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롯 -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였다” 20년간의 연구로 복원한 인간 예수를 만나다
레자 아슬란 지음, 민경식 옮김 / 와이즈베리 / 2014년 3월
평점 :
품절


1. 

유대민족해방운동의 지도자였던 예수의 모습이다. 

특히 시오노 나나미의 팍스로마나는 이민족에게 관대하고 세련된 로마인의 지적인 천년제국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설파하는데 

로마제국시대의 변방 식민지 팔레스타인지방에서 유대민족의 해방운동을 하던 정치범 예수가 사형당한 사건은 매우 유명하고

죽음에 이른것이 예수하나 였던 것도 아니며, 

오죽하면 골고다언덕은 십자가형에 처해진 수많은 정치범들이 시체조차 수습되지 못하고 공개된채 말라가고 썩어거던 언덕일까. 

저 수많은 학살이 이민족에 대한 로마식 세련된 관대함인가. 


예수한사람으로 끝나지 않고 수많은 메시아와 혁명가들이 죽음을 당한 66년 유대인들은 로마와 전쟁을 시작한다. 

73년 마지막 진압될때 예루살렘은 쑥대밭이 되었고 주민들은 모조리 학살되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1,000명 정도. 

제국 로마에서 십자가 처형 뿐 아니라 떼로 죽이는 학살이 참 흔하다. 



2. 

프롤로그가 56년 대제사장 요나단 암살사건의 극적인 장면으로 시작한다. 

대제사장이 왜 학살의 대상이 되는지 

왜 유대의 인민들이 대제사장을 적으로 생각하게 되는지 

팔레스타인 땅 유대 민중들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이 흥미롭다.


예수는 일주일에 엿새, 해 뜰 때부터 해 질 때까지 왕의 도시에서 고된 작업에 시달렸을 것이다. 낮에는 유대 귀족들을 위해 대궐같은 집을 짓고 밤에는 진흙과 벽돌로 지은 허름한 집으로 돌아와, 터무니 없는 부를 소유한 사람들과 점점 늘어나는 빚에 짓눌린 가난한 사람들의 격차가 급속도로 심화되는 것도 직접 보았을 것이다. 

2000년 전에도 지금이랑 얼추 비슷하군.

터무니없는 부를 소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격차가 겁나 심화된 사회라니 말이다. 


폭력과 예수의 관계도 흥미롭다. 

예수가 무난한 하느님나라, 영적세계의 주인인지 

땅위의 억압을 넘어 유대인들의 왕이 되고자 했는지 


주요한 복음서들이 이미 기록된 1세기 말이 되자, 로마(특별히 로마에 사는 지적 엘리트층)가 기독교 선교의 핵심 표적이 되었다. 이 특별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접근하지 위해 복음서 기자들은 어느정도 창조성을 발휘할 필요가 있었다. 예수의 삶에서 혁명적 열정의 흔적을 모두 제거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죽음이 대한 로마인들의 책임을 완전히 씻어주어야 했던 것이다. 이제 메시아를 죽인 사람들은 유대인들이다. 

과격한 유대인 혁명가 메시아가 어떻게 보편적 평화주의 설교자로 바뀌는지  


예수를 죽인 책임을 유대인에게 돌려 2000년에 걸친 기독교 반유대주의의 토대가된다는 설명은 설득력있다. 

물론, 그렇다해도, 2000년동안 방랑하며 박해받은 유대인들이 2차대전후 팔레스타인 땅으로 몰려가 

땅주인들을 몰아내고 학살하는 짓이 100년이 되도록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은, 용서할 수 없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바뀔뿐 2000년동안 파괴와 폭력과 학살이 반복되고 있다니. 

인간들 참 징그럽다. 



3. 

예수가 혁명가였다면, 그의 추종자들 

십자가 처형후 사흘만에 무덤에서 살아나왔다는 주장을 한 베드로를 비롯한 그의 추종자들의 배짱도 참 대단하다. 

어떻게 저런 주장을 할 생각을 했을까. 

비천하게, 모욕적으로 공개처형당해 죽은 사람이 부활하여 다시 살과 피를 가진 사람으로 되었다니 

그래서 이 왕은 더이상 사람이 아니라 신이라니. 

인간의 몸을 입은 하느님, 죽음으로 부터 해방된 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죽은자가 살아난다니.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에 대해 가졌던 간절하고 열정적인 신념의 근원은 무엇일까. 

어떻게 저런 황당하고 비상식적인 신념을 간절하게 갖게 되었을까. 

추종자들에게 매력적인 것은 재산을 모두 헌납하고 함께사는 공동체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따로없는 평등한 공동체에 대한 신념이 아니었을까.


예루살렘의 유대이들은 예수추종자들이 주장하는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에 설득당하지 않는다.

성서의 상식이 있는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에 매달린다면 이미 메시아가 아니다.

그래서 예수 추종자들의 열성적인 신념은 오히려 그리스, 로마 문화쪽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나 이교도들에게 전파되었고

유대의 신이아니라 로마의 신을 닮아갔다.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은 예수의 추종자들을 좋게 말하면 무식한 사람들, 나쁘게 말하면 이단으로 여겼다.  

예수가 죽은후 지독교가 보편적인 종교로 만들어지는 과정의 드라마가 흥미롭다. 


예수의 제자들, 12명의 사도들과 바울에 관해 생생한 캐릭터로 보여준다.  

신약성서의 각장 복음서와 편지들의 관계, 씌어진 시기, 편집의도 등등의 전체 맥락을 읽어주는 것도 재밌다. 

그러게 종교 또한 정치와 권력의 산물이라니까. 


그래도, 예수의 죽음이후 부활이라는 창조적인 발상을 했던 그의 추종자들의 간절하고 열정적인 신념이 끝내 살아남은 것은 

이방인들에게 전파하여 용케 로마의 지식인층을 포섭했기 때문이아니라 

예수의 뜻을 이어받아 현실에서 실천하며 살아낸 예수의 동생, 의로운 사람 야고보 같은 후계자들의 활동 때문이다.  


야고보서에 대해 가장 먼저 거론할 내용은 이 편지가 가난한 사람들이 처한 곤경에 대해 극진한 관심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별로 놀랄 일은 아니다. 어떤 전승이든 야보고를 비곤한 사람과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대변자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그는 의로운 사람이라는 이름을 얻지 않았는가? 야고보가 세운 예루살렘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섬긴다는 원칙하게 세운 공동체라는 사실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야고보의 지도력 아래 모인 예수 추종자들이 자신들 집단을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불렀다는 증거도 있다. 

한국의 예수 추종자들이 쫌 배웠으면 싶네.  

스스로를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교회말이야. 얼마나 멋지냐구. 

더 부자될려고 교회가는거 말구. 



4. 

2000년이 흐른 오늘날, 바울이 만든 그리스도가 역사적 예수를 완전히 집어삼켜 버린 셈이다. 이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제자들을 이끌로 갈릴리를 배회하던 혁명적 젤롯에 대한 기억, 로마의 압제에 도전하다 실패한 과격한 민족주의자에 대한 기억은 역사의 뒤편으로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레자는 말한다.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 예수 만큼이나 카리스마가 넘치며 찬미받을 만 하다는 사실을 

NO. 인간예수가 더 매력적이고 카리스마 넘친다. 날 때부터 신의아들에게 뭔 카리스마가 있남. 원래 신의아들인디. 


재밌다. 

예수의 죽음이후 이방인들에게 전파하던 바울과 본토 유대인 사도들 사이의 공방도 극적이고 

결국 유대전댕으로 이스라엘이 초토화되고 본토의 교회가 폐허가 된 후 

디아스포라 예수의 후예들이 새로운 종교 그리스도교로 로마를 판정리한 후 2000년 동안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아. 

성서를 앞세운 권력쟁탈과 피의 역사거든. 

노예들의 종교가 지배자들의 종교가 된 순간, 더이상 가난한 사람들을 섬지지 않아.

나사렛 예수가 무덤 속에서 보고 있다면 엄청 화딱지 날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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