을 걸. ^^


또한 이야기를 거듭 비틀다가 결국 의미가 사라지고 이야기가 스스로의 방향을 무시하며 모든 것이 뒤집어지고 결국 아무것도 중요해지지 않는 지경에 이르는, 광기의 정점까지 플롯과 등장인물을 밀어붙이는 한물간 현대 스릴러의 유행과 아주 신선한 대조를 이루기도 한다. 그러나 크리스티는 현기증 나는 굵직한 한번의 반전만을 스스로에게 허락할 만큼 숙련된 작가다. 

글쎄, 그렇다니까. 한물간 현대 스릴러의 유행은 정말 저렇다. 

자꾸 비틀다 결국 모든 것이 뒤집어져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지경의 허탈함, 작자에게 사기당한 느낌에 비하면 

크리스티의 맛이야 당근 깔끔하고 깊지. 아무렴. 

죽이는 책과 대화하며 읽었다. 


죽이는 책,은 미스터리 명예의 전당이다. 

후배 추리소설가들의 추앙받는, 사랑받고 존경받는 선배들에 대한 이야기.  

  

세상에는 위대한 범죄소설가들이 몇몇 존재하지만, 덱스터만큼 - 또는 마이클 코넬리 만큼 - 실제 삶의 만화경같은 양상을 유능하게 포착한 작가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도시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는 도시를 핏빛으로 물들였다. 명도가 조금씩 다른 핏빛이었다. 대실 해밋은 그 도시 최고의 인기인이었다. 

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미스터리 소설에 대한 찬사. 

짧지만 명쾌하거나 강렬하고, 탁월하거나 따뜻하다. 


하지만 날렵하게 구축된 플롯은, 그리고 세인트의 트레이드마크인 살기등등한 이상주의는 지금도 우리가 사는 세계와 놀라울 만치 밀착되어 있다. 


챈들러는 좌파 쪽으로 경도된 하드보일드 산문을 술 취한 낭만주의에 빠뜨렸다가, 결국에는 패러디의 막다른 골목에 떨궜다. 


조세핀 테이라는 이름으로는 장편 미스터리 소설을 여덟편 남겼다. 무척 근사한 그 여덟 편은 나에게 영감을 불어넣었고, 덜어내야 더 많은 것을 담아낼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또한 공포를 암시하는 편이 자세한 묘사보다 더 강력하다는 것 역시 가르쳐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루이즈 페니가, 좋아하는 조세핀 테이를 표현한 말이다. 

루이즈가 좋아하는 조세핀, 마이클 코넬리가 좋아하는 챈들러에 대한 고백을 읽는것은 즐거운 일이다. 


<A는 알리바이>는 고전적인 '누가 범인인가' 공식을 쇄신하고 깊이를 더하며 유머를 적절하게 가미한다. 이 소설은 인도적이고 따뜻하며, 자의식이 깃들어 있다. 고급 미스터리 소설도 존재할 수 있음을 증명할 뿐아니라, 미스터리의 기준 자체를 아예 높여버렸다. 

맥 가디너가 수그래프턴의 A는 알리바이에 대한 칭송이다. 

이런 칭송을 들은 책이라면 읽어보고 싶어지는게 당연하다. 


흑인이라는 것, 노동계급 지역에서 성장했다는 것, 그것은 내 가슴에 와 닿는 문젯거리를 넘어 지금의 나라는 성인을 형성한 뼈대와도 같다. 

나도 그렇다. 여성이라는 것, 노동계급 지역에서 성장했다는 것이 나의 뼈대다. 


헤밍웨이는 쿨한 태도란 엄청난 압박하에서도 우아하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최고의 글은 당신이 등장인물들과 함께 그곳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장담하건대, 위대한 범죄소설을 읽을 때의 즐거움은 명백하게 이질적인 사건과 캐릭터와 단서들을 내보이면서 독자로 하여금 그것들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숙고하게끔 한다는 데 있다. 

동의한다. 반전이란 저 연결의 생각지 못한 절묘함을 말한다. 


어떤 범죄소설들은 내안에 미칠 듯한 호기심의 불을 댕긴다. 나는 거의 숨막히는 상태에서 빨리 결말을 보고야 말겠다는 심정으로 책장을 마구 넘기며 광기어린 질주를 벌인다. 하지만 진정한 즐거움이 느껴지는 책이라면, 나는 그 욕망을억제하고자 한다. 어서 결말로 달려가고 싶다는 유혹에 맞서면서 대신 천천히, 세부를 구석구석 음미함으로써 나의 호기심과 즐거움은 둘다 오래 지속된다. 얼마다 행복한 순간인지!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지! 추리소설에 대한 소메르의 이런 애정고백은 정말로 적절하다. 딱 내맘같아.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지! 


수많은 누아르 소설은 여성의 고문과 살인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팜 파탈 같은 여성의 악마화는 여성에게 닥치는 그 어떤 운명도 근복적 의미에서는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인 것처럼 형상화 한다. 여성 혐오는 범죄소설 문법의 일부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소설가 마리 오퍼드의 의견에 공감한다. 

하지만 범죄 소설은 기존의 형태에서 벗어나 여성의 이야기도 들려줄 수 있을 만큼 유연한 장르이기도 하다. 

그녀의 말에 모두 동의해. 



3.

범죄를 해결하는 경찰이 등장하는 소설은 국가 차원의 독재를 강화하는 것으로 독해될 수 있다. 이 시기는 아파르트헤이트가 맹위를 떨치던 시기다. 국가가 혼란에 질서를 가져온다면, 고문이나 실종, 죽음은 말할것도 없고 착취와 분리, 학대를 용인하는 법으로 강화되어온 인종차별을 기반으로 한 국가에 대해 작가는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진보적이고 자존감 있는 작가하면 경찰소설을 집필함으로써 경찰 편을 드는 행동 따윈 하지 않을 것이다. 경찰은 적이었다. 그들은 국민들을 침공하는 군대였다. 

이 문단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헤닝 망켈을 처음 읽었을때 내가 놀란것은 그가 상상하는 발란더라는 매우 인간적이고 성실한 경찰의 존재였다. 

이떻게 이렇게 사색하고 고민하고 성찰하는 사람을 경찰로 상상할 수 있는거지?

한국 추리소설 작가들은 여전히 경찰이 적이라고 느껴지는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상상력이 제한될 뿐 아니라 

한국 추리소설 독자들은 권력의 횡포가 비인간적이라 그것을 소설로 즐기기 어렵다.

심지어 가장 큰 범죄는 법을 집행하는 경찰과 검찰, 판사들이 저지른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대 

소설에서 모범적인 착한 경찰이 나오면 그 소설역시 권력의 눈치를 보는 소설이니 또한 폭력일뿐 재미가 있겠는가 말이다.


가공의 범죄와 폭력을 즐기기 위해서는 언론의 자유와 법과질서, 희망과 번영이라는 조건이 필요하다. 무수한 아르헨티나인들은 여전히 한밤중에 문을 쾅 열어젖히고 들이닥치는 군대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런 곳에서는 코지 마스터리 따위가 필요없다. 그리고 케냐는 소말리아에 바로 인접한 나라다. 어떤 상상속 위법행위도 상대적으로 황량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실제하는 사건에 너무 가깝게 붙어 있다면, 개인을 죽이는 행위에 탐닉하는 오락적 욕구는 축소될 수 밖에 없다. 

동의한다. 독재의 나라에서 대중은 미스터리를 즐길수 없다. 

일제의 식민지와 한국전쟁, 그리고 독재를 연속해서 100년을 겪은 대한민국은 추리소설을 즐기기 어려운 나라였던 거다. 

국가권력의 살인이 일상에서 느껴진다면, 살인은 오락거리가 될 수 없다. 

대한민국이 미스터리나 SF 장르가 척박했던 이유는 오랜 억압의 원인이 있었던 셈이다. 



4. 

아주 많은 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딱한권의 미스터리 소설을 뽑아 왜 좋은지 설명한다. 

대체로 한사람이 다섯페이지 정도의 짧은 글 

1840년대 에드거 앨런 포에서 시작해서 2000년대의 마크 히메네즈까지 

보통 이렇게 모아놓으면 잘써진 글과 대충 쓴 글의 편차가 있는 법인대 

자기가 좋아하는 작품을 왜 좋아하는지 쓴 모든 작가들이 매우 열정적으로 

자기가 왜 추리소설가가 되었는지를 고백하듯이,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듯이, 혹은 오랜 연인을 소개하듯이 썼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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