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그러나, 그러나 그날 모두가 총을 내려놓았다면 광주는 우리 가슴에 오늘과는 다른 모습으로 남았을 것이다. 끝까지 총을 내려놓을수 없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승패가 문제가 아니었다. 왜 총을 내려놓을 수 없다는 것인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걍' 내려놓을 수 없었다. 텅 빈 도청에 전두환과 그 졸개들이 씩 웃으며 들어온다면 지금까지 죽은 사람은 뭐가 되고, 지금까지 싸운건 또 뭐가 되느냐는 것이다. 

산사람을 더 생각하는 자들은 총을 내려놓자고 했고, 죽은 이들을 더 생각하는 자들은 총을 놓을 수 없었다. 


굳이 뉴라이트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균형잡힌 역사서를 보기어렵다. 특히 현대사는. 

여성의 역사와 노동의 역사가 복원되고 있지만 통사로 정치와 문화, 사회를 모두 살펴 

진상규명할 수 있는 실력이 되는 현대사학자가 몇명이나 될까.  


저런 문장을 쓸 수 있는 역사학자가 또 있을까. 

광주에서 몇월 며칠날 몇명이 죽었는지, 사실을 밝히는 것을 넘어 

마지막으로 도청을 사수한 사람들의 마음

산사람을 더 생각하는 자들이 내려놓자고 하는 총을, 죽은 이들을 위해 들어야 했던 사람들의 마음 

그 마음을 통해 광주는 한국 현대사의 마르지않는 양심의 샘물이 된다.


세월호의 침몰을 통해 대한민국의 침몰을 경험하고 있는 요즘

저 무능력하고 폭력적인 권력의 뿌리와 참모습이 어떤지 

저것들이 계승하고 복원하여 마침내 만들고 싶은 나라가 어떤 꼴의 야만과 천박함인지 알기위해 

유신을 보아야 할 뿐 아니라

성찰을 통해 한국현대사를 이정도로 의미있게 정리해낸 한홍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또한 70년대 유신을 두려워했던 젊은이이고, 광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양심이거든. 


저렇게 죽었는데, 30년만에 다시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다니. 

모욕적인 세월이다.  



2. 

1969년 9월 문을 연 군산의 아메리카 타운은 미군을 위한 클럽, 식당, 미용실, 각종 상점, 환전소에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500여개의 방까지 갖춘 매매춘을 위한 자급자족형 신도시였다. 많은 사람들은 군산의 아메리카 타운을 정부 주도 아래 설립된 '군대창녀 주식회사'라 부른다. 


빌어먹을 국가. 

떠난다는 미군의 바짓가랑이 잡느라고 별짓 다한다. 

'양공주'에 기생한 국가포주제도. 

기가 찬다. 


<이제는 말할수 있다>에서 '투기의 뿌리 강남공화국' 편을 연출한 유현피디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때 불법으로 사람 잡아다가 고문하고 때리고 한 거 용서할 수 없는 짓입니다. 그런데 이 프로를 만들고 보니까 그보다 더 나쁜것은 모든 사람들이 투기를 꿈꾸게 만드는 사회구조, 도덕이나 근면 따위는 '웃기는 짜장'으로 만들어 버리고 볼로소득, 일확천금을 꿈꾸게 만드는 사회구조, 또 그 사람들이 더 높은 아파트를 쌓고, 타워팰리스를 쌓아 그들암의 세계를 만들고 호의호식하는 사회를 만들어버린 것이 오히려 박정희, 전두환에게 더 준엄하게 따져 물어야 할 죄악이 아닐까요?"


재밌다. 진심이다. 

이 슬프고 억울한 시대를 읽으며 재밌는 이유는 저런 문장의 생생함 때문이다. 

한홍구는 역사를 시간순으로 써내려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시대의 다양한 면모를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 대표적인 장면들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다. 

몇년도에 무슨일이 있었는지는 사실 네이버가 검색하면 다 나온다. 


고은이 서문에서 

정사와 야사의 구차한 변별 따위를 가차없이 뭉개버린 생동의 역사서술이 한홍구의 전위사관에서 체현된다. 라고 쓴다. 

옳다. 

살아움직이는 역사서술이고 유신공주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2014년 침몰하는 청와대와 맞닿아 있는 역사서술이다. 


사실 한국 현대사는 읽기 어렵다. 

서승의 옥중19년이 어찌나 읽기 힘들던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억울함과 슬픔을 잊지 못한다. 

한국 현대사는 야만과 폭력으로 얼룩져 억울한 사람들의 피눈물이 너무 많아 읽기 고통스럽다. 


한홍구는 사실에 근거해 쓰면서도 행간에 유신의 기획자들, 유신에 빌붙어 떵덩거리며 먹고산 자들을 조롱하고 경멸한다. 

그의 이런 서술이 시대의 답답함에 숨구멍을 열어주고, 슬픔과 고통으로 부터 객관적인 거리두기를 가능하게 해준다.

권력앞에 인간의 오만과 비겁과 정의가 모두 어쩌면 이렇게 극명한지. 

이렇게 인간의 본성을 바닥까지 드러내게 만드는것 자체가, 그런 시스템은 그 자체가 악이다. 


1968년 국민교육헌장을 선포하면서 박정희는 우리와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우리의 출생의 의미를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났다'고 규정해 버렸다. 

이런 서술은 절묘하다. 

우리와 상의없이, 우리 출생의 의미를 한꺼번에 아도쳐서 선포해버리는 권력을 조롱한다. 

나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나는 것에 동의한 적 없다고! 

내 삶의 의미를 왜 니가 결정하냐고. 

이런면에서 한홍구는 여유있고, 유신 일당들에게 까칠하다. 

유신이라는 시대의 어두운 무게에 눌리지 않으며 솔찍하게 깐다. 

내공이다.  



3.

유신을 쓰며, 70년대 노동운동을 이끌었던 여성노동자들을 살피고, 

'강주룡의 을밀대, 김진숙의 크레인' 이라는 타이틀로 시작한다. 

철학적 일관성을 이정도로 관철시키며 시야를 확보한 현대사학자가 한홍구 말고 또 있을까. 


강주룡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겨우 2층 높이에서 단지 여덟 시간 버텼지만, 조선8도가 뒤집어졌다. 어떻게 여성의 몸으로 저 높은 곳에 올라 다른 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것을 그냥 보고 있을수 있느냐며 사람들이 힘을 보태 임금 인하를 막아냈다. 

강주룡이 행한 최초의 고공농성은 지금부터 80여년전의 일이다. 한국 경제가 비교가 안되게 발전한 사이, 강주룡의 손녀들은 그 시절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더 높이, 더 멀리 올라 오랫동안 버텨야 한다. 김진숙은 아득한 40미터 위 85호 크레인에 올라 300일을 버텨야 했다. 


유신시대 여성 노동자들의역사는 여러 대목에서 울컥 눈물이 나지만, 한편 그녀들의 투쟁은 참으로 씩씩하다. 

그리고 어쩌면 하나같이 어용을 담당한 남성들은 폭력적이고, 찌질하게 여성노동자들을 개무시할까. 

그러고, 그리고 유신시대를 지나 30여년이 지나서도 왜 아직도 여성노동자들의 삶은 눈물이 날까.  


지식인들은 비참하게도 '단 한번의 승리'를 외치지만, 그 최후의 승리는 민중들이 일상생활에서 경험한 작은 승리를 통하지 않고는오지 않는 법이다. 

매우 당연한 이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식인'들을 많이 봤다. 그들은 일상을 조직해야 승리의 날이 온다는걸 모른다. 

또한 매우 당연한 이 문장에 기대어 자신의 비겁함을 감추는 '지식인'들도 많이 봤다.



4. 

박정희의 병영국가 운영의 폭력성과 천박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는 정당한 평가를 해 주어야한다. 

전쟁을 반대할 자유, 타인을 죽이는 훈련을 하기 싫다는 양심조차 없는 국가다. 지금까지. 


더욱 황당한 것은 그렇게 강제로 끌려가서 대한민국 군인은 외부의 적과 싸우다 죽는게 아니라 

군대 내에서 죽는다는 거다. 

정전 이후 60년동안, 6만명. 매년 1000명 꼴로 죽은셈이다. 

이건 미친짓이다. 

죄없는 젊고 어린 남자들을 대려다가 가둬놓고 사람죽이는 훈련시키다가, 죽이는 거다. 멀쩡한 애들을. 


박정희는 참 독특한 인물이다.

교활함으로 승부하는 입지전적인 인물.

그때그때 힘있는 쪽으로 붙는 것도 잘하고, 참 가벼워.

권력을 잡은 뒤에는 왕이 되고 싶었던 거야. 20세기에. 참 가벼워.

참을 수 없는 그의 가벼움에 권력이 생기니 재앙이었다.

유신을 선포하여 지맘대로 하면서, 또 후계자는 인정하지 않아요. 

그의 핵심측근 입장에서 보면 감히 후계자의 자리를 꿈꾸지 말고 기양 대충 넘버 10안에서 많이 해처먹을 일이다. 

후계자가 되는 것을 경계하지 않고 감히 거론되었다가는 한방에 훅 간다. 

박정희의 측근들이 차례차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을 행사하다가 몰락하는것도 흥미롭다.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한홍구의 판단도 재밌다.

김대중 납치사건을 실무담당한 행동대장 윤진원의 마지막 양심,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

김대중을 살려 한국으로 보낸 에피소드 끝의 이후락과 박정희의 표정이 골때린다.



5.

사법살인.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8명이 사형당했으나 그 판결문에서 조차 인혁당은 실체가 없다. 

이들이 처형되고 딱 30년 후인 2005년, 국정원 과거사위 사무실에서 이 이해할 수 없는 판결문을 읽다가 나는 울어버렸다. 


한홍구는 역사와 현실이 어떻게 만나는지 직접 주어가 되어 진술한다. 

역사학자라고 해서 현실에서 떨어져서 어깨에 힘주며 평가질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한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그 자신 유신의 역사와 어떻게 만나는지를 직접 보여주는것으로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유신을 모를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남의 얘기가 아니고, 과거의 얘기가 아니라고. 


박근혜 정부는 유신을 계승하여 현실에서 다시 꽃피우고 싶어하거늘. 

나는 두렵다. 

그래서 가만히 있지 않으려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