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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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페미니즘은 예나 지금이나 호명하고 정의하려는 싸움, 발언하고 경청되려는 싸움이다. 

모든 사회적 약자, 억압받는자들의 싸움이 그렇다. 

신뢰할 만한 존재, 경청할 만한 말로 인정받는것은 사회적 약자에게 매우 어려운 일이다. 

권력, 힘이란 말을 가진 힘으로 표현된다. 그의 말대로 세상이 해석되고 움직이는것. 

그래서 박근혜가 역사교과서를 독점하겠다고 하는것이다. 세상을 제 눈으로만 호명하고 정의하고 해석하겠다는거지. 


내가 경험한 종류의 대화들이 남자들에게는 공간을 열어주되 여자들에게는 닫아버리는 쐐기처럼 작용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발언할 공간, 경청될 공간, 권리를 지닐 공간, 참여할 공간, 존중받을 공간, 온전하고 자유로운 한 인간이 될 공간을. 


언어는 힘이다. '고문'을 '선진적 심문'으로 바꾸거나 살해된 아이들을 '부수적 피해'로 바꾸는 것은 의미를 전달하는 언어의 힘을, 우리로 하여금 보고 느끼고 마음을 쓰도록 만드는 언어의 힘을 망가뜨리는 일이다. 

맞다. 가장 충격적으로 망가뜨린 사례 중 하나는 유대인들을 '학살'하며 나찌가 '청소'라고 표현한 것이다. 

어떻게 호명하느냐는 철학의 문제이고 힘의결과이며 투쟁의 장이다.  

레베가 솔릿, 영민하고 화통한 그녀가 호명하고 정의하고 발언하는것을 경청한다. 

직설화법으로 말하는 그녀의 문장에 힘과 위트와 재치가 있다. 시원하다.  



2.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든다. 

이 제목은 경쾌하고 재밌게 튄다. 읽기전에 이미 느낌이 확온다.  

남자들이 자꾸 나를 가르치려들어서 짜증나고 화나는 느낌이 어떤것인지 모르는 여자들은 없을걸. 

뭘 몰라도 가르키려들고, 심지어 생전 하지 않는 집안일조차 가르치려들지. 


......그는 그녀의 목을 졸랐다. 그녀는 경찰서로 찾아갔지만, 경찰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런 폭력이 경악스럽다. 그러나 더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그런 폭력의 이면에는 피해자를 통제하고 처벌할 권리가 학대자에게 있다고 보는 가정이 깔려 있다는 점, 그가 그걸 목적으로 폭력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전쟁과 마찬가지로 성폭행은 피해자의 신체보전권, 자기결정권, 자기표현권을 공격하는 행위다. 피해자를 소멸시키고 침묵시키는 행위다. 피해자의 목소리와 권리를 지워내는 행위다. 피해자는 그런 소멸을 용케 피하고 용감히 나서야만 입을 열소 있다. 


그래도, 지금까지도 여자가 남자의 비행에 관해서 뭔가 불편한 말을 할라치면, 사람들은 으레 그녀를 망상에 빠진 인간, 사악한 음모론자, 병적인 거짓말쟁이, 그저 재미일 분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징징대는 인간, 혹은 그 모두에 해당하는 인간으로 묘사한다. 


맞다. 여기도. 지금까지도. 날마다 날마다. 

유쾌하고 발랄한 내용을 기대하며 책을 폈다가 놀랐다. 

아, 맞아. 남자들이 자꾸 나를 가르키려드는 것은 웃을일이 아니었다.


리베카가 겼었던 어처구니없이 잘난척하는 남자땜에 황당했던 경험담을 시작해서 

여성들을 진지한 대화의 상대로 생각지 않는 사람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꼬집는 것으로 발랄하게 시작하지만 

사실 자꾸 여자들을 가르치려드는 것은 여자를 통제하고 관리하는것이 남자의 역할인냥 

여자는 남자의 말에 복종하고 순종해야 하는 질서를 강요하는 시스템이라는 것을 

어떤 또라이같은 남자 하나가 잘난척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렇게 굴러가고 있음을 

이 강요는 남자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여성을 폭행하는 것으로 발전한다. 


"이게 무슨 사랑이예요?" 라고 물었던 티나 터너의 전 남편 아이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래요. 나는 아내를 때렸습니다. 하지만 보통 남자들이 자기 아내를 때리는 것보다 더 많이 때리진 않았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9초마다 한번씩 여자가 구타당한다. 확실히 짚어두는데, 9분이 아니라 9초다. 배우자의 폭행은 미국 여성의 부상원인 중 첫번째다.  

음... 놀랐다. 

미국에서 9초마다 한번씩 여자가 구타당한다니.

내가 기억하기로 대한민국은 얼마만에 한번씩 여자가 구타당하는지에 대한 계산된 수치는 없다. 


부연하자면 총에 맞아 죽은 여성들의 3분의 2 가까이는 현파트너나 전 파트너에게 살해되었다. 

그러니까 잘 아는 남자가, 사랑했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그녀를 총으로 쏴죽인다는 말이다. 

명령하고 지배하고 그것을 관철시키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허용된 남자라는 집단과 

순종하고 복종하여 시키는대로 살지 않으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여자라는 집단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지금. 

이정도의 통계가 제출된 범죄에 대한 재발방지 법은 거의 없다는 것이 더 경악스럽다. 

남자들이 이렇게 많이 동일한 범죄로 목숨을 잃어도 이렇게 무대책일까. 


이 나라와 이 지구에서는 여성에 대한 강간과 폭력이 엄청나게 많이 발생하지만, 그 사건들이 시민권 문제나 인권문제로 혹은 위기로 혹은 하나의 패턴으로 다뤄지는 경우는 거의없다. 폭력에는 인종도 계급도 종교도 국적도 없다. 그러나 젠더는있다. 


하도 많은 남자들이 현재 배우자나 옛 배우자를 살해하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살인이 매년 1,000건을 훌쩍 넘는다. 그렇다면 그로인한 희생자 수가 매 3년마다 9/11사건의 사망자 수를 넘는다는 뜻인데, 이런 종류의 테러에 대해서는누구도 전쟁을 선포하지 않는다. 


6.2분마다 한번씩 경찰에 신고되는 강간이 벌어지고 여성 다섯명줄 한명은 살면서 강간을 당하는 미국부터

여성버스 승객이 강간당하고 살해된 인도의 뉴델리까지 

성폭력, 배우자 폭력이 어떤 미친놈들 몇명의 예외적인 문제가 아니라 

남성과 여성사이의 권력과 힘의 문제라는것. 

자꾸 가르치려드는 남자들의 권력행사는 라는것을 구체적인 다양한 예와 적절한 통계를 인용하며 단호하고 시원하게 말한다. 


제니 추라는 여성은 트위터에서 이렇게 말했다. "물론 모든 남성이 다 여성 혐오자나 강간범은 아니다. 그러나 요점은 그게 아니다. 요점은 모든 여자는 다 그런 남자를 두려워하며 살아간다는 점이다. 


1990년에 <미국 의학협회 저널>은 이렇게 보고했다. "공중위생국의 조사에 따르면, 가정폭력은 15세에서 44세 사이의 여성들에게 가장 흔한 부상원인이다. 교통사고, 강도, 암으로 인한 사망을 합한 것보다 더 많다. 


폭력은 무엇보다도 일단 권위주의적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폭력은 내게 상대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살인은 그런 권위주의의 극단적 형태다. 살인자는 당신이 죽을지 살지 결정할 권리는 자신에게 있다고 살인을 통해서 단언하는 셈이다. 


6년전 내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라는 제목의 글을 쓰려고 앉았을때, 나 스스로 놀란 점이 있었다. 웬 남자가 나를 기르치려든 우스꽝스러운 사례로 글을 시작했건만 결국에는 강간과 살인에 관한 이야기로 글을 맺게 된 점이다. 



3. 

자연스럽게 발전하는 그녀의 통찰은 결국 지금, 세상에 어떤 힘관계가 관철되고 있고, 누가 수탈당하는지, 누가 지배자이고 

어떻게 저항하고 있는지에 대한것으로 발전한다. 

누군가를 통제할 권리가 스스로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한 폭력의 세계화다. 


우리가 이미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를, 내가 어떻게 들려줘야 좋을까? 그녀의 이름은 아프리카였다. 그의 이름은 프랑스였다. 그는 그녀를 식민지로 삼았고, 착취했고, 입을 막았으며, 그런 일을 그만두기로 한 때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뒤에도, 가령 코티디부아르 같은 곳에서 그녀의 사정을 결정하는일에 위세를 부렸다.....

그녀의 이름은 아시아였다. 그의 이름은 유럽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침묵이었다. 그의 이름은 권력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가난이었다. 그의 이름은 풍요였다. 그녀의 이름은 그녀의 것이었지만, 그녀가 과연 무엇을 소유했던가? 그의 이름은 그의것이었고, 그는 그녀까지 표함해 모은 것을 그의 소유로 여겼다. 그리고 그녀의 의향을 묻거나 뒷일을 염려하지 않고도 그녀를 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지구적인 권력관계가 어떻게 관철되는지 잘 보여주는, 직관이 뛰어난 문장이다. 


이 질서가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이렇게 표현된다. 

그녀의 이름은 아프리카였다. 그의 이름은 IMF였다. 그는 그녀에게 올가미를 걸어 약탈당하게 했고, 보건 써비스를 폐지하게 했고, 굶주리게 했다. 자신의 친구들을 배불리기 위해서 그녀에게 쓰레기를 투하했다. 


IMF는 포식세력이었다. 개발도상국들의 문호를 열어젖혀 부유한 북반구와 강력한 초국적기업들의 경제공세를 겪게끔 만들었다. IMF는 포주였다. 어쩌면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1999년 시애틀의 반기업시위를 계기로 세계적 운동이 전화된 이래 IMF에 저항하는 대중봉기가 있어왔고, 그런 세력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 덕분에 앞으로 벌어질 모든 경제논쟁의 틀이 바뀌고 있으며, 경제와 전망에 대한 우리의 상상이 더 풍요로워지고 있다. 


 

투쟁은 지루하고 험난하고 때론 추악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역공도 여전히 야만적이고 강력하고 보편적이다. 

그러나 발언 또한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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